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 분지로와 「조선산악론」

2009. 6. 28. 16:55山情無限/山


고토 분지로와 「조선산악론」

 


 




<사진>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에서 발간한 「문교의 조선(文敎の 朝鮮)」1931년 3월호에 수록된 이토 후미마루(伊藤文治)의 '소등박사(고토 분지로)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의 앞부분이다. (사진/총독부 산하 조선체육회가 발간한 <문교의 조선> 1931년 3월호에 실린 이토 후미마루의 '소등박사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의 첫 부분. 이 글 머리부분에서 이토는 한반도의 모습을 중국에 예를 차리는 모습으로 본 고토 분지로의 한반도 모습을 다시 들 먹이고 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는 태백산맥, 소백산맥과 같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산맥 명칭과 그 체계를 창안한 인물이다. 고토 분지로의 제자인 이토 후미마루는 이 글에서 그의 스승 고토 분지로의 저서 「조선산악론」(朝鮮山岳論, 원제 An Orogrphic Sketch of Korea)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산맥이론을 요약,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고토 분지로는 요코하마 마다지로(橫山又叉次郞, 1860 ~ 1942), 야스 쇼에이(矢津昌永, 1863 ~ 1922) 등과 함께 명치 시대 일본 지리학을 대표하는 지리학자 중의 하나이다. 1881년 동경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한 그는 3년 여의 독일 유학을 거쳐 1886년부터 동경대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후 고토 분지로는 서양 지리학의 일본 도입 과정과 정책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전문학술지「지학잡지」(地學雜誌)를 창간하였고, 이 잡지를 통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후학의 양성에도 힘써 경도대학과 동경제대 지리학과를 창설한 오가와 다구치(小川琢治)와 야마자키 나오사마(山崎直方) 등을 배출하였다. 이 글을 쓴 이토 후미마루도 그 중의 하나이다.

 

<사진>의 자료에는 그에 대한 인적사항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을 발표할 당시 그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이 글을 발표하게 된 배경 등이 무엇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가 없다. 하지만 이 자료는 고토 분지로 이론의 국내 수용 과정과 시기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막연하게, 조선총독부가 합병 초기부터 고토 분지로의 이른바 「조선산악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하고 채택해 온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토 후미마루의 글 제목과 발표시기 등을 고려한다면, 고토 분지로의 산맥이론은 이 글이 발표되던 1930년대 초까지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 채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만일 조선 총독부에서 그의 이론을 '공인'했다 하더라도 이 글이 발표된 이후의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04년에 발행된 야스 쇼에이의 『한국지리』(韓國地理)에는 우리나라 산맥의 계통을 고토 분지로가 연구한 개요에 따라 서술하겠다는 언급이 있다. 그리고 1908년 평양의 대동서관에서 발행한 당시 지리교과서인 『고등소학 대한지지(高等小學大韓地誌)』에서는 종래의 우리나라 산지(山地)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앞서 말한 야스 쇼에이의 이론을 채용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고토 분지로의 이론은 한일 강제합병 이전부터 우리 한국인의 손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육당 최남선은 「소년(少年) 」1908년 11월호를 통해 고토 분지로의 이론을 비판하는 한편,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山經表)를 영인, 발간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현재까지는 조선총독부에서 고토 분지로의 이론을 정식으로 공인했다는 명확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만일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식으로 공인되지 않은 채 사실상 공인된 것처럼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면, 이는 구한 말의 관련학자들뿐만 아니라 광복이후의 우리나라 지리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이토 후미마루는 '소등박사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에서 고토 분지로의 국내 연구활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생의 연구는 지금부터 30년 전, 1900년부터 1902년까지 두 해의 겨울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7명의 사람이 4마리의 당나귀를 인솔해서 모두 14개월에 걸쳐, 266일동안 매일 약 5리를 걸어서 1,575리를 답파하여 반도(半島)를 한쪽 해안에서 다른 쪽 해안까지 수 차례 왕복하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정밀히 조사한 결과 얻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고토 분지로는 「지학잡지」를 창간한 다음해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지질구조를 연구한 것이다. 그가 왜 겨울을 택해 답사를 하였으며 조사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지질구조에 대한 고토 분지로의 연구목적이, 순수한 학술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의도에서 출발한 것인지 이 문제는 앞으로 구명(究明)되어야 할 것이다.

 

2회, 14개월에 걸친 현장답사를 통해 고토 분지로는 우리나라 지리와 관련해서 모두 3편의 논문과 지명사전(공저), 그리고 지도 1편을 연구실적으로 남겼다. 3편의 논문은 모두 영문으로 발표되었는데, 그의 연구실적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조선산악론」(朝鮮山岳論, 원제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 : 한반도의 지체구조(地體構造), 특히 남한의 지질을 조사한 논문으로 1903년 4월에 발간된 「동경제국대학 이과대학 기요(東京帝國大學理科大學紀要, The Jounal of the College of Science, Imperial University of Tokyo)」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내외학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우리나라 지질지리학 연구에 중요한 논문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조선의 지질지리적 여행기(朝鮮の地質地理的旅行記, Jouneys through Korea. First Contribution)」 : 「조선산악론」을 발표한 지 6년이 지난 뒤인 1908년 6월 「동경제국대학 이과대학 기요」에 발표한 논문으로 우리나라를 답사할 때의 상황과 일정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 「조선의 지질지리적 여행기」(Jouneys through Korea. Contrib. Ⅱ) : 앞의 같은 논문 후속 편으로 1908년 5월 같은 논문집에 발표되었다. 특히 이 논문에는 평안도의 홀동금산(笏洞金山)의 지질과 광산에 대한 조사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로마자 색인 조선지명자휘(羅馬子索引朝鮮地名字彙, A catalogue of the romanized geographical names of Korea)」 : 고토 분지로가 우리나라를 답사할 당시에 기록한 도읍, 산, 강 등의 지명을 한글 발음순서에 따라 영문 표기한 지명사전으로, 1903년 동경제대 강사인 문학박사 가네자와(金澤壓三郞)와 공동으로 발간하였다. 제 1부에서는 한글 발음을 영어 철자법 순서에 따라 배열한 후 그 옆에 한자로 지명과 도명(道名)을 표기하였으며, 제 2부에서는 지명의 한자 표기를 일본식 발음에 따라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조선전도(朝鮮全圖)> : 고토 분지로가 제작한 우리나라 전도로 1903년 동경에서 발행되었다. 컬러판이며 지명은 염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연재의 3회(1991년 「산」10월호)에서 「소년」(少年)지 수록 산악관련자료를 다룰 때, 우리 국토의 외형이 토끼와 흡사하다는 고토 분지로의 주장에 대해 1908년 육당 최남선은 직접 호랑이를 그려가면서 반박했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이토 후미마루의 글에도 이같은 내용이 반복되는데, 그는 우리 국토가 중국에 대해 예를 갖추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라는 고토 분지로의 주장까지 소개하고 있다.

 

이태리는 외형이 장화(長靴)와 같고 조선은 토끼가 서 있는 것과 같다. 전라도는 뒷다리에, 충청도는 앞다리에, 황해도에서 평안도는 머리에, 함경도는 어울리지 않게 큰 귀에, 강원도에서 경상도는 어깨와 등에 각각 해당된다. 조선인 사이에는 자신의 나라 외형(外形)에 대해 가상(假想)의 모습이 있다. 그들은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支那)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 게 마땅하다." 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 같은 생각은 지식계급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일청전쟁(日淸戰爭) 후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든 간에 한 나라의 국토 외형을 특정 동물이나 사물에 비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리학적 측면에서도 논의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토 분지로의 주장과 이를 글의 서두에서 구태여 거론하는 이토 후미마루의 의도는, 우리 국토의 외형이 중국에 예를 차리는 모습과 흡사하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사대적(事大的)이고 모화적(慕華的)일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결정론'식의 논리를 다분히 깔고 있다. 이 때문에 고토 분지로의 이론이 국내에 소개되던 1908년을 전후한 당시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에 육당 최남선은 호랑이 비유를 통해 이를 통렬하게 반박, 상당한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박용수 글, 월간 「산」 1994년 1월호에서 전재 편집.

 

홈지기 덧붙임) 위의 국토의 외형에 관한 논의에서 이 땅이 '노인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고토 분지로가 『택리지』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택리지』의 「복거총론」중 '산수'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옛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노인형(老人形) 지세라고 하면서, 해좌(亥坐) 사향(巳向)이어서 서쪽으로 얼굴을 들어 중국에게 읍하고 있는 형상이므로 옛부터 중국과 친하게 지냈다고도 하였다.(大抵古人, 謂我國, 爲老人形, 而坐亥向巳, 向西開面, 有拱揖中國之狀, 故自昔親[ㅁ+尼]於中國)"(『택리지』. 이중환/허경진. 1996. 한양출판. 서울)(밑줄 친 'ㅁ+尼'는 '친하다. 사이좋게 지내다'는 뜻을 가진 '니'자이나 한자변환에 들어 있지 않아 부득이 조합하여 표현하였음)고 하였다.

 

이 내용을 위와 같이 노인의 육체적인 약점만을 부각시켜 표현함으로써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한 의혹을 떨칠 수 없다. 비록 옛부터 사대 모화사상에 젖어 있던 일부의 식자들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으나 이를 옛사람들 모두가 우리 민족이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까지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땅을 토끼에 비유한 것은 일고의 반박할 가치가 없는 부분이라 생략한다.

 

끝으로 이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의 개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설명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토 분지로가 어떻게 이 땅을 조사했는지 비록 원전은 아니지만 일본인의 글을 통해 알아봄으로써 좀 더 실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떠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남의 나라를 정밀하게 조사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모습은 본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땅의 지리학은 아쉽게도 해방 후 50년이 지나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첫마당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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