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15. 23:10ㆍ글쓰기/생각의 창
'구조적 친일', 어불성설이자 언어도단이다
최근 친일 행위를 두고 ‘구조적 친일’이라는 궤변이 등장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업을 얻고,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의 친일 행위를 오늘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구조와 선택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식민지 제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배우며 일제가 만든 제도 안에서 살아갔다는 사실만으로 모두를 친일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구조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이다.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김익남과 안상호의 삶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공부했다. 출발점도 비슷했고 시대적 조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의 선택은 전혀 달랐다.
김익남은 대한제국 정부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의학교 교관으로 한국인 의사들을 길러냈다. 이후 군진 의학 분야에서 활동했고, 일본인 의사 단체에 맞서 한국인 의사 단체를 만드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하다 숨진 정재홍 의사의 추모 사업에 참여한 뒤 일제로부터 불이익을 받은 정황도 전해진다.
반면 안상호는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되고도 귀국하지 않아 해임됐고, 이후 친일 성격의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언론에는 자신을 일본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표현한 기록도 남아 있다. 물론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충분한 연구와 자료 검토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삶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같은 구조 속에서도 다른 선택은 가능했다.
바로 이것이 ‘구조적 친일’이라는 말이 친일 부역의 면죄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구조는 한 인간이 놓여 있던 조건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에 적극 협력하고, 침략을 찬양하고, 식민 지배에 편승해 이익을 얻은 선택까지 지워 주지는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다. 정말 시대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 해방 뒤에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그것을 합리화하고, 자신이나 선조를 오히려 피해자인 듯 포장한다면 과거의 잘못 위에 또 하나의 잘못을 쌓는 일이다.
후손에게 조상의 죄를 묻자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조상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후손에게 필요한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역사를 사실대로 바라볼 수 있는 성찰과 염치다. 선대의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사죄의 뜻을 밝힌 이들의 태도가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친일을 시대의 탓으로 돌리며 그 책임까지 지우려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목소리를 낮춰라.
양심이 없으면 염치라도 있고,
염치가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라.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도 목숨과 재산을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앞에서 친일을 시대 탓으로 돌리며 큰소리칠 일은 아니다.
조용히 선조의 잘못을 성찰하면 된다. 그 잘못을 감추거나 미화하지 말고,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서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삶을 위해 자기 몫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가장 떳떳한 길이다.
구조는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구조적 친일’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선택과 책임까지 지우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고 언어도단이다.
역사가 묻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느냐가 아니라, 역사와 양심 앞에서 무엇을 선택했느냐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 생각의 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미완의 해방, 우리가 세워야 할 정의 (0) | 2026.08.14 |
|---|---|
| 시가 떠나기 전에 (0) | 2026.08.12 |
| 놓아 주는 마음 (0) | 2026.07.17 |
| 잠자던 블로그를 깨우며 (0) | 2026.07.03 |
| 먼저 온 초록 (0) | 2026.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