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한일병합조약 우리측(왼쪽)과 일본측 문서는 첫머리(노란색 테두리 친 부분)의 ‘한국황제폐하’와 ‘일본황제폐하’ 순서만 바뀌고 토씨가 각각 한글과 일본어로 다를 뿐 필적이 거의 흡사해 동일 인물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 국권을 강탈한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양측 문서가 동일한 인물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등 최소한의 외교적 요건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상찬 교수는 6일 우리나라와 일본 측 한일병합조약 문서의 물리적·외형적 특징을 비교한 결과 필체와 종이질, 색깔과 제본, 봉인 방식 등이 같아 두 문서가 동일한 인물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6일 밝혔다. 이 교수는 정상적인 여건에서 이뤄진 조약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통상 국제조약을 맺는 각 당사국은 개별적으로 자국어로 문서를 작성하고서 이를 상대방과 교환·서명하고 각 문서를 동등하게 정본(正本)으로 삼는 형식을 취한다.
한일의정서(1904년)와 을사조약(1905년), 한일협약(1907년)만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 측 문서는 외형적으로 특징이 달랐다. 가령, 세 조약을 맺을 당시 우리측이 녹색의 인쇄양식을 쓴 데 비해 일본측은 회색의 인쇄양식을 썼다.
반면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한일병합조약의 우리측과 일본측 문서에서 글자 대부분이 동일 필체의 한자로 이뤄져 있으며, 토씨가 한글이냐 일본 글자냐는 점과 문서 맨 앞의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라는 문구 순서가 다를 뿐이다.
또 양측 문서 모두 흰 종이로 돼 있으며, 흰비단으로 만든 천끈으로 제본했다.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한일협약에서 우리측 문서는 봉인이 없는데, 한일병합조약에서는 일본 것처럼 봉인돼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1910년 8월 일본측이 양쪽 문서를 모두 작성해 일방적으로 우리측에 체결을 강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이 교수는 “국제조약에서 문서를 교환하는 이유는 쌍방합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것인데, 당시 일본은 이것조차 불필요하게 봤을 정도로 오만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학계가 거시적 문제에 치중하다 보니 문서학 등 미시적 관점의 연구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며 “조약 체결에 관여한 고위 관계자들의 필적을 감정하면 이 문서가 누구 손으로 작성됐는지도 쉽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7월 7일자 세계일보 이귀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