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8. 22:41ㆍ山情無限/山
에베레스트 18인
PROLOGUE
후추 명예의 전당 헌액자에 대한 추측, 건의, 격려, 그리고 항의까지… 후추의 게시판에 올라 오는 많은 글들 외에도, 후추 편집국의 공식 이메일 함으로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양의 메일들이 쏟아져 온다. 그 만큼 후추 '명.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이 많은 것으로 위안하며 살아 왔다. 수요일… 2주에 한번씩 돌아오는 '명.전 수요일'은 많은 후추인 들에게는 '과연?' 또는 '역시…"의 수요일이 되겠지만, 후추 편집인들에게는 2주 중 가장 평온한 하루가 된다. 그런 수요일 오후, 독자들은 새로운 명.전을 읽고 있을 무렵에 후추 편집국에선 곧바로 '차기 헌액자'에 대한 격론이 펼쳐지고 있다고 보면 대충 시간 대가 맞아 떨어질 것이다. 자… 그래서 뭐??
약 열흘 전, 최동원 선수의 이름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올린 그 수요일 오후, 후추 편집국에선 약 30여분 만에 유난히 '가볍고도 고통 없는' 차기 헌액자 선정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 대략적인 글의 흐름과 목차를 정하고, 편집진 각자의 임무와 역할을 분담했다. 여느 헌액자 취재 과정과 별 다름 없는 순조로운 (?) 1주일을 보내오면서 필자의 마음 속 한 구석에 '죄 의식'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말이다. 무언가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이 필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후추 명예의 전당이 존재하는 이유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5-60% 이상의 원고가 이미 작성 된 시점에서 '칼을' 뽑게 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그 1주일 전에는 편집진 모두가 '산 사나이' 고상돈을 생각 했고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 더군다나 고상돈의 '천당에서 지옥까지'의 3년, 즉 에베레스트 등정에서부터 79년 맥킨리 봉 참사 사건까지의 기록을 본다면 그야말로 'TV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만큼 산과 고상돈의 '러브 스토리'는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후추 명예의 전당이 고상돈을 지명한 이유는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기, 아니 77년 우리 조국의 만인에게 '정상의 풍경'을 처음으로 대리 체험하게 해 준 '민족의 쾌거'를 다루기 위해서 였지만, '에베레스트 = 고상돈' 이란 등식을 받아들이기에 후추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기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시작한다. 고상돈의 이름은, 아니 그의 기구한 운명은 명예의 전당 한 곳, 아주 '산이 잘 내다 보이는 자리'에 모셔 두기로 약속하면서 말이다.
1977년 9월 15일 12시 50분… 필자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고 뭐시기 하는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올랐다'며 온 대한민국이 열광하던 그 날을.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 에베레스트라는 산이 도무지 얼마나 높은 산인지 말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산의 높이도, 산의 아름다움도, 그리고 산의 '시퍼런 두 이빨'도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 1주일동안 후추 편집진은 고상돈만을 상기하며 그의 일생을 현미경 속으로 들여다봐야 옳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에베레스트를 보고, 느끼고, 숨 쉬며 1주일을 살아왔다. '에베레스트 였기 때문에 고상돈이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지난 1주일 동안 어렴풋이 나마 에베레스트를 곁눈질 할 수 있었다. 너무 높아서 쳐다볼 수 없다던 에베레스트의 높이를, 그리고 지금의 현대식 고산 등반대와는 판이하게, 소박하고 어리석고 용감했던 77년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 대원들의 '에베레스트 대 원정'을 조금이나마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20여년 전, 대한민국의 염원이 담긴 한걸음 한걸음 전진의 의미를, 몇 장 안 되는 일개 스포츠 웹진의 기사로써 대신한다는 망상은 감히 하지도 않는다. 산을 정복한다는 야망보다는, 사랑하는 산을 '만나기 위해서'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떠난 우리 대한민국의 아들 18명의 '정신'에 매료되어서 이 글을 그들의 이름으로 바칠 뿐이다. '77 KEE (Korean Everest Expedition)' 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베이스 캠프를 쳤던 그 에베레스트 중턱은 오늘날 '그룹 관광객'들의 휴가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고,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쌓여 있을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산이 되어 버렸다. 78년 독일의 세계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가 무 산소, 단독 등반으로 '낭가 파르바트' (8,125m) 를 정복했다는 기적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사실상 '에베레스트 대원정'의 개념은 우리 '77 KEE' 대원들이 그 마지막을 장식한 셈이 되었다. 21일 간의 캐러밴 (Caravan - 380km 도보 행진), 금속 사다리 100여 개를 설치하며 진행 된 아이스 폴 (Ice Fall - '마의 길목') 루트 공작 과 같은 초인간적인 의지와 도전 정신을 요하는 고전적인 '대원정'의 개념은 그들을 끝으로 사라졌다는 얘기다. 현대식 에베레스트 공략 작전을 과소평가 한다기 보다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정석'으로 통하던 그들의 파란 만장 했던 탐험기를 우리들의 후손에게 제대로 알리고자 이 글을 쓴다.
팀웍, 도전, 희생, 체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체험하는 희로애락… 이 모든 것들이 스포츠를 형성하는 소중한 요인들이라 짐작할 때, '알피니즘' (Alpinism) 이야말로 최고를 위해 내딛는 최고의 스포츠라 불러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등산인들의 '정신' 만큼은 올림픽 정신의 창시자 쿠베르탕이 울부짖던 그것과 가장 흡사하게 존속되어온 순수의 결정체라고 보여진다. 막막하기 그지없는 7년의 준비 과정, 그리고 쉴 틈 없이 생,사가 교차하는 100여 일의 숨 막히는 고통과 공포의 순간을 극복하며, 1평 남짓한 에베레스트의 8,848 미터 정상에 태극기를 꽂기까지… 그 모든 공과 명예가 '에베레스트 = 고상돈' 이란 짤막한 표현 하나로 후손들에게 기억되기엔 나머지 17 명의 모험가들의 노고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짓밟히는 행위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이름 모두를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액 하기로 한다. 개인의 명예 보다는 좀 더 거국적인 차원의 희생과 양보를 선택했던 '에베레스트 18인'. '에베레스트는 남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 던 어느 유명한 산악인의 말처럼, 당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세계의 지붕' 을 오를 수 있었던 쾌거야 말로, 어느 한 사람의 의지와 용기만으로 가능할 수 없었다는 믿음 하에 그들 모두의 이름과 그들 모두의 '정신'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액시킨다.
고 고상돈 대원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산을 잘 탔던 사람이었음엔 분명하다.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단독 등반' 시도였다면, 이 기사는 온통 고상돈의 이름과 영혼으로 물들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77년 우리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우리 민족도 '세계 정상' 이란 단어와 연관 지을 수 있다는 뿌듯함을 전해 주었던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거룩한 업적은, 그 '생사의 현장'에서 수 개월동안 동고동락했던 18명 모두의 '하나됨'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믿는 바이다. 그리고… 만약 후추마저 나머지 17인의 '에베레스트 추억'을 앗아가 버린다면, 그는 곧 '우리들의 미래'인 후세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셈 밖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정상 공격에 투입되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고상돈 대원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열 일곱 명의 '에베레스트 영웅' 들이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사실을 동등하고 공평하게 치하하고자 한다.
원정대장 김영도, 등반대장 장문삼, 부대장 박상렬, 이윤선 대원 (총무 담당), 고상돈 대원 (총무 담당), 이원영 대원 (식량 담당), 이기용 대원 (식량), 김영한 대원 (식량), 도창호 대원 (식량), 전명찬 대원 (식량), 김명수 대원 (장비 담당), 한정수 대원 (장비), 이상윤 대원 (장비), 곽수웅 대원 (수송 담당), 김병준 대원 (수송), 조대행 대원 (의료 담당), 김운형 대원 (보도 담당), 이태영 대원 (보도)
77년 9월 15일 12시 50분에 우리 국민 모두가 느꼈던 환희와 눈물을 이 18명의 에베레스트인 모두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山
미치지 않고서는 감히 인생을 걸었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살면서 가끔씩 왜 사느냐를 묻곤 한다. 아마도 볼품없이 일그러져 있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들, 절망과 부조리, 삶의 무의미성에 환멸하는 인간의 이성, 삶의 표면에 굽이치는 비참한 일상, 그것들에 대한 부정이리라. 또한 그것은 인간이 처한 일상의 그러한 삶 속에서 낙원을 발견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반대급부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스런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은 늘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산다는 명쾌한 대답이 아니라 삶 속에서 불현듯 느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살아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처럼 고통스러운 삶에의 물음에 대해 희망과 도전으로 존재를 확인해 가는 사람들…
그들의 화두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그들은 왜 산에 오르는가…그리고 정상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산은 또 무엇인가.
단 한번의 눈사태로도 시체조차 찾을 길 없는 그곳에, 가족을 묻고, 친구를 묻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돌아가는 그 험한 곳에 목숨을 던지는 그들의 삶 또한 살아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끊임 없이 오르고, 끊임 없이 좌절하기를 반복하고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에게 철저한 방관의 자세로 일관하는 자연을 향해 생명을 던져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엔 정복에 대한 거대한 꿈을 꾸며 산을 오른다. 그러나 처음의 그 힘찬 발걸음은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부서지는 암벽을 만나면서 무릎이 꺾이고, 걷고 또 걸으며 정복의 의미에 대해 물음표를 찍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손과 발의 피가 얼어버릴 듯한 추위와 거대한 빙벽들을 만나면 너무나 작고 초라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자신…
이제 더 이상 자아실현과 정복의 완성이 주는 희열은 그들의 산행이라는 범주에 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삶과 죽음 앞에서 생존에 대한 집착이 주는 묘한 쾌감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한 의지로 자신과 싸우며 호흡과도 같이 찾아오는 고독,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일 뿐이다. 로프가 끊길지도 모르고, 추락하거나,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며, 캠프와의 연락이 두절된 체 고립될지도 모른다.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 그것 뿐인 것이다.
두려움과 싸워 정상에 선 그들의 승리, 얼음 구덩이를 파내어 홀로 싸워 왔던 고귀한 눈물과 동지들의 혼을 묻고 그리고 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무념 무상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에베레스트. 태고의 신비가 가득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불과 얼마 전까지 누구도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던 성역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정상의 그림자만 드리워진 산아래 캠프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누구도 다시 찾아와 그를 위해 눈물 한줌 흘려줄 수 없는 얼음 땅에 육신을 묻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혼이라도 그곳에 남겨둬야 할 만큼 절실한 그들의 도전을 기억한다. 그리고 왜 가야 했는지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까지도 말이다.
그들은 "공격"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렇다. 그것은 공격인 것이다. 무엇에 대한 공격인가.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1차 공격에 실패했다는, 숨이 잦아드는 대원의 목소리가 무전기 속으로 흘러나오면 힘겨운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또 다른 치밀한 계획과 준비로 2차 공격을 나선다. 산은 공격도, 항복도,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거만한 방관은 나약한 인간에게는 거부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결코 위대한 인간이길 원한 것도 아니고 영웅이고 싶어서 생명을 담보로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스포츠의 위대함이 승패에 있지 않듯이, 그들의 위대함 또한 "정상의 정복"이라는 결과에 있지 않다.
숱한 눈물과 인간의 본질적 두려움, 삶에의 집착과 싸워 이기는 길고 긴 여정 속에서 결국에는 집착까지도 버려내고서야 얻어지는 산악인의 정신의 자유…. 위대한 인간의 모습 그것이다.
99년 5월, "산이 거기에 있기에…"라는 말을 세인의 가슴에 남기고 결국은 에베레스트의 빙산 속에 묻혀버렸던 산악인 조지 말로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75년만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엔 7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허리에는 로프가 둘려져 있고, 여전히 가죽등산화를 신고, 여전히 잊혀질 수 없는 이름 "조지 말로리"라는 이름표가 재봉된 내의를 입고 있었다. 처음 그를 발견한 어느 산악인(노바 등산대의 데이브 한)은 차디찬 얼음 속에 75년간이나 누워 있던 그를 추모하는 일이 그의 오랜 평화를 깨는 듯이 죄스럽게 느껴졌다고 한다. 비록 그의 목숨을 앗아간 산이지만,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 하던 어떤 속세의 인간들보다도 산은 우직하게 그에 대한 의리를 지켜온 것이다. 너무도 사랑하여 생명을 걸고 오른 산에 생명뿐 아니라 육신까지도 담보해둔 그를 산은 마침내 평화와 안식으로 보답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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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인생이며 산을 오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낮은 초원, 잔잔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빙벽과 폭풍을 만나는 정상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우린 잠깐동안 꿈을 꾸듯이 만났을 뿐인데도 그 말의 의미를 알 듯 하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있고부터 누구나 무미건조한 일상을 탈피하고 싶어하고 또는 무언가를 반드시 이루어 내고 싶은 희망, 아니 도전을 시도한다. 그 속에서 삶은 어디서부터 시작 될지 모르는 인생의 굴곡과 좌절을 겪지 않던가. 그리고 나서야 얻게 된 열매는 얼마나 달고 단지 우린 잘 알고 있다.
위험과 고난이야말로 인간이 산을 오르게 하는 첫번째 이유이며 자연의 위대한 힘이다. 때로는 인간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드는 이토록이나 가혹한 자연의 거부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끊임 없이 정상의 고지를 탐할 것이다. 죽음의 여신이 지키고 있는 모든 순결한 땅은 숙명과도 같이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그 곳을 찾아서 끊임 없이 산을 오르는 시지프스의 후손들이 그 곳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Because it is there….
후추 REPLAY: ‘죽음의 100 여일’ - 에베레스트 등정 일지
18인의 특공대' 77년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에 성공했던 우리 원정대를 이렇게도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미지의 세계였던 히말라야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당당히 태극기를 꽂고 돌아왔던 우리 18인의 대원들이 이루어낸 일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히말라야의 심설과 끝이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 급경사의 아이스 폴 등 숱한 난관을 뚫고서 해냈기에 이들의 정상정복은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이 글을 통해서 당시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던 열 여덟 명의 '전사' 들의 감정 또는 역경을 생생히 재현 시킨다는 생각은 무리인줄 알지만, 후추 독자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역할까지는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Replay를 틀어 본다.
에베레스트 원정 계획을 갖고 있던 한국대는 71년 네팔 외무성에 에베레스트 등반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에베레스트 등반은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만 허용됐기 때문에 한국대는 73년 가을에 가서야 등정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대는 74년부터 본격적으로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을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등산과 스포츠 정신' 참조).
6월11일 77 에베레스트 등반대회를 주최한 한국일보 강당에서 18인의 우리 원정대는 발대식을 가졌다. 다음날 장문삼 등반대장과 도창호 대원 두 사람은 선발대로 네팔 카트만두로 떠났다. 선발대가 원래 그렇듯이 두 사람에겐 본대가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듯 먼저 원정 기간 내내 우리 대원들과 동고동락할 셀파와 짐을 지게 될 포터를 뽑았다. 원정대가 임시 숙소로 사용하게 될 집을 구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마침 카트만두 '바니 포칼라가'에서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 포터들이 짐을 질 수 있게 짐들을 30kg씩 나누는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마당이 넓은 곳이 필요했는데 이 집은 건물이 낡긴 했지만 마당은 운동장처럼 넓었다. 눈이 동그래졌을 수 밖에.^^ 일단 원정대가 묵게 될 숙소를 정하고 나선 셀파들과 함께 카트만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셀파들에게 필요한 장비를 직접 구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에겐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카트만두 시내를 즐길 만한 조금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먼저 간 죄로 두 대원은 이처럼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7월6일 드디어 나머지 본 원정대도 카트만두에 입성했다.
1. 캐러밴
7월19일. 드디어 캐러밴이 시작됐다. 에베레스트 원정의 첫 발걸음을 뗀 것이었다. 캐러밴이란 베이스캠프 예정지까지 도보 행진하는 것을 말하는데 380km 에 이르는 거리를 등에 짐을 지고 걸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원정대는 여명이 밝아올 무렵 정들었던 카트만두를 떠나 첫 기착점인 램상고를 향해 출발했다. 대원과 셀파들이 타자 버스 한 대가 빽빽이 들어찼고 짐은 트럭 6대분에 달할 만큼 그 양이 어머어마했다.
4시간 남짓 걸려 첫 기착지인 램상고에 도착했다. 원정대는 캐러밴 첫날부터 포터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캐러밴을 떠나기 전 등반대에게 셀파와 포터를 소개해주는 셀파조합에서 포터 650명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했는데 램상고에는 고작 200명 정도의 포터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많은 짐을 다 어떻게 한담. 캐러밴 출발할 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대원들은 갑자기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포터문제는 캐러밴 중 우리 원정대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원정대는 100개의 사다리를 준비해 갔는데 이것을 지려고 하는 포터들이 없었다. 사다리 한 개의 무게는 15kg 정도로 가벼운 편이었지만 길이가 3m나 되기 때문에 이것을 지고 걷는 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임금인상이었다. 그때 포터들의 일당은 18루피(한화 720원)였는데 25루피(한화 1000원)로 7루피나 인상했다. 그랬더니 사다리를 지겠다는 포터들이 생겼다.
포터들을 겨우 달랬을땐 포터의 우두머리인 나이께가 말썽을 부렸다. 포터들의 임금은 나이께가 모았다가 포터들에게 전달해 주는데 나이께가 그 돈을 가지고 몰래 도망을 쳐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포터들 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나이께를 맡겼는데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이었다. 임금을 못 받게 되자 포터들은 지고 있던 짐을 팽개쳐 버리고 도망쳤다. 그것도 200명에 달하는 숫자가 말이다. 우리 대원들은 그야말로 앞이 깜깜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포터들을 끌어모았고, 셀파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나중에 고상돈과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했던 펨바 노르부라는 셀파는 직접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197명의 포터를 모아오는 능력을 발휘하여 원정대에게 큰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포터문제는 대원들의 힘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흐린 날이면 출몰하는 거머리떼 공격은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연일 고도차가 심한 고개를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9월18일을 전후해 온다는 야르주(몬순이 끝나고 오는 주기적인 폭설) 전에 정상공격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쉼 없이 전진해야만 했다. 막상 야영지에 도착해도 쉴 곳과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어쩌다 학교나 호텔 같은 건물 안에서 잠을 자거나 보통 셀파들이 주인인 찻집에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면 다음날 대원들의 표정부터가 달랐다고 한다.
8월9일. 갖은 고생 끝에 원정대는 5400m 아이스폴 하단에 위치한 베이스캠프 예정지에 도착했다. 카트만두를 떠난지 21일만의 쾌거였다. 캐러밴이 지속되면서 지쳤있던 대원들과 감기몸살로 병상에 누워있었던 김영도 대장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한달 반이 걸린다는 380km 도보 행진을 단 21일 만에 무사히 마친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적막했던 히말라야는 색색깔의 천막과 높이 쌓아올린 짐으로 제법 그럴듯한 전초기지의 모습을 띄었다.
2. 베이스 캠프 설치
원정대는 정상공격을 위해서 앞으로 5개의 캠프를 차려야 했다. 그런데 캠프 개척을 위해선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다. 아이스 폴 (Ice Fall)이 그것이다. 아이스 폴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마치 폭포가 얼어붙은 것 같은 급경사의 빙하지대인데 곳곳에 크레바스가 숨겨져 있었다. 크레바스는 쉽게 말하면 얼음 구덩이인데 대부분이 눈으로 덮혀 있기 때문에 대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치 유령같은 존재라고 할까? 그래서 아이스 폴을 지날 때 대원들은 서로 로프를 연결하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아이스 폴은 빙하지대이기 때문에 얼음이 녹지 않는 새벽과 밤에만 움직일 수 있어서 통과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런데 크레바스도 리어카에서 파는 수박처럼 크기가 다 제 각각이었다. 껑충 뛰어서 건널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도저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것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엔 사다리를 여러 개 이어서 크레바스를 건넜다. 이럴 때 쓰려고 우리 대원들은 그 무거운 사다리를 여태껏 낑낑 메고 왔던 것이다. ^^
베이스캠프를 출발하고 나서부턴 아이스폴과 크레바스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에베레스트 대원정에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작전이 바로 이 아이스 폴 공작이었을 것이다.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는 '얼음 지뢰 밭'에 루트를 만들어 놓는 작업 말이다. 고도가 높아지자 고산증세를 호소하는 대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헤쳐내고 원정대는 고도 6100m에 캠프1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캠프2(6450m), 캠프3(7500m), 캠프4(7986m), 마지막으로 캠프5(8500m)까지 차례차례 설치해나갔다. 캠프1에 진출한 날은 마침 8월15일 광복절 날이어서 대원들의 감회는 더욱 새로웠다. 대원들은 에베레스트를 뒷배경으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조촐하게 광복절 기념식을 가졌다. 김영도 대장은 울음이 나와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대원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3. 정상공격
"1차 공격조는 박상렬 부대장, 셀파 앙 푸르바, 2차 공격조는 고상돈과 한정수 대원이다." 모든 대원들이 내심 공격조가 되길 바랐지만 김영도 대장은 이들 네 사람을 정상 공격조로 정했다. 9월9일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새벽 6시 무렵. 박상렬 부대장과 셀파 앙 푸르바는 1차 공격을 위한 첫 발걸음을 떼었다. 대원들 모두가 1차 공격조로 박상렬 부대장이 뽑히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에게 거는 기대는 지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다. 두 사람의 무전 연락만 기다리던 대원들에게 전해진 것은 앙 푸르바의 힘없는 목소리였다. "산소가 바닥이 났고, 너무 지쳤다." 1차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도 정상을 불과 100여m 남겨둔 지점에서 말이다. 정상 공격 전날 박상렬 부대장이 캠프5가 있는 8500m 고지에서 산소를 마시지 않고 잔 것이 실패의 커다란 원인이었다. 실패도 실패지만 두 사람의 생명이 더 걱정이었다. 대원들은 모두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면서 두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이런 기도가 통했던 것인가? 다음 날 아침 박상렬과 앙 푸르바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정상공격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8700m 고지의 강추위를 견디면서 산소도 없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체 하룻밤을 자고도 살아 돌아온 것은 초인적인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차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우리나라 대원 두 사람이 2차 공격에 나서기로 했던 계획을 바꿔 고상돈과 셀파 펨바 노르부를 2차 공격조로 선발했다. D-day는 9월15일 새벽 5시30분이었다. 다행히도 여느 때와 달리 날씨가 쾌청했다. 두 사람은 밑에 남아 있는 대원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9시30분. 두 사람은 캠프5와 정상의 중간 지점인 '남봉'의 심설지대를 무사히 통과한 후 일단 무전으로 남봉 도착을 알렸고 그로부터 2시간 40분 후인 12시50분. 드디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고상돈 대원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발 밑에 밟히는 게 있었다. 65년 중공 등반대가 북방 루트로 올라와 정상에 묻고 갔다는 삼각대였다. 울컥 하고 울음이 나왔다. 비로소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여기는 정상이다. 더 올라갈 곳이 없다." 무전을 타고 전해진 이 소리를 들은 대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렸다. 고상돈 대원은 김영도 대장 부인이 주신 포켓성경과 국내 설악산 훈련 중 희생되었던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세 대원의 사진을 묻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보낸 한 시간. 그 감격이야 말로 산소가 부족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고통보다도 더 가슴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는 이렇게 8848m의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 열 여덟 명이 한걸음 한걸음씩 말이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고상돈 대원이었지만 열 여덟 사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않았다면 정상정복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산악인들이 왜 그토록 자주 산을 찾는지도 알 것 같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힘들고 고된 과정은 정상에 닿는 순간 말끔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1977년 9월15일. 12시50분. 한국의 등반역사를 새롭게 쓴 그때를 되새기면서 77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비롯한 산악인 모두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등산과 스포츠정신
'산악회' 하면 요즘은 지극히 정치적인 냄새가 풍겨서 싫다. 그리고 '등산' 하면 어딘지 모르게 약수터 생각이 나서 스포츠 란 인식이 되질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에베레스트 18인'의 승리는 체력의 승리, 테크닉의 승리, 전략의 승리, 그리고 정신력의 승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잠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얘기인데? 체력? 테크닉? 전략? 그리고 정신력? 이거 혹시 축구 한-일전 아냐? 그렇다. 가끔 TV 프로그램에서 '안나푸르바 등정기' 또는 '마나술루 어쩌고..' 하는 동행 취재기를 볼 때마다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저런 상상을 초월하는 '한계와의 싸움' 을 두고 어찌 등산을 단순한 '취미' 또는 '레져' 정도로 싸잡아서 도매급 취급을 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등산이 스포츠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스포츠인가? 우승컵이 걸려 있지 않아서? 1, 2, 3등이 결정지어지지 않아서? 심판이 없어서? 관중이 없어서?
'등산은 지구상 가장 순결한 형태의 스포츠이다.' 라고 주장하는 필자의 논리에 구멍이 있음을 짐작한다. 뭔가 좀 더 '큰 것'을 놓치고 있다는 예감이 든다. 모름지기, 산악인들 앞에서 이런 얘기 했다가는 '반 병신' 될 것도 기대한다. 그들만의 '우주' 안에서는 이미 스포츠가 '타락한 상업주의의 산물' 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본 없는 드라마', '마라톤은 인생'… 등의 비유가 용납되는 풍토라면 등산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나 평가가 그 동안 너무나도 궁색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명실공히 세계가 인정하는 고산들을 차례로 올라타는 우리 대한의 영혼들에게 우리는 그 동안 너무나도 미흡한 대접을 해 왔다. '주리메' 컵이 어떻고, '트리플 더블'이 어떻다 손 치더라도, 산악인들만큼 목숨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내던지고 산의 '혼'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는 '억대 연봉 올스타' 들이 몇 명이나 될까?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마라톤을 잠시 보자. 가슴이 곧 터질 것만 같이 숨이 목 끝까지 차 올라 온다고 한다. '됐어, 나 그만 뛸래..' 하는 생각이 2시간 내내 든다고 하는 스포츠가 바로 마라톤이다. 거리 상으로 본다면 에베레스트 등반은 마라톤의 1/4도 채 못 되는 거리이다. 하지만, 정상을 100m 앞 두고 3시간이 걸린다는 고산 등반에 대해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가슴이 터질듯한 고통? 마라톤 아니라 그 어떤 격렬한 스포츠라도 산소가 없는, 아니 의학적으로 사람이 걸어 다니면 죽는다고 믿었던 그 고지대에서의 활보만큼 가슴이 터진다는 말인가? 포기하고 싶은 충동? 잘 닦아 놓은 아스팔트 위에서 체내 수분 조절할 것 다 해가면서 뛰라는 데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하는데? 파리 새끼 미끄러질 듯하게 반질반질한 빙벽에 끈 하나로 동동 매달려서 발 디딜 고리 하나씩 박아가면서 올라가는 동안 만큼은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단지 마라톤을 예로 든 것 뿐이지만, 그 어떤 스포츠가 더 훌륭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하지만, 마라톤이 진정한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체력적인 한계에 도전이란 이유로 올림픽의 꽃이란 칭호를 받는다면, 고산 등반 역시 마라톤에 버금가는 체육으로서의 대우는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본다.
77년 에베레스트의 승 전보는 하루 아침에 그리고 한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분명 아니다. 이미 74년부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꿈꾸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던 '에베레스트 18인'의 훈련 일지를 잠시 보도록 하자. 언론에 소개되었던 고 고상돈 대원의 정상 공격 과정은 이들 18명이 체험했던 3년간의 '지옥훈련의 열매' 일 뿐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 알피니스트 ("Alpinist') 들이 보여주는 끝이 없어 보이는 발버둥 뒤엔 국가대표 운동 선수들 뺨치는 고된 훈련이 숨어 있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 뒤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아니 죽음이 따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74년에 접어들면서 '에베레스트 18인'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원정을 3년 앞두고 본격적으로 인원 선발 및 훈련 장소 섭외, 그리고 실전 연습..등이 이루어지면서 말이다. 에베레스트에 간다는 소문이 나돌자 전국의 '산 사나이'들이 쇄도했고, 본부에서는 1차 서류 심사를 통해 36명을 선발했다. 1차 훈련 장소는 지리산의 칠선 계곡. 한라산의 1,950m 보다는 높이에서 뒤 졌지만, 국내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계곡이 많기로 유명한 지리산의 혹독한 겨울을 선택했다. 지리산의 넓고 깊은 골짜기가 1,915m의 천왕봉으로 이어졌고, 곳곳의 폭포와 소는 히말라야의 설벽과 빙벽을 상상하게라도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2,000m 가 넘는 산 하나 없는 국내 실정을 본다면, 높이로써 에베레스트를 실감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남원을 지나 마천에 도착한 훈련대는 고산 등반 훈련의 핵심인 도보 행진에 들어간다. 베이스 캠프 예정지까지 식량과 장비를 등에 업고 무작정 걷는 훈련이 가장 중요한 훈련 중에 하나였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같이 걷는 또 다른 이유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모르는 사이의 대원들이 같이 걷고 고생하며 빨리 친숙해 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에베레스트의 규모에는 비할 수가 없지만, 나름대로 눈과 얼음을 파헤쳐 가며 아이젠과 피켈 등을 쓰는 기술을 습득해 나간다. 지리산 훈련 기간 중 훈련대가 체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실전 연습은 '추위와의 싸움' 이다. 에베레스트 고지대의 영하 40도 추위는 아닐지언정, '반 무장' 상태에서 부족한 침구와 텐트로 견뎌내야 하는 지리산의 겨울밤 역시 혹독하긴 마찬가지라고 믿었다. 이렇게 지리산 기슭에서 한 겨울을 보낸 훈련대 인원 중 10명은 탈락을 하게 되었다. 서서히 '에베레스트를 향한 옥석'이 구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해 겨울, 2차 훈련에는 설악산 공룡 능선에서 28명의 전사가 소집하게 된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엔 에베레스트와 흡사한 기후 조건을 찾아서 설악산에 입산 한다. 바람이 많이 불고 눈이 많은 그런 환경을 찾아서… 2차 훈련의 강도는 점점 더 높아 갔다. 설악의 공룡 능선은 최고 지점이 1,275m 이니, 표고는 지리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에베레스트의 '안개꽃' 인 아이스 폴 (Ice Fall) 을 그나마 국내에서 체험하기엔 안성맞춤이었고, 다행히 설악의 깊은 골짜기마다 100미터 이상 되는 아이스 폴이 발달되어 있었다. 훈련대는 1275봉을 중심으로 내외 설악의 급사면을 오르내리며 비박 훈련도 겸했고, 계곡의 빙폭 지대에 설치했던 길이 100m 자일이 밤새 얼어붙어서 이것을 회수하려면 피켈로 얼음을 깨야 하기도 했다. 아주 조금씩 '에베레스트의 맛'을 보았던 훈련대였다.
1976년 2월, 훈련대는 설악산에서 3차 훈련을 갖는다. 이 무렵 동해안 일대에는 폭설이 와서 설악산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흰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대원들은 환성을 올렸다. 눈의 고향 히말라야에 가야 하니 눈과 싸우고 눈과 친해져야 하는 것이 원정대의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전 훈련과도 같이 곳곳에 캠프를 치고 전진과 대기를 반복해 왔던 훈련 대원들 중 당시 국내 최고의 등반가로 꼽히던 최수남 대원을 포함, 송준송, 전재운 대원이 순식간에 벌어진 눈 사태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같이 움직이던 박훈규, 이기용, 김호진 대원은 다행히도 목숨을 건지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에베레스트 원정 시, 등반 대장으로 점쳐질 정도로 탁월한 등반 기술과 경험, 리더쉽을 발휘하던 최고의 '산 꾼' 최수남의 죽음은 훈련대 전원에게 '눈 사태'란 단어의 의미를 새삼스레 깨닫게 해 주었고, 아마도 3년 동안의 훈련 과정 중에서도 좌절과 재기의 개념을 가장 리얼 (Real) 하게 체험하게끔 해 주었다.
1977년 겨울… 33명의 사나이들의 마지막 훈련이 대관령 오대산에서 시작된다. 최수남을 대신 할 등반 대장 장문삼 과의 융화, 그리고 캠프 전진… 이란 두 가지 큰 목표를 염두에 두고 소집한 훈련이었지만, 그야말로 가장 강도 높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대관령에서부터 노인봉과 등대산을 돌아 소금강에 이르는 구간을 5박6일에 전진하는 코스였는데, 때 마침 폭설과 강 추위가 불어 닥쳐 대원들의 희비가 엇갈리게 했다. 대원 전원이 무거운 짐을 지고 깊은 눈을 각 구간마다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두 차례 왕복하는 지루하고 고된 훈련을 했다. 어떤 때에는 그러한 왕복을 끝내고 자기 원위치로 돌아가니 새벽 서너 시였으니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다시 전진을 계속해야 했다. 원정대의 훈련 과정 중 가장 힘 들고 고달픈 것이 바로 이 '반복'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국내에서 에베레스트 높이의 반만 되는 자연적 훈련 환경을 찾을 수 있었더라면, 그들의 훈련 일정이 이처럼 고되지는 않았겠지만, 뛰어난 지리적 조건이 있는 나라 등산가들 보다 2-3배나 더 힘드는 반복 훈련을 달게 받아 낸 우리 산악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에베레스트 공격에 치명적인 차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같이 뒹굴고 울고 웃었던 4차례의 동계 훈련을 끝낸 77년 3월 27일, 드디어 '에베레스트 18인'은 정식으로 발족을 맞게 된다. ]
* 이상은 '에베레스트 '77 우리가 오른 이야기' 중 일부 인용
'등산인', '모험가', '산악인', '알피니스트'… 이런 부류로 칭해지는 사람들이 우리 일반인들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아니, 우리 일반인들이 별 다른 훈련 없이 '에베레스트 대 원정' 과 같은 모험을 걸었을 때, 도대체 어떤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지 후추 독자들이 대충 감이라도 한번 잡아 보시라고 웃지 못할 일화를 소개한다.
77년 6월, '에베레스트 18인'이 히말라야의 뚜껑을 열기 위해서 태국 방콕에 경유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KBS 기자 소속이었던 김광남씨가 황급히 원정대의 태국 숙소 문을 두드렸다. 나도 같이 가야 한다며.. 비록 남산도 한번 올라보지 못했지만, '취재의 자유'를 운운하며 기어코 같이 가게 해 달라고 원정대를 졸랐다고 한다. 원정대 입장에서 볼 때, 엄연한 언론사인 한국일보에서 후원을 했고 그 만큼의 '취재 독점권'은 보장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제 아무리 기자라 하더라도 어디 집 앞 약수터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전혀 사전 준비가 되지 않았던 무 경험자의 참여를 쉽게 허락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 기자의 끈질긴 설득 작업에, 그리고 그의 '배짱'에 반해버린 원정대는 어렵사리 OK를 했다. 단, 인적 사고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일보 측에선 한바탕 난리를 쳤지만, 결국은 따라가게 되었던 김 기자였다.
원정 대원들의 등반 보다도 훨씬 더 활동 폭이 넓어야 하는 카메라 기자의 특성 상, 곧잘 따라오던 김 기자를 대견하게 생각했던 원정대였지만, 고도 5,400m의 베이스 캠프에 다 와서는 고산병 증세로 쓰러지는 김 기자를 보면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김 기자는 며칠의 휴식 후, 다시 벌떡 일어나서 고도 Camp 2 (6,500m) 지점까지 동행 취재를 강행했고, 대원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의 '그림을 따고 나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온 김 기자는 그 뒤로 '에베레스트의 맛'을 제대로 경험한다. 그날 밤부터 텐트 안에서 꼼작 하지 못하며 밤새도록 고통 속에 굴렀다고 한다. 증세? 적응 훈련이고 뭐고 아무 것도 해본적이 없던 일반인 김 기자는 그날 저녁 '탈장 현상' (항문으로 주먹만한 크기의 살덩어리가 튀어 나오는 현상)을 일으키며 전혀 거동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Camp 2에 있던 의료 대원에게 자문을 구해도 '1주일 안에 빨리 되돌려 보내지 않으면 죽는다.' 는 말만 할 뿐, 묘안이 없었다고 한다. 뜨거운 수건으로 통증 부위를 찜질해 주라는 말 외엔 말이다. 이상윤 대원의 며칠 밤을 지새는 '지극 정성'으로 김 기자의 '부위'는 원상 복귀하게 되었고,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서울로 돌아 온 김 기자는 갑작스럽게 치아가 완전히 다 빠져버리는 '괴 현상'을 일으켜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고 한다. 공식적인 '77 KEE 대원 18명은 아니었지만, '19번째 인물' 김광남 기자의 '에베레스트 등정기'는 악몽 같은 몇 주가 되었을 것은 뻔하다.
평소 등산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마다 이런 고통스러운 증세를 접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평상인들이 사전 지식과 적응 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도전해 보는 에베레스트가 초래하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비극적인 에피소드이다. 무엇이 훌륭한 스포츠 인을 만드는 것일까? 아무리 보아도, 다른 종목의 슈퍼스타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산악인 사이에서 찾지 못하는 것이 없다. 경쟁심? 아마도 상대와의 직접적인 경쟁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에베레스트가 상대라고 본다면, '너에게 먹힐 수 없다.' 란 정신만으로 그들의 경쟁 심리는 충분하다고 본다. 등산이 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사실 무의미한 토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과 좌절의 아픔을 사랑하는 우리 스포츠 팬들만큼이라도 등산인들의 이런 나타나지 않는 노고와 열정에 좀 더 큰 소리로 박수 쳐줘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어이, 셰르파 스펠링이 뭐냐?”
히말라야 등반과 관계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언제나 들려오는 말이 있다. 셰르파. 단순하게 산악 등반 안내인 정도로만 생각되어 지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 정말로, 단순하게 가이드나 짐꾼 역할만 하는 것인가 ? 그렇다면, 왜 꼭 한 명씩 끼어서 산악 등정자 옆에 이름을 내미는 것일까 ? 과연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길래… 그리고, 산에 오르지 않는 나머지 그들의 아내나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 우선, 필자가 궁금해서 살 수가 없었다. '에베레스트 18인'의 명.전을 작성하면서, 이 참에 셰르파의 모든 것을 해부해 본다. 앞으로 그 누가 셰르파에 대해 묻더라도 '후추인' 다운 답을 할 수 있도록, 아니 이 순간만큼은 독자들의 귀에 '셰르파 못' 이 박히도록…
1. 셰르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셰르파라는 고산족이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45년 전의 일이다. 1953년 존 헌트가 이끄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을 올랐다는 소식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등정자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오른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의 존재 또한 외부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최근까지 셰르파 족들이 히말라야 고산등반에서 해온 역할은 지대하다.
'셰르파' 란 단어는 티베트어로 동쪽을 뜻하는 '샤르(shar)' 와 사람을 뜻하는 '파(pa)' 의 합성어로 '동쪽에서 온 사람' 을 의미한다. 이는 셰르파족이 동부 티베트의 캄(kham) 지방에서 현재의 거주지로 옮겨왔음을 시사한다. 실제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몽고족에 속하며 언어, 풍습, 종교 등이 모두 티베트의 그것과 비슷하다.
셰르파족이 캄 지방을 떠나 지금의 거주지인 쿰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대략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이동 이유는 거의 알려진바 없지만 중국과 몽고족의 정치, 군사적 압력과 종교적인 이유 때문일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이들의 이주는 남체바잘(3,446m) 주변의 대단히 비옥한 계곡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쿰부지역을 떠나 솔루 지역에 정착을 시작했다. 솔루 지역은 솔루쿰부(Solu Kuhumbu)라고도 불리며 쿰부 지역보다 낮은 곳으로 옥수수, 밀, 보리 등의 재배에 적당했다. 쿰부와 솔루 지역으로 이주한 셰르파들은 산비탈에 계단식 밭을 일구어 감자, 보리, 밀, 옥수수, 메밀 등을 경작하였고 암소와 야크를 접종시켜 우유의 생산량도 늘렸다. 특히 티베트에서 들여온 감자는 셰르파들의 식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리하여 셰르파들의 경제력은 상승되어 갔고 인구도 늘어 갔다. 남는 농산물들은 낭파를 넘어 티베트로 팔리기도 했다.
1920년경 셰르파들은 인도 북부의 다아질링에 있는 차 농장에 일자리를 얻어 대규모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 이주한 셰르파 중에는 당시 티베트 지방으로 히말라야 원정을 하던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고용되어 히말라야 등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셰르파라는 단어가 히말라야 등반사에 등장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현재 쿰부 지역에는 약 5천 여 명의 셰르파가 살고 있다.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곳은 쿰중과 쿤데 지역으로 모두 950여 명이다. 최고의 상업 지역인 남체바잘에는 약 900여 명, 보테 강가에는 850여명, 근래에 이들은 팡보체와 포체에 각각 400여명이 살고 있다.
1949년 네팔정부 수립 이후 쿰부 지역으로 대규모 원정대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셰르파족은 서양문물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 학교, 진료소, 우체국, 항공기, 무선 전신 등이 들어와 셰르파들의 생활 깊숙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셰르파 족의 생활 수준은 다른 고산족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인데 이것은 티베트와의 교역과 자립영농, 그리 고 원정이나 트레킹에서 올린 수입 때문이다. 하지만 월등히 높다고 해도, 그들이 원정에서 올리는 수입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정상급의 셰르파가 등반대를 정상까지 안내해 주는 대가는 고작 1, 400 달러(160만원 정도).. 정상 공격까지 보통 2개월이 걸리고, 또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많은 액수는 아니다. 게다가, 등반 시즌이 짧은 만큼 저 수입도 1년에 단 한 차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족은 늘 불안하다.험악한 산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날씨.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셰르파의 부인들은 남편이 길을 떠날 때면 언제나 히말라야 산신에게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원한다.
- 셰르파들의 삶의 방식.
전통적으로 셰르파 사회를 통제하는 힘은 혈통으로 조직된 공동사회 의식이다. 이들 사이에는 명백하지는 않지만 묵인된 계급체계가 있다. 공식적인 셰르파 모임에서는 계급에 따라 앉는 순서가 정해진다. 어떤 개인에 의해 질서파괴나 범법행위 등은 재판보다는 마을에서 추방함으로써 굴욕과 치욕을 주는 것으로 주어진다. 셰르파들은 영혼 재래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때 고통 받는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해 재판이나 처형당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한 남자의 죽음은 가족에게 커다란 슬픔과 함께 경제적인 손실을 가져다 주는 게 보통이다. 왜냐하면 의식주를 해결 할 노동력을 잃기 때문이다. 오늘날 셰르파사회는 미혼 청년보다 과부나 처녀의 수가 훨씬 많은데 그 이유는 고된 노동으로 인한 남자들의 조기사망과 근세에 들어와 히말라야 등반 중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셰르파족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죽은 자의 시신은 마을 밖에서 화장한다. 화장할 장소는 그가 태어날 때의 천체 위치에 따라 동서남북 중에서 결정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의 영혼이 천광(天光)을 향해 여행하는 49일간 제를 지낸다. 이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제사 법이다. 언젠가 본 TV 프로에서 등반 도중 저 세상 사람이 된 한 셰르파의 화장 장면을 보았다.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멋지게 험하디 험한 빙벽을 타고 오를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 '죽음'을 숙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셰르파들은 어떻게 고산지대에서 잘 견디는가 ?
Case Western Reserve대학 교수이자 IMAX/IWERKS film에서 에베레스트에 관한 영화를 제작한 MacGillivray Freeman Films의 인류학 관련 자문을 맡았던 Cynthia Beall 박사에 의하면, 셰르파는 높은 고도에서 잘 견딜 수 있는 유전적 요인을 타고 났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에베레스트 등반가들은 산을 오르기 위한 엄청난 육체적인 노동 뿐만 아니라, 극심하게 체온도 저하된다. 이런 스트레스는, 예를 들어, 우리가 춥다고 느낄 때 옷 하나 더 입는 정도로 완화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셰르파들은 다르다. 어떻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지대에서 잘 버티는지는, 인류학자와 생리학자 들의 숙제이지만, 아직도 정답은 없다. 다만, 유전적인 요인으로 그들의 혈액이 더 많은 산소를 나르고, 또한 다른 요인들도 작용할 것이라는 추측 뿐이다. " 고 한다.
2. 셰르파, 그들이 명성을 얻게 된 계기
"만약, 당신이 외향적인 성격이나 동료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절대로 당신은 훌륭한 등산가가 될 수 없다. 친구란, 정상 정복만큼 중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팀웍이다. 팀웍이야 말로, 등반의 성공을 좌우하는 유일한 요소이다. 이기심은 쓸 데 없이 사람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들자면 노력이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산 위에서나 다른 어떤 곳에서라도 그가 노력한 것 이상을 얻어내지는 못하는 법이다." - Tenzing Norgay,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함께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셰르파.
셰르파들이 비할 수 없는 도전정신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등산이 이루어진 초기부터, 고 고도에서 잘 적응하는 그들의 능력은 유명했다. 현재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등산할 때 셰르파를 제일 먼저 고용하게 된 사람은 영국 애버딘의 정신과 의사인 A. M. Kellas 박사였다고 한다. 20세기 초에, 그는 런던에 있는 Middlesex 병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일 년에 몇 달 정도는 그를 보조해주는 셰르파들과 함께, 히말라야의 골짜기와 길을 탐사했다고 한다.
General Bruce 또한 셰르파의 힘을 빌린 사람 중 하나였다. 1922년과 24년에 행해진, 에베레스트 답사에서 그는 인도의 다아질링에 있는 셰르파들을 짐꾼으로 고용하였다. 이 셰르파들을 고용한 성과가 너무 좋아서, 곧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모든 사람들은 셰르파를 고용하여 도움을 받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셰르파들 또한 명부 등록의 개념을 도입, 조직화하였고, 아직도 최정예 셰르파들의 모임으로 알려진 "Tigers"가 탄생했다.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셰르파들이 서구인들의 등반을 돕기 위해 다아질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Tenzing Norgay역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에베레스트 탐험에 선택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1933년, 17살의 나이에 인디아로 왔다. 하지만, 그 해에는 탐험대에 발탁되지 못하였고 1935년이 되어서야 Eric Shipton 이 이끄는 탐험대에 선발되어 에베레스트 지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일원이 되었다.
그 후, 다아질링에 머물며 수 차례 에베레스트 탐험에 참가했다가, 1953년 유명한 에드문드 힐러리와 함께 정상 정복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에서야 네팔이 외부인에게 문호를 개방해서, 셰르파 들은 탐험대를 찾으러 외부로 나갈 필요 없이 자기들 동네에서 고용된 후 카트만두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에베레스트 첫 등정이후, 지구상의 가장 높은 지점에 인간의 발걸음이 벌써 닿았기 때문에 관심이 줄어들기는 커녕, 다른 등반가, 트랙커, 관광객 들이 Solu Khumbu로 홍수처럼 몰려들었고, 그 결과에 따라 셰르파들의 경제 생활과 삶의 방식 그 자체가 바뀌게 되었다. 가장 높은 곳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따라 등반 기술이 발전하였고, 셰르파들이 사는 지역은 에베레스트로 가는 관문이 되었고, 더욱 더 많은 등반가 들이 몰려들었다…그리고, 셰르파들은 그들의 등반을 돕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산과 더불어 살며, 등반가들을 도운 셰르파들 중에는 앙 리타(51), 아파(39) 같이, 에베레스트를 10번, 8번 씩이나 등정한 유명한 셰르파도 있다…그들이 이렇게 목숨을 걸고 등반을 도와주고, 성공할 때 받는 대가는 ? 한 번에 1,500불 가량이라고 한다(물론, 네팔 현지에서 바라보는 돈의 가치는 우리와는 무척 다를 것이다). 두 달 정도 등반이 이어지고, 등반 시즌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유능한 셰르파라도 산에 오를 기회는 1년에 단 한 번 뿐이다.
3. 셰르파, 역사는 그들을 외면했지만, 그들은 에베레스트의 진정한 주인일지도 모른다.
셰르파들은 에베레스트 정복에 있어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산지대 등반이 시작될 무렵부터, 셰르파들은 종종,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들의 목숨을 잃곤 했다. 1922년, 7명의 셰르파 짐꾼들이 에베레스트의 북쪽 골짜기에 묻혔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탐사활동이 계속된 지난 70년 동안, 43명의 셰르파들이 죽었다. 그리고, 작년만 해도,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심각하게 부상을 입은 3명 중 2명이 셰르파였던 것이다.
왜냐고 ? 그들의 역할이 루트를 고정하고, 보급물자를 나르는 것을 맡고 있기 때문에, 같이 산에 오르며 그들을 고용한 등반가보다 극도로 높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PGA 또는 LPGA 골프 대회에서 우리 선수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캐디 (Caddie), 과연 골프 스타에게 캐디가 주는 의미와 산악인들에게 셰르파가 주는 의미… 흥미로운 비교가 되겠지만, 캐디가 죽었다 깨어나도 줄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셰르파들은 '운명'으로 삼는다. 정상을 향해 내던질 수 있는 그들의 고결한 '목숨' 말이다.
역사는, 비록 그들의 업적을 단순하게 정복자의 옆에 달린 주석 정도로만 기록하지만, 셰르파의 노력과 기여가 없었다면, 에베레스트, 아니 히말라야 탐험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셰르파의 역할은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다.전반적인 준비상황은 물론 등정루트 선정에서부터 정상 공격시간의 최종 설정, 최종 공격자 추천에까지 모든 것을 조언한다.우리 '77 KEE 의 박상렬과 고상돈 대원을 추천했던 것도 셰르파들이었다. 훌륭한 셰르파를 만나면 등정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S.H.E.R.P.A… 모든 산악인들 가슴 속에 가장 애틋하게 다가오는 스펠링일 것이다. 비록, 등반에 성공한 등반가들만 기록과 우리들의 기억에 남지만, 셰르파의 가치는 역사에 남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폄하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한국 등반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수 없이 많은 셰르파의 이름들도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미약하나마 셰르파에 대한 이 글을 바치면서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 이 글은, 남선우 저, '역동의 히말라야' 를 참고로 했습니다.)
18인의 애국인 - Now and Then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 만남이 20년 이상 이어진다는 것.
전자의 경우, 누구라도 매일같이 겪는 일이다. 버스를 타거나,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가거나.. 우리는 매일 매일 같거나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며 하루의 생활을 보내게 된다.
후자의 경우… 과연 우리 중 몇 사람이나 저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까 ? 쉽게,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행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20년 !! 늘 듣는 표현으로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만큼의 시간이다.
이 아래, 그들의 삶 중 가장 중요하고 기뻤던 4개월을 동고동락한 18명의 이름이 있다. 비록, 그들 중 몇 명은 세상을 하직했고, 몇 명은 다른 하늘을 보고 살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만남은 적어도 1, 2달에 한 번 꼴로 이루어지며,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의 만남을 20년도 넘게 지난 아직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것일까 ?
197709151250…. 그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한 그들을 이 자리에 모신다. 그리고, 그 만남을 이어지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Then |
참가자 |
Now |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대한 산악연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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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산악관련 서적 저술, 번역, 출강. |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근무. 71년 로체 샬 원정, 76년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2차 정찰대장, 산동회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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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기술단 대표. |
영남대학교 섬유공학과 졸.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근무. 71년 로체 샬 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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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가정대 직원. |
춘천 고등학교 졸. 강원도 교육위원회 근무. 총무 담당. 일반 대원 중 가장 연장자로, 성격이 부드럽고 후배들을 잘 챙겨주던 산악인. 원정에서는 C1을 지키며, 항상 아침마다 무전으로 동료들의 안부를 물어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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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로 이민. |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 수료. 전매청 청주연초제조창 근무. 대한산악연맹 충북도 연맹 이사. 75년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1차 정찰대. 총무 담당.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 당수 3단 등으로 다져진 체력과 기술이 일류급. 모두의 노력을 한 몸에 담아, 2차 공격을 성공시킨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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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맥킨리 봉 등정 후 하산 도중 사고로 사망. |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졸. 한국 등산학교 강사, 한국 하켄클럽 소속. 75년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1차 정찰대 식량 담당. 클라이밍의 전문가이고, 같은 학교를 졸업한 한정수와 단짝. 아이스 폴 루트 공작시, 모두가 사다리의 안전을 믿지 못해 주저할 때, 앞으로 나가 시범을 보일 만큼의 용기가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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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 근무당시, 말레이시아로 출국하여, 이민. |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졸. 극동건설 근무. 한국 설령산악회 소속. 식량 담당. 식품에 대해 남다른 지식을 갖추고 있어서 매일 쿡에게 고추장 된장국의 조리법, 김 굽는 법 등을 전수하고 때로는 직접 요리까지 선보였다. ‘아리랑’을 셰르파에 가르쳐 준 장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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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건설 토목이사. |
충남대학교 건축과 2년 수료. 서울 상사 근무. 대한 산악연맹 충남도 연맹 이사. 대전 자일클럽 소속. 식량 담당. 온순한 성격으로, 에베레스트 원정이 첫 외국 나들이. 캐러밴 2진을 맡았는데, 산중에서 포터 도망 사태 등이 벌어져 큰 어려움을 겪으며 악전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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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경산업 부장(수자원 개발사업 감리업체). |
동국대학교 철학과 졸. 석산무역 근무. 동국산악회 소속. 식량 담당.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빙벽의 하나인 설악산의 토왕성 폭포(상단 150m, 하단 150m) 하단 세계 초등(1976)의 경력이 말해주는 등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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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로 이민. |
동아대학교 정외과 3년 수료. 아주관광 근무. 식량 담당. 산에서 만드는 음식의 달인. 부산지역 대표로 참가했는데, 등반 전 모든 지옥훈련에 참가하는 열성이 인정되어 대표로 발탁. 등반 대원 중 가장 나이가 어려서, 원정 시에는 고 고도에 적응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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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으로 사망. |
한양대학교 화공학과 졸. 한국화재보험협회 근무. 76년 일본 북알프스 등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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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재엔지니어링 이사. |
성균관대학교 금속공학과 졸. 동기실업 근무. 한국 하켄클럽 소속. 75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1차 정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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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으로 사망. |
명지대학 전기공학과 졸. 명지대학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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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철강 대표. |
동아대학교 농학과 2년 수료. 71년 일본 북알프스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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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전문지 “사람과 산” 부산지부장 |
한국외국어대학 무역학과 졸. 대한전선 근무. 75년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1차 정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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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산악연맹 전무이사 |
카톨릭의과대학 졸. 비뇨기과 전문의(육군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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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성빈센트 병원 진료부장 |
한국일보 사진부장. 한국 어썬트 클럽 소속. 71년 로체샬 원정. 75년 ‘77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1차 정찰대. 76 한국 마나슬루 3차 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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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서 퇴사 후 휴직. |
한국일보사 체육부 차장 보도담당. 본사와의 연락을 위해서 파견된 보도원이지만, 1차 공격 실패와 박상렬 대원의 생사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사에 연락을 하지 않을 만큼(국내의 가족 등을 고려) 사려 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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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계열 자회사 사장으로 재직. |
18명.. 막말로, 이들 중 누구 하나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어도, 197709151250의 영광의 순간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정상에 올라선 사람은 고상돈 대원 한 사람이지만, 그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도록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그들 18명이 조금만 어긋났어도…
그렇게 "77 KEE의 18명"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남김없이 쏟아 부었고, 그 결과가 인생에서 잊지 못할 '성공'으로 나타났기에 그들의 경험이 더욱 값진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4개월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TRIBUTE: 산 사나이 고상돈
고상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최초의 한국인'. 그렇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과연 고상돈 혼자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 반드시 고상돈 이었기에, 에베레스트 정복이 가능했는가? 그건 아니다. 1977년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18인들 중의 한 사람에 그는 포함될 뿐이다. 나머지 17명이 없었더라면 에베레스트도 고상돈도 없었을 것이라고 후추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왜 후추는 고상돈을 주목하나?...
고상돈의 삶은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 보다도 더 애절하고 기구했다. 그의 삶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산에서 태어나고 산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산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도 못했으며, 부인의 몸 속에 자신의 핏덩이를 남겨둔 채, 그는 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왜 그는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을까?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그가, 에베레스트보다 낮은 매킨리 봉을 반드시 등반해야 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꼭 그가 등반을 해야만 했는지... 젊은 나이에 그야말로 갑자기 요절해야 했던 고상돈의 기구했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이제는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 없는 고상돈의 이름을 특별히 헌정 한다. 나머지 에베레스트 17인의 삶이 고상돈의 그것보다 덜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산을 사모하고 산을 지배하다가 유일하게 산에 목숨까지 바쳐버린 고상돈의 기구한 운명을 애도하기 위해 이 글을 바친다.
- 청년 고상돈
고상돈이 태어난 곳은 제주도 한라산 기슭이었다. 고상돈이 출생한 곳, 죽은 곳은 모두 '산'이었던 것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쭉 살던 고상돈은 그의 나이 12살 때, 친척이 있는 청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청주로 와서, 고상돈은 산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는다. 청주중학교 2학년 시절, 알던 선배의 권유로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기 시작한 고상돈은, 우암산 캠핑을 가서 산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고, 청주상고에 진학하면서부터 등산과 무전여행에 거의 '미치게 된다'. 가족들에게 어디 간다고 말도 하지 않고, 며칠을 산에 갔다가 돌아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가 산에 얼마나 미쳐있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를 살펴보자. 1965년 8월. 고상돈의 아버지는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위독한 상태에서도 그의 산행은 계속 이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고상돈은 당신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설마 돌아가시기야 하겠는가?' 싶어 산으로 떠났었다. 그날 오후... 아버지는 고상돈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눈을 감았다. 산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도 하지 못하며, 졸지에 '불효자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상돈은 결국 장례식 다음날에야 배낭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학창 시절을 마친 고상돈은 청주 연초제조창에 들어가서 직장생활을 한다. 입사하자 마자, 그는 산악회를 만들어 전국의 명산들을 두루 찾았다. 하지만, 공무원의 봉급만으로 등산에 필요한 경비를 대기엔 빠듯하다고 느낀 고상돈은 청주 시내에 '설 산장' 이란 작은 등산장비 및 스포츠 용품점을 부업으로 열어 부족한 등산경비를 충당했다. 이곳은 또 전국의 '산 쟁이' 들의 연락처 또는 '아지트' 역할도 했었다.
이렇게 산을 좋아하던 고상돈은 마침내 1974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등정계획에 참여를 하게 되고, 약 3년 동안을 지리산과 오대산 등을 전전하며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한 훈련을 거치게 된다.
- 민족 스타 고상돈
에베레스트를 등반 후, 사람들은 고상돈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상돈은,시쳇말로, 오방나게 바빠졌다. 고상돈은 더 이상 '산악인 고상돈'이 아닌, '한국이 낳은 자랑스런 슈퍼스타, 슈퍼맨 고상돈'이 되어 있었다. 언론들의 취재 요청들이 줄을 잇는 것은 물론이고, 에베레스트 등반인의 자격으로 네팔에서 열리는 각종 기념식들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재미동포들에게도 인사를 하기 위해 미국 등 해외를 방문했고, 전국을 돌면서 각종 순회 전시회, 강연들도 해야 했다. 오죽하면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에까지 보도가 됐을까?
그야말로 스타가 탄생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고상돈 혼자서 에베레스트를 단독 등반한 것도, 아닌데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은 지나치리 만큼 고상돈 개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고상돈은 등반 성공 이후,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갔다. 사양하고 싶었다고 나중에 실토할 정도로 버거운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 만남 그리고 이별
에베레스트 등정 이전인 1976년 4월, 친구를 통해 지금의 미망인 이희수씨를 소개받게 된다. 이희수씨는 활발하고 쾌활한 고상돈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사랑을 키워가던 둘은 한창 바쁘던 시절이었던 1978년 4월 15일, 결혼식을 올린다. 한국 등반대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뒤,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년 뒤, 고상돈은 매킨리 등정에 나서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 1978년 5월 30일, 6,195m 의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정복한 고상돈과 대원 2명 (이일교, 박훈규) 은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로프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하산하다가 실족, 밑으로 약 820m 를 추락 한다. 미국 원정대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급히 우리 원정대를 찾았지만, 이미 그때 고상돈과 이일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유일한 생존자 박훈규는 손 과 다리를 잃었지만 기적처럼 살아났다. '웨스턴 리브' 라는 최대 난코스를 선택해서 정상 공격에 성공한 고상돈, 사실 그는 등반 대장의 이름으로 매킨리 등반을 지휘하며 베이스 캠프에 있을 작정으로 떠났지만, 매킨리의 '젖가슴'을 보고 난 후에는 산악인들만이 느끼는 '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정상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그저 통곡할 수 밖에 없었던 이희수씨는 임신 3개월 상태었다. 고상돈은 불행하게도, 아내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매킨리 등정을 떠났다. 이희수씨는 남편에게 일부러 임신 사실을 감췄단다. 남편이 등정을 마치고 개선을 하면 '기쁜 선물'을 주려고 일부러 알리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이씨는, 남편이 등정에 나서고 3일 뒤에, 출발인사를 드리려고 자신을 찾아온 이일교 대원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준다. '돌아 오시면 좋은 선물이 있을 거예요.' 라고 적은 쪽지를... 운명의 장난이란 말도 적절치 않게 들려진다. 산 속에 묻혀있는 수 많은 영혼들의 '질투' 라기엔 너무나도 불공평하다는 생각 뿐이다. 사고 당시, 고상돈의 나이 32세. 이희수씨 나이 30세. 결혼한지 막 1년이 지난 젊은 신혼부부는 이처럼 가혹한 이별을 맞게 된다.
- 베일 속의 죽음
이 처럼 처절했던 고상돈의 죽음 뒤엔 몇 가지 의문점이 떠돌고 있다. 어떤 경위로 그는 매킨리의 무덤을 그의 종착역으로 택하게 되었는지? 당시 상황을 잠시 살펴 본다.
에베레스트 등반에 전사적인 지원을 물심양면 아끼지 않았던 한국일보사는 한국탐험대가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을 하자 너무나도 기뻐했음은 당연하다. 그들로서는 그런 분위기 유지와 함께 '후속탄'이 필요했을 것이고, 모름지기 후속카드로 준비한 것이 '북미대륙 최고봉 맥킨리 등정'이었을 것이다. 한국일보사는 이 맥킨리 등정 계획을 산악인 사이에 비밀로 붙이고 실행에 옮겼다. 게다가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고상돈이, 아니 '한국일보 생산품'으로 포장되어 가던 고상돈이 그 매킨리봉마저 정복한다면 그들 입장에선 더 없는 홍보 효과가 보장되지 않았을까? 얼마나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에베레스트 준비 과정만 7년이라고 봤을 때, 불과 1년 정도의 준비 과정 후에 이루어진 '매킨리 도전'은 아무리 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고상돈이 단시일에 맥킨리 정상 공격에 나서야만 했고 서둘렀던 이유는 또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처녀봉이었던 매킨리봉은 우리나라의 여러 산악회에서 욕심을 내고 있었다. 한국일보의 지원을 받은 고상돈 일행이 정상공격을 하고 있던 당시, 고상돈 일행의 뒤편에는 고려대 산악회와 고령 산악회라는 두팀이 서로 정상에 먼저 올라 가려고 경쟁을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한데 힘을 합치고 뭉쳐도 성공할 수 있을까 말까한 현실에서 서로 자기팀이 먼저 올라가야 한다며 경쟁을 하고 있었으니... 한마디로 적을 앞에 두고 자중지란이 일어난 꼴이 아니었겠느냔 말이다. 등반대에게 '경쟁' 이란 마라톤 대회에서 보이는 리드 교환의 개념은 아니다. 경쟁을 한다손 치더라도 몇 백 미터의 경쟁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요소는 분명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내 뒤엔 어느 팀이 따라오고 있다.' '나를 지원해준 한국일보 등정대가 국내 최초로 태극기를 꼽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무리수를 띄워가며 고상돈은 하루라도 더 빨리 정상 공격을 한 것은 아닌가?? 고인이 된 사람은 말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을 바탕으로 베일 속에 쌓여진 그의 죽음에 대해서 후추 독자들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남기고 간 자리
고상돈이 남긴 유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서 후추는 백방으로 유가족들과 접촉을 시도해봤다. 정말 정말 어렵사리, 후추는 고상돈의 매형되시는 분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다음은 매형분과의 전화 인터뷰 내용의 요약이다.
현재 고상돈씨 유가족들은 극도로 민감한 상태에서, 언론들과 일체의 접촉을 거부하고 있단다. 그 이유는 매킨리 등정 때 유일한 생존자였던, 박훈규씨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유가족들은 박훈규씨에게 아주 큰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매킨리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박훈규씨는, 몇년 전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단다. "사실 나는 그때 사고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 자신들이 잘못을 해서 죽은 것이다"라고.
이 인터뷰 내용을 접한 유가족들은 당연히 분노에 떨게 되었다고 한다. 사고 당시,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전해 들은 사고의 진상과는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사고 당시, 언론에는 박훈규씨가 먼저 발을 헛디뎌 사고가 난 것으로 보도가 됐었고, 인터뷰 전까지만 해도 그것이 사고의 직접적 원인으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는 상태였다.) 박훈규씨의 이 인터뷰가 나간 후, 당연히 언론들이 고상돈 유가족들을 가만히 내뒀을 리가 없었다. 정확한 진상을 요구하는 문의가 유가족들에게 쇄도한 것은 물론, 갑자기 죽은 두 사람이 사고의 원인자들로 둔갑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유가족들은, 언론들의 취재는 무조건 거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로 한이 맺혀있는지, 매형분 말씀을 들으면, 유가족들 현재 분위기가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그 미스터 박(박훈규씨를 지칭)이 이곳에 와서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유가족들의 한은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겁니다."
무엇이 그의 유가족들을 이렇게 까지 만들었는지... 아무쪼록 후추는 유가족들이 고상돈씨의 유가족들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고, 언제나 밝게 얘기할 수 있는 여건이 빨리 오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고상돈의 얼을 찾아… 후추 제주 취재기
지난번 취재와는 다른 느낌의 제주가 나에게 다가왔다. 봄이 온 것일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제주는, 무엇인가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맞다… 자신도 이땅의 일부라는 것을… 바둑판처럼 딱딱하게 널려있는 논, 밭들이 아닌 연초 달력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현대풍 민화의 배경들… 이제는 제주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흰 눈이 아직 가시지 않은 웅장한 봉우리와 함께… 후추 명예의 전당 '에베레스트 18인' 편에, 지독하게도 산을 사랑하다가 결국 산에서 쓰러진 고 고상돈 대원의 Special 섹션을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진 후, 후추는 고 대원의 '현재'를 찾아가기로 했다. 1977년, 대한민국에서 '고상돈'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 취급을 받던 시절을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지 23년 만에… 지금의 고상돈의 모습, 아니 그의 '얼'을 찾기 위해 제주로 향했다.
3월 9일 오후 12시 40분 제주 공항
제주공항에서 뵙기로 한 후추 열렬 독자 newday 님이 계신가 한번 슬쩍 훑어 보았다. '아직 도착 전이신가 보다.' 전화를 걸었다.
"저 후추예요."
"아! 벌써 왔어요? 1분만 기다려요."
고맙기 그지 없는 분이시다. 사실 제주에 아무 연고도 없는 후추가 이번 제주취재를 쉽게 결정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인 newday님이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든든했다. 두 번째 뵌 newday님은 한층 밝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셨다. 우선 식사를 간단하게 하면서 예전에 미처 못 나눴던 이야기를 잠깐하고, 곧바로 오늘의 목적달성을 위한 잠깐의 토의를 했다. "아! 제주도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과 달라서 쉽게 협조 해줄 겁니다."
말씀하나로도 든든 ^^.
- 제주 자연사 박물관
이곳은 고 고상돈 대원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이번 취재의 어려운 점은 소장되어있긴 하지만 전시되어 있지는 않은 유품의 촬영가능 여부였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사람 좋게 생기신 분(김완병님)께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시고는 보관소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뵌 정세호 과장님. (감사!) '안녕하십니까! 저는 후추에서 온…' 이제는 후추소개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회사소개 및 명예의 전당 취지를 말씀 드렸더니 '당연히 하셔야지요! 우리 자료들을 보여 드릴께요.' 하시면서 소장하고 계신 자료들을 보여주셨다. 유품을 꺼내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분이 직접 찍으신 유품 사진들, 77년 에베레스트 원정 당시 찍었던 원정대 사진들, 사진첩 등등…
"지금 한창 자료수집 중인데 조금만 늦게 오시지… 우선 훈장은 월요일 오후에 오시면 받으실 수 있어요. 그것도 받아가시고, 자료들 더 있으니까 기사 올라간 후에라도 더 가져가셔서 계속 추가해주세요."
이런, 부담 아닌 부담이군.^^ 이건 협조의 차원을 넘어섰다. 부탁을 하신다. 아!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협조적으로 만든 것인가? 고 대원을 포함한 77KEE에 대한 올바른 평가 및 인정에 대해 그 동안 얼마나 목이 말라 있었길래? 원정대가 출발하고 이미 23년째… 아직 무엇이 남아있길래…
정과장님과 김완병님의 도움으로 후추는 이번 취재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방대한 자료를 얻었다. 아직 두 번째 장소로는 가기 전, 다시 한번 제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유품들이 참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니예요… 아니… 아직 부족한 것들이 많고요… 그리고 사실은 저 처음엔 많이 혼났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에 이러한 것들이 있는 것부터 해서, 원래는 제가 책임자가 아니었거든요. 기념관이 없으니… 도지사가 건의를 해서 우선 자연사 박물관에서 맡아달라. 처음 보관소에 있기 전엔 전시관 안에 있었어요. 그곳에서 한 달에 한번 소독하고 하긴 했지만 보관 환경이 좋진 못했죠. 자료도 얼마 없고… 그래서 많이 혼났어요. 유족들과 산악인들한테서요. 그래서 제가 맘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이왕 할거 열심히 해보자 했죠. 그래서 여기저기서 사진이랑 다 사오고, 미망인께 유품도 좀 달라고 부탁하고... 해서 지금 이정도예요. 더 모을겁니다. 처음엔 맨날 야단치시던 분들도 이젠 오셔서 좋다고 하시고… 유족들하고도 이젠 사이도 좋아요. ^^ 이렇게 모아놓았다가 기념관이라도 하나 세운다면 그 쪽에 다 줘야지요. 그러면 그 쪽은 할 일도 없어요.^^"
참 이런 분들도 있구나 싶었다. 많은 분들에게 고상돈, 그리고 '에베레스트'는 이제 가물가물 잊혀져 가는 기억인데…
"전시는 언제언제 합니까?"
"이 곳 특성상 전시는 기념일일 때 해요. 97년엔 등정 20주년, 99년엔 추모 20주년 기념으로 했어요. 아! 이 사진들 보세요. 77년도 당시 등정하셨던 분들인데 지금도 해마다 찾아오세요. 그때 이후로 이분들 항상 모이셔서 해마다 오세요. 그래서 이곳 한번 들리시고 한라산 가시고 그러세요."
가슴에 뭔가 뭉클한다. 산에 올라 바람 쐬고, 약수 마시고 내려오는 것만이 등산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필자에게 원정등반이란 것이 무엇인가 희미하게 다가오는 듯 했다.
"저희가 이제 한라산으로 가려고 합니다. 1100고지에 있다고 하는데, 1100고지 길가에 있습니까? 아니면 거기서 더 올라가야 하는 겁니까?"
"아 여기 제가 다 사진 찍어 놓았는데 안가셔도 되요. 허허. 1100고지 길가에 있습니다. 가서 한번 보셔도 되고."
newday님도 감동을 받으셨나 보다. 한라산 1100고지엔 고 고상돈 대원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인 곳이다.
"그럼 말입니다. 이 자료들을 저희가 소중하게 쓰고 다음주 주말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하하 정말 잘 써주세요. 잊혀져서는 안 될 사건입니다. 정말 잘 써주세요. 글이 안 좋으면 뺏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박물관을 나서는 우리는 그들의 크나큰 호의에 감사했다. 그리고는 한라산 1100고지로 향했다.
"newday님, 그런데 오늘 일 안하세요?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죠?"
"하하 다 얘기하고 왔어요. 원래 이번에 오면… 그런데 쩝,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국회 모라더라 하여간 위원회인가 하는 데서 시찰온대요. 총선 의식했겠지. 그래 가지고설랑 뭐야, 원랜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만 시찰하는 건데,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서 컨벤션 센터도 보러 온대잖아요. 죽겠대. 약속 잡아놓았더니… 그래서 그냥 나 몰라라 했어요. 밑에 사람한테… 그리고 서귀포에도 우리 회사 직원이 나가있어요. 그 사람한테 최대한 막아라. 그리고 뚫리면 컨벤션 센터에 나가있는 직원한테 알아서 대처하라고 했어요. 하하"
이런 걸 '사명감' 이라고 하나?? 명예의 전당 취재를 해 오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 사명감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후추가 뭐 하는 집단인지 등을 돌리던 분들도, 후추의 본 취지를 알고 나면 친 가족보다도 더 자상하게 도와주시니…
- 한라산 1100고지.
강렬한 햇빛아래 당당히 추모비는 서있었다.
Peanut 12: "묵념을 해야겠지요?"
Newday: "저는 이미 올라오면서 했습니다"
장엄했다. 옆 휴게소에선 관광객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장엄했다. newday님과 필자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냥 그 앞에 서서 비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 엄숙한 순간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평화로운 곳이다. 이곳은 대한민국 최고도의 국도 1100고지. 산이 좋아 산에 살고, 산이 좋아 산에 묻혔다는 고인의 추모비가 서있기엔 참으로 적합하지 않나 싶다. 너머로 보이는 눈 쌓인 봉우리. 강렬한 햇빛으로 두 눈 제대로 뜨고 보기엔 어려운 추모비. 어찌 감히 고개 뻣뻣이 들고 보리오. 사뭇 숙연해진다.
"내려가시죠."
"그럽시다."
"좋은 곳이군요."
"좋은 곳에 있네요. 그런데 난 왜 한번도 못 봤는지… 제주에 살면서…"
"…"
취재를 말없이 끝낸 필자는 후추 제주 게릴라 newday 님의 손에 끌려 (?) 그 분의 댁으로 갔다. 돈 없고 빽 없는 후추 취재진을 위해서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제주도 생선국을 차려주시는 사모님과 newday님… 나는 이곳에서 제주인의 정을 또 한번 느꼈다.
newday님 과의 이별은 그래도 지난번 보다는 쉬웠다. 그냥 공항에서… 그냥 간단히 헤어졌다. 하지만 그분의 모습에서 후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아니 내가 고맙지. 내가 많은 것을 배웠어요."
19시 50분 제주공항 이륙.
20시 55분 서울 도착으로 이번 취재는 마쳤다.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자료는 제대로 된 것을 찾아왔는지… 제대로 된 장소에 가서 사진은 찍은 것인지… newday님의 안내에 경솔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동안 방치해둔 지금의 고상돈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제주로 향했지만, 수십장의 사진 자료 그리고 추모비 보다도 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 온다. 고상돈, 그리고 '에베레스트 18'인에 대한 '느낌'을 직접 체험하고 돌아 온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우리 주방장께서 필자를 제주로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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