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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 차 례 |머리말 _ 4 1부 빛이 오는 길 눈부심 _ 13 프레임 밖 _ 14 셔터 앞에서 _ 15 지구별 한 모퉁이의 환한 기척 _ 16 봄비 _ 17 여정餘情 _ 18 원추리꽃 _ 19 구절초 _ 20 노랑할미새 _ 21 벽을 읽는 법 _ 22 옥상 화단 _ 24 단풍 _ 25 잔향殘香 _ 26 기다림의 미학 _ 272부 길과 몸의 시간 결 _ 31 분수령 _ 32 기울던 _ 33 사이의 길 _ 34 .. 2026. 9. 19.
엄마 TV 엄마 TV 엄마 방에는 두 개의 텔레비전이 있다. 큰 것 하나, 그리고 그 곁에 소박하게 놓인 17인치 액자 모니터 하나. 엄마는 화려한 세상이 쏟아지는 큰 화면보다 작고 조용한 ‘엄마 TV’를 들여다보신다. 시작은 구순연이었다. 아흔 번째 생신에 틀어드릴 영상을 만들며 서랍 속 사진들을 꺼냈다. 흑백사진 속 희미한 얼굴에서부터 최근의 실버센터 일상까지, 어느 사진에서든 화면의 중심에는 엄마가 있었다. 잔칫날 사진 한 장 한 장이 화면에 번져갈 때마다 웃음 끝에 숙연함이 감돌았고, 이모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 뒤 사진을 더 보태 삼십 분 남짓한 영상으로 엮어 액자 모니터에 담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곧바로 엄마의 일생이 흘러나오도록.화면이 바뀔 때마다 엄마는 사람들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신다. 아.. 2026. 9. 17.
새날. 새롭게 살자 - 죽성성당 - 매일 떠오르는 태양,그러나 어제의 태양은 아니다. 새날이 선물로 주어졌다.오늘도 새롭게 2026. 9. 14.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울리히 샤프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아무도 그대가 준만큼의 자유를내게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나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그대 아닌 누구에게서도 그토록 나 자신을깊이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사람은 평생 수많은 관계 속에서자신을 조금씩 바꾸며 살아간다.젊어서는 기대에 맞추고, 중년에는 책임에 맞추며,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희미해진다. 그런데 가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관계를만날 때가 있다.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애써 무엇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다.그때 사람은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자기 안.. 2026. 9. 8.
시집이 나왔다. 시집이 나왔다. 원고를 넘긴 뒤 교정을 거듭할수록 부담은 조금씩 늘어났다. 한 글자 한 문장을 고치며 온전히 내 이름으로 세상에 나갈 글임을 실감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에 드니 마음은 뜻밖에도 담담하다. 오래 품고 있던 무언가를 조용히 내려놓은 듯하다.오래 묵혀 둔 언어들을 고르고 다듬으며, 지나온 삶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사람과 풍경, 기쁘고 아팠던 순간들이 문장 사이로 하나둘 걸어 나왔다. 어쩌면 시는 한 생을 오래 살아낸 뒤에야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릴케는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했다. 미처 다하지 못한 고백을 다시 마주하는 일, 어쩌면 그래서 나는 시에 이끌렸는지도 모르겠다.이제 책은 온전히 내 손을 떠났다. 부족하고 서툰 글이지만, 이제는 독자의 몫으로 돌아갈.. 2026. 9. 7.
니는 일 안 시킬라 했다 니는 일 안 시킬라 했다 9월에 들어서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햇살은 따갑다. 오늘도 밀짚모자를 쓰고 엄마 손을 잡고 긴 골목길을 걷는다. 실버센터 차를 타러 가는 길이다. 한 손으로는 골목을 따라 설치한 안전바를 잡고, 다른 손은 내게 맡긴 채 엄마는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차가 올 때까지 이삼 분쯤 남았다. 그늘진 곳에 있는 의자에 엄마를 앉혀 드리고 곁에 섰다. 그런데 엄마가 내 얼굴을 한참 빤히 바라보신다. 정확히는 내가 쓰고 있는 밀짚모자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엄마, 뭐 좋은 일 있나? 와 웃는데?”엄마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니는 일 안 시킬라 했다.”뜻밖의 말에 순간 가슴이 멈칫했다. 밀짚모자를 쓴 내 모습이 엄마 눈에는 들일을 .. 2026. 9. 5.
저들의 정원 저들의 정원 올해는 옥상정원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래도 꽃은 제때 피고 졌다. 초대하지 않은 이름 모를 풀들 틈에서도 저마다 때를 알고 피었다. 수국은 애초에 옥상 체질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는 물이 모자라면 잎부터 생기를 잃었고, 겨울이면 찬바람이 꽃눈을 얼렸다. 몇 해를 함께 지냈지만 이제는 알맞은 자리를 찾아 보내야 할 것 같다.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곁에 붙들어 두는 것이 정말로 좋아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장미에게는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늦봄, 백 송이가 넘는 꽃을 피워 옥상을 환하게 밝히던 장미꽃을 보고 시골에 다녀왔다. 일주일 만에 돌아와 보니 꽃은 말라붙고 잎은 시들어 있었다. 줄기마저 죽어가는 듯했다. 산머루도 목수국도, 대추나무와 포도나무도, 거의 모두 목마름에 지쳐.. 2026. 8. 28.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그동안 미루어 오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오늘 CGV삼산 IMAX관에서 관람했다. 시골과 울산을 오가는 일상 속에서 세 시간이라는 긴 상영 시간부터가 부담스러웠고, 몰린 예매자들 틈에서 일정에 맞는 표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들이 예매해 준 자리까지 적절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온몸을 울리는 효과음에 휩싸여 거대한 IMAX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전율을 느꼈다. 과연 대작이라 불릴 만했고,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찾아온 보람이 있을 만큼 감동은 컸다 수천 년 전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이 낯선 얼굴과 목소리를 입고 스크린 위에서 되살아나는 순간, 수천 년 전의 텍스트를 현대의 영화 언어로 새롭게 조형하고, 글로만 존재하던 세계에 빛과 소리와 움직임을 부.. 2026. 8. 26.
산의 전우들을 떠나보내며 산의 전우들을 떠나보내며 옥상 올라가는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낡은 장비들을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다. 밑창이 다 닳아 평평해진 등산화, 지퍼를 올릴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재킷, 손잡이가 반질반질해진 스틱 한 쌍. 형상으로야 그저 버려야 할 낡은 물건들이겠지만, 산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안다. 저것들이 단순한 장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사람이 산을 오른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 말없는 것들이 나를 업고 걸었던 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을.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몸으로 하는 기도와 같다. 혹한의 능선에서 발끝이 먼저 겨울을 배우고, 빙판 위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생의 균형을 붙잡는 간절함이 된다. 여름 정맥길에서는 태양이 등을 짓누르고 폭우가 길을 지워버리기도 하고, 매운 바람은 몸보다 마음을.. 2026. 8. 24.
'구조적 친일', 어불성설이자 언어도단이다 '구조적 친일', 어불성설이자 언어도단이다 최근 친일 행위를 두고 ‘구조적 친일’이라는 궤변이 등장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업을 얻고,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의 친일 행위를 오늘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구조와 선택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식민지 제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배우며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갔다는 사실만으로 모두를 친일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구조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이다.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김익남과 안상호의 삶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 2026. 8. 15.
역사의 힘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6. 8. 15.
미완의 해방, 우리가 세워야 할 정의 미완의 해방, 그리고 우리가 세워야 할 정의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국권을 되찾은 감격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는 묵직한 아쉬움이 남는다. 해방은 이룩했으나 친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은 끝내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복은 단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날에 그치지 않는다. 되찾은 조국을 어떤 가치와 원칙 위에 세울 것인가를 되묻는 ‘원점의 날’이다. 그렇기에 광복절은 해방의 환희와 더불어 미완으로 남은 역사적 청산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만든다. 혹자는 ‘구조적 친일’이라는 궤변까지 동원해 부역의 책임을 희석하려 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얻고,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식민지 백성이 일제의 제도 밖.. 2026. 8. 14.
시가 떠나기 전에 시가 떠나기 전에 ― 마감 앞에서 다시 만난 문장들 원고를 출판사로 넘기고 나면 긴 퇴고의 여정도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줄 알았다. 이제부터는 편집과 교정의 시간이며, 나는 한 권의 책이 되어 돌아올 시집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겨울 줄 알았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원고가 내 손을 떠나자 비로소 시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붙들고 씨름할 때는 안개 속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것들이, 마치 시험지를 거두어 간 뒤에야 뒤늦게 정답이 선명해지듯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히 다듬었다고 믿었던 시어는 어딘가 모나 있었고, 자연스럽다 여겼던 한 행은 느닷없이 길고 진부해 보였다. 시 뭉치를 덮고 돌아서려 할 때마다 문장들은 나직한 음성으로 나를 다시 불러 세우는 듯했.. 2026. 8. 12.
그대들 돌아오시니 / 정지용 그대들 돌아오시니 - 재외(在外) 혁명동지(革命同志)에게 鄭芝溶 (정지용) 백성과 나라가이협(夷狹)에 팔리우고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오연(傲然)히 앉은지죽엄보다 어두은오호 삼십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피 흘리신 보람 찬란(燦爛)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외오 돌아섰던산(山)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자휘 잃었던 물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어제 하늘이 아니어니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피 흘리신 보람 찬란(燦爛)히 돌아오시니! 밭이랑 문희우고곡식 앗어가고이바지 하올 가음마자 없어금의(錦衣)는 커니와전진(戰塵) 떨리지 않은융의(戎衣) 그대로 뵈일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피 흘리신 보람 찬란(燦爛)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온 말굽에일가친척 흐터지고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낯 서라 흙에 이름 없이 굴으는.. 2026. 8. 9.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만 깊이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평소보다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놀라 일어나니 엄마는 벌써 센터에 갈 채비를 다 한 모습으로 방문을 열고 나오신다.그런데 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손에는 장갑을 끼고, 양말도 두툼하게 챙겨 신었다. 티셔츠와 셔츠를 겹겹으로 세 벌이나 껴입고 있었다."엄마, 옷을 와 이리 많이 입었노?"엄마는 내 말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대답했다."있는 옷을 입어야지."틀린 말은 아니다. 옷이 있으니 입는다는 것, 그 말만 놓고 보면 더없이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다. 그러나 서랍에 아껴둔 옷을 꺼내 겹겹이 껴입고야 센터에 갈 수 없지. "이 옷은 다음에 입자"며 실랑이를 하며 한 겹씩 벗겨 드드리고서야 실버센터에 보내드릴 수 있었다... 2026.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