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와 스핑크스

2014. 5. 5. 01:05카테고리 없음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3대 피라미드를 보고 나면 이집트 여행의 절반은..)



○ 2014. 2. 11  / 날씨 : 약간 더움
○ 이집트, 카이로, 기자지구






어제는 집을 나선지 35시간 만에
여장을 풀 정도로 강행군이었다. 여행도 젊어서
힘 있을
때부터 시작하여 나이가 들수록 쉽고 편한 여행을 하여야 한다
여독이 풀릴 틈도 없이 새벽부터 서둘러 7시에 또 호텔을 나선다.
기자지구의 3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둘러 보러 가는 길인데
혹시 교통체증이 생길까 봐 일찍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은 카이로를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를 건넌 후, 출애굽 경로를 따라 시내산 아래까지 가는 일정이다.
오늘도 버스만 10시간 넘게 타는 강행군이다. 시나이 반도를 거쳐
샤론 쉐이크를 돌아 시내산 아래에 도착하려면 거의 밤 10시가
넘어야 도착이 될 것 같다. 빠듯한 일정, 우리같이 여행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여독이 풀릴 틈이 없다는 표현보다
여독을 느낄 틈이 없다고 해야 될듯..





(차창밖에 산 하나가 나타났다)

차가 붐빌 것을 예상하여 호텔을 일찍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으로 웅장한 산봉우리가 비친다.
뿌연 황사를 뒤집어 쓴 피라미드가 나타난 것이다.
일순간 환호성이 터진다. 와 피라미드다!!







(다행히 황사가 빨리 사라지고 있다)

관광객도 많이 줄어든 것 같고, 교통정체도 없어
예정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렸다 입장했으니 우리가 제일 먼저 입장을 한 것 같다.







(남쪽방향과 시내방향)

시내방향은 점점 하늘이 파랗게 변하고 있는데
남쪽 방향은 아직도 연무로 뿌옇다







(이건 산이다 산! 산 세 개가 우뚝 서 있다)

눈 앞에 펼쳐진 산같은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인 파라오(Pharaoh)의 무덤
고대 이집트는 성경의 애굽이고 파라오는 바로를 말하는 것이다!
입구쪽에 위치한 제일 큰 피라미드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2대왕인 쿠푸왕의 피라미드. 우리를 내려 준 곳은 장소가 비좁아
카메라 화각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크다.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전제 왕국이 형성된 이후
30개 왕조가 교체되었는데, 이를 통상적으로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등
3기로 나눈다. 그 중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피라미드가 건축된 것은
고왕국의 제3~제4 왕조(전 2585~2395경) 때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미드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쿠푸 왕의 것으로
높이가 146m이며, 밑변은 한 변이 각각 230m에 이르는 정방형이며,
각 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재료로 쓰인 돌은
누런색이 도는 석회암인데, 평균 1.5톤의 돌 230만 개를 쌓아 올렸다.
이 피라미드를 완성하는 데 10만 명의 백성이 해마다 3개월씩
동원되어 2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니 먼저 나타난 것은 낙타꾼)

낙타꾼들의 호객행위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뭐 시간만 있으며 낙타를 한 번 타보는 것도 괜찮겠다만
딸랑 시간 5분 주고 다음 코스로 이동한다는데 여유부릴 시간이 없다.
사진 찍기도 바쁜데.. 타라는 낙타는 안타고 사진을 한 장 찍었더니
이제는 사진 찍은 것 돈 내라고 집요하게 따라온다.









(대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쿠푸왕 피라미드)

이집트 기자에 있는 가장 큰 피라미드를 대 피라미드라고 한다.
이 대 피라미드는 기원전 2560년 무렵 세워진 쿠푸의 피라미드로
완공에는 약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바로 옆에 아들 및 손자까지
파라오 3대의 피라미드가 나란히 있다. 대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다.





(낙타꾼들이 풍경으로는 좋으나)

호객행위가 심하다. 따라 다니면서 낙타를 타라고 한다.








(사진 포인트 잡기가 마땅찮아 이리저리 뛰어 다녀 보지만..)

피라미드는 일반적으로
정사각뿔 꼴의 고대 유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대 중국,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앙아메리카 등
많은 문명권에서 피라미드 형태의 유적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태왕릉이나 장수왕릉 등도 정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의 일종.
그중에서 고대 이집트의 유적인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대체로 국왕,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쓰였을 것
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피라미드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피라미스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80여 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나일 강 서안
사막 연변 여기 저기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2권)'에 나오는
기록이 현존하는 피라미드에 대한 제일 오래된 기록이라고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는 10만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낙타꾼들.. 피라미드 주위에만 있는게 아니다)









(피라미드는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유명하다)

피라미드는 갑자기 나타난 건축 양식으로
아랍어로 '직사각형의 벤치'라는 의미의 마스타바라는
왕을 매장하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하였다고 한다.
파라오 조세르(Djoser) 시대에 이 마스타바를 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다층 마스타바 혹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임호테프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이후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형태의 건축물을 건설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당대의 피라미드 건축 경험 부족으로 붕괴하고 만다.
스네프루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지었지만 피라미드의
각이 너무 예각이었던 탓에 다시 붕괴 위험에 부딪치자 어쩔 수 없이
공사 중에 각도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를 굴절 피라미드라고 한다.
그러나 스네프루는 굴절 피라미드로 만족할 수 없었고, 더욱 상징적이고
미적으로 완성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한 재차의 노력을 했으며,
이 건축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이미지와 같은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다음의 파라오 쿠푸(Khufu)는 이미 완성된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 그 규모를 극대화하여 대규모의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이러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이 바탕이 된 것이며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가 정점을 이루고, 평민들까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사람 크기 정도의
작은 피라미드들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일위는 앞쪽이 카프라왕, 뒤쪽이 쿠푸왕, 아래는 멘카우라왕 피라미드)

파라오는 저승세계의 왕인 오시리스의 환생이자
그의 아들 호루스의 환생으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파라오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주의 질서에 따라 예정된 일이며
더구나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후에 파라오의 영혼은 신들이 만들어놓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태양신 '라'를 둘러싼 하나의 별이 되어 영원한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왕에게만 주어진 사명이었다.
 
왕의 묘로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설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파라오의 영원한 생명에 걸맞게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주거가 필요했으며 또 한 가지는 그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 또는 사다리의 역할이었다.
 












(스핑크스(Sphinx))

불가사의 한 피라미드와 함께 유명한 것이 스핑크스.
스핑크스는 거대한 석회암 석상으로, 앉아 있는
사자의 몸뚱이에 두건을 쓴 왕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스핑크스는 두 번째로 큰 피라미드를 건설한 카프레 왕의
모습으로, 피라미드를 수호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사람의 머리가 달린 상상속의 동물.
이 동물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동남아시아 지역의 설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자의 대 스핑크스는 길이 60미터 높이 20미터의 석회암.
대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쌓아 만든 게 아니고 원래 있던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한 것. 대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기 때문에
카프레 왕 때인 기원전 255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카프레 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제작법이 다르고 석재의 산지와 공법이
다르다. 최근 스핑크스 주위에 있는 벽에서 무수히 많은 큰 홈들이 발견되었다.
지질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홈들은 홍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홍수는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때 있었지만
빙하기에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울 만큼의 문명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워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대 스핑크스의 코는 깨져 있는데
대 스핑크스뿐 아니라 이집트 안의 석상은 거의 다 코가 없다.
나폴레옹이 대포를 쏘아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나, 문화재에
심취해 있던 나폴레옹이 그러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슬람교의 우상 숭배 금지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이슬람 교도들이 스핑크스의 코를 부수면
스핑크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터키 병사들이 포격 연습을 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증명사진 한 컷 남기고..)





(낙타가 있는 풍경)









(Khafre's Valley Temple)







(이제 쿠푸왕과 카프라왕의 피라미드가 선명해졌다)











(스핑크스쪽에서 본 피라미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뒤돌아 보며 당겨본다.
아직도 약간의 박무는 있지만 하늘은 코발트 빛이 되었다.
아쉽지만 이제는 떠날 시간..

▲   △   ▲   △   ▲ 


피라미드를 이야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신이된 남자 '임호테프'와 ' 최초의 피라미드 '조세르 피라미드'
조세르 피라미드는 기자지구에서 약 10km 남쪽에 있다.





(조세르 왕)

고대사에는 보통 왕의 이름이 중심에 선다.
정밀한 역사 기록이 적고 집권자의 실질적, 상직적인 영향력이 컸던 시절,
역사는 왕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게 당연했으며 수많은 뛰어난 인물들의 이름은
왕들의 이름에 가려졌다. 그러나 아득히 먼 옛날, 왕에 못지 않은 명성을 얻고
죽어서 신으로까지 숭배된 사람이 있었다. 이집트 제3왕조의
조세르 왕 시절에 살았던 임호테프였다.

이집트는 문명의 발생이라는 점에서는
메소포타미아보다 다소 늦었다. 하지만 고대 왕국의 수립은 더 빨라서,
기원전 3500년경에 왕국이 나타나고 3100년경에는 상,하 이집트가 통일되어
고대 이집트의 기틀이 잡혔다. 북아프리카가 건조해지며 나일강 유역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나일강의 범람을 적절히 활용할 대규모의 관개작업이 절실해져서
일찌감치 강력한 왕권이 수립될 수 있었다. 많은 인원을 동원해 효율적으로
작업하려면 강력한 중앙권력과 합리적인 계획,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이집트를 정복하여 제1왕조를 세운 '최초의 파라오'는 메네스.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인물이라 실존성이 불분명하다. 나르메르라는
이름이라고도 하고, 나르메르는 후대의 왕이라고도 하며, 호루스 신에게서
직접 왕권을 물려받아 62년을 다스렸는데 하마 또는 물소에게 죽었다고 한다.
이후 7, 8명의 파라오를 거쳐 기원전 2890년경부터 2686년까지 제2왕조가,
그 뒤로는 제3왕조가 이어갔다. 사나크테가 시작한 제3왕조는 이집트 역사에서
"고왕국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파라오의 왕권이 강대해지고 국력도
크게 떨친 시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바로 피라미드인데,
최초의 피라미드는 제3왕조의 2대 파라오(조세르가 초대 파라오이며,
사나크테는 후대의 파라오라는 설도 있다)
조세르 시대에 재상 임호테프가 건설했다.





(임호테프(Imhotep,B.C.2655~B.C.2600))

'임호테프'는 '평화롭게 다가오는 사람'이라는 뜻.
그는 고관이던 카네페르의 아들이며 조세르 왕의 친구였다고 하나,
왕자였다는 설도 있다. 그의 이름은 조세르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조세르 상에 새겨져 있는데, "파라오의 고문, 하이집트 왕국의 회계,
상이집트 왕국의 제2인자, 위대한 재상, 귀족, 헬리오폴리스의 대신관,
건설자, 목수, 조각가, 도예가"라고 임호테프를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임호테프의 생전에 새겨졌을 이 문구를 보더라도
그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재상'이라는 직위는
사실상 임호테프가 '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까지는 왕실 살림살이를 돌보는 소규모의 신하집단만 있었으나
고왕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대규모의 관료집단이 이루어지고, 그들을 총괄하는
직위인 재상이 신설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헬리오폴리스의 대신관으로
태양신 '라'를 받드는 제사를 주재했다.' 라'의 숭배도 고왕국 시대의 특징으로,
그때까지는 호루스나 세트가 주로 숭배받았었다. 그야말로
파라오를 제외하면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조세르 상의 명문에도 나오듯 그는 단지 유능한 관료,
정치가만이 아니라 천재적인 기예가였던 듯하며, 기원후 3세기경의
이집트 역사가인 마네토에 따르면 임호테프는 "신의 경지에 이른 의술로
널리 명성을 얻었고,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천문학자,
수학자, 철학자, 연금술사였다는 말도 있다. 파피루스를 발명한 사람도
임모테프라고 한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이야기가 부풀려진 것일지
모르지만, 살아서 널리 숭배받고, 죽어서 전설로 남을 만큼
임호테프의 실제 재능이 뛰어났음은 분명해 보인다.





(조세르 피라미드)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오늘날까지 임호테프의 이름을 높여 주는
기념물은 바로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다. 사카라에 있는 피라미드는 흔히 알려진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기자 피라미드)와는 달리 장방형의 석조물을 층층이
쌓아올린 계단식 피라미드인데, 이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원형이며 층 사이의
공간을 메워 사각뿔 모양으로 만든 것이 기자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밑변은 109×125미터, 높이는 62미터에 달한다.
그때까지의 파라오들은 마스타바라고 불리는 높이 10미터 정도의 장방형
무덤에 묻혔음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축물이었을지,
조세르와 임호테프가 얼마나 큰 권력을 누렸을지 알 수 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본래는 평범한 마스타바였으나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여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는 추정이 있고,
처음부터 그런 형태로 설계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신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도 본다. 임호테프가 그토록 놀라운 재주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메소포타미아의 선진 문물을 접한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조세르 피라미드는 석조건축 기술에서도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때까지 이집트에서 돌은 건축에 부수적으로만 쓰였고 나무와 진흙이
주요 건축재였으나, 조세르 피라미드에서 비로소 돌을 깎고,
운반하고, 쌓아올리는 기술이 본격적으로 동원된 것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들은 대부분 소실되었기에
조세르 피라미드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석조건축'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페루의 카랄 피라미드가
이보다 앞선다(기원전 3000년경)는 주장이 나왔다.

조세르 피라미드의 미학적, 정치적인 의미 역시 크다.
산처럼 우뚝 솟은 피라미드는 멀리서도 보이며, 절로 외경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것은 파라오가 하늘로 올라 신이 되기 위한
계단이라고도 한다. 신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널리 온 땅을 다스리는 지배자,
그가 파라오이며, 그 이상을 구현하는 실체가 피라미드였다.
임호테프는 이 신성한 건축물에 개인 서명을 남긴 것으로도 보인다.
"네켄의 목수"라는 것인데, 임호테프의 별명으로 알려진 이 서명의 의미는
이 피라미드가 조세르의 왕권을 나타내는 상징물인 동시에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이기도 함을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임호테프는 조세르 피라미드 말고도 두어 곳의 건축물을 건설했고,
거기서 쓰인 원기둥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서 나중에 고대 그리스의 신전건축에도 응용되었다.





(신이 된 남자/토트(왼쪽)와 동일시되는 임호테프(가운데)를 나타낸 그림)

워낙 오래 전의 인물이다 보니, 그가 어떻게 태어나
어떤 가정을 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무덤조차 사카라 어딘가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현대 고고학자들이
필사적으로 찾고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처럼 신비에 싸인 인물이기에
더욱 신화로 남지 않았을까. 아니, 그를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인간 임호테프'의 정보가 사라지고 잊혀져 버린 게 아닐까.

불세출의 건축가이며 모든 학문의 권위자인 그를
지혜의 신인 토트와 동일시하는 믿음이 자연스레 생겼으며,
사카라를 찾는 숭배자들은 어딘가에 있을 그의 무덤에 토트 신의 상징인
따오기의 미라를 바치며 경의를 표시했다. 크눔 신이나 프타 신이
그의 진짜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세크메트 여신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2천 4백년 뒤에 이집트를 지배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도
임호테프 숭배는 사라지지 않아서, 그리스의 의술과 학문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와 동일시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고문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던 학자가 일을 게을리하자 임호테프가 꿈에 나타나 꾸짖었고,
이후 번역이 빠르게 완성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오늘날 생각해 보면 정말 그토록 많은 재능이 한 사람에게 갖춰져
있었을지 믿기 어렵다. 건축이나 조각 역시 실행은 여러 전문가들이 하고,
임호테프는 다만 총책임자로서 영예를 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이 아닌
인간이 왕과 거의 동격으로 추앙받고, 그의 권력이 아니라 지혜와 재능으로
길이 숭배받는 일은 고대에서는 실로 보기 드문 경우였다.
조세르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는 한, 아니면 그 후까지도,
임호테프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출처 : 함규진 | 역사저술가





(또 나타난 낙타부대(?)부대들..)

기자지구를 1시간 반만에 떠나야 하다니..
이건 완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격이다.
하긴,
오늘 신 광야를 거쳐 샤롬 쉐이크를 돌아 시내산까지 가려면 서두르긴
해야하지만 인류 최대의 불가사이한 현장에 와서  맛만 보고 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 다시 올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온다면 석양의 피라미드를 보고 싶고 카이로에서 '왕가의 계곡'을 따라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였던 테베와 룩소르를 가 보고 싶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나일강을 건너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 광야로 들어선다. 수에즈 운하를 넘으면
신 광야.. 출애굽 40년 행적을 차를 타고 맛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