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형과 <대동여지도> 그리고 백두대간

2009. 6. 30. 07:52山情無限/山



이우형과 <대동여지도> 그리고 백두대간



  희고 여윈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칼. 산줄기마냥 불끈불끈 솟은 손등의 핏줄과 주름. 특유의 손짓과 서울사투리의 컬컬한 목소리. 목소리만큼이나 걸걸한 성격의 이우형 선생은 우리 나라에서 손꼽는 고지도 연구가로 '20세기 김정호'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다. 이런 주위의 평가에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의 인생은 고지도 연구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지도제작자로 일하면서도 고지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그는 겹겹이 쌓인 지도더미 속에 파묻혀 살다 틈만 나면 산과 강을 찾아 우리 땅의 참 모습을 종이 위에 담아내고 있다.

 

 

 (아래 사진 : 생전의 이우형 선생)  그의 고향은 부산 동래이고, 광주에서 태어났다.(부모님이 부산 동래 출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 나이 또래가 그렇듯이 그의 인생에서도 길손냄새가 흠씬 묻어 난다. 슬하의 딸 둘을 모두 외국에 유학 보내고 허름한 아파트에 부인과 단 둘이 살고 있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길과 자유를 꿈꾼다. 그의 차림은 언제도 떠날 준비를 갖춘 사람같다. 면바지 스웨터에 랜드로바. 그의 손가방엔 항상 형광펜과 지도가 들어 있다.

 

 대학 재학시절에는 연극배우, 그리고 한 때 방송국 성우(기독교 방송 성우 1기)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 전속제가 아니었기에 남들보다 자유롭게 산을 다닐 수 있었다. 그의 지도와의 인연은 그가 걸출한 산악인이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그는 대한산악연맹의 서울시연맹 구조대장을 지낼 정도로 젊은 시절을 산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69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산악전문지 「산수(山水)」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었고 그 때 특집으로 지도를 그려 넣곤 한 것이 지도와의 인연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지도제작자로 나서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잡지사가 경영난으로 6개월만에 문을 닫게 됐는데 일 년 치 구독료를 선불로 받은 것이 문제가 된다. 고민 끝에 그는 평소 산행경험으로 쌓아 둔 자료를 바탕으로 4색 컬러 등산용 지도를 부록으로 만들어 마지막 호 잡지와 함께 독자들에게 보냈다. "못 보내 드리는 잡지는 이 부록으로 대신해 달라"는 사과문과 함께. 그런데 이 지도가 예상외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지도제작자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 무렵 나온 경주와 제주도의 문화재지도는, 그의 지도제작자로서의 첫 '작품'들이다. 당시 만든 경주와 제주도의 문화재지도는 그가 처음으로 '현장주의 지도'의 기법을 써 만든 주제도였다. 예컨대 제주도 성판악의 경우 현지에서 쓰는 말인 '성널오름'으로 표기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다가 80년초에는 '광우당'이라는 전문 지도제작회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채산성에 관계없이 제대로 된 지도를 추구하는 그의 성격상 얼마 안 있다 문을 닫고 만다.

 

 지도제작자로서의 삶을 통해 그가 우리의 지리인식체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등고선을 통한 지형 표현 방법이 들어온 1900년대 이전 우리 선조들이 이 땅을 표현한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고지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국내에는 고지도에 관한 연구나 자료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고지도의 존재조차도 잊고 있었다. 개인소장본 외에 공공도서관에만 수 백종 수천점이 남아있는 사실에 눈돌린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10년전쯤(1997년 현재 시점에서)에는 학위 논문하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5~6편이 고작입니다. 우리 땅 이야기를 모르고 어떻게 이 땅에 온전히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발견되지 않은 고려시대이전 지도를 찾아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이사로 있는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회원 중 교수가 아니고 박사가 아닌 사람이 그 뿐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부족한 실정에서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솟아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지도를 포함한 전통지리에 대한 현실도 다른 한국학 관련 분야에서 겪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존재가 더욱 커보이는 것은 이런 불모지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 그의 열정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고지도에 관한 많은 연구 성과뿐 아니라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그리고 『산경표』를 통해 백두대간이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1970년대 말)그는 김정호를 만난다. 국토를 그리는 지도는 물론 역사를 아우르는 지도를 만들고 고지도에 관심을 갖다 보니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고산자와 <대동여지도>였다. <대동여지도>를 대하면서 그는 김정호의 '지도관'이 자신의 것과 맥이 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지도 제작자로서 고산자에게 갖게 된 애정이 <대동여지도>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대동여지도>를 처음 대한 것은 70년대 말 경이었는데, 그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는 사이 이것이 보통 정성과 뜻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에게 헬리콥터를 한 대 주고 해보라고 해도 10년 세월은 족히 걸리겠다 싶었어요. 이와 함께,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방대한 작업에 손을 댔을까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초적인 연구와 더불어 우선 85년에 단순작업으로서 <대동여지도> 영인본을 제작, 발행했다. 이후 더욱더 깊이있는 연구에 매진했고 그 결과 <동여도>의 지명을 수록한 새로운 <대동여지도>를 1990년에 제작하게 된다. 그는 고산자가 30세 때 제작한 <청구도>와 20여년 후에 편찬한 『여도비지』와 필사본인 <동여도>를 바탕으로 60세 때 최종적으로 지도의 대량 유포와 전사(전사)의 오류를 막기 위한 목판본인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사실을 알고, 고산자가 제작한 초기 지도이면서 직접 쓴 범례가 기록된 <청구도>와 지도와 따로 편찬한 지리지인 『여도비지』에 주목했다. 이 작업에서 그는 우선 대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산마루와 물줄기는 땅의 근골과 혈맥이다"라는 말에서는 고산자가 가진 지도 제작의 근본 이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정말 고산자가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오르내리며 직접 전국을 누비고 다녔는지, 산줄기 표시는 어떤 기준으로 굵기를 달리했는지, 저마다 틀리게 그린 산봉 모양에는 어떤 기준을 두었는지, 한자로 된 지명 표기는 우리말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지도의 축척은 어떻게 되는지, 도로상 10리 단위를 나타낸 점의 간격이 왜 일정하지 않은지, 왜 현대 지형도에서 잘 나타나지 않은 능선줄기가 <대동여지도>에서는 명확하고 큰 선으로 나타난 지역이 있는지, 강줄기가 두 개 선으로 표현되다가 상류에 이르면 한 줄로 합쳐지는데 이 지점이 갖는 특징 무엇인지 등 많은 의문들이 함께 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산악인 이우형씨 <대동여지도> 완성했다.' 참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이르면 잠자리에서도 생각했지요. 왜, 왜 하고 말이죠. 그러다가 이제 그만 자야지 하고 돌아눕다 보면 환한 새벽이곤 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계는 팽개친 채 박물관과 도서관, 개인소장 등을 뒤지는 일과 답사 등 <대동여지도>에 숨겨진 뜻을 풀어 나가기 위해 보냈던 지난 시간의 힘겨웠던 나날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대동여지도>에 문외한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외려 '왜'하는 의문사를 던지게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항공촬영으로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각종 지도가 얼마든지 있는 이 현대에 무엇하러 그 냄새 나는 묵은 옛 지도를 가지고 무려 5년(1985년 <대동여지도> 영인본 간행과 <동여도>의 지명을 수록한 광우당의 <대동여지도>가 나오기까지)이나 씨름을 했다는 말인가' 하고. 당연한 질문이라면서 그는 그 자신도 연구를 해 나가는 도중 <대동여지도>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지도는 땅만을 그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땅을 보는 심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땅의 환경은 유일한 것이고 우리식 표현이 있었을 것입니다. 등고선식으로 그린 오늘날의 서양식지도와는 달리 우리 선조들은 산경수경을 지도에 담았습니다. 이는 물줄기 중심의 산줄기 개념입니다. 지도는 읽기에 따라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권 식생 문화 기후 농경권역은 단순한 등고선식 지도로는 알 수 없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는 필사본인 <동여도>를 기본으로 목각본인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목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상에는 총19,000여 개였던 지명 가운데 7,400여 개를 뺀, 11,700여 개만 <대동여지도>에 판각했다. 그는 이 누락된 지명을 일일이 확인해 추가인쇄한 <대동여지도> 3분의 2 축소판 300부와 함께 『대동여지도의 독도(大東輿地圖의 讀圖)』라는 책자를 발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대동여지도>의 기본도로서 현존하는 필사본이 세 벌에 불과한 <동여도>를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등으로 찾아가, 워낙 휘귀한 것이라 복사도 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고역을 감수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실로 100여년만에 김정호의 완전한 뜻이 이뤄진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는 중 그는 의문 해결을 위해 숱한 답사를 다녔다. 그 많은 답사에서 느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아쉬워했다. "길도 문화재입니다.그러나 지금의 길은 관리자만 있고 이용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답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당시에 허름한 옷차림과 보따리 나침반 지도 도시락…이런 것들 덕분에 간첩으로 몰려 끌려간 적도 있습니다. 사공이 들려주는 그들 세계의 에피소드와 물길의 역사를 안주 삼아 뱃전에서 기울이는 소주잔이 바로 인생이고 역사지요. 홀수는 남북으로, 짝수는 동서로 난 도로입니다. 지금의 국도는 1920년대 일제가 닦은 신작로를 모태로 해 약간씩 수정보완된 것입니다. 48개국도중 20개 정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밟아봤지요. 지난해(1996년) 이후에는 3.4.5호선을 답사했습니다. 그게 별거라면 별거일수도 있겠지요."

 

그는 80년대 초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미상의 우리 나라 옛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를 발견한다. 요즘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지만 백두대간이란 전통지리인식과 체계가 세상에 다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산경표』에는 강을 기준으로 하여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그리고 13정맥으로 이 땅의 산줄기를 크게 가름하고 있다. 이러한 백두대간 지리인식과 체계는 조선 시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조선 시대 중기까지의 지도들에도 그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 후 『택리지』나 『성호사설』등을 통해 구체적인 용어들이 등장하고 여암 신경준의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둘 다 그의 저작)에서 산줄기 흐름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산경표』는 산줄기들에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한 족보형식의 독특한 지리서로 이 때 와서는 백두대간 지리 인식이 확고한 틀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산줄기 표현은 어느 개인의 사고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고산자도 이를 그대로 지도에 표현했던 것이다.

 

 그는 『산경표』를 <대동여지도>와 비교하며 연구하던 중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산을 우리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산은 영어에서 말하는 마운틴(mountain)이나 일본의 야마와는 다른 개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산을 정상(peak)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 옛 산의 개념, 즉 산경원리에서 이르는 우리 산의 뜻은 그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규모) 였다는 것과 그 모두를 두고 어느 곳이든지 그 산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런 개념을 기초로 족보형식의 『산경표』를 현대지형도에 작도하여 지도화한 <산경도>를 제작했고 이는 월간 산악지들과 조석필의 글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백두대간 종주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아래 그림 : 산경도)

 

 고지도 연구가로서 또한 지도제작자로서 그는 지도 만들기와 관련해 '생활지리'를 강조한다. 지도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땅과 산과 물을 보는 심성이 나타나 있는 만큼 산수경 (山水經)의 개념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이를 도외시하면 그 시절 사람이 그 땅에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지리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산줄기의 개념이 아직까지 산맥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 했다.

 

 "한시 바삐 이 땅의 산줄기를 지도상에 제대로 표기하는 일도 본격화돼야 합니다. 우리 지리교과서상의 복잡한 산맥구도와 이름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우리 선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을 하나의 등줄기로 보고 (장백) 정간 하나와 13정맥으로 국토를 파악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제가 지하자원의 수탈을 위해 세운 태백산맥이니 차령산맥이니 하는 지리개념을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질학에서나 필요한 개념이지 우리 강토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는 거의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의 흐름이 바뀌면 기후나 토양도 바뀌며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품성도 바뀌는 것인데, 우리는 어처구니 없게도 그 일제의 지리개념에 의해 무감각해진 채 별 생각없이 우리 땅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들어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의 개념이 널리 확산되고 있고, 이와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행이 많아지고 있는 점은 우리 국토를 알고 사랑하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로 인해 백두대간이 망가지고 파헤쳐지고 있는데 대해서는 분노를 표했다.

 

"우리 조상은 이 땅을 뼈와 피의 흐름을 가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는 그런 인식의 구현입니다. 이 <대동여지도>를 통해 잃을 뻔했던, 그 현명했던 땅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일이 곧 불구가 되어가는 이 강토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는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조선어독본』'김정호전'(아래 서술된 내용의 이해를 이해서는 왼쪽의 '김정호' 메뉴 참고하면 좋음)에 처음 실린 이레 왜곡된 모습으로 60여년 동안 전해져 오던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잘못된 교과서 기술을 바로 잡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기존의 국어 읽기 교과서에는 ‘조선후기까지 조정에 제대로 된 지도가 한 장도 없어 김정호가 10년 동안 조선팔도를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러 번 오르내리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그 지도를 보고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라 오해했기 때문에 김정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지도와 판목은 압수당하여 불살라졌다’고 적고 있었다.
 
"김정호는 전국을 뺑뺑 돌지도, 백두산을 여덟차례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지도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때문에 옥에 갇히지도 않았고 판목이 폐기되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런 기록은 우리 역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대부분 왜 그렇게 알고 있었을까. 이우형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1990년도판 이전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었다.

 

“일제의 의도는 고산자가 불굴의 의지로 <대동여지도>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용을 잘 분석해보면 우리 민족이 김정호 이전에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못 만들어 왕이 보던 지도마저 엉터리였으며 고산자가 천신만고 끝에 <대동여지도>를 혼자 만들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게다가 이런 훌륭한 업적을 남긴 고산자를 칭송하기는 커녕 대원군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했다며 <대동여지도>를 불태우고 그를 감옥에 가둬 옥사시켰다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이어집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이 얼마나 미개하고 제대로 된 지도조차 하나 없는 한심한 나라인지 은연중에 심어주고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정당화하려는 것인데 광복 이후 50여년이 지나도록 앵무새처럼 이를 되풀이 인용해 왔습니다”

 

이런 잘못된 내용들은 이번 교과과정 개편에서 모두 삭제되거나 수정됐다. 지리연구가였던 김정호가 당시까지 전해오던 수많은 지도들을 모아 그 내용을 다듬어 <청구도>를 만들었으며 <대동여지도>도 당시 전국을 돌며 만든 것이 아니라 대축척의 기존 실측지도를 편집하여 제작했으며 당시 조정에서도 이 지도를 활용하고 현재도 그 판본이 남아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는 교과서의 수정을 위해 증거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방당시 일제로부터 우리측으로 문화재가 인수.인계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여지도> 목판본 인계서와 1995년 12월 그렇게도 찾던 <대동여지도> 목판 11장을 찾아내기도 했다. 한 때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김정호 부분이 아예 교과서에서 삭제될 위기에까지 처하기도 했다. 그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김정호의 인생이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독본 제작이후 60년이상 일본의 식민사관에 이용된 것도 억울한데, 이 분야 한국사에 둘도 없는 그의 인생과 업적을 없는 것으로 하자니 기가 막힌 일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이에 주저 앉지 않고 교육계 등을 대상으로 집요한 설득작업을 계속한다. 중학교와 지리 등 다른 과목 교과서 필자에게까지 로비를 벌일 만큼 열심이었던 그의 김정호에 대한 집념은 끝내 97학년도 5학년 1학기 교과서에 김정호의 개정된 진짜 이야기를 실리게 하는 결실을 거둔다. 그는 그러나 아직도 김정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학계는 그런대로 되고 있지만, 아직도 김정호에 관해 모르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정호의 다른 지도인 <청구도> 서문에 보면 고산자는 '애국이란 그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 땅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땅을 사랑하려면 땅의 됨됨이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지도와 지리지를 온 백성이 보아야 한다는 게 고산자의 생각이었죠.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온갖 어려움에 시달리며 나무를 파고 또 고치고 또 파고 하는 고산자의 10년 집념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20여 년의 세월을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하는 일에 바친 그의 놀라운 열정은 고산자가 <청구도>에서 <대동여지도>를 판각하여 완성하기까지 바친 열정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의 고산자라고 부르는 것일 게다. 130여년의 세월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지만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해서, 온전히 이 땅의 모습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던 두 사람은 그렇게 한 사람이 되어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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