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 23:46ㆍ카테고리 없음
騷壇赤幟引
(연암집 제1권 / 煙湘閣選本)
騷壇赤幟引
*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 인(引)은 문체의 명칭으로 서(序)와 마찬가지이다. 《소단적치》라는 책에 붙인 서문이란 뜻이다. 소단(騷壇)은 원래 문단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과거 시험장을 가리킨다. 적치(赤幟)는 한(漢)나라의 한신(韓信)이 조(趙)나라와 싸울 때 계략을 써서 조나라 성의 깃발을 뽑고 거기에 한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세우게 하여 적의 사기를 꺾어 승리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범(典範)이나 영수(領袖)의 비유로 쓰인다. 요컨대 ‘소단적치’란 과거에서 승리를 거둔 명문장들을 모은 책이란 뜻이다.
善爲文者。其知兵乎。字譬則士也。意譬則將也。題目者。敵國也。掌故者。戰塲墟壘也。束字爲句。團句成章。猶隊伍行陣也。韻以聲之。詞以耀之。猶金皷旌旗也。照應者。烽埈也。譬喩者。遊騎也。抑揚反復者。鏖戰撕殺也。破題而結束者。先登而擒敵也。貴含蓄者。不禽二毛也。有餘音者。振旅而凱旋也。
글을 잘하는 자는 병법(兵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대오항진(隊伍行陣)과 같다.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照應)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 抑揚反覆 : 문장의 기세를 억제했다가 고조했다가 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는 수법을 말한다.
* 鏖戰 : 적을 모조리 죽일 때까지 힘을 다하여 싸움. 또는 많은 사상자를 낸 큰 싸움.
* 破題 : 당송(唐宋) 시대에 과거 답안지의 첫머리에서 시제(試題)의 의미를 먼저 설파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명청(明淸) 시대 팔고문(八股文)에 이르러 고정된 법식이 되었다.
* 不禽二毛也 :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2년 조에서 송(宋)나라 군주는 적이 불리한 처지에 있을 때 공격하는 것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머뭇거리다가 패전한 뒤에 “군자는 부상자를 거듭 상해하지 않고 반백(半白)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다.〔君子不重傷 不禽二毛〕”고 변명하였다.
夫長平之卒。其勇㥘非異於昔時也。弓矛戈鋋。其利鈍非變於前日也。然而廉頗將之。則足以制勝。趙括代之。則足以自坑。故善爲兵者。無可棄之卒。善爲文者。無可擇之字。苟得其將。則鉏耰棘矜。盡化勁悍。而裂幅揭竿。頓新精彩矣。苟得其理。則家人常談。猶列學官而童謳里諺。亦屬爾雅矣。故文之不工。非字之罪也。
대저 장평의 군사가 그 용감하고 비겁함이 지난날과 다름이 없고, 활․창․방패․짧은 창의 예리하고 둔중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건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제압하여 이기기에 족하였고, 조괄(趙括)이 대신하자 스스로를 파묻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 하는 자는 버릴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그 장수를 얻는다면 호미․곰방메․가시랑이․창자루로도 모두 굳세고 사나운 군대가 될 수 있고, 천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정채(精彩)가 문득 새롭다. 진실로 그 이치를 얻는다면 집안사람의 일상이야기도 오히려 학관(學官)에 나란히 할 수 있고, 어린아이들의 노래나 마을의 상말도 또한 이아(爾雅)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 長平: 전국시대 때에 조(趙)나라 군사 40만이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에게 몰살당한 곳. 즉 진나라 백기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에서는 처음에 명장 염파(廉頗)가 장수로 나와 진나라를 상대로 승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반간계(反間計)에 속은 조왕(趙王)이 염파를 쫓아내고 싸움에 서투른 조괄(趙括)을 장수로 삼음에 따라, 백기가 이를 이용하여 조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투항한 40만 군사를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조괄은 조나라의 장군인 조사(趙奢)의 아들로 병법을 조금 배워서 알게 되자 천하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늘 자부하고 다녔으므로 아버지 조사로부터 조나라 군대를 망칠 사람은 틀림없이 조괄일 것이라는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글은 똑같은 군대라도 장수가 누구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짐을 말한 것이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彼評字句之雅俗。論篇章之高下者。皆不識合變之機。而制勝之權者也。譬如不勇之將。心無定策。猝然臨題。屹如堅城。眼前之筆墨。先挫於山上之草木。而胸裏之記誦。已化爲沙中之猿鶴矣。故爲文者。其患常在乎自迷蹊逕。未得要領。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篇)과 장(章)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비유컨대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까마득하기가 굳센 성(城)과 같은 지라, 눈앞의 붓과 먹은 산위의 풀과 나무에 먼저 기가 꺾여 버리고, 가슴 속에 외었던 것들은 벌써 사막 가운데 원숭이와 학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글을 잘 하는 자는 그 근심이 항상 혼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 山上之草木: 동진(東晉) 때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격하였다. 이때 동진의 장수 사석(謝石)과 사현(謝玄) 등이 이를 맞아 싸웠는데, 부견이 성에 올라 동진의 군대를 바라보니 진용(陣容)이 정제되고 군사들이 정예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북쪽으로 팔공산(八公山) 위를 바라보니 초목들이 마치 동진의 군사로 보여 겁을 먹었다고 한다. 《晉書 卷114 苻堅下》
* 沙中之猿鶴矣: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주나라 목왕(穆王)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는데 전군이 몰살하여 군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와 모래가 되었다.” 하였다. 즉 아무것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이 다 잊어버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夫蹊逕之不明。則一字難下。而常病其遲澀。要領之未得。則周匝雖密。而猶患其踈漏。譬如陰陵失道而名騅不逝。剛車重圍而六騾已遁矣。苟能單辭而挈領。如雪夜之入蔡。片言而抽綮。如三皷而奪關。則爲文之道如此而至矣。
대저 갈 길이 분명하지 않으면 한 글자도 내려 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항상 더디고 껄끄러운 것이 병통이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헤아림을 비록 꼼꼼히 하더라도 오히려 그 성글고 새는 것을 근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오추마(烏騅馬)도 나아가지 않고, 굳센 수레로 겹겹이 에워싸도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는 이미 달아나 버린 것과 같다. 진실로 능히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면 마치 눈 오는 밤에 채성(蔡城)을 침입하는 것과 같고, 토막 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세 번 북을 울리고서 관(關)을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글을 하는 도가 이와 같다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 名騅不逝: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의 군사에게 쫓겨 음릉에 이르러 그만 길을 잃게 되자 그곳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그리고 배를 몰고 자신을 마중 나온 오강(烏江)의 정장(亭長)에게 타고 다니던 오추마(烏騅馬)를 주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항우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처했을 때 지은 시 속에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달리지 않도다.〔時不利兮騅不逝〕”라고 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 六騾已遁: 한나라 무제(武帝) 원수(元狩) 4년 대장군 위청(衛靑)이 무강거(武剛車)라는 전차로 진영을 만들고 흉노(匈奴)를 포위하였으나 흉노의 선우(單于)가 여섯 마리의 노새가 끄는 육라(六騾)를 타고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 雪夜之入蔡 : 당나라 헌종(憲宗) 때에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 장수 이소(李愬)가 눈 오는 밤에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 반군의 근거지인 채주(蔡州)를 불의에 습격하여 오원제를 사로잡았다. 《舊唐書 卷133 李愬傳》
* 三皷而奪關 : 춘추시대 노(魯)나라 장공(莊公) 10년에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하자 조귀(曹劌)가 장공과 함께 장작(長勺)에서 제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는데, 제나라에서 북을 세 번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의 힘이 빠진 다음에 제나라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春秋左氏傳 莊公10年》
友人李仲存集東人古今科軆。彙爲十卷。名之曰騷壇赤幟。嗚呼。此皆得勝之兵而百戰之餘也。雖其軆格不同。精粗雜進。而各有勝籌。攻無堅城。其銛鋒利刃。森如武庫。趨時制敵。動合兵機。
繼此而爲文者。率此道也。定遠之飛食。燕然之勒銘。其在是歟。其在是歟。
벗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엮어 열권으로 만들고, 이를 이름하여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이것은 모두 승리를 얻은 군대요 백 번 싸워 이긴 나머지다. 비록 그 체재와 격조가 같지 않고, 좋고 나쁨이 뒤섞여 있지만 제각기 이길 승산이 있어, 쳐서 이기지 못할 굳센 성이 없고, 그 날카로운 칼끝과 예리한 날은 삼엄하기가 마치 무고(武庫)와 같아, 때에 따라 적을 제압하여 움직임이 군대의 기미에 맞으니, 이를 이어 글하는 자가 이 방법을 따른다면, 정원(定遠)의 비식(飛食)과 연연산(燕然山)에 공을 적어 새기는 것이 그 여기에 있을 것이다.
* 李仲存 : 중존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의 자이다.
* 科體 : 과거시험에서 보이던 여러 문체의 글을 이른다. 과문(科文), 공령(功令)이라고도 한다.
* 定遠之飛食 : 정원후(定遠侯)는 후한의 장수 반초(班超)의 봉호(封號)이다. 반초가 일개 서생으로 지내고 있을 때 답답한 마음에 어떤 관상쟁이를 찾아갔는데 그가 하는 말이 “제비의 턱에 호랑이의 목을 지니고 있으니 멀리 날아가서 고기를 먹을 것이다. 이는 만리후(萬里侯)의 관상이다.〔燕頷虎頸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고 하였다. 그 후 반초는 장수가 되어 서역(西域)의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정원후에 봉해지고 그가 서역에 있던 31년 동안에 서역의 50여 개국이 모두 한나라에 복속하였다. 이 말은 반초가 멀리 서역에까지 이름을 날리듯 문장의 명성이 멀리 퍼진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後漢書 卷77 班超列傳》
* 燕然之勒銘 : 후한 때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서 남흉노와 연합하여 계락산(稽落山)에서 북흉노를 대파하고는 연연산(燕然山)에 올라가 공적비를 세우고 반고(班固)로 하여금 연연산명(燕然山銘)을 짓게 하였다. 이 말은 두헌이 비석을 세워 공적을 후세에 남기듯이 문장의 명성이 오래도록 남겨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後漢書 卷53 竇憲列傳》
雖然。房琯之車戰。效跡於前人而敗。虞詡之增竈。反機於古法而勝。則所以合變之權。其又在時而不在法也。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수레싸움은 앞 사람을 본받았어도 패하고 말았고, 우후(虞詡)가 부뚜막을 늘인 것은 옛 법을 반대로 하였지만 이겼으니,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이 아니다.
* 房琯之車戰 : 방관(房琯, 697~763)은 당나라 때의 장수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현종(玄宗)이 물러나고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방관에게 각군을 모아 장안(長安)을 수복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장안으로 진격하다 함양(咸陽)에서 적을 만났다. 방관이 직접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춘추시대의 거전법(車戰法)을 흉내내어 소가 끄는 수레 2000승(乘)과 보병으로 진을 쳐서 적과 대치하니, 적들이 바람을 이용하여 소리를 지르고 불을 놓아 공격하여 방관의 군이 대패하였다. 《資治通鑑 卷219 唐紀》
* 虞詡之增竈 : 후한(後漢) 때의 장수 우후(虞詡)가 옛날 손빈(孫臏)의 전법과 반대로 취사하는 아궁이의 수를 늘려 병력이 증강되는 것처럼 위장한 고사를 말한다. 손빈(孫臏)이 제(齊)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위(魏)나라의 장수 방연(龐涓)과 싸우게 되자 첫날에는 취사하는 아궁이를 10만 개 만들었다가 이튿날엔 5만 개로 줄이고 또 그 이튿날엔 3만 개로 줄여 군사들이 겁먹고 도망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에 방연이 방심하고 보병을 버려둔 채 기병만으로 추격을 하다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복병을 만나자 자결하였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우후는, 북방의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병력의 열세로 인해 몰리게 되자 구원병이 온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는 아궁이의 수를 매일 늘려 구원병이 계속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에 어떤 이가 묻기를, “손빈은 아궁이의 수를 줄였다는데 그대는 늘리고 있으니, 무슨 까닭이오?” 하자, “손빈은 허약한 척하느라고 아궁이 수를 줄인 것이고 나는 반대로 강하게 보이려고 아궁이 수를 늘린 것이니, 이는 형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後漢書 卷88 虞詡列傳》
筆犀墨利。字飛句騰。藝垣中頗牧。
世謂文之照題緊襯者。爲科擧之文。則殽鉛雜鐵。外若精鍊。而內實有參恕處。苟能十分照顧十分緊襯。無一字浮辭漫語。便是得意古文之上乘。
붓과 먹이 날카롭고 글자와 글귀가 날고 뛰니. 문예계의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이라 하겠다.
세상의 이른바 ‘글제를 고려하여 거기에 꼭 들어맞게 지은 글’이란 것으로 과거(科擧)를 위한 글을 짓게 되면, 납이 섞이고 철이 섞여서 겉으로는 마치 정련(精鍊)된 것 같지만, 속을 보면 실은 참작해서 관대히 보아줄 곳이 있다. 진실로 충분히 고려하고 충분히 꼭 들어맞도록 하여 한 글자도 겉도는 말이나 두서없는 말이 없게 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득의한 고문(古文) 중에서도 상승(上乘: 上品)일 것이다.
* 頗牧 : 염파(廉頗)와 이목(李牧). 모두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명장이다.
* 內實有參恕處 : 《하풍죽로당집》에는 “속을 보면 실은 경박하고 부실하다.〔內實浮浪〕”고 되어 있다.
* 便是得意古文之上乘 : 《하풍죽로당집》에는 “이야말로 득의한 고문일 것이다.〔便是得意之古文〕”라고만 되어 있다.
命意綴文。如尉繚子之談兵。程不識之行師。當爲功令之上乘。篇篇若此。豈不使擧世心折。
주제를 결정하여 글을 엮기를 《울료자(尉繚子)》에서 병법을 말할 때나 정불식(程不識)이 군사를 출동할 때처럼 한다면 당연히 공령문(功令文: 科體文)의 상승이 될 것이다. 편(篇)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심복하게 하지 않겠는가.
* 尉繚子 : 울료자는 전국시대의 병법자인 울료(尉繚)가 지은 병서로 거기에서 그는 본말(本末)을 분명히 하고 빈주(賓主)를 구분하고 상벌(賞罰)을 명확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 程不識 : 정불식은 전한 때의 명장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문제(文帝) 때에 이광(李廣)과 함께 변방의 태수로서 흉노를 공격하러 출동할 때에 이광과는 달리 군대를 엄중하고도 분명하게 통솔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109 李廣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