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초록

2026. 3. 11. 12:06글쓰기/생각의 창

 먼저 온 초록

 

아직 겨울이 다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언 땅을 비집고 먼저 머리를 내미는 녀석들이 있다. 차가운 흙 틈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는 작은 초록들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늘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정원을 가꾸기 전부터, 이 땅에는 이미 먼저 와 있던 생명들이 있었다고.

 

  정성껏 심어 둔 화초들이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녀석들은 아무 예고도 없이 틈새마다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것들을 솎아 내려 몸을 굽힌다. 그러나 손끝에 닿는 순간, 까슬한 줄기와 흙을 꼭 움켜쥔 뿌리의 단단함에 매번 손길이 멈칫한다.

 

  땅속 깊이 내린 가느다란 뿌리는 좀처럼 흙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 작지만 단단한 저항 앞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피어오른다. 경이로움과 미안함이 엉킨 오래된 감정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잡초’라 부른다. 참 짧고 편리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두 글자는 한 생명이 견뎌낸 시간을 너무 쉽게 지워 버린다. 그 이름 속에는 비바람을 견디고 흙 속에서 제 길을 찾아온 수많은 낮과 밤이 빠져 있다.

 

  한번은 뽑아 놓은 풀들을 마당 한쪽에 그대로 둔 적이 있었다. 햇볕 아래 몸이 뒤집힌 채 뿌리를 하늘로 내밀고 말라 가던 녀석들이었다. 이미 삶이 끝났다 여겼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소나기 한 줄기가 그 위에 잠시 머물다 갔다.

 

  놀랍게도 녀석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뿌리에 묻은 작은 흙 몇 톨을 겨우 붙든 채, 서서히 몸을 굽혀 마침내 다시 땅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들을 부르고 있는 듯했다.

 

  생명에는 돌아가야 할 방향이 있는 모양이다. 바싹 마른 몸속에서도 그 방향만은 잊지 않는다.

 

  우리는 화려한 꽃을 사랑한다. 고운 빛깔을 탐하고 향기를 기억하며, 열매의 달콤함을 오래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묵묵히 땅을 붙들고 있는 풀의 삶에는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잡초는 어쩌면 지구라는 거대한 몸을 감싸고 있는 가장 낮은 피부일지도 모른다. 비바람이 흙을 쓸어가려 할 때 뿌리로 대지를 붙들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때는 몸을 낮추어 작은 그늘을 만든다.

 

  인간이 만든 정원에서는 지워져야 할 존재일지 몰라도, 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먼저 온 자’들이다. 황폐한 땅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다른 생명이 떠난 뒤에도 오래 남아 땅을 지킨다.

 

  나는 여전히 잡초를 뽑는다. 화초들이 숨 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손을 놓고 있으면 이 작은 풀들은 어느새 화단을 가득 채운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땅의 진짜 주인은 자기들이었다는 듯이.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미안한 마음을 안고 몇 포기를 뽑아 낸다. 하지만 예전처럼 모조리 없애 버리지는 않는다. 화초를 향한 애정과 풀들을 향한 미안함 사이에서, 어느새 나만의 작은 타협점이 생겼다.

 

  비가 지나간 뒤 한층 더 짙어진 초록을 가만히 바라본다. 말없는 작은 잎들이 아주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는 것만 같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려 본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이 땅에 먼저 와 있었고,
내가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아
땅을 지킬 그 낮고 끈질긴 초록들에게.

 

다음 겨울이 지나도
언 땅을 다시 비집고 올라와
가장 먼저 고개를 내밀 그 초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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