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festo(선언) 외 / Victor Jara(빅토르 하라)

2014. 11. 9. 01:10Music/Music

 

 

 

 

 

 

 

 

Manifesto

Victor Jara

 

 
 

 


 

 
Venceremos (우리 승리하리라)

 
Zamba del Che (체를 위한 삼바)

 La Plegaria a un Labrador (한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

Te Recuerdo Amanda (너를 기억해 아만다여)
 
 
 
 
 

 

 1932년 칠레 남부 산티아고 부근 론켄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
10살 때, 하라의 가족은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로 이주했으며, 1948년 판토마임 극단에 가입했다.
1951년 칠레 대학연극학부에 입학, 친구와 함께 칠레 오지와 가난한 농촌지역을 순회하며 민요를 채집하고
민속춤과 음악을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쿤쿠멘 그룹 등 여러 그룹을 결성하였다. 1961년 칠레 대학 부속연극연구소에
근무하며 연출가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연극을 연출하여 국제연출상과 유럽의 비평가상을 받는등
연출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서정적인 하라의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칠레의 '새 노래운동'에
불을 지펴 이후 문화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투쟁가요를 만들어 대중앞에 나서서 부르게 된다.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칠레의 정치상황과 비참한 생활 조건들이 그의 노래를
무기로 만들었고 그를 정치일선에 가져다 세운다.
 
60년대 칠레의 경제 상황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통한 이익 대부분이 외국의
대기업들에게 돌아갔고, 스페인 식민시대의 상위계층들이 전체 경작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칠레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일하거나 빈곤한 도시의 노동자일 수밖에 없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되는 상황 속에서 칠레의 진보세력들은 인민연합을 형성했고,
마침내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이 되면서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1971년 말부터 빅토르 하라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순회하며 칠레 민중들이
겪었던 삶의 역사와 조국이 처해 있는 고난의 현실을 노래했다. 이 무렵 그가 부른 선언(manifiesto)은 칠레 민중은
물론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큰 울림이 됐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누에바 깐시온의 테마처럼 그의 노래는
파시스트의 폭력에 항거하는 무기가 됐다. 그러나 1973년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부의
꿈은 깨어지고, 아옌데 대통령은 군부의 망명 권유를 거절하고 대통령 집무실인 모네다 궁을 지키다 칠레 공군의 폭격에
사망하고 말았다. 빅토르 하라는 이러한 칠레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음악과 연극 등 예술을 통해 민중의 편에 서 있었고,
1973년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의 군부에 의해 산티아고 국립경기장에 구금, 결국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5000명과 함께 학살당했다. 당시 군인들이 노래로 저항의지를 표현하는 하라의 창작능력을 두려워 해
기타 치는 손을 부러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누에바 칸시온이 라틴 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칠레 민중 정부의 붕괴와 빅토르 하라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산티아고의 빈민지역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연극을 공부하면서
 안데스 음악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민속음악에 관심을 가지다 노래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품었다. 누에바 칸시온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인  ‘Te Recuerdo Amanda(너를 기억해 아만다여)’에도
등장하는 그의 어머니 아만다로부터 기타와 칠레 민요를 배웠고, 비올레타 파라를 만나 진정한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1969년 제1회 누에바 칸시온 페스티벌에서 1위를 차지한
노래가 바로 그의 대표곡 중의 하나인 ‘La Plegaria a un Labrador(한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이며,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에서부터 개인적인 서정을 담은 노래들로 칠레 민중들의
가슴에 감동을 전했다. 또한 빅토르 하라는 아옌데 정권의 음악대사 역할도 했다.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노래를 통해 칠레의 현실과 아옌데 정권의 정책을 알렸다.
하지만 칠레 민중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빅토르 하라는 피노체트의 군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아옌데 정부의 종말과 빅토르 하라의 죽음으로 인해
칠레의 많은 음악가들은 국외로 도피하거나 해외 순회공연 중에 망명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 하라와 함께 칠레의 누에바 칸시온을 이끌었던 그룹 퀼라파윤(Quilapayun), 인티 이이마니
(Inti-Illimani), 그리고 비올레타 파라의 자녀들인 앙헬 파라와 이사벨 파라도 그 대열에 있었다.
이들은 유럽의 저항음악인들과 함께 콘서트 무대에 올라 칠레의 현실을 알리고
빅토르 하라의 죽음을 추모하는 공연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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