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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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나왔다.
시집이 나왔다. 원고를 넘긴 뒤 교정을 거듭할수록 부담은 조금씩 늘어났다. 한 글자 한 문장을 고치며 온전히 내 이름으로 세상에 나갈 글임을 실감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에 드니 마음은 뜻밖에도 담담하다. 오래 품고 있던 무언가를 조용히 내려놓은 듯하다.오래 묵혀 둔 언어들을 고르고 다듬으며, 지나온 삶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사람과 풍경, 기쁘고 아팠던 순간들이 문장 사이로 하나둘 걸어 나왔다. 어쩌면 시는 한 생을 오래 살아낸 뒤에야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릴케는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했다. 미처 다하지 못한 고백을 다시 마주하는 일, 어쩌면 그래서 나는 시에 이끌렸는지도 모르겠다.이제 책은 온전히 내 손을 떠났다. 부족하고 서툰 글이지만, 이제는 독자의 몫으로 돌아갈..
2026.09.07 -
나는 니 일 안 시킬라 했다
나는 니 일 안 시킬라 했다 9월에 들어서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햇살은 따갑다. 오늘도 밀짚모자를 쓰고 엄마 손을 잡고 긴 골목길을 걷는다. 실버센터 차를 타러 가는 길이다. 한 손으로는 골목을 따라 설치한 안전바를 잡고, 다른 손은 내게 맡긴 채 엄마는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차가 올 때까지 이삼 분쯤 남았다. 그늘진 곳에 있는 의자에 엄마를 앉혀 드리고 곁에 섰다. 그런데 엄마가 내 얼굴을 한참 빤히 바라보신다. 정확히는 내가 쓰고 있는 밀짚모자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엄마, 뭐 좋은 일 있나? 와 웃는데?”엄마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나는 니 일 안 시킬라 했다.”뜻밖의 말에 순간 가슴이 멈칫했다. 밀짚모자를 쓴 내 모습이 엄마 눈에는 ..
2026.09.05 -
저들의 정원
저들의 정원 올해는 옥상정원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래도 꽃은 제때 피고 졌다. 초대하지 않은 이름 모를 풀들 틈에서도 저마다 때를 알고 피었다. 수국은 애초에 옥상 체질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는 물이 모자라면 잎부터 생기를 잃었고, 겨울이면 찬바람이 꽃눈을 얼렸다. 몇 해를 함께 지냈지만 이제는 알맞은 자리를 찾아 보내야 할 것 같다.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곁에 붙들어 두는 것이 정말로 좋아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장미에게는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늦봄, 백 송이가 넘는 꽃을 피워 옥상을 환하게 밝히던 장미꽃을 보고 시골에 다녀왔다. 일주일 만에 돌아와 보니 꽃은 말라붙고 잎은 시들어 있었다. 줄기마저 죽어가는 듯했다. 산머루도 목수국도, 대추나무와 포도나무도, 거의 모두 목마름에 지쳐..
2026.08.28 -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그동안 미루어 오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오늘 CGV삼산 IMAX관에서 관람했다. 시골과 울산을 오가는 일상 속에서 세 시간이라는 긴 상영 시간부터가 부담스러웠고, 몰린 예매자들 틈에서 일정에 맞는 표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들이 예매해 준 자리까지 적절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온몸을 울리는 효과음에 휩싸여 거대한 IMAX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전율을 느꼈다. 과연 대작이라 불릴 만했고,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찾아온 보람이 있을 만큼 감동은 컸다 수천 년 전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이 낯선 얼굴과 목소리를 입고 스크린 위에서 되살아나는 순간, 수천 년 전의 텍스트를 현대의 영화 언어로 새롭게 조형하고, 글로만 존재하던 세계에 빛과 소리와 움직임을 부..
2026.08.26 -
산의 전우들을 떠나보내며
산의 전우들을 떠나보내며 옥상 올라가는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낡은 장비들을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다. 밑창이 다 닳아 평평해진 등산화, 지퍼를 올릴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재킷, 손잡이가 반질반질해진 스틱 한 쌍. 형상으로야 그저 버려야 할 낡은 물건들이겠지만, 산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안다. 저것들이 단순한 장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사람이 산을 오른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 말없는 것들이 나를 업고 걸었던 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을.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몸으로 하는 기도와 같다. 혹한의 능선에서 발끝이 먼저 겨울을 배우고, 빙판 위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생의 균형을 붙잡는 간절함이 된다. 여름 정맥길에서는 태양이 등을 짓누르고 폭우가 길을 지워버리기도 하고, 매운 바람은 몸보다 마음을..
2026.08.24 -
'구조적 친일', 어불성설이자 언어도단이다
'구조적 친일', 어불성설이자 언어도단이다 최근 친일 행위를 두고 ‘구조적 친일’이라는 궤변이 등장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업을 얻고,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의 친일 행위를 오늘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구조와 선택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식민지 제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배우며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갔다는 사실만으로 모두를 친일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구조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이다.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김익남과 안상호의 삶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
202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