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의 대일담판

2009. 8. 16. 23:03역사/독도

 

 

안용복의 대일담판

 

독도는 울릉도와 더불어 아무리 늦게 잡아 우산국의 신라 귀복 때부터 따진다고 해도 1천년 넘게 우리 배달 겨레의 고유한 땅이었다. 조선왕조 초기인 태종 때부터 사람이 정착할 수 없는 독도에 대해서는 물론 울릉도에 대해서도 곧 공도정책을 써 한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지 않았지만 연해는 갖가지 물고기들과 해초들 및 해조들이 넉넉한 천연의 어장이 어서 동해안과 남해안의 어부들이 조정의 관리들 몰래 이 두 섬에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어부들도 이곳을 탐내는 데서 일어났다. 그때 오늘날의 도교인 에도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의 고도정책에 착안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카와의 두 가문을 상대로 국경을 넘어서 울릉도 연해에 들어가 조업을 해도 좋다는 취지의 허가를 내주었다. 물론 조선 조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선 어부들과 일본 어부들 사이에 자연히 때때로 충돌이 벌어지게 됐다. 특히 조선 숙종 19년에 해당돼는 1693년 봄에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울산 지방 어부들과 일본의 오오다니 가문의 어부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일본의 어부들은 일곱 척의 배를 끌고 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오늘날의 돗토리 현에 속하는 호오키 슈, 곧 백기주 사람들이었다. 돗토리 현은 바로 이수의 시마네현과 함께 혼슈의 서부에 있다.

 

싸움이 커지자 일본 어부들은 꾀를 냈다. 조선 어부들에게 평화적으로 의논할 일이 있으니 대표를 보내라고 제의한 뒤, 막상 조선어부들이 안용복과 박어둔 두 어부를 대표로 뽑아 보내자. 그 두 대표를 호오키 주의 섬 오키시마로 납치한 것이다. 오키시마는 오늘날 시마네 현에 속해 있다.

 

이 때 안용복이 일본을 상대로 영웅적인 담판을 벌였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앞장들에서 때대로 인용한 인한기 교수의 연구와 신용하 교수의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또 최근에 안용복의 담판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안용복의 일본행적을 샅샅이 파헤친 중앙일보사 발행 『시사 월간 윈』의 취재반 소속 정순태 편집위원의 글과 김홍균 기자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연구들을 필자 나름으로 종합하기로 한다.

 

안타깝게도 안용복이 언제 태어났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그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안씨의 본관은 열 한 개나 되는데, 그의 본관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 그 의 직계 후손이라고 나서는 집안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가 되는 것이, 안용복은 서울에 사는 오충추의 사조였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배경에서  남의 집 노비가 됐는 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그의 출생과 성장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으며,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좌천동에 해당되는 부산 좌자천 1리14통 3호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의 뒷날 행적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용복과 거의 같은 시대의 인물인 큰 실학자 성호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일찍부터 왜관에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익혔다"고 썼는데, 좌천동 이웃에 왜관이 있었음에 미루어 이익의 그 기록은 정확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안용복은 어린 시절부터 왜관에서 습득한 일본말로 뒷날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담판했을 것이다.

 

안용복의 원래 직업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관하 좌수영에서 전선의 노를 젓는 수졸이었다. 그때 용어로는 능로군이었다.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던 좌수영은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 지역까지의 동남 해안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안용복은 동해안 해역에 밝았을 것이며,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수졸을 그만 둔 뒤에 울산 어부들과 함께 울릉도 일대로 고기잡이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일본으로 유인된 뒤 일본을 상대로 대답하게 담판을 벌인 일들에 대해서는 다행히도『숙종실록』과『승정원 일기』 및 『비변사 등록』등 조선 왕조의 사료들에 나와 있다.  

 

이때, 안용복은 우선 오키시마의 도주에게"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 고기잡이를 했는데 무슨 까닭으로 너희가 우리를 잡아 왔느냐"고 당당히 따졌다. 안용복의 논리정연한 항의를 받은 오키시마의 도주는 어쩔 수가 없어 자신의 상관인 호오키 주 태수에게 안용복과 박어둔 두사람을 넘겼다. 안용복은 이 자리에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이 울릉도는 조선 땅임을 강조하고 남의 땅에 들어와 불법적으로 조업하는 일본 어부들을 단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의 자료들에 따르면, 안용복은 이때 나이가 36세 정도였으며, 검은 얼굴빛에 마마자국을 갖고 있었다. 키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호오키 주의 태수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용복을 후대해 주었고, 자신의 상급 기관인 에도 막부에 처리를 맡기기 위해 에도로 보낼 때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닌 만큼 선처해 줄 것을 겉의 한다"는 취지의 문서를 함께 올렸다. 에도 막부의 최고 책임자인 쇼군은 그 건의를 받아 들여 "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본 어민의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만들어 주고 안용복을 석방하여 조선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 사항은 에도 막부가 어떻게 조선 조정의 대표가 아닌 한낱 민간인에게 서계와 같은 외교문서를 만들어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에도 막부가 서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안용복이 뒷날 조선 조정으로부터 엄격한 조사를 받을 때 한  말이었으므로 그것은 안용복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만, 조선 조정의 영중추부사라는 정일품무관 벼슬에 있던 남구만도 사실로 인정한 기록으로 미루어 안용복의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 할 수 있다.

 

그때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병들어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화해를 성립시키고 국교를 수립시킴으로써 정권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더욱 굳히고 조선을 통해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했던 만큼 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 문제를 놓고 조선과 불과를 빚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배경에서"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는 서계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서계를 받은 안용복은 박어둔과 함께 에도르 떠나 귀국길에 올라 나가사키를 거쳐 대마도에 도착했다. 이곳을 거쳐야만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마도의 도주 종의륜의 생각은 에도막부의 생각과 달랐다. 어업을 주요한 산업으로 삼는 대마도의 최고 책임자로서 울릉도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용복과 박어둔을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를 침범한 죄인"으로 몰아 붙여 구속했을 분만 아니라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라는 세계를 빼앗았다.

 

안용복과 박어둔을 50일 동안 억류했다가 풀어주면서 대마도 도주는 하나의 음모를 꾸몄다. 이 계제에 울릉도를 아예 대마도의 부속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작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693년 11월에 안용복과 박어둔을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를 침범한 죄인" 이라고 의도적으로 단죄한 뒤 부산포의 왜관으로 이송하고 거기에 다시 40일 동안 구금했다가 조선의 동래부로 인계했다. 대마도주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다케시마, 곧 죽도는 물론 우리 영토에 속하는 울릉도를 의미했다.

 

안용복과 박어둔은 귀국하자 이제는 살았다 싶어 동래부 부사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하며 세계를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동래부 부사는 그들을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든 죄인",곧 "월경죄인"으로 몰아 감금했다. 이것을 보고 대마도 도주의 차사, 곧 사신인 귤진중은 대마도 도주의 흉계에 발맞춰 작성된 서계를 동래부 부사를 통해 조선 조정에 보냈다. 이 세계를 통해 대마도 도주는 다케시마가 대마도 땅이며 따라서 일본 땅이라고 전제한 다음에, 안용복과 박어둔을 비롯한 조선의 어부들이 일본의 국금을 어기고 다케시마에 들어와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그들 가운데 안용복과 박어둔 두 사람을 잡아 한때의 증거로 삼으려 했으나 에도 막부가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도록 배려했기로 그렇게 따른다고 설명한 뒤, 조선 조정은 조선 어부들이 "결단코" 다케시마로 출어하지 못하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서계에는 대마도 도주의 음흉한 계교가 숨어 있었다. 다케시마 곧 울릉도를 아예 대마도 땅, 일본 땅으로 못박아 버려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속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조선 조정은 굴욕 외교로 대응했다. 그때 조선 조정은 장희빈을 앞세운 남인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임진왜란의 경험에 비춰 볼 때 험악한 일본 사람들과 싸우면 우리 쪽도 많은 손해를 입는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를 적당히 넘기기로 합의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상 전래의 고유 영토인 울릉도를 일본 영토라고 인정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울릉도는 분명히 우리 땅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다케시마가 울릉도가 아닌 다른 섬으로 인정하는 듯한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회서가 만들어져 차사 귤진중에게 넘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민이 바깥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 단속해왔다. 그래서 비록 우리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아득히 멀리 있기에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그밖의 섬이겠는가. 지금 우리 어선이 감히 당신 나라 국경 안의 죽도에 들어가 난잡하게 고기를 잡은 것은 법으로서도 마땅히 엄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므로 범인들을 형률에 의거해 죄를 과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 과조를 엄격하게 제정해 이것을 신칙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회서는 울릉도가 곧 죽도이며 죽도가 곧 울릉도라 1도 2명의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여 울릉도는 조선의 땅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울릉도의 일본 이름인 죽도는 일본 땅이라고 인정해 준 잘못된 문서라고 할 것이다. 신용하 교수가 적절히 비판했듯, "이 회답문은 조선 왕조의 무사안일 외교의 대표적 사례가 될 만한 것이었다."

 

왜관에서 이 회서를 받아 읽은 차사 귤진중은 대마도 도주의 목적이 절반은 달성됐음을 금새 알 수 있었다. 죽도가 일본 땅임이 인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울릉도는 조선 땅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우리가 다케시마에 대해서만 말했으니 회서에는 다케시마에 대해서만 쓰면 될 테인데 우리가 말을 꺼내지 않은 울릉도 얘기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울릉도  얘기를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끈질겼다. 무려 보름이나 버티면서 조른 것이다.

 

이 무렵인 1694년 숙종20년에 조선 조정에서는 일종의 정권교체가 발생했다. 장희빈의 모략으로 폐비됐던 민비가 복위되고 왕비 장씨는 희빈이라는 원래의 자리로 강등되면서 민씨, 곧 인현왕후의 복위를 반대한 남인들이 제거된 것이다. 갑술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고 부르는데, 이 일을 계기로 소론 정권이 들어섰다.

 

소론정권은 영수 남구만을 비롯해 모두들 남인 정권의 나약한 대일 외교를 비판적으로 보던 터였다. 소론의 지도자들은 대마도 도주의 흉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의 회서를 만든 관리들을 처벌하고 그 회서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숙종의 윤허를 받기에 이르렀다. 

 

조선 조정의 대응이 이렇게 바뀐 것을  모르고 대마도 도주는 1694년 8월에 다시 차사 귤진중을 조선으로 보내 울릉도 부분의 삭제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새로운 강경 대응의 방침을 정한 남인 정권이 응할 리가 없었다. 남인 정권은 제1차 회서를 취소한다는 뜻을 담았을 뿐 아니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죽도는 바로 조선의 땅인 울릉도임을 당당히 밝히는 새로운 회서를 만들었다.

 

이 회서는 또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서 안용복 등을 데려간 것은 조선에 대한 침략이라고 정당하게 규정했다. 그리고는 이 뜻을 에도 막부에 보고해 일본인들이 다시는 울릉도에 출몰하기 못하게끔 조처하도록 하려고 강력히 요구하는 내용도 담았다.

 

이 회서를 들고 동래로 내려가 차사를 상대하게 된 접위사 유집일은 준비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금당해 있던 안용복을 미리 만나 일의 앞뒤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흉계의 장본인은 대마도 도주이고, 에도 막부의 뜻은 다르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로 그는 대마도 도주의 차사를 단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유집일은 차사에게 "이번 일을 우리 정부가 에도 막부에 직접 알린다면 에도 막부가 그대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겠느냐"고 호령한 것이다.

 

그래도 차사 귤진증은 끈질기게 울릉도 부분의 삭제를 요구하면서 버텼다. 무려 1년 남짓 왜관에 계속 머물며 조르다가 대마도 도주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서야 돌아갔다.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종의륜이 죽고 그의 어린 동생 종의방이 대마도의 새 도주로 등장하면서 상황은 새 국면을 맞았다. 1696년1월에 종의방이 에도 막부를 방문했을 때에도 막부의 쇼군은 호오키 주 태수를 포함해 네 명의 태수들이 나란히 앉은자리에서 다케시마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리하여 토론이 계속됐는데, 결론은 다케시마, 곧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다는 쪽으로 내려졌다. 그 결론은 물론 쇼군이 유도한 것이었다.

 

이 결론에 바탕을 두고 에도 막부는 대마도의 새 도주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지시를 내렸다.

 

"첫째, 다케시마는 호오키주로부터의 거리가 160리 정도인데 비해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깝다. 그러므로 조선 영토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일본 사람이 다케시마로 건너가는 것을 금하도록 한다.


 셋째, 대마도 도주는 대마도로 돌아가는 대로 형부의 대보를 조선 조정에 보내 이 결정을 조선에 공식으로 알리고, 그 결과를 막부에 보고하도록 한다."
 
이 지시는 다케시마에 관한 에도 막부 시대의 문서들을 포함시킨 일본 내무성의 『공문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문서는 확실히 당시 일본의 중앙 정부인 도쿠가와 막부가 울릉도는 조선 영토임을 공식 확인해 준 매우 중요한 문서라고 하겠다.

 

대마도의 새 도주 종의방은 대마도로 돌아온 뒤 일종의 지연 전술을 썼다. 조선의 역관에게 에도 막부의 뜻을 간략히 담은 짧은 편지를 주어 조선 조정에 전하게 했을 뿐, 형부 대보를 보내 공식 문서를 전달하는 절차를 밟지 않은 채 시간을 끈 것이다.

 

이 무렵 동래부에 2년 넘게 갇혀 있다 풀려난 안용복은 자신이 다시 일본을 상대로 담판해 문제를 잘 매듭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1696년 봄에 16명의 어부들을 모아 울산을 떠나 울릉도로 건너갔다.

 

마침 일본 어선 다섯 척이 조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용복은 일본 어선의 뱃머리로 달려가 "울릉도는 원래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어찌 침입했느냐"라고 호령했다. 일본 어부들은 "우리는 볼래 마츠시마에 사는 어부들로 고기를 잡다가 우연히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곧 돌아가겠다"라고 대답했다. 안용복은 다시 "너희가 마츠시마라고 부르는 그 섬은 곧 우산도이며, 그 섬 또한 우리 땅인데 너희가 어찌 감히 거기에 산다고 하느냐"고 꾸짖었다.

 

안용복의 기세에 놀라 일본 어부들은 모두 도망쳤다. 안용복은 자신의 어부들을 이끌고 일본 어부들이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으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가 몽등이로 그것들을 마구 두들겨 부수자 일본 어부들은 배를 타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안용복이 말한 우산도가 오늘날의 독도임을 물론이다.

 

안용복은 다시 일본 어부들을 오키시마까지 쫓아갔다. 그는 섬에 상륙하자마자 도주를 만나 "몇 해 앞서 내가 여기 왔을 때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 땅이라는 서계를 받았는데, 일본 어부들이 또 다시 우리의 경지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고 항의했다. 이에 오키시마의 도주는 자신의 상관인 호오키 주 태수에게 알려 대답을 받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날짜가 괘 자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안용복은 호오키 주 태수와 직접 담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호오키 주로 갔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할 일은 그들 가운데 이인성이라는 문사를 포함 시켰다는 사실이다. 안용복은 호오키  주 태수와 담판하고 그 내용을 문서로 남기려면 유능한 분사가 있어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인인성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사실만 보아도 안용복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일을 추진했는지 깨닫게 된다. 뒷날 안용복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든 죄인", 곧 범경죄인으로 몰려 심문을 받았을 때, "제가 분을 참지 못해 배를 타고 곧장 호오키 주로 가서 울릉우산양도감세라고 참칭한 뒤, 저는 남빛 철릭을 입고 검은 포립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탔으며 다른 동행인들은 모두 말을 탄 채 태수의 공청으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빛 철릭이라면 정3품 당상관 이상이라야 입을 수 있는  조선 시대 무관의 옷이다. 안용복은 관명을 사칭하고 거기에 걸맞은 관복까지 입음으로써 갔다

 

호오키 주태수와 대등한 지위에 서서 당당히 담판하려고 했던 것이 확실하다. 


호오키 주 태수의 공청에서 태수와 마주앉은 안용복은 그 자신이 3년 전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문서를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으나 귀국 길이 대마도 도주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죄상을 에도 막부에게 알리는 상소를 올리겠다고 위협했다. 안용복은 대마도 도주의 비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이 일본에 보내는 세륜미한 섬은 반드시 열 다섯 말이고 면포 한 필은 반드시 서른 다섯 자이며 종이 한 권은 반드시 스무 장인데, 대마도 도주가 중간에서 빼먹고 세륜미 한 섬
은 일곱 말이라 하고 면포 한 필은 스무 자라 하며 종이 한 권은 석 장이라 하니, 내가 막부에 대마도 도주가 막부의 속인 죄를 알리겠다." 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안용복의 엄포 외교는 효과를 보았다. 우선 대마도 도주의 나이 많은 아버지 종의진이 상소만은 막아달라고 호오키 주 태수에게 간청했다.

 

호오키 주 태수 스스로의 이해 관계를 따져 보아도, 이러저러한 내용의 상소가 올라가는 것은 자신에게도 불리했다. 그는 몇 달 앞서 쇼군이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확인하는 결정을 내릴 때 그 자리에 배석했기에 상소가 올라가면 몹시 화를 낼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오키 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다케시마와 마츠시마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국경을 범하는 사람이 있거나 또는 대마도 도주가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여기서 호오키 주 태수가 조선 땅으로 인정한 다케시마가 울릉도이고 마츠시마가 독도임은 물론이다.

 

안용복의 공로는 참으로 컸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가 호오키주 태수와 담판을 벌인 뒤 그 해8월에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을 때 체포되고 말았다. 앞에서 이미 썼듯, 범경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숙종 22년인 1696년9월에 중앙 정부의 몇몇 중요한 기관들 가운데 하나로 국방 문제를 다루는 기관인 비변사에서 추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한 쪽에서는 "한낱 상민이 관직을 사칭하면서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와 다투는 단서를 일으켰다."고 비난하면서 사형에 처 할 것을 주장했다. 비변사는 안용복이 노비임을 모르고 상민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의 목숨은 위태로와졌다. 그러나 남구만이 "안용복이 아니었다면 대마도의 속임수을 모를 뻔 했던 만큼 사형은 지나치다'고 변호했다. 이 다툼 속에서, 결국 일본측의 태도를 본 뒤 마지막 결론을 내기로 합의됐다. 

 

이듬해인 1697년 1월에 대마도 도주는 형부 대보 평성상을 조선에 보내 에도 막부의 결정을 알려 왔다.1699년에는 일본측이 다케시마와 마츠시마를 조선 영토로 다시 확인하는 최종적 외교 문서를 조선 조정에 넘겼다.

 

그래서 안용복은 사형을 면하게 됐지만 매를 맞은 뒤 귀양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귀양을 갔으며 그 뒤 어떻게 됐는지는 어느 문헌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 일본측은 안용복의 대일 담판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일본측은 안용복의 대일 담판을"허구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는 "개인적 차원의 일이어서 구속력이 없다"라고도 주장한다. 조선 정부의 공식적 문서에 올라 있는 그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용복의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 수는 없다. 이익이『성호사설』에서 이미 높게 평가했듯, 안용복은 민족적 영웅이라는 역사적 자리매김을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독도는 우리땅-  김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