2011. 5. 5. 01:00ㆍ시,좋은글/詩
산정(山頂)에서 / 권경업
때죽꽃, 함박꽃 하얗게
꽃내음 스러진 숲 머리 거슬러
바람에 실려 오는 노각꽃 내음
초저녁 별빛 먼저 와 닿고
깊은 밤 은하가 스쳐 지나간다 해도
그래, 바락바락 기를 쓰고 올라온 아랫것들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라면, 우리
내려가자, 내려가다가 어디
강물도 지쳐서 에둘러가는 저잣거리
허름한 평상 처마 낮은 주막이라도 만난다면
땀내 배인 배낭 턱하니 벗어놓고
이놈 저놈 뭇 잡놈들 죽고 못 사네
주둥이 쭉쭉 빨던 생탁 사발에
주거니 받거니, 실없는 놈들처럼
입 가로 뚝뚝, 농지거리 흘려가며
무박 하룻길 산행 같은 인생
안주삼아 철철 마셔보자, 어차피
낮은 곳으로 돌아가야 할 너와 나의 삶도
능선 길처럼 아름답고
하산 길처럼 뿌듯한 것이라며,
-시작노트-
꽃내음이 별빛 사이로 소리 없이 번지는,
5월 산정은 정녕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속인들에겐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누구든 한번쯤은 서있고 싶어 하는 외경스러운 곳이긴 하지만
서둘러 하산해야 할, 외로운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용케 어느 멧부리 끝에 섰다한들
폭풍우에 눈보라 때로는 고스란히 알몸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힘겨운 곳이기도 합니다.
산길을 오래 걷다보면 알게 됩니다,
산정이 다가 아니란 것을. 멧부리 끝이 다가 아니란 것을,
출세와 성공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시,좋은글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 아는 이야기 / 박노해 (0) | 2011.06.16 |
---|---|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 김남주 (0) | 2011.05.18 |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B. 브레히트 (0) | 2011.05.01 |
낙화 / 이형기 (0) | 2011.04.29 |
그래도 / 마더 테레사 (0) | 2011.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