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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의 정원
저들의 정원 올해는 옥상정원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래도 꽃은 제때 피고 졌다. 초대하지 않은 이름 모를 풀들 틈에서도 저마다 때를 알고 피었다. 수국은 애초에 옥상 체질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는 물이 모자라면 잎부터 생기를 잃었고, 겨울이면 찬바람이 꽃눈을 얼렸다. 몇 해를 함께 지냈지만 이제는 알맞은 자리를 찾아 보내야 할 것 같다.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곁에 붙들어 두는 것이 정말로 좋아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장미에게는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늦봄, 백 송이가 넘는 꽃을 피워 옥상을 환하게 밝히던 장미꽃을 보고 시골에 다녀왔다. 일주일 만에 돌아와 보니 꽃은 말라붙고 잎은 시들어 있었다. 줄기마저 죽어가는 듯했다. 산머루도 목수국도, 대추나무와 포도나무도, 거의 모두 목마름에 지쳐..
2026.08.28 -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그동안 미루어 오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오늘 CGV삼산 IMAX관에서 관람했다. 시골과 울산을 오가는 일상 속에서 세 시간이라는 긴 상영 시간부터가 부담스러웠고, 몰린 예매자들 틈에서 일정에 맞는 표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들이 예매해 준 자리까지 적절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온몸을 울리는 효과음에 휩싸여 거대한 IMAX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전율을 느꼈다. 과연 대작이라 불릴 만했고,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찾아온 보람이 있을 만큼 감동은 컸다 수천 년 전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이 낯선 얼굴과 목소리를 입고 스크린 위에서 되살아나는 순간, 수천 년 전의 텍스트를 현대의 영화 언어로 새롭게 조형하고, 글로만 존재하던 세계에 빛과 소리와 움직임을 부..
2026.08.26 -
산의 전우들을 떠나보내며
산의 전우들을 떠나보내며 옥상 올라가는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낡은 장비들을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다. 밑창이 다 닳아 평평해진 등산화, 지퍼를 올릴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재킷, 손잡이가 반질반질해진 스틱 한 쌍. 형상으로야 그저 버려야 할 낡은 물건들이겠지만, 산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안다. 저것들이 단순한 장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사람이 산을 오른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 말없는 것들이 나를 업고 걸었던 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을.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몸으로 하는 기도와 같다. 혹한의 능선에서 발끝이 먼저 겨울을 배우고, 빙판 위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생의 균형을 붙잡는 간절함이 된다. 여름 정맥길에서는 태양이 등을 짓누르고 폭우가 길을 지워버리기도 하고, 매운 바람은 몸보다 마음을..
2026.08.24 -
'구조적 친일', 어불성설이자 언어도단이다
'구조적 친일', 어불성설이자 언어도단이다 최근 친일 행위를 두고 ‘구조적 친일’이라는 궤변이 등장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업을 얻고,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의 친일 행위를 오늘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구조와 선택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식민지 제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배우며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갔다는 사실만으로 모두를 친일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구조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이다.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김익남과 안상호의 삶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
2026.08.15 -
미완의 해방, 우리가 세워야 할 정의
미완의 해방, 그리고 우리가 세워야 할 정의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국권을 되찾은 감격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는 묵직한 아쉬움이 남는다. 해방은 이룩했으나 친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은 끝내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복은 단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날에 그치지 않는다. 되찾은 조국을 어떤 가치와 원칙 위에 세울 것인가를 되묻는 ‘원점의 날’이다. 그렇기에 광복절은 해방의 환희와 더불어 미완으로 남은 역사적 청산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만든다. 혹자는 ‘구조적 친일’이라는 궤변까지 동원해 부역의 책임을 희석하려 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얻고,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식민지 백성이 일제의 제도 밖..
2026.08.14 -
시가 떠나기 전에
시가 떠나기 전에 ― 마감 앞에서 다시 만난 문장들 원고를 출판사로 넘기고 나면 긴 퇴고의 여정도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줄 알았다. 이제부터는 편집과 교정의 시간이며, 나는 한 권의 책이 되어 돌아올 시집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겨울 줄 알았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원고가 내 손을 떠나자 비로소 시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붙들고 씨름할 때는 안개 속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것들이, 마치 시험지를 거두어 간 뒤에야 뒤늦게 정답이 선명해지듯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히 다듬었다고 믿었던 시어는 어딘가 모나 있었고, 자연스럽다 여겼던 한 행은 느닷없이 길고 진부해 보였다. 시 뭉치를 덮고 돌아서려 할 때마다 문장들은 나직한 음성으로 나를 다시 불러 세우는 듯했..
202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