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반가 유학재

2011. 5. 27. 18:11山情無限/山

 

 
  

1988년의 유학재(兪學在.48)는 등반기량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전국 명산의 암벽을 57일 동안 등반하며 체력과 기술을 쌓아,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그 해 최단시간 등반기록인 1시간 38분 만에 올랐다. 등반 실력에 걸맞게 맥킨리 원정대의 대원으로 발탁되어 설악산 겨울훈련까지 마친 상태에서 운동 삼아 인수봉을 찾은 게 사고의 발단이었다. 친구와 말장난을 하며 암벽을 오르다 실수로 바위를 놓쳐 15m를 추락한 것이다. 6개월을 꼬박 병원에 누워 있었고 퇴원한 뒤에도 6개월을 요양해야 했다. 젊고 뛰어난 클라이머의 방심을 북한산은 용서치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을 누워 있다 재활을 위해 그가 찾은 곳은 역시 산이었다. 목 깁스를 풀기도 전에 산부터 찾았다. 더 이상 누워 있다가는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박감 때문이었다. 조심조심 인수봉을 오르며 그는 거짓말처럼 과거의 기량을 되찾아 갔다. 그 노력의 결과로 개토왕 빙폭을 국내 산악인 중 처음으로 오르는 데 성공한다. 설악산 개토왕 빙벽폭포는 얼음으로만 되어있는 여느 빙폭과 달리 10여m의 암벽을 오른 다음, 벽과 떨어져 있는 고드름 빙폭으로 접어들어 다시 오버행(90도 이상의 각도) 빙벽을 오르는, 난공불락의 혼합등반 루트였다. 당시 쟁쟁한 클라이머들도 실패한 빙벽을 오름으로써 유학재는 자신의 부활을 화려하게 알렸다.

 

유학재를 산사나이로 키운 건 북한산이었다. 5대에 걸쳐 우이동에 터를 내린 북한산 토박이였으니 산은 뼈 속 깊이 새겨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3남 1녀 중 막내였던 그에게 산은 무궁무진한 놀이터였다. 솔밭은 전쟁 놀이터였고 바위는 친구끼리 뱃심을 겨루는 곳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장난이 무척 심해 사고뭉치로 통했다. 오죽 짓궂었으면 별명이 ‘개고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밤나무 밭에서 불장난을 하다 산불을 내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했고, 중학교 때는 썰매를 타다 연탄집게가 콧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특이한 사고를 당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때, 코에 박힌 연탄집게를 빼내자 피가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혼날까봐 혼자 앓다 병원에서 뇌막염 판정을 받았다. 상태가 악화되면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근 1년을 치료에 매달려 체중이 30kg으로 줄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코뼈가 휘어져 말을 하면 울림이 와류되어 보통 사람들보다 하이톤의 목소리를 낸다.

 

뼈만 남은 그에게 의사는 운동 차원에서 산에 다니라고 권한다. 산에 놀러 다녀도 좋다는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이후 산비둘기산악회 회원들의 눈에 띄어 고등학생 신분으로 산악회에 들어간 그는 암벽등반을 배우고 백두대간 종주를 하며 본격적인 산꾼의 길로 접어든다. 특히 암벽등반에 깊게 빠진다. 그에게 암벽등반은 어릴 적 산에서의 놀이문화가 집약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것이었다. 170cm가 되지 않는 왜소한 체격의 그였지만 바위를 오르는 기본자세는 어릴 적 놀이문화를 통해 몸에 배어 있었다.

 

암벽등반 실력은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빙벽등반은 달라 실력이 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는 빙벽등반의 기본자세인 X바디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3년에 걸쳐 자신에게 맞는 지그재그식 등반법을 만들어낸다. 최소의 동작으로 최대한 많이 오를 수 있는 유학재식 등반법을 만든 것이다. 보고 있노라면 소위 FM이라고 하는 멋진 등반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꾸물딱 꾸물딱’ 하는데 조금 있으면 다 올라가 있는 게다. 어떤 틀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오름만을 위한, 상황에 맞는 최선의 동작을 찾는 것이 그의 등반법이었다. 이 등반법으로 그는 89년 설악산 개토왕과 92년 백두산 장백빙폭에서 절정의 등반실력을 보여주었다. 당시 백두산 장백빙폭을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6093m꽁대샤르 정상에 선 유학재.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동계 등정이었다.

 

이쯤 되자 나라 안의 산은 기량을 펼치기에 좁아진다. 1990년 코뮤니즘봉(7495m)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외 고산원정에 나선다. 그러나 고산에서 약점이 있었다. 어릴 때 연탄집게에 찔린 것 때문에 코 속 기관지 한 쪽이 막혀 호흡이 가빠지는 증세가 있었다. 3000m 이상의 고소에서는 산소가 줄어들기 때문에 원활한 호흡이 중요하다. 두통과 메스꺼움 같은 고소증세가 찾아오면 제 아무리 힘 좋은 근육질의 등반가라 해도 버틸 수 없는 것이 고산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첫 원정이었던 코뮤니즘봉에서 그는 고소증세로 원정기간 내내 고통스러워하다 마지막 1주일을 남겨두고 등반을 시도해 한국인 최초로 정상 등정에 성공한다.

 

“한국산악회 선배들 얼굴이 떠올라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그의 말 속에는 한 번의 해외원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산 선배들에 대한 부담과 의리가 담겨 있다. 어렵게 6900m지점에 이르러 후배 대원들에게 “여기서부터는 가고 싶은 사람만 가라”고 했다. 후배들에게 정상 등정의 영광을 돌릴 양이었다. 그러나 후배 대원들은 복통과 다리 통증을 호소하며 더 이상 못 가겠다며 등반을 포기했다. 결국 혼자 정상을 올랐다. 정상 근처에서 체력이 떨어져 기다시피 해서 오기로 올랐다. 하산은 구 소련 클라이머들의 도움으로 끌려 내려오다시피 했다. 그러다 중간에 로프를 풀어버렸다. 산악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후 베이스캠프까지 혼자 내려가는 길은 한없이 멀고 힘들었다.

 

 

 

 

2008카니바샤시르(6500m)등반중 5800m에서 고통스런 비박을하는 유학재


첫 해외원정을 독기로 오른 이후 92년 알래스카 키차트나 스파이어 동벽을 새로운 루트로 올랐으며 97년 파키스탄 가셔브룸 4봉(7925m) 서벽을 신루트로 올랐다. 2007년에는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의 코치 역할을 자처해 지원등반을 했으며, 지난해에는 파키스탄 히말라야 CAC샤르(5942m)와 코리안샤르(6000m) 최초등정인 초등을 이룬다.

 

그가 한 등반 중 가장 빛나는 등반은 단연 가셔브룸 4봉 등반이다. 가셔브룸 4봉 서벽은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거벽 중의 하나로 높이만 보면 8000m급에 조금 못 미치지만 등반 난이도에 있어서는 최고로 꼽히는 험난한 벽으로 알려진 곳이다. 유학재는 소위 ‘빛나는 벽’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1997년 한국산악회 원정대의 등반대장으로 팀을 이끌어,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루트로 등정에 성공한다. 일순간 세계 산악계를 주목시켰던 이 등반은 그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산악회의 해외원정이 대부분 성공적이었던 건 ‘선봉장’ 유학재의 임기응변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이 산악계 일반의 평가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등반방법을 고안해 눈앞에 놓인 문제를 풀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92년 원정에서 철길 옆에서 주운 대못을 망치로 두들겨 ‘훅’이라는 등반장비를 만들어 사용, 등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셔브룸 4봉 등반 때는 바위하켄이 부족하자 아이스하켄을 쇠톱으로 잘라 대체했고 심지어 숟가락과 포크를 하켄 대신 사용해 등반하기도 했다. 그는 한번도 열악한 환경 탓에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열악함을 가능함으로 바꾸어 왔다. 그래서 산악계에서는 유학재를 ‘임기응변의 대가’라고도 한다. 그는 이런 탁월한 손재주로 91년 토종 암벽등반 장비제조업체인 트랑고스포츠에 입사, 17년을 근무한다. 서구 장비업체들의 전유물이었던 등반장비를 국산화하고 새로운 장비를 개발하여 장비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몸은 국산인데 등반장비는 대부분 외제라는 게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우리나라가 등반능력뿐만 아니라 장비도 세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97년 인터뷰에서 얘기했다.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트랑고스포츠는 자금난으로 2007년 문을 닫았다.

 

“생명을 담보로 한 등반장비를 만드는 게 스트레스가 엄청 났어요. 오히려 나올 때 마음은 후련했어요.” 등반장비가 잘못되면 곧바로 클라이머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한 순간도 제품을 대충 만든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같은 산악인인 아내 박현우씨와 영원프라자 강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97년 가셔브룸 4봉 등반을 마치고 10년 간 그는 거벽 원정은 가지 않았다. 그 동안 원정 다니느라 가족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원정을 가면 본인이 위험한 것 외에도 몇 개월 동안 월급이 없다. 그래서 “원정을 가면 가정이 풍비박산 난다”고 말한다. 이제 그는 전과 달리 “가장으로서 임무를 다하고 산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산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제일 앞에 있으면 인생이 다 망가진다”는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의 원정대는 늘 소수의 인원에 가난했다. 후배들이 “학재형이랑 가면 굶기를 밥 먹듯이 한다”고 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그는 “평소에는 잘 먹더라도 산에서는 잘 먹을 생각 마라. 우리가 가진 여건으로 등반에 성공하려면 최소한의 식량과 최소한의 장비로 가볍고 빠르게 오르는 수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90년대부터 지켜온 그의 지론은 소규모팀과 최소장비로 빠르게 오르는 등반 스타일로, ‘알파인 등반’이라는 세계 산악계의 흐름과도 부합한다. “외국의 원정대는 짐이 정말 적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원정대는 짐이 어마어마하죠. 이는 우리의 음식문화와도 관련이 있는데 ‘산에서도 배가 불러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걸 조금씩 포기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산을 오를 때는 언제나 장애요인이 있게 마련이고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는 “어릴 때 다쳐서 장기적으로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없어, 빨리 치고 나오는 알파인 스타일이 내 몸에 맞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그는 원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대원들의 팀워크를 꼽는다. 더불어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대원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원정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항상 함께 하는 등반을 좋아해요. 솔로 등반을 오래하면 사람이 이기주의적으로 변하고 외로워지고,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요. 저도 그걸 경험했죠. 그러다 평생 산에 다니려면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됐어요.”


 

그는 86년 한국산악회에 입회했다. 한국산악회는 1945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악단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가대표격 산악회지만 입회 당시 젊은 층보다 원로회원들이 많았다.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보자”는 각오로 뛰어들어 지금은 한국산악회의 굵직한 원정을 이끄는 선봉장이자 90년대 이후 대표적인 클라이머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다음 원정은 클라이머의 꿈이라 할 수 있는 8000m대 벽등반이다. 아직 구체적인 윤곽은 잡히지 않았지만 2년 이내에 도전한다는 게 목표다. “이제껏 선배들 덕에 산에 갔으니 이젠 내가 후배들을 지원해 더 큰 벽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러려고 집사람 몰래 비자금을 열심히 만들고 있어요.

 

 

산악인 유학재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산에 가는가?” 그는 “왜 사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답한다. 산을 떠난 삶을 살아본 적 없으므로 ‘왜 산에 가냐’는 도시인의 의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벽을 오를 때의 매력적인 흡인력에 대해 얘기한다. “등산은 무궁무진합니다. 어떤 룰이나 제한된 영역이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산이 가만히 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들어가면 순간순간 결정해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합니다.”

 

등반은 삶을 닮아 있어 늘 사람을 선택의 기로에 세운다. 정해진 틀은 없다. 그저 가는 것이다. 왼쪽 혹은 오른쪽 아님 정면으로 올라치던가, 그것도 아니면 대기하거나 후퇴해야 한다. 수많은 결정을 통해 거대한 벽을 넘어서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 더 나은 등반가로 진화해 가는 것이다. 유학재는 자신만의 확고한 진화론을 가지고 있다. “절대 길은 하나가 아니다. 막히면 돌아서 올라갈 것을 생각해야 한다. 등반은 산과의 대화다. 산의 변화에 적응하며 계속 반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 등반이다. 정상에 서면 끝이라 생각하지만 내려가는 것도 중요한 대화이며 정확한 계산을 필요로 한다. 나는 아마도 산과의 복잡한 대화를 즐기는 것 같다.”

 

거대한 산 앞에 한 사내가 있다. 키가 크지도 힘이 세지도 않은 작은 사내지만 아무리 큰 산이 나와도 넘어선다.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독하게 오른다. 그의 가장 강력한 기술은 고정관념의 틀을 뛰어넘는 생각을 한다는 것. 의식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등반가 유학재다.

 

 

 

신준범 / 월간<山> 기자
불빛 하나 없는 깊은 산 속에서 별을 보는 걸 좋아한다.
골짜기 끝에서 바람이 불어와 휘이잉 하며 내는 소리를 좋아한다.
산을 좋아한다.

발행일  2009.07.16

사진 김덕화, 유학재(등반 사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