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선명해졌을 뿐인데, 삶의 결이 보였다

2026. 1. 29. 12:13글쓰기/생각의 창

소리가 선명해졌을 뿐인데, 삶의 결이 보였다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 오디오를 바꿨는데, 정작 먼저 달라진 건 음악이 아니라 나였다. 시작은 단순했다. 그저 음악을 조금 더 깊게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거실 한복판에 장식품처럼 놓인 기계 덩어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리가 좋아지면 그만큼 감동의 깊이도 정비례할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그 세계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디오의 세계는 생각보다 가팔랐고 냉정했다. 하이엔드 기종들의 가격표는 보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숙이게 했고, 타협점이라 생각한 중급기들조차 만만치 않은 기세였다. 결국 욕심을 한 뼘 접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가성비로 화제가 된 'WiiM Amp'와 그에 어울리는 스피커를 들였다. 그럼에도 지출은 가볍지 않았다. 백만 원을 훌쩍 넘긴 계산서를 받아 들고서야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비로소 '진짜 듣는 행위'의 영역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설치는 명쾌했다. TV와는 ARC로 연결해 소리의 통로를 텄고, 스마트폰의 음악은 블루투스로 날려 보냈다. 소리는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그동안 TV 내장 스피커로 듣던 소리가 단순한 '정보'나 '신호'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거실이라는 공간에 소리의 무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결을 만들며 다가오는 변화에 나는 흡족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은 간사하고 호기심은 집요했다. WiiM Amp의 진정한 저력은 '네트워크 스트리밍'에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타이달(Tidal), 코부즈(Qobuz) 같은 고음질 서비스의 이름들이 유혹처럼 맴돌았다. 추가 비용과 번거로운 가입 절차 앞에서 주춤거렸지만,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끝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이성을 앞질렀다.

 

결정적인 계기는 뜻밖의 지점에서 찾아왔다. 네이버 멤버십을 통해 무료로 제공된 스포티파이(Spotify)였다. AI에게 물어가며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익숙한 노래들을 하나씩 클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렘에 부풀어 있었다. '내가 사랑한 추억들을 이제 최상의 화질로 복원하듯 감상할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당혹감이었다. 내가 평생 사랑해왔던 노래들이,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악뮤(AKMU)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는 분명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숨소리까지 들렸다, 그 또렷함이 오히려 낯설 정도였다. 7080 포크송과 올드팝이 비교되었다. ‘베스트’, ‘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노래들은 마치 너무 밝은 조명 아래 노출된 오래된 사진처럼 빛이 바래 보였다. 소리는 분명 좋아졌는데, 마음은 자꾸만 그 소리로부터 멀어졌다.

 

노래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변한 것은 나였다. 김민기, 김광석, 양희은, 그리고 사이먼 앤 가펑클과 짐 크로치. 그들의 노래를 나는 단 한 번도 ‘음질’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 노래들은 그 시절의 눅눅한 공기, 함께 듣던 사람의 체온, 그리고 치열했던 청춘의 시간과 한 덩어리로 엉겨 붙어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 소중한 기억의 덩어리를 '고음질'이라는 정교한 칼날로 잘게 분해해서 듣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시대의 속도에 발맞추려 애쓰며 살았다. 초기 디지털카메라로 업무 보고서를 만들고, 8비트 컴퓨터를 남들보다 먼저 들였으며,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나올 때마다 기꺼이 얼리어답터를 자처했다. 하지만 음악에서만큼은 아니었다. 기술은 앞서가고 있었지만, 나의 감정은 여전히 낡은 레코드판의 지지직거리는 잡음 속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이미 들어버린 소리는 되돌릴 수 없다. 고해상도의 세계를 목격한 눈이 낮은 화소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듯이 말이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어느 쪽이 진짜 소리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음질의 세계를 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사랑해온 '추억의 입자'들과 일정 부분 이별해야 한다는 뜻임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바꾸기로 했다. 좋은 음악을 ‘사냥’하듯 찾는 것이 아니라, 내게 남은 시간을 ‘대접’하는 쪽으로 말이다. 내 세대와 너무 동떨어지지 않은 음악들을 천천히 만날 것이고, 정서가 맞닿는 새로운 목소리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오래된 노래들은 이제 '자주 꺼내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아닌, 삶이 고단할 때 슬며시 열어보는 '비밀 서랍'으로 남겨두려 한다.

 

생각해보면 이 소동은 오디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위로의 의식이었다. 한평생 수고한 내 몸에게 주는 선물 말이다. 점점 둔해지는 귀는 좋은 소리로 달래고, 흐려지는 눈은 선명한 풍경으로 채우며, 무리 없는 여행으로 지친 다리를 쉬게 하는 일. 오디오는 그저 그 길을 안내하는 정중한 초대장이었을 뿐이다.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완벽한 주파수가 아니라, 남은 생을 대하는 나 자신의 진실한 태도였다. 이제 나는 멈춰버린 과거의 시간을 붙잡기보다, 흐르는 시간과 나란히 걸으며 그 속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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