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의 축복

2022. 1. 13. 22:22글쓰기/생각의 창

 새벽 4시의 축복

 

 

  몇 번이나 뒤척였던가. 어둠이 짙게 깔린 밤, 가만히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던 것이...

  요즘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은 유튜브라는 확성기를 통해 저마다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여덟 시간은 자야 건강과 삶의 리듬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반복되는 조언은 정보가 아니라 지키지 못했을 때의 압박으로 다가온다. 캄캄한 방 안, 전자제품의 LED 불빛들이 어둠을 밀어내며 작은 인공의 밤을 만든다. 그중 가장 또렷하게 빛나는 것은 시계의 숫자다. 새벽 네 시.

  잠은 돈처럼 잡으려 손을 뻗을수록 저만치 달아나고, 간절해질수록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지금 일어나면 고작 네 시간 반. 그들 전문가의 잣대로 본다면 내 수면 성적표는 분명 낙제점이다. 사람마다 다른 몸의 리듬을 단 하나의 숫자로 재단하고, 은연중에 불안을 부추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문장을 만났다.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깼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있기보다 일어나 세수하고 책상에 앉으십시오. 당신의 하루는 남들보다 일찍 시작될 것입니다.

  ‘축복’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의 나는 이불 속에서 부족한 잠의 양을 계산하며 스스로를 초조하게 몰아세우던 사람이었다. 네 시간 반, 다섯 시간……. 수면 시간을 셈할수록 마음의 조바심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축복’이라는 단어 하나가 내 시선을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잠을 못 자 피곤한 사람이 아니라, 남들보다 먼저 깨어난 사람으로. 오랫동안 나를 가두어 두었던 강박의 빗장이 그제야 소리 없이 풀렸다.

  돌이켜보면 직장생활을 마칠 때까지 내 몸에는 나름의 단단한 리듬이 있었다. 새벽 두 시쯤 잠자리에 들어도 아침 여섯 시면 알람 없이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몸의 균형이 흔들리자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절대적인 진리처럼 다가왔다. 여덟 시간 수면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졸리지도 않은 밤 열 시면 서둘러 불을 껐다. 하루 중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던 그 소중한 네 시간을 몸이 원하지도 않는 잠을 기다리며 허비했던 것이다. 건강이라는 미명 아래 스스로를 침대라는 감옥에 가두었던 셈이다.

  이제 나는 새벽 네 시의 적막을 기꺼이 환대한다. 눈을 떴을 때 잠이 다시 오지 않으면 억지로 붙잡지도, 부족한 잠을 아쉬워하며 뒤척이지도 않는다. 조용히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세상이 침묵에 잠긴 이 시간은 오롯이 나에게만 허락된 비밀스러운 선물이다. 정갈한 마음으로 묵상을 하고, 고요 속에서 책장을 넘기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적어 내려간다. 창밖의 짙은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고 사물의 형체가 하나둘 드러날 무렵이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아침의 문을 열어젖힌 듯한 충만함이 가슴 깊이 차오른다. 잠을 빼앗겼다고 여길 땐 결핍이었던 시간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니 더없이 귀한 축복이 되었다.

  물론 충분한 수면은 몸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 피곤하면 더 자야 하고, 몸이 원하면 기꺼이 잠을 청해야 한다. 다만 누군가 정해놓은 천편일률적인 숫자가 모든 이의 삶을 설명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숫자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내 몸이 스스로 보내는 고유한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오늘도 새벽 네 시에 눈을 뜬다면 더 이상 시계를 원망하며 뒤척이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일어나 새벽의 서늘하고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실 것이다. 나에게 새벽 네 시는 이제 잠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나만의 아침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축복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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