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역사

2011. 5. 31. 23:07山情無限/등산학교

 

 

 

등산의 역사

 

 

 

 

 

 

 

 


1. 고대등산사


산은 창세기 때부터 지반의 융기, 습곡, 단층 작용에 의하여 지표가 변동된 형태중에서 높이 솟은 부분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산은 태고적부터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변모해 왔다.  적어도 250만년전 고대인들은 외적인 야수들에 대한 공포와 대자연의 맹위에 저항하면서 걷기 시작한 것이 등산 운동의 시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등반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단순히 생존경쟁에 승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산을 오르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인간이 산을 오른 기록을 살펴보면 B.C. 328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힌두쿠시 산맥을 B.C. 218년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제국의 공격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이 있으나 이 행동은 순수한 등산 의식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산운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기원 후의 등산운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92 - 몽떼기유(2,125m)에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시종인 앙트완느 드비유가 산꼭대기 끝까지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등산은 처음이며 상세하고 완전한 기록을 남겼다.  인공보조용구를 사용등반(그리노블 근처의 드피네 알프스)


·1642 - 다비 필드가 워싱턴 산 (1,920m 프렌지덴셜 산맥)을 오르면서 인디언 가이드를 동행 등반했으나 가이드 2명만 정상에 도착하였다.   이유는 신의 거처인 산이라 믿고 죽음이 두려워 올라가지 않았다.

 

 

2. 알프스 등반사


(1) 근대 등산의 여명(1760∼1800)


1760년경 스위스 박물학자 호래스 베네딕트 드 소슈르가 몽블랑 첫 등정자에 상금을 걸었으나 26년 동안 등정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1786년 8월 8일 샤모니의 수정채취인 재크 발마와 내과의사 미셀 G 파갈 두사람이 정상 등반에 성공하여 상금을 받았다.  1787년 드 소슈르 자신도 발마를 리더로 한 등반대를 꾸려 18명의 가이드를 데리고 등반을 하였다.


모든 등산가는 이 사람을 근대 등산에 있어서 최초의 그리고 진정한 후원자라고 보고 있으며 이것이 근대등반의 효시라고 본다.  이렇게 시작된 등반은 몽블랑 등반후 열기가 냉각 되었다.

 

 

(2)알프스의 개척시대(1800∼1845)


순수등반론에 입각하여 유럽 알프스의 각 처녀봉을 초 등반하기 위한 과도기로서 황금시대에 영광의 초 등반자 및 1급의 가이드들이 이 시기에 태어났다.


1급가이드인 샤모니 출생의 어거스트 벨미트, 가이드레스 등반의 기수 케네디, 마테호른 등반으로 이름난 안톤 카렐, 산악문학의 선구자 레슬리-스테판 및 19세기 최대의 등반가인 에드워드 윔퍼 등 쟁쟁한 등산가가 탄생하였다.


산악계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암벽 등반이 시작되었으며 암장은 영국내 피레내 산맥의 필라-록이다.  이것이 암벽등반의 효시이다.  이 암벽등반의 출현은 머메리즘의 예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등반의 근거가 확실한 개척자들 중에 뛰어난 사람들은 스위스의 호상 메이어가이다.  메이어형제는 융프라우를 초등반하였으며 이 때부터 등반은 과학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눈과 빙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3)알프스의 황금시대(릿지등반 1845∼1865)


1854년 신혼여행중의 영국의 알프레드 윌리스가 등반이 어려운 베터호른(3,708m)을 등정하자 많은 영국인이 잇달아 도전 등반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 뒤 16년동안 영국인은 유럽의 주봉을 등정하여 등산열을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가이드에 전파하였다.


이후 알프스의 고봉들의 등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65 에드워드 윔퍼가 25세 때 마터호른(4,505m)을 등반(스위스 이탈리아 국경 펜닌 알프스 쪽)하였는데 이 등반은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비극적인 가장 오랬동안 논의 대상이 된 등반이다.  7회의 등정 시도 실패 끝에 스위스 측의 체르메트로 루트 변경하여 등반에 성공하였으나 하산시 일행중 4명이 마터호른 빙하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 뒤 약 10만명 정도의 사람이 등정을 하였으며 1854년부터 1865년 의 짧은 기간동안 140좌의 알프스 고봉들이 인간에게 자연의 신비로움을 드러냈다.

 

·1857년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알파인클럽(ALPINE CLUB)이 런던에서 창립되어 체계적인 탐사를 시작하였으며 이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산악회도 탄생하였다.

 


(4)알프스의 은의 시대(벽등반 1865∼1900)


머메리즘 운동이 일어나서 일반적인 등산 루트 보다 좀더 곤란한 루트를 선택하여 보다 어렵게 등반하는 등반 사조가 일어났으며, 머메리가 제창한 머메리즘은 현대의 등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암벽 및 빙설벽 등반사조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최초의 여성 등산가(루시워커)가 탄생하였으며 그녀는 여성 최초로 마터호른을 등반하였다.  그리고 등반의 한 방법으로 극지법(1897년 이탈리아 아부룻지공에 의해 알라스카에서 처음 시도)이 시작되어 후에 히말라야 8,000m 급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은의 시대에는 머메리즘의 더 발전한 아크로바티즘이 나타났다.  그러나 너무 곡예적인 등반으로 정통파 등산가에게는 환영받지 못하였다.  이때의 등반을 살펴보면 1882년 당 뒤체앙 쌍두봉(4,009m)초등을 셀라 형제가 가이드레스방식으로 성공하게 된다.  또 에밀 찌그몬디는 단독 등반의 명수로 각종 기술과 지식에 숙달한 명 등산가였다.

 


(5)알프스 철의 시대(3대 북벽 등정 1900∼현재)


철의 시대를 대표할만한 등반사조는 직등주의 이다.  머메리즘이 극에 도달한 형태의 일종이다.  이 시대는 경쟁 무대가 알프스에서 히말라야로 옮겨져 제3의 극지에도 피크헌팅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의 등반을 살펴보면 암벽등반의 명인인 벨� 바하가 암벽의 등급을 난이도에 따라 6등급으로 분류하였으며, 한스 듈퍼가 안자일렌을 고안 하였으며, 에밀 솔랫터의 직등주의(디렛티시마) 등산사조가 만연하였다.


하켄, 카라비나, 해머, 아이젠, 아이스바일, 빙벽용 특수 피켈이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장비를 이용하여 1931년 슈밋 형제(독)가 마터호른을, 1938년 안델 헤크 마이어(독)가 아이거 북벽을, 1938년 리카르도 카신(이)이 그랑드 조라스를 오르므로써 난적의 3대북벽은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때 등반사조는 자유 등반에서 다시 변화하여 인공 등반의 기술을 탄생 시켰다.


2차대전의 발발로 등산운동은 다소 주춤하였으나 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에두알프랑도, 가스똥레뷰파의 그랑드 조라스 2등을 효시로 루이 나슈날, 리오넬 테레이 2인조의 아이거 2등을 스타트로 철의 시대가 다시 문을 열게 되었으며, 1950년 프랑스 등반대가 새로운 제품인 나일론을 이용한 장비 경량화에 힘입어 1950년 6월 3일 8,000m최초의 안나푸르나를 등정하게 된다.  또 K2가 이탈리아의 아디토 데시오대에 의해, 마나슬루가 일본의 3차에 걸친 원정에 의해 초등정 되었다.


고산에서의 최초의 벽등반은 프라스대의 아콩카쿠아 남벽등반이었다.


이 때 알프스는 동계 암벽등반이 주로 행해졌으며 1952년 볼트하켄이 드류서벽 등반시 제작 사용되었으며 많은 장비와 기술의 변화가 이루어져 왔다.


이상으로 간단히 살펴본 바, 근대등반은 소슈르부터 약 200년간 수 많은 희생의 대가로 무한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1760년대는 주로 워킹 방식의 등반이 1800년 경에 머메리즘의 출현되어 기술적인 등반의 기준을 확립했고 이것이 더욱 발전한 형태로 아크로바티즘이 출현되었다.

 

  

 

3. 히말라야 등반사


(1) 히말라야의 개척기


초기의 히말라야 등반은 1885년 전후부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등산자체 만을 목적으로 한 등산은 1883년 영국의 그레이함에 의해서 이며 그 이전은 포교, 측량, 과학적 연구, 정치 등 무엇인가 다른 목적으로 행해졌다.  그레이함은 1882년 8월 알프스의 은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한 몽블랑산군의 일봉인 당뒤제앙 쌍두봉(4,013m)의 초등정을 이룬 사람으로 처음 칸첸중가를 계획하였으나 가이드의 죽음으로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스위스 가이드인 에밀, 포스, 빌릿하, 카우프만과 "가르왈 히말라야" 에 원정 다울라기리, 난다데비 등을 시등하였고 다시 "시킴 히말라야' 의 봉우리 카브르(7,316m)에 올랐는데 그 후 50년간 이 보다 더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어서 그레뽕을 비롯하여 알프스의 어려운 여러 처녀봉을 초등정하여 대륙산악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등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88년 머메리, 헤이스 탱크스, 콜리와 같이 낭가 파르바트를 답사 시등을 계획했으나 불행하게도 실패로 돌아가고(디아밀 벽을 등로로 선택) 목숨마저 잃었다. (1895년) 이것이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 사고이다.


·1892년 영국의 마틴 콘웨이를 대장으로 한 대규모 탐험대의 카라코람 히말라야 등산과 탐험
·1899년 후레쉬 필드의 칸첸중가 일주 답사
·1902년 영 엣켄쉬타인을 대장으로 한 등반대의 K2시등
·1905년 영국의 크로우리 대장으로 한 칸첸중가 시등으로 히말라야의 신비가 베일을 벗길 상태에 놓이게 되었    다.
·1905년 롱 스테프가 가르왈 히말라야의 최고봉 난다데비를 정찰하고 난다콧트를 시등하고

 1907년 에베레스트 등정 계획을 세웠으나 정치적 이유로 좌절되자 가르왈 히말라야의 고봉 트리스푸를 초등. (인류최초 7,000m 급)

 1930년 어범 슈나이더가 네팔 피크와 존슨 피크(7,423m)를 초등함으로

 1883년 그레엄이 오른 카부루(7,316m)보다 더 높은 산에 올랐다.  그러나 이 기록은 47년 만에 기록이 갱신될 정도였다.
·1931년 F 스미스(영) 카메트(7,761m)을 등정하고
·1936년 H 틸만 난다데비(7,817m)를 등정하였다.

 


(2)히말라야 철의 시대


1950년대 들어 모리스 엘조그를 리더로 하는 프랑스대가 안나푸르나 정상을 등정(8,078m) 하였다. 

22회의 도전을 물리쳤던 이 산은 8,000m 급 최초로 등정된 산으로 대장 앨조그, 루이 라슈날이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히말라야 황금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앨조그가 장갑 분실로 인한 동상으로 손과 발가락을 절단 하였으며 4주일간이난 헛소리를 하였다.


1953년 헤르리히 코퍼(독)를 대장으로 독일 등반대가 낭가 파르밧을 도전하게 된다.  이 산은 머메리가 도전한 후(1895년) 58년 만에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정된다.  등정후 헤르만 불은 '아침에 젊은이로 떠났다가 저녁에 늙은이로 내려왔다' 고 할만큼 힘든 산이었다.


이 산은 독일이 1932, 1934, 1937, 1938, 1939 5차에 걸쳐 원정대를 보냈으나 실패 하였고, 1937년 3차시는 7명의 전대원과 9명의 셀파까지 전원 생명을 잃게 되었다.  1895년 머메리 희생 후 희생자의 수가 33명에 달하게 되어 마의 산으로 불리우게된 산이다.


또한 이탈리아의 아브롯치공이 이끈 히말라야 등산대, 미국 등산대의 K2 도전등 여러나라의 등산가들은 히말라야의 처녀봉을 벗기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약 7년간 잠잠하던 산악계가 모든 등산가들의 염원이던 8,000m급 고봉의 등정이 안나푸르나의 등정에 이어 1953년에는 영국의 존 헌트의 등산대에 의해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등정되므로 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준봉 14좌는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일본, 중국 등 각국 등산대에 차례로 등정되어 1964년 허 경(중)이 이끈 중국 등산대가 코사이탄(시샤팡마 8,013m)를 마지막으로 등정함으로써 히말라야 황금의 시대가 주춤하게 된다.  중국과 네팔의 정치적 이유로 입산이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 네팔 정부의 입산 해금령으로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따라서 7,000m급 초등정 8,000m급 재 등정이 활발히 이루어 졌으며 알프스에서 처럼 베리에이션 루트와 벽등반 나아가 슈퍼 알피니즘이라 할 수 있는 알파인 스타일, 단독등반, 연결등반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인간능력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

 


(3) 에베레스트 초등 등반사


1852년 영국 측량국 직원이 자료를 정리하다 제15봉 부근에서 높은 산을 발견하여 측량국 전 장관인 서어 죠오지 에베레스트로 명명하였다.


이 산은 즉각 등산가의 관심을 부러 일으켜 1921년 (1차) 조오지 레이 말로리가 북쪽 능선 롱 부크 빙하 길이 루트를 발견하여 2명의 동료와 수명의 포터를 데리고 노스콜 (북동쪽 등성)위 표고 7,000m 이상 도달 하였으며, 1922년 다시 말로리는 13명의 영국인과 150명의 포터를 데리고 7,625m 까지 도달 하여 캠프를 설치하여 말로리와 대원 2명이 정상 등정을 시도 했으나 산소 부족으로 1시간에 100m 밖에 전진할수 없어서 8,235m에서 등정을 단념한다.


말로리 실패후 영국인 조오프리 부르스와 조오지 핀치 그리고 구르카 병사인 데지벌이 나섰으나 무겁고 효율이 나쁜 산소 장치로 8,306m 까지 올라 정상 근처의 돌을 알아 볼수 있는 곳까지 갔으나 실패하였다.


1924(3차) 300여명의 대원이 참가하였으나 1차, 2차 의 등반 경험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여기에 히말라야 등산의 어려움이 있다.  3번째 공격에서 제5캠프를 7,716m 제6캠프를 8,174m에 설치하고 6월4일 에드워드노튼, 데어도어소머벨이 정상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소머벨은 8,540m에서, 노튼은 8,578m까지 전진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말로리는 체념하지 않고 몬순 내습전에 한 번 더 공격할 준비를 하여 등산 기술을 부족하나 강건하고 열의에 찬 앤드류 어빈과 동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6월6일 둘은 제5캠프 출발, 7일 다음 캠프도착, 8일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행동이 예정보다 늦어져 정상 등정 후 돌아올 시간이 부족한 상태였다.  6캠프로 지원하기 위해 가고 있던 오델이 산 꼭대기 최후의 피라밋 바로 밑 바위 층계를 오르는 것을 본 것이 두사람을 이승에서 마지막 본 것이다.

 

그 후 두 사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정상에 도달 했을까?


그 9년 뒤 1931년 두사람 중 한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피켈이 다음 등반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언제 어떤 상황에서 손에서 빠져 나갔는지 알수는 없다.  이 두사람은 에베레스트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 후 35, 36년 계속 정예 클라이머를 보냈으나 2차 원정시 노오턴이 도달한 고도를 깨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프톤을 대장으로 한 35년의 5차 원정대가 티베트 입국 문제로 에베레스트 공격에는 별 성과가 없었으나 칼타프, 케라스 등 7,000m급 여러 산을 등정하고 서릉을 답사하여 자신이 이끈 1951년의 8차 원정시 웨스턴 쿰, 사우스콜 동남릉 루트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 후 1930년대까지 8,570m 까지 도달한 사람은 7명이며 말로리와 어번은 더 위쪽까지 올라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2차 대전으로 티벳의 국경이 폐쇄되어 접근할 수 없고 네팔은 문호를 개방하였으나 남쪽이라 자료가 없었다.


1950년 미국의 고소순응 전문가 찰즈 S 호스톤 박사가 네팔 쪽 남쪽의 지도를 만들어 탐사를 시작하였다.


1951년에는 영국의 에릭 쉽튼이 이 지역을 탐사 하였고


1952년에 스위스대가 봄 가을 2회에 걸쳐 등반을 시도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53년이 되자 영국은 존 헌트 대령을 대장으로 한 등반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치밀하고 정성들인 등반 준비가 이루어지고 대원들도 많은 시간을 고소순응에 충당했다.  1차 공격은 톰 버딜론과 R.C. 에반스 두사람은 정상 100m 까지 올라갔으나 실패하고 2차 공격대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셀파 텐진 노르게이가 5월 29일 11시 30분 최초 등정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 때 올린 9캠프는 이제까지 무거운 짐을 지어 올린 최고 지점이 되었으며 (8캠프 정상 아래 7,800m 정도) 1차 공격대가 진짜 정상과 등산 중 지형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 등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에베레스트 도전 시작 후 32년 만에 성공한 이 등반은 힐러리와 헌트 대령에게 나이트에 서훈되는 영광도 함께 안겨주었다.

 

 

 

4.국내 등반역사


(1)고대 등반기(고대∼1920)

 

고대인은 산을 신격화하여 높은 산에는 오르려 하지 않았다.


옛날 우리 나라의 등반을 살펴보면 혜초 스님의 723∼727년의 파밀지역 순방은 신앙, 또 고구려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화한 고 선지 장군의 747년의 달콧트고개(4,572m) 진출은 정벌의 형태를 빌린 등산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으며, 삼국시대의 화랑은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산에 올랐으며, 특히 삼국시대에는 산은 종교적 활동의 산실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명산 순례 같은 유랑 등산이 주된 사조였다.


역사에 나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팔도지리지, 여지승람 제작

·청국과 국경분쟁의 해결을 위한 백두산 정계비를 위한 등산 (1712년 음력 5월)
·1751년 초여름 이중환이 택리지 (최초의 인문지리지)발간

·1764년 음력 5월 박종의 백두산 유록 (산행기)
·1809년 정조시 성해응의 동국 명산기 (명산소개)

·1861년 철종 13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23책으로 엮은 최초의 전국지도)


등과 같이 우리나라의 고대 등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등산이 단순한 생활 수단의 형태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개척되어 이조 말기에 이르러 서양 문물의 전래 실학 사상의 보급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그 후 1920년 까지는 일제하에서 모든 영역에 걸쳐 운동이 중단된 시기여서 산악계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의미를 주어 본다면 내일의 산악관을 정립하기 위한 잠재적인 능력의 배양기라고 볼 수 있다.

 


(2)근대 등반기의 태동기(1920∼1930)


일제의 유화정책으로 탐승과 유람 등산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자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1925 미국인 언더우드(원한경) 인수봉 암벽등반

·1926 조선 교육회 - 백두산 등산 기록 (육당 최남선 참석 백두산 참관기 발표)
·1926 한국 임무, 영국 아처(공사관) 인수봉, 도봉산 암벽등반

·1931 안재학 백두산 등보기 - 정계비 문제 민족 울분 토로
·1931 노산 이은상 묘향산 유기

·1933 노산 이은상 설악 행각 발표가 있었으며
1925년 전후하여 서구적인 알피니즘과 순수한 등산운동 기록들이 영화와 서적으로 보급됨과 동시에 서울에 살고 있던 서양인들에 의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에서 암벽 등반이 시작되었으며, 이 같은 외국인들의 근교 암벽 등반은 한국 근대운동의 태동에 직간접 많은 영향을 미쳤다.

 


(3)근대 등반의 형성기(1930∼1945)


이 시기에는 외국의 근대적 등산 운동을 전수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등반기록은


·1931. 1. 일본인 이야마와 이누마에 의해 금강산 비로봉에서 스키 등산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동계등반이다.

·1931. 10. 조선 산악회 창립이 일인을 중심으로 있었다.  일이 중심이지만 순수 산악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회지로 조선산악을 창간하였다.
·1935. 1. 일본 경도제대 산악부 대장 이마니시 킨지가 극지법 사용 동계 백두산 초등

·1936. 1. 경성제대 산악부 동계 한라산 등반 중 일본인 前川 대원이 조난을 당하였는데 이 사고가 우리나라 최초의 조난 사고 기록이다.
·1937. 백령회가 창립(엄흥섭씨 중심) 되어 순수한 한국인만의 산악 단체가 조직 되었다.

·1938. 1. 백령회 금강산 집선봉, 1351봉 암벽 슬라브 초등 (김정태, 엄흥섭)
·1938. 12. 관모봉 북설령, 북수백산 연화봉 동계 초등이 백령회에서

·1939. 1. 설악산 마등령 화채봉 경유 초등반이 조선 산악회에 의해 이루어짐.
·1942. 1. 백령회 적설기 백두산 마천령 산맥 연봉 경유 종주 등반이 있었으며 암벽등반은 서울 근교의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를 중심으로 많은 코스가 개척되었고 금강산에는 집선봉을 위시하여 많은 암벽이 초등 되었으며 답사 위주의 방식에서 탈피 근대적 등반 운동이 전역에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적인 알피니즘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4)근대 등반의 발전기(1945∼1960)


해방과 더불어 이 땅은 새로운 희망으로 충만할 때 1945년 9월 15일 백령회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 산악회가 사회 단체 2호로 창립되었다.  그 뒤 1946년 부산지부 경북지부가 창립되었으며 47년에는 서울대, 세브란스 의대, 한양공대를 주축으로 학생 산악 연맹이 창립되었고 또 학생 스키 연맹이 발족되어 본격적인 근대 등산 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 때의 활동을 살펴보면, 한국산악회는


·1946. 3. 제1차 제주도 종합 학술 조사 등산을 시작으로 1955년 까지 11차에 걸쳐 산악도서를 중심으로 국토규명 학술조사 등산
·1954. 1. 스키 협회 태백산 일대 등산

·1956. 1차 동계 한라산 극지 등반
·1957. 6. 경북 학생산악 연맹 창립

·1962. 4. 대한산악연맹 창립
·1962. 12. 대산련 경북 연맹 창립하여 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암벽등반은 머메리즘에 입각하여 보다 어려운 루트를 개척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955년 서울 문리대 산악부의 설악산 천불동 초등반, 슈타이맨 클럽의 동계 설악산 초등반은 적설기 등반과 초등정의 사조를 국내 산악계에 심게 되었다.

 


(5)히말리즘과 현대 등반(1960∼현재)


이 때의 주요한 변천은 해외등반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1960년 하켄 클럽의 대만 옥산 원정 등반을 깃점으로

1962년 경희대 산악부 다울라기리 II봉 정찰등반
1964년 동국대, 한국산악회의 일본 북알프스 등반이 이루어졌으며 암벽 등반은 프리클라이밍을 위주로 한 등반이 인공 등반으로 변천해 선우중옥씨에 의해 선인봉 박쥐 코스와 인수봉 귀바위 A, B 코스가 개척되었으며 설악산 공룡능선 역시 선우중옥씨 파티에 의해 개척되었다.


인공등반 기술 역시 1965년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수봉 측면 볼트 코스 초등 설악산 12선녀탕 골의 빙폭 토왕성폭포 시등 요델클럽의 선인봉 표범길 설악산 100m 폭 초등 어센트 클럽의 선인봉 동벽, 동계 천화대 7연봉 초등등 K.C.C. 은벽 크로니등 유능한 조직적인 파티의 서울 암봉과 설악산 연봉의 초등반이 잇따랐다.


해외로 뻗으려던 국내 산악운동이 1965. 3. 네팔의 입산 금지령으로 주춤했으나 1969년 해금령에 따라 다시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기록을 보면


·1962. 8. 박철암 다울라기리 II봉 정찰

·1969. 7. 한국산악회의 츄렌히말 정찰대 파견
·1970. 4. 김정섭대 츄렌히말 초등 성공

·1971. 3. 대한산악연맹 로체샤르 원정대 눈, 고소장애 대원의 조난으로 실패
·1971. 4. 김정섭대 마나슬루 원정대 실패

·1972. 4. 김정섭대 마나슬루 재도전 하였으나 히말라야 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사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1977. 9. 15 .12시 50분 김영도 대장이 이끈 등반대가 제3의 극지인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한지 6년 만에 정상에 태극기를 꽂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해외등반 추세와 함께 1960년대 초에는 서구에서 들어온 극지법 등반 방식과 종주 횡단 등의 방식을 사용한 등반이 대학 산악부 및 지방의 몇몇 단체에 의해서 설악, 한라, 지리 등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1960년대 이후는 내적으로는 각급 산악단체의 활발한 등반 활동이 근대등산을 이 땅에 토착화 시켰고 외적으로는 서구의 등반 사조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산악운동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하여 히말라야 및 전세계 곳곳에서 좋은 등반 기록을 갱신하면서 한국의 등반 기술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