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악하악 / 이외수

2009. 10. 9. 22:14시,좋은글/좋은글

 

 

 

 

 

 

 1
해는 왜 아침마다 빙그레 웃으면서 떠 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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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척박한 땅에 나무를 많이 심는 사람일수록 나무그늘 아래서 쉴 틈이없다.
정작 나무그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은 그가 뙤약볕 아래서
열심히 나무를 심을 때 쓸모없는 짓을 한다고 그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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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그대 신분이 낮음을 한탄치 말라.
이 세상 모든 실개천들이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지 않았다면
어찌 저토록 넓고 깊은 바다가 되어 만 생명을 품안에 거둘 수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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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사랑의 절대법칙
사랑한다는 말 뒤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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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다소 쪽팔리는 일이기는 하지만,
내 홈페이지 작가 약력에는 시골초등학교 분교에서 고용인 노릇을 했던 경력이 명기되어 있다.
열등한 내 젊은 날의 중심부, 절망 속에 당도한 막다른 골목, 지나간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훙터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떠올라 가슴을 아리게 만들더니,
요즘은 유명인들의 학력위조 사건을 배경으로, 내 어깨 위에서
박사학위보다 몇 배나 거룩한 자부심으로 나름대로의 광채를 발하고 있다.
이럴 때도 있구나. 민망하게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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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천재들은 이따금 '다른 답'을 창출해 낸다.
그러나 무식한 채점관들은'다른 답'과 '틀린 답'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순간에 천재를 둔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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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오늘은 한글날. 한글은 세계적인 언어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한
인류 최대의 문화유산이다. 당연히 공휴일로 지정되어야 한다.
정부가 지정해 주지 않아도 내가 지정하겠다. 한글날만 되면 나는 무조건 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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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신중하라.
그대를 썩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대를 익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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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영국 사람이 영어를 잘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잘 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영어는 잘 하면서 한국말을 못하는 건 캐안습이다.
일찍이 퇴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내 손자가 뜰 앞에 천도복숭아가 있는데 먼 데까지 가서 개살구를 줍고 있구나.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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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한국 사람들은 정력에 좋다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서 멸종위기에 처하도록 만든다.
내년 여름에 대비해서 지금부터라도 모기가 졸라 정력에 좋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그런데 양심이 정력에 좋다는 소문은 도대체 언넘이 퍼뜨린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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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을 만나면 그래, 산에는 소나무만 살지 않으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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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산은 정지해 있으되 능선은 흐르고 있고,
강은 흐르고 있으되 바닥은 정지해 있다.
그대가 두 가지를 다 보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산과 강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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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하루 종일 남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결국 하루를 헛살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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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아, 생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하악하악.





이외수 李外秀

독특한 상상력, 기발한 언어유희로 사라져가는 감성을 되찾아주는 작가 이외수.
특유의 괴벽으로 바보같은 천재, 광인같은 기인으로 명명되며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문학의 세계를 구축해 온 예술가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추구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술의 힘임을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1946년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났고, 춘천교대를 자퇴한 후 홀로 문학의 길을 걸어왔다.
문학과 독자의 힘을 믿는 그에게서 탄생된 소설, 시, 우화, 에세이는
해를 거듭할수록 열광적인 '외수 마니아(oisoo mania)'들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는 현재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감성마을에 칩거,
오늘도 원고지 고랑마다 감성의 씨앗을 파종하기 위해 불면의 밤을 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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