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6. 22:07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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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장 홍 순 칠
직업병이란 것이 있단다. 방송하는 사람은 몇 초간이라도 정적이 흐르면 자신도 모르게 진땀이 나서 그 침묵을 어떻게든 깨려하고 개그맨들은 그 순간 어떻게든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어진단다. 역사를 공부하는 나에게는 아마 ‘시대 순‘이란 병이 있나보다. “영토를 지켜낸 인물“은 왠지 우리의 역사가 쓰여진 처음부터 훑어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한사군,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비문을 차례로 얘기하였다. 나의 답답한 걸음새에 문득 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1997년 혜안 출판)라고 책제목으론 다소 선언문 같은 거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대장 의 수기였다.
홍순칠(洪淳七)대장은 1929년 생이다. 홍대장의 집안은 3대에 걸쳐 울릉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홍재현(洪在現)이 울릉도에 자리잡은 것은 1883년 (음력) 4월8일로 강원도 강릉에서 한 10년쯤을 예정으로 낙향하였다가 대대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당시 울릉도 주민은 두 가구뿐이었다. 높은 산에 올랐다가 문득 또 하나의 섬을 발견하곤 1897년 6월에 울릉도에서 향나무 한 그루를 가져가서 독도에 심었다. 돌아올 때 바다사자를 잡아와서 이웃주민과 그간 부족했던 지방질을 공급받았다. 다음해에 다시 부족한 지방질을 위해 독도에 갔다가 일본인 무라카미(村上)를 만나 일본까지 동행하여 일본인의 독도 출입을 금지할 것을 당부한 무용담이 전한다.
홍순칠대장은 1949년에 육군 독립기갑연대에 입대하였다가 6.25때 원산부근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오랜 병원 생활 후 4년 만에 울릉도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고향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였다. 경찰서 마당 한쪽에 있는 길이 6척이나 되는 일본영토 표목 이었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 고시(告示) 제40호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칭하며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2차 대전을 종결하는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의 지역적 범위는 1945년 11월 1일 일본 점령 및 관리를 위한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기본적 지시에 의해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의 4개섬 이외에 쓰시마섬을 포함한 약 1천 개의 인접제도‘라고 국한되어 독도는 일본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었다.
나라를 송두리째 잃었었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른 홍순칠 에게 할아버지 때부터 삶의 터전이었던 독도에 대한 일본의 침입은 이순신 장군이 물리쳤던 왜군과 같았고 나라를 다시 빼앗는 절대적 침입과 같았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좌우명처럼 듣고 자랐던 ‘멋스런 삶‘을 생각하였고 독도에서 그 멋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6.25전에 군이 자원 입대하여 부상을 입고 귀향한 울릉도 출신 장병은 1952년 말경 40여명이나 되었다. 홍대장은 울릉도 출신 향군을 규합하여 ‘독도사수 특수의용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경찰서장의 협조로 경찰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대여 받아 합숙훈련을 하였다. 경북 병사구 사령부에서 소총 몇 정과 권총, 경기관총 1정을 압수하고 부산 ‘양키‘시장에서 바다사자 1마리를 대가로 권총과 소총을 얻을 수 있었다.
독도수비대의 편성은 전투대,예비대,보급대 등이었다. 전투대는 현지에 주둔하였는데 2조로 나뉘었고 각 조의 인원은 15명씩이었다. 또한 울릉도 보급 연락소의 3명과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이었다. 이중 보급선의 선원과 연락소의 3명만이 군 출신이 아니고 그 외는 모두 6.25 때 각 전선에서 용감히 싸운 전력이 있었다. 처음 독도에 진주할 때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3정, M1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현지에서 쓸 0.5톤 보트1척 등이 고작이었다. 수비대는 처음 구성에서 3년 후 국립경찰에 수비업무를 인계하기까지 전적으로 수비대내의 사비로 이루어졌고 활동하였다. 보수는 생각할 수 없었고 보급선의 경우도 겨우 기름 값을 어느 정도 지원하는 정도였으며 수비대에 지원되는 식량 등도 대부분 울릉도 민의 기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1953년 4월 20일 밤 12시에 언제 돌아올지 모를 장도에 올랐다. 수비대라는 군대와 같은 체계와 명칭을 띠었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우리 땅을 일본군이 침입하도록 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만 이었다. 그들이 탄배는 10년이 훨씬 넘는 5톤 미만의 오징어잡이 배로 수비대의 전함이었고 유일한 보급선이었다. 당시 일본 경어정은 1천 톤이 넘었다.
수비대는 독도에 상륙한 후 바로 태극기를 게양하며 애국가를 우렁차게 합창하였다. 수비대의 하루 일과 중 몸을 햇볕에 쪼이고 물 속에 뛰어들어 짠물에 적신 후 다시 햇볕에 쪼이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는 모기보다 더 독한 ‘깔따귀‘란 벌레에 대비하여 피부를 가죽처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주로 알몸으로 활동하였는데 부족한 의복이나 식수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의 최선의 방법이었고 오히려 그들을 단합시키는 동지애로 발전하였다.
1953년 7월 23일 새벽 5시에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 9함이 진격해 왔다. 잠시 당시 수비대의 마음이 되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그만큼의 용기를 느낄수 없기 때문이다. 좁은 섬에 40여명이 가 있고 일본 함정이 그것도 1천 톤이 넘는 큰 함정이 다가오는 것이다. 가진 것은 소총 몇 자루가 전부이다. 일본 경찰은 독도를 이미 자신의 땅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몇 번에 걸쳐 표식까지 세운 참이다. 그들이 수비대를 체포하여 험하게 다룬들 무엇이 주저될까. 이미 어부들의 어로 활동마저 막아오던 참인데 말이다. 그런데 수비대는 그들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시킨 것도 아니다. 나라는아직 독도를 지킬 어떤 경비대도 보내지 않았다. 모두 수비대원들의 온전한 자기 의지였고 영토사랑이었다. 수비대의 항쟁은 목숨을 모두 내건 싸움이었다.
수비대는 각자가 가진 소총과 보트에 설치된 경기관총으로 전함을 집중 공격하였으나 함정 철판이 너무 두꺼워서 구멍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일본 함정은 멀리 동쪽으로 도망쳤다. 홍순칠대장은 이때 직사포의 필요를 느꼈다. 단지 도망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함을 침몰시키겠다는 다부진 의지로 경북 병사구 사령부에서 바다사자를 미끼로 M2정과 노획한 소련제 직사포 한 문, 그리고 조준대가 없는 박격포 한 문을 얻었다. 그러나 실탄은 없었다. 또한 당시는 미군정이 ‘무장단체 불허용‘의 내용 등을 담은 법령 28호를 발효한 때라 필요한 무기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군자금으로 현금 200만 환과 바다사자 수놈 생식기 1개를 가지고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무기를 수집하였다.
홍순칠대장은 중화기를 보완하자 수비대가 있던 서도보다 동도 가 경비 상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동도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때 짐을 가득 실은 전마선 이 동도 와 서도 중간쯤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M1소총 10여 자루와 탄약들이 물에 빠졌는데 수심 15m나 되는 물 속에서 별다른 장비도 없이 모두 끌어 올렸다. 동도에 야영천막과 중화기의 진지구축을 마친 후 독도에서 영주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했다. 이는 울릉도 경찰서장과 군수의 도움으로 소나무 삼천 본의 벌채 허가와 장정 300명의 모집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장정을 모집함에 오징어잡이 배의 선장과 기관사는 제외하였는데 이는 그에 딸린 선원 20명과 가족 100여 명이 굶게 될 것을 걱정해서였다.
국회는 1953년 7월 울릉도 경찰서 소속 경찰관을 경비대로 독도에 파견하여 상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비임무를 맡은 인원은 5명뿐이었고 상주를 위한 숙소는 독도수비대에 의존하였고 준비된 장비는 칼빈 소총 한자루와 약간의 식량, 간장, 된장 그리고 소주 몇 상자뿐이었다. 당장 비좁아진 잠자리며 부족하기 만한 보급품에 수비대내에서는 경찰관을 쫓아내자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명색이 정부에서 파견한 경찰관이라 귀신소동으로 귀여운 항변을 한 후 동도 에서 다시 서도로 장비 일체를 옮겼다. 서도로 옮긴 다음날 새벽, 일본 해상 보안청 소속 순시선 PS 11정이 동서 양도사이 300m 위치에 나타났으나 새롭게 정비된 중기와 경기로 물리쳤다.
1954년 11월 21일 1천 톤급 일본함정 PS 9, 10, 16함이 비행기 1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이 접근하였다. 홍순칠은 접근하는 일본함정을 보며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며 그때보다는 더 나은 전력임을 위로하였고, ‘독도를 그냥 버려 두면 일본놈이 표류목처럼 주워 가는가‘라고 힐난하던 힐책을 떠올리며 진정한 의미를 알리기 위해 승전을 다짐하였다. 박격포가 PS 9함에 명중되었고 PS 10함은 중기에 치명상을 입어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며 도망갔다.
그러나 일본측은 정오뉴스에 한국 경비대의 발포로 일본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를 하였고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 각서를 제출하고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한국으로 반송시켰다. 본 해상 보안청의 함정은 정기적으로 20일에서 23,4일 사이 출현하였다. 이를 파악한 홍순칠은 앞으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부족한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경상북도 지사로부터 도움을 받아 구호양곡에서 200표(俵)를 출고할 것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미군 고문관 소령은 한국과 일본이 서로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독도분쟁에 미국의 식량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기도 구하기 어려워지자 가짜 대포를 생각 해냈다. 포구 직경이 20cm, 포신이 자유롭게 돌고 미제 에나멜로 단장된 신형대포로 독도의 ‘목대포‘로 불렸다. 목대포는 후에 일본에서 발간된 {킹}이란 월간지에 ‘독도에 거포 설치‘ 란 기사까지 나게 할 정도로 진짜 같았다. 목대포를 설치한 다음달인 1953년 8월 24일 일본측 함정이 나타났지만 그전처럼 근접하지는 않고 먼 곳에서 배회만 할 뿐이었다. 목대포는 수비대가 3년 후 정부에 독도 수비를 인계할 때까지 일본 함정과의 총포전을 막아준 큰 역할을 하였다.
무인도에서 겨울나기는 어느 곳보다 지루하고 길었다. 대원들은 바다사자를 잡아 기름은 자연굴에 보관하여 연료로 사용하였고 고기는 삶아 소금에 절여 부식으로 충당하였다. 대원들 대부분은 초등학교도 못 다닌 상태였는데 책을 읽어 무료함을 달래며 3번의 겨울을 지내는 동안 한문을 빼고는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고 초등학교를 나온 대원은 중학이상의 실력으로 향상되었다. 시간이 지나 수비대원들이 반백이 넘은 나이가 되어 오징어도 못 잡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을 때 쉬운 소설책 등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한치의 땅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우리의 땅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대한 훈장으로 생각한다는 회고가 정겹고 더없이 소박하다.
홍순칠은 독도수비를 정부에 인계한 후 독도에 물이 난다면 ‘생산하는 독도‘로 육성시킬 수 있겠다는 신념으로 10년 동안 탐수 작업을 벌여 결국 1966년 식수를 발견하여 수조탱크를 설치 근해에 출어하는 어민이 여기에서 급수하도록 하였다. 1983년 6월에 독도 정상에 대형 태극기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1986년 2월 척추암으로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독도본부 소식지 탑골인 밝은이 2002年 4月(이선희, 한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