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을 빛낸 80명의 선구자들 /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2011. 6. 6. 21:45山情無限/등산학교

 

 

알피니즘을 빛낸 80명의 선구자들(1)  

글 /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고드윈 오스틴 중령Gowin Austen1834∼1923


인도 주재 영국 육군 측량기사. 세계 제2봉 K2(8611m)의 발견자로 K2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856년 몽고메리(Montgomery) 영국공병대 대위가 200㎞ 먼 곳에서 K2의 높이를 측량하고, 그 산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봉임을 밝혀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861년 고드윈은 카라코룸(Karakorum)에 들어가 비아포(Biafo) 빙하와 발토로(Baltoro) 빙하를 발견했고, 이 지역을 탐험하면서 지도를 만들었다.
그는 발토로 빙하를 25㎞나 거슬러 올라가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얼음 피라미드 K2와 마주친다. 고드윈은 이 지역의 여러 고봉에 도전했던 선구적인 탐험가로 발토로 빙하에서 K2에 이르는 루트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다.
한때 K2에 그의 이름을 붙여 마운틴 고드윈 오스틴(Mt, Godwin Austin)이라 명명했으나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까렐Carrel Jean Antoine1829∼1890


장 안뚜안느 까렐은 이태리 출신의 등산가다.
1865년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정 때 정상등정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그는 윔퍼의 뒤를 이어 이틀 뒤인 7월 16일 이태리능선을 통하여 마터호른 제2등을 기록, 초등의 영예를 놓친다.
그는 1858∼1859년 마을 사람들과 마터호른 이태리능선을 최초로 정찰한 이래 죽는 순간까지 윔퍼 이상으로 이 산에 대해 강한 집념을 나타냈다. 그는 마터호른 첫 정찰 후 윔퍼와 틴달(J·Tyndall) 등의 안내인으로 이 산의 등반에 참가하여 틴탈과 함께 삐끄 틴달(Pic Tyndall)까지 올랐다.
그는 조국애가 남다르게 강한 사람으로 이태리 사람이 마터호른을 초등하기를 원하였으므로 이태리 능선으로 등반을 시도했다. 윔퍼는 까렐의 도전에 분개했으나, 곧 화해하여 1874년 마터호른을 함께 오르기도 했다.
1879∼80년에는 남미 안데스 원정에도 그와 함께 했다. 까렐은 1890년 이태리능선으로 후퇴하던 중 푹풍설 속에서 지쳐 사망했다. 그가 죽은 장소에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꼬강



 

 

 

 

 

 

 

 

 

 

 

 

 

 

 

 

 

 

 

 

 

 

 

 

 

 

 

 

꼬강Kogan Claude1926~1959


클로우드 꼬강은 프랑스 남부 출신의 여성 등산가다.
알프스의 여러 어려운 루트를 선등했고, 히말라야·안데스·그린란드에서도 활약했다. 1951년 안데스의 끼따라루(Quitaraju·6040m)를 등반하고, 1952년 살칸타이(Salcantay·6081m)와 기네쉬 히말(Ganesh Himal·7406m)을 초등했다. 1954년 스위스와 프랑스 합동대의 초오유(8153m) 원정에도 참가하여 정상을 공격했으나, 7700m 지점서 기상악화로 퇴각한다. 이 고도는 당시 여성이 오른 최고의 기록이다. 1959년 8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국제여성합동등반대를 조직하여 1954년의 실패를 설욕하기 위해 초오유에 재도전했으나, 4캠프 주위에서 벨기에 여성대원과 함께 눈사태에 쓸려 사망했다.

 

 


꾸지Cauzy Jean1923∼1958


프랑스 산악인. 전자·항공 기술자다.
6급의 등반가로 지적이며 독창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1950년 에르조그(Maurice Herzog)가 지휘하는 안나푸르나(8091m) 원정대에 참가했다.
테레이(Lionel Terray)와 함께 1954년 초모뢴쪼(Chomo lonzo·7790m)를, 1955년 마칼루(8482m)를 각각 초등한다. 1955년 등반 중 낙석에 맞아 타계했다.

 

 


끄로Croz MichelCroz Michel


미쉘 끄로는 프랑스 르뚜르(le Tour) 출신의 안내인이다.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하여 활동기간이 짧았으나, 수많은 훌륭한 초등을 이루어내어 알프스 황금시대를 장식했다. 1864년 바르데 제크렝(Barte desecins), 에끼유다르장띠에르(Aigdargentiere), 1865년 당 블랑슈(Dent Blanche), 그랑 조라스(Grandes Jorasses)의 윔퍼 피크(Whymper Peak) 서봉 초등이 유명하다.
1865년 7월 14일 윔퍼(E·Whymper)의 마터호른(4478m) 원정대에 참가하여 초등에 성공했으나, 하산 도중 7명을 연결했던 로프가 낙석에 맞아 끊어지면서 추락한다. 일행 중 4명이 1200m 아래 마터호른 빙하로 떨어져 죽었는데 끄로도 이때 함께 사망했다.
마터호른은 알프스 4000m급 봉우리 중 마지막 난봉으로 남겨졌던 봉우리다. 이때의 등반으로 알프스 황금시대(피크 헌팅시대)가 막을 내리고 은의 시대가 개막된다.

 

 



 ◇노턴



 

 

 

 

 

 

 

 

 

 

 

 

 

 

 

 

 

 

 

 

 

 

 

 

 

 

 

  

노턴Norton Edward Felix1884∼1954


에드워드 페릭스 노턴은 1924년 영국3차 에베레스트(8850m) 원정대의 대장이었다.
1854년 난공불락으로 여겨왔던 베터호른(Wetterhorn·3710m)을 초등하여 알프스 황금시대를 개막시킨 알프레드 윌스(Wills Alfred)경의 손자다. 그는 조부의 산장에서 등반활동에 눈을 떴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인으로 인도에서 복무했다.
1922년 2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하여 말로리(G·L·Mallory)·소머벨(Somervell) 등과 함께 무산소로 8225m까지 진출했다.
인류가 산소 보급기 없이 8000m 선을 넘은 최초의 기록이다. 1924년 3차 원정에서는 병으로 쓰러진 부르스(C·Bruce) 대장을 대신해서 원정대장이 되었으며 그도 직접 등반에 참가해 북면 대꿀르와르의 8572m까지 올랐으나 말로리와 어빈(A·Irvine)이 정상 공격 중에 행방불명되자 철수한다. 당시 노턴이 오른 8572m의 기록은 1953년 에베레스트가 정복되기 전까지 인간이 오른 최고 높이였다.
에베레스트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이후 에베레스트 원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53년 헌트(J·Hunt)대의 초등정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1925년 발행된 'The Fight for EVEREST' (1924)가 있다.

 

 


다이렌퍼스Dyhrenfurth Norman1919∼


미국 산악인. 노만 다이렌 퍼스는 히말라야 등반사의 권위자인 스위스의 군터 오스카 디렌푸르트(G·O·Dyhrenfurth)의 아들이다. 스위스 태생으로 미국에 귀화하여 영화제작에 종사하면서 부친과 함께 히말라야 탐험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2년 스위스 2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원 19명·비용 40만불·장비와 식량 27톤·포터 909명·셰르파 32명·총인원 1000명)를 조직하여 지휘한다.
이 등반대는 에베레스트 등반 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트래버스를 실현한 팀이다.
각기 다른 루트로 오른 두 팀이 정상에서 합류하여 함께 하산한다. 위테이커(J·Whittaker)와 셰르파가 1차 공격에 성공하자, 시간·장비·대원이 충분했으므로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서릉팀과 반대편인 남동릉팀으로 두 팀을 나누어 오르게 한 뒤, 정상에서 랑데부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언솔드(W·Unsold)와 혼바인(T·Hornbein)이 서릉팀으로 등정한 후, 남동릉으로 오른 비숍·저스타드와 정상에서 만난 후 함께 하산하는 획기적인 횡단기록을 성공시킨다. 서릉의 ‘혼바인 꿀르와르’는 당시의 혼바인 대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늦은 시간에 정상에서 합류한 네 사람은 밤12시에 8500m 고소에서 맨몸으로 비박하고, 사고 없이 하산했다.
그 후, 다이렌퍼스는 1971년 국제합동대를 조직하여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팀워크 부재로 인한 대원들간의 불화와 질병, 악천 후 등이 원인이 되어 실패한다.

 

 


데지오Desio Ardito1897∼?


아르디토 데지오는 이태리 밀라노대학의 지질학 교수이자 등산가다.
K2 초등 당시 이태리원정대의 대장을 지낸 인물이다. 알프스와 카라코룸(Karakorum) 등의 산악지대에서 지리학 및 지질학 조사를 했다.
1954년 이태리는 45년 전 아브루찌공(Duke of Abruzzi)이 시도했다가 실패한 K2 초등정을 목표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한다. 대장인 데지오를 포함해서 11명의 등반대원과 3명의 과학자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폐렴으로 인한 대원 한 명의 사망과 악천후를 무릅쓰고 초등에 성공한다.
콤파뇨니(A·Compagnoni)와 라체델리(L·Lacedelli)는 정상 공격 중 산소가 바닥나자 산소 없이 등반을 계속해서 정상을 밟았다.(후일 산소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이태리의 초등정 성공은 데지오의 뛰어난 조직력과 대원들간의 팀워크가 밑바탕이 되었다.
당시 이태리원정대는 팀 전체의 팀워크와 단결된 정신을 존중해서 정상에 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등정자 두 사람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뒬퍼



 

 

 

 

 

 

 

 

 

 

 

 

 

 

 

 

 

 

 

 

 

 

 

 

 

 

 

 

뒬퍼Dulfer·Haken1893∼1915


한스 뒬퍼는 독일의 선구적인 등반가다.
뮌헨에서 의학과 법률학을 전공했다. 마우어 하켄(Mauer Haken)과 오토 헤르조그(Otto Herzog)가 고안한 카라비너, 뒬퍼가 개발한 뒬퍼지츠(Dulfersitz) 기술 등 삼위일체를 이룬 인공등반 기술을 동부알프스 북부지방에서 실용화시켰고, 난이등급-뒬퍼가 초안한 난이등급은 후에 벨첸 바하(W·Welzenbach)에 의해 완성된다-을 초안했다.
레이백(Layback) 등반기술과 로프를 이용한 뒬퍼지츠라는 현수하강 기술도 개발했다. 1912년 플라이쉬방크(Fleishbbank) 동벽, 1913년 치마그란데(Cimagrande) 서벽을 등반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그는 1912년부터 22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할 때까지 3년 동안에 인공등반기술을 체계화한다. 뒬퍼가 고안한 뒬퍼지츠는 암벽에서 자일에 매달려 하강하거나 루트를 변경할 때 옆으로 이동하는 펜듈럼(Pen-dulum 진자식 횡단기술)까지도 포함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뒬퍼는 등반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음악적인 소양도 풍부했던 인물이다.

 

 


드 소쉬르de Saussure H· B1740∼1799


제네바(Geneve)의 부유한 언어학자이자 자연과학자다.
근대 알피니즘의 아버지라 불린다. 1760년 샤모니를 방문하여 몽블랑(4807m) 초등자에게 상금을 제안해 이 산의 초등에 크게 기여했다. 몽블랑은 그가 제안한 26년 후인 1786년 8월 8일에 수정 채취업자인 짝 발마(Jacgue Balmat)와 의사인 미셸 빠가르(Michel Gabriel Paccard)에 의해 초등된다. 소쉬르는 몽블랑 초등정 1년 후인 1787년에 올라 제2등을 기록한다.
그는 학문적인 목적으로 알프스를 두루 여행했다. 그가 근대 등반의 선구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알프스 역사가인 쿨리지(Coolidge William Augustus Brevoor)는 그와 플라시두스아 스폐사 신부(Father Placidus a Specha)로부터 근대 알피니즘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현재 샤모니에는 몽블랑 등정을 기념하는 드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이 서있다.
저서 : 알프스 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가 담긴 책이다.

 

 


디렌푸르트Dyhrenfurth 1886∼1975


군터 오스카 디렌푸르트는 독일 출신으로 1939년에 스위스로 귀화한 고생물 및 지질학자이자 산악인이다. 1963년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끈 노만 다이렌퍼스의 아버지이며, 그의 부인은 씨아캉리(Siakangri 7315m) 서봉을 초등정하여 당시 여성으로는 최고봉 등정 기록을 세웠다. 1930년 국제원정대를 조직하여 캉첸중가(8598m) 서면에 도전했으나 눈사태로 실패하고, 씨아캉리와 종상피크(Jongsang Peak 7473m)를 초등했다.
40여 년간의 히말라야 연구로 이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독일 태생인 디렌푸르트의 부친은 독일 내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그는 이런 부친의 막강한 부를 배경으로 히말라야 개척기에 여러 차례의 원정과 저술을 통하여 히말라야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부레스라우 대학에서 14년간 지질학과 고생물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히틀러 나치 정권이 집권하자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중립국인 스위스로 망명하여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히말라야를 무대로 하는 영화제작 사업에 투자하면서 가산을 탕진했다.
히말라야 문헌 중 1952년 발간된 'zum Dritten Pol'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The Third Pole-제3의 극지'란 제목의 영역판으로 출간되었다.

 

 


딤베르거Diemberger Kurt1932∼


쿠르트 딤베르거는 오스트리아 등반가다.
1942년경부터 마터호른, 아이거(Eiger)를 비롯하여 알프스에서 많은 등반활동을 했다. 1957년 마르크 슈묵크(Marcus Schmuck)가 이끄는 소규모의 브로드피크(8047m) 원정대 일원으로 참가하여 헬만 불(H·Buhl)과 함께 정상에 올라 초등정을 이루었다. 이는 8000m 봉우리에서 이룩한 최초의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 등반이다.
그들은 포터와 산소 없이 등반했다. 그는 이 등반을 마치고 헬만 불과 함께 초골리사(Chogolisa·7665m)를 등반했으나, 헬만 불이 눈처마 붕괴로 사망한다.
1960년 다울라기리(8167m)를 초등함으로써 당시로서는 8000m급 거봉을 2개 이상 오른 몇 안돼는 등반가가 되었다. 그는 힌두 쿠시(Hindu Kush)의 티리히 미르(Tirich Mir 7708m) 서벽을 등반하고, 티리히 서(西)4봉을 초등했고, 그린란드·아프리카·안데스에서도 활동하였다. 또 1978년 미국의 마칼루(8481m)와 에베레스트(8850m) 원정대에도 참가하였다.
커빙턴(M·Covington)이 1980년에 설립한 판타지 리지 알피니즘(Fantasy Ridge Alpinism)의 등산학교 초청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1986년까지 브로드피크·다울라기리·마칼루·에베레스트·가셔브룸2·K2 등 8000m봉 6개를 등정했다. 딤베르거는 1950년대 초기에 이미 슈퍼 알피니즘을 실천한 현대와 근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등산가다.
그는 1986년 한국대의 K2 원정 때, 한국대가 힘들게 작업해 놓은 비좁은 캠프 사이트 한가운데를 비집고 들어와 텐트를 쳐서 눈총을 받기도 했다.
당시 54세의 노장으로 영국 여성 줄리 튜리스(Tulis)와 K2를 등정한 후 늦은 시간까지 하산하던 중 구조대에 의해 전진 캠프에서 구출되어 한국대의 치료를 받고 하산한다. 결국 튜리스는 사망했고, 그는 동상에 걸린 손가락 2개를 절단했다.
저서 'Summits and Secrets' 1971년 발행.

 

 


오이겐 귀도 라머 Lammer Eugen Guido1862∼1945


오이겐 귀도 라머는 오스트리아의 등산가이자 비엔나 대학 교수였다.
그는 로리아(A·Lorria)와 함께 단독등반, 가이드레스 등반(Guideless Climbing) 등 대담한 등반 활동을 한 등산가다. 그는 낙석과 같은 외적 위험도 등반의 일부라고 여겼으며, 산장을 포함한 모든 인공적 구조물의 철거를 주장할 정도로 자연주의를 신봉했다. 20대 전후에는 거의가 단독등반으로 일관했으며, 기존의 루트를 피하여 새로운 루트 개척에 도전하였다.
1884년 푸스슈타인(Fussteine) 북동릉, 1885년 그로스페네디거(Grossvenediger) 서벽을 초등했고, 1887년에는 바이스호른(Weisshorn 4506m), 찌나로트호른(Zinarrothorn 4221m)을 단독등반했다. 마터호른 서벽(4478m) 등반을 시도하던 중 눈사태를 만났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893년 그로스페네디거 북서벽, 1883년 21세 때 그로스글로크너(Grossglockner 3798m) 동벽을 초등한다. 1898년에는 힌테러 브록코겔(Hinterer Broclkogel) 북릉을 초등했다. 특히 이 등반은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등반이라 할 수 있다. 라머는 루드빅푸르첼러(Ludwigpurtscheller), 에밀찌그몬디(E·zsigmondy) 등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등반을 거부하고 극한적인 벽등반을 추구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자기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죽기 아니면 살기(Do or Die)’식의 극적인 등반태도는 1930년대의 전통적 등반방식을 고수하려는 등반가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으나, 등반 장비의 개발로 이러한 논쟁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19세기말의 독일·오스트리아계 등산가의 한사람으로 투쟁적인 등산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등산이란 스스로 위험 속에 뛰어 들어 산의 위험과 싸우는 것이야말로 영웅적인 행위이며, 인간 정신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며, 이것이 등산의 최고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니체(F·W· Nietzsche)를 숭배했고, 말년에는 열렬한 나치주의자가 되었다.
저서 'Jungborn': 극한을 추구하는 인간 행위와 등반 활동을 신비적으로 묘사한 내용의 책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춘의 샘>이란 제호의 역서가 간행되었다.
또한 그는 과학적 관리방법을 등반 훈련에 활용하기 위해 <등산가를 위한 테일러 시스템>을 집필하였다.



라슈날, 루이 Lachenal, Louis 1920∼1955


프랑스 산악인. 알프스 가이드 출신으로 1948년 샤모니 가이드조합 멤버가 되었다.
1950년 에르조그(M. Her-zog)와 같이 안나푸르나(8091m) 초등정을 이룩했다. 이는 인류가 8000m에 오른 최초의 거봉 등정 기록이다. 그와 에르조그는 정상 등정 후 폭풍설 속을 헤매며 하산하던 중 5캠프에 대기 중이던 레뷔파와 테레이에 의해 구조되었다. 목숨을 건 이들의 하산과정은 영광과 비극이 점철된 극적인 드라마였다.
당시 그들은 정상 등정 전에 복용한 흥분제 멕시톤(Maxiton)의 영향과 심한 동상으로 자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라슈날의 발가락 동상은 그 후 14차례의 절단 수술을 받은 후 회복됐다.
1955년 에르조그와 함께 마리넬리 꿀르와르를 통해 몬테로자(Monte Rosa)를 등정하였으며, 이들은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자신들이 다시 등반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그해 말 라슈날은 발레블랑쉬(Vall’ee Blanche)의 빙하에서 스키활강 도중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사한다.
그의 등반 경력을 살펴보면 1946년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측릉 제4등, 1947년 아이거북벽 제2등, 트레올레 북벽 제2등, 쁘레디엘 서벽 제2등, 1949년 피즈바딜레 북벽은 제6등으로 7시간만에 등반했다
저서 'Carnetss du vertige' 1956년(모리스 에르조그가 편집) 'Vertigo Note Books' (영문판)

 

 



 ◇ 레뷔파, 가스통



 

 

 

 

 

 

 

 

 

 

 

 

 

 

 

 

 

 

 

 

 

 

 

 

레뷔파, 가스통 Rebuffat Caston 1921∼1985


프랑스를 대표하는 산악인 중의 한사람. 유명한 알프스 가이드다.
프랑스 마르세이유(Marseille)에서 출생, 깔랑끄(Calangue)에서 등반활동을 시작하여 1942년 가이드가 되었고, 1946년 샤모니 안내인협회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육군 고산병학교를 졸업했으며, 국립스키등산학교(ENSA)강사에 선임됐으나 가이드 생활을 위해 강사직을 포기했다.
레뷔파는 1920∼30년대에 초등되었던 알프스의 어려운 루트들을 1940년대에 재등하여 주목받기 시작한다. 1945년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능(Walker spur) 2등, 1949년 피츠바딜레(Piz Badile), 그리고 1952년 아이거 북벽(Eiger Wand),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안나푸르나 초등반에도 참가했다.
당시 리오넬 테레이(L. Terray)와 한조가 되어 5캠프에 대기하던 중 정상을 오르고 거의 빈사상태에서 하산하던 에르조그와 라슈날을 구조한다.
4캠프로 향하여 괴로운 하산을 시작할 때 레뷔파는 고글을 잃어버려 설맹에 걸린 상태에서 장님처럼 헤매면서 동상에 걸린 동료를 업고 하산했다.
1956년 에귀뒤미디(Aigdu Midi)에 레뷔파 루트를 개척했으며, 국립등산스키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는 등반활동 이외에도 많은 산악저술과 영화제작에 몰두하여 11권의 책과 4편의 산악영화를 제작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설과 암>, <별빛과 폭풍설(Etoiles Tempetes)>등이 번역되어 많은 산악인들에게 사랑 받았다. <별빛과 폭풍설>은 산악문학을 한 차원 높인 책으로 수많은 독자들이 산을 동경하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설과 암>에서 첫 산행에서 맛보았던 흥분을 다음과 같은 간결한 문체로 전달하고 있다.
“동반자의 선택은 등반의 선택만큼 중요하다.”
또한 그가 평생을 바쳐온 등반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겨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산은 하나의 다른 세계다. 그것은 지구의 일부라기보다는 동떨어져 독립된 신비의 왕국인 것이다.
이 왕국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다.”
또한 <설과 암>에서는 기술 위주의 등반에 집착하려는 최근의 경향을 꼬집기라도 하듯이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기술개발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테크닉은 등정의 감격을 위한 최종 수단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산의 세계는 체육관의 스케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로 다가서는 길은 얼마나 먼가? 알피니스트들은 강한 근육, 강철같은 손가락, 완벽한 테크닉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지만 이러한 것은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알피니스트는 무엇보다 먼저 생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육체와 영혼이 있다. 높은 봉우리는 인간에게 활동과 명상을 제시하고, 인간 속에 잠들어 있는 꿈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의 <하늘과 땅(Entre Terre et Ciel)>은 영화로 만들어져 1961년 이탈리아 트렌토(Trento)에서 열린 제10회 국제산악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레뷔파가 산악계에 남긴 공적은 직업가이드로서의 등반활동 뿐만 아니라 저서와 영화를 통해 등산의 대중화에 성공함으로써 산악계와 일반인의 의식을 바꾸어 놓은 점에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속에서 수많은 금언들을 쏟아냈다. 한때 레뷔파는 우리나라 50∼60대 산악인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의 역서 <설과 암>(교진사)은 산악인들의 애독서였으며, 성서와 같은 존재였다. 빨간 실크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니커보커 차림에 눈송이 모양의 무늬를 넣은 검정바탕의 스웨터 차림을 한 모습은 산악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몽블랑 마시프>라는 그의 저서 표지에 등장하는 로프를 손에 감아쥐고 침봉 끝에 서있는 사진은 수많은 젊은 클라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9년 동안 암으로 고생하다가 1985년 알프스의 별빛으로 승화했다.
저서 'Etoiles et Tempetes' 1954년, 'Du Mont Blanc a 1Himalaya' 1955년, 'Neige etroc' 1959년, 'Entre Terre et ciel' 1961년, 'Cervin, cime Exemplaire' 1965년, 'Glace Neige et Roc' 1970년, 'Mon Blanc Massif' 1975년

 

 


레이, 기도 Rey Guido 1861∼1935


곡예등반(Acrobatic climb- ing)을 보급한 이탈리아 등산가다.
북이탈리아 트리노 출신으로 실업가·작가·탐험가이기도 하다.
유명 산악사진작가 겸 탐험가인 빅토리오 셀라(V. Sella)와 사촌간이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에 걸쳐 알프스에서 가이드 마키냐 형제와 함께 폭넓은 등반 활동을 했다.
당시 새로운 등반 방식인 인공등반을 추구한 대표적인 등산가다. 그는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 등지의 여러 봉을 등반했고, 몬테로사(Monte Rosa)와 마터호른(Materhorn) 등반에 특히 열중했다. 1890년부터 마터호른의 푸르겐 능(Furrgen Ridge)에 수차례 도전하였으나 실패했고, 1899년 에뜨리에(Etrier·줄사다리)를 사용해서 남동능선으로 등반 성공했다. 푸르겐 능은 머메리가 1880년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능선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가 처음 등반을 시작했을 때는 가이드 없이 했으나 1885년 콜뒤제앙 등반 중에 동생을 잃고 마키냐 형제를 가이드로 고용하여 많은 산행을 함께 하면서 평생 동안 깊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오르기 힘든 암벽구간에서 인공등반을 최초로 시도하면서 줄사다리와 피톤을 사용했다.
당시 고전적인 등반을 추구하던 영국인들의 냉소와 비아냥거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산을 새로운 방식으로 오른다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다.
20대엔 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에서, 30대엔 몬테로자와 마터호른 주변에서, 40대엔 샤모니와 돌로미테 주변에서 활동하면서 곡예등반을 보급했다.
50대엔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등산을 그만두고, 마터호른이 바라보이는 산장에서 산을 음미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몬테로자의 크레스타 레이(Cresta Rey)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그의 부상은 1차대전 중에 적십자활동을 하다가 입은 교통사고였으며, 등산 활동을 마친 뒤에는 평생을 즐겨 오르던 마터호른 가까이에서 살면서 마터호른을 초등한 에드워드 윔퍼를 흠모하고 존경하면서 산장에서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다가 사후 고향 트리노에 묻혔다.
저서 'The Matter horn' 1907년, 'peaks and precipices' 1914년

 

 


로빈스, 로열 Robbins, Royal 1936∼


미국의 전설적인 탁월한 클라이머다. 요세미티와 알프스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암벽등반에서 등반 윤리를 강조한 자유등반의 대표주자다.
로빈스는 1957년 5일간에 걸쳐 요세미티의 하프돔(Half Dom) 북서벽에 루트를 개척했고, 1959년 엘캐피탄(Elcapitan)의 살라데월(Sala the Wall)을 자유등반으로 개척했으며, 1964년에는 노스아메리카월(North America Wall)을 취나드, 프로스트와 함께 볼트 38개로 9일 만에 올라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7년에는 엘캐피탄의 서벽도 개척했다.
1965년에는 등반무대를 알프스로 옮겨 존 할린과 함께 드류(Dru) 서벽과 남서 필라(South west pillar) 루트를 개척했으며, 유럽에 요세미티 등반기술과 신장비를 전파했다. 이 루트는 고도의 기술과 담력을 필요로 하는 루트로 스카이훅(Sky Hook), 러프(Rurp), 봉(Bong)을 비롯한 혁신적인 요세미티 등산장비가 사용되었다.
1967년 엘캐피탄의 서벽 등반에서는 주마를 이용한 색홀링(Sac Hauling)기술을 개발하여 등정하였으며, 취나드와 함께 클린 클라이밍(Clean climbing)을 제창했다.
1968년 엘캐피탄의 뮤어월(Muir Wall)을 10여일에 걸쳐 단독 초등반했다. 1970년에는 하딩(W. Harding)이 300여 개의 볼트를 박으며 개척한 엘캐피탄의 얼리모닝 라이트(Earlymorning Light)를 6일에 걸쳐 재등반하면서 하딩이 초등시 박아놓은 대부분의 볼트를 제거해 하딩과 심한 논쟁을 벌인다. 그는 거벽등반에서 두 개의 주마를 이용한 색홀링 시스템을 개발했고, 암장의 훼손을 줄이는 너트(Nut)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1967년 엘캐피탄의 서벽 등반에 이런 점들을 활용해 클린 클라이밍을 시도하였다.
그는 거벽등반에 이용되었던 시지택틱스(Siege tactics) 방법을 반대했으며, 일회 돌파론(Single push theory)을 주장했다. 등반활동의 창조성과 예술성, 윤리성을 강조한 자유등반의 대표자로 손꼽힌다. 러버즈 리프(lovers Leap) 등산학교를 세우고 요세미티 계곡에 로빈스 등산장비점도 운영했다.

 

 


롱스타프, 토머스 조오지 Longstaff Thomas George 1875∼1964


영국의 위대한 초기 히말라야 탐험가·의사·박물학자다.
알프스·히말라야·코카서스·캐나디언 록키·셀커크스 이외에도 북극탐험을 5차례, 히말라야 탐험을 6차례나 한 인물이다.
그는 이튼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 1895년 알프스지역을 여행했고, 1903년 코카서스 탐험시 쉬카라 서봉(Shkara West·5200m)을 초등정하였으며, 1905년에는 히말라야 난다데비(Nanda Davi)를 돌아 상투아리(Sanctuary) 부근까지 탐험한 후 난다데비 동봉(7434m)과 난다코트(Nanda Kot·6867m)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1907년 리쉬강가 강(River Rish Ganga)을 통해 상투아리에 들어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트리슐(Trisul, 7122m)을 초등하였다.
이 등정이 인류 최초의 7000m봉 등정 기록이다. 1909년 카라코룸 지역에 들어가 시아첸 빙하(Siachen Glacier)와 테람캉그리(Teram kangri·7463m)를 발견했다. 1910년 캐나디언 록키의 아씨나보인(Assiniboine·3618m)을 등정했다. 이후 군에 입대하여 심라총영사부 참모장교를 역임했으며, 1916년에는 인도변방국경경비대 길기트 지역 부사령관까지 역임한 후 1919년에 퇴임했다. 1922년에는 영국의 2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기술고문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수많은 탐험체험들을 잡지에 기고했으며, 한 인간으로서는 유례 없는 탐험과 여행을 했다. 그는 자유스러운 여행과 탐험을 즐겼으며, 그 지방의 문화와 원주민을 사랑하고 그들과 잘 융합했다. 1929년 그가 이룩한 히말라야 업적에 대해 왕립지리학협회가 골든메달을 수여했다.
후에 왕립지리학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알파인클럽 회장을 지냈다.저서 'This my Voyage' 1949년


 

 ◇ 말로리,조오지 허버트 레이



 

 

 

 

 

 

 

 

 

 

 

 

 

 

 

 

 

 

 

 

 

 

 

 

말로리, 조오지 허버트 레이 Mallory George Herbert Leigh 1886∼1924


에베레스트와 함께 영원한 미스터리를 남긴 영국산악계의 전설적인 인물.
영국 체셔루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교사생활을 했다. 영국과 알프스에서 등산 활동을 한 뒤 초기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여하여 제1차(1921년), 제2차(1922년), 제3차(1924년)까지 연속하여 원정대에 참가했다. 그에게 등산을 가르친 사람은 영국 최고의 산악인으로 꼽히는 제프리원스롭 영(Young Geofrry winthrop)이다. 윈스롭 영은 1차대전 중 한쪽 다리를 잃고도 의족으로 마터호른을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두드러진 등반기록은 없으나 인상적인 외모와 성격, 지적이고 재치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어느 등산가도 그만큼 많은 일화나 미스터리를 남긴 등산가는 없었다. 오늘날 만인에게 회자되는 “Because it is there” 라는 말은 그가 남긴 명언이다.
이 말은 3차 원정을 떠나기 전에 필라델피아의 한 강연에서 청중 중 어느 부인이 “왜 에베레스트에 올라가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한 말이다. 그는 이 말을 남긴 후 제3차 원정에서 어빈과 함께 6캠프(8220m)를 떠난 후 정상 부위의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춘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부터 75년이 지난 1999년 그의 시체가 정상 부위에서 발견되어 그의 망령은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21년 정찰 위주의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2·3차에서도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산악계의 행운아로 불려졌다. 거대한 에베레스트는 그를 압도했다. 그는 북면으로의 등정 가능성을 확인하고 웨스턴 쿰1(western cwm·1953년 헌트가 이끄는 초등대는 웨스턴 쿰을 통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을 통과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말로리는 1924년 노턴(E.F Norton)을 대장으로 한 3차 원정에서 6월 8일 동료 어빈(A.C Irvine)과 6캠프(8220m)를 떠나 정상 등정 시도 중에 실종되었다. 당시 6캠프에 있던 오델(N.E. odell)은 구름 사이로 북동능선 상에서 움직이는 그들을 보았으나 바람이 불고 구름이 잠깐 가린 후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구름이 다시 걷혔을 때 그들의 모습은 사라진 후였으며,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고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과연 그들은 정상을 밟고 하산 중에 사고를 당한 것인가? 이 문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의문을 증폭시켜왔다.
1933년 영국의 4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북동릉 8229m지점에서 9년 전의 피켈 한 자루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1924년에 실종된 어빈의 것으로 밝혀졌다. 1953년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힐러리(E.P. Hillary)와 셰르파 텐징(Tenzing Norgay)은 말로리와 어빈이 정상에 오른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1960년 중국의 초모랑마(Chomolungma·8850m)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사점춘(史占春)은 1981년 LA타임지와 인터뷰에서 그의 대원이 북동릉 8500m 지점서 피켈자루로 보이는 나무 방망이와 로프를 발견하였으며, 수백m 밑에서는 산소봄베 2개를 찾았는데 그중 하나에 ‘영국제’라고 씌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말로리가 정상을 밟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결과적으로 사고는 8500m지점에서 일어났고, 말로리와 어빈은 이 지점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말로리 시신 탐색에 나선 다국적 탐색대는 에릭 시몬스(Eric Simonson) 대장 지휘하에 원정에 나섰다.
과연 누가 에베레스트 최초 정복자였는지 밝혀내려는 일념으로 수색에 나선 이들은 5월 3일 에베레스트 북쪽 능선에서 실종 75년 만에 말로리의 시체를 찾아냈고, 시체 발굴기는 란 책으로 발간됐다.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말로리의 정상 등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시체 발굴에 성공한 에릭시몬스 등반대는 중국 산악인 왕홍바오의 진술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왕홍바오는 지난 1975년 에베레스트 등정 중 북쪽 루트에서 세계대전 이전 차림새의 영국인 시체를 목격했다며 옷에 손을 대자 바스러졌다고 전해주었다.
말로리의 존재를 몰랐던 그는 이 사실을 1979년에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일본인 하세가와에게 처음 알렸으나 하세가와는 바로 다음날 눈사태로 사망해 위치 단서가 사라지고 말았다.
에베레스트를 두 번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는 지에 기고한 기사에서 말로리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매스너가 주장하는 실패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해발 8,500m에 있는 수직의 세컨드 스텝은 당시의 열악한 장비로는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세계대전 어떤 원정대도 돌파하지 못한 지점으로 1975년 중국대가 알루미늄 사다리와 하켄을 사용해서 돌파한 곳으로 지금도 이 지점은 자유등반을 허락지 않는 곳이다.
당시 징이 박힌 등산화와 20㎞의 배낭을 멘 채 이곳을 돌파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 앞선다고 했으며, 오후 늦은 시간에 이 지점에 도착한 말로리는 식수와 산소가 바닥이 났고, 산소가 없는 죽음의 지대에서 오래 머문 여파로 근육이 풀리고 마취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움직였다는 것은 어떤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와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결국 그들은 등정에 실패했고, 하산 도중 사망했음이 분명하다고 했다. 말로리 시체가 발견된 지점은 그들이 세컨드 스텝에서 실패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했다.
또한 그의 고글이 주머니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고는 일몰 후 어둠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말로리의 시체는 유족의 뜻에 따라 수색대가 에베레스트 북쪽 능선에 안장하고 그 장소는 비밀에 부쳤다. 리버트슨(D.Rebertson)은 그를 추모하여 1969년에 'George Mallory' 라는 책을 썼으며, 듀드레이 그린(Dudley Green)은 1990년에 'Mallory of Everest'라는 전기물을 펴냈다.
라인홀드 메스너는 그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친 '에베레스트 미스테리' (삶과 꿈)라는 책을 펴냈다.

1 쿰(Cwn) : 독일어권의 카르(Kar)와 같은 의미. 영·불권에서는 서크(Cirque)라고 부른다. 말발굽 모양으로 빙하가 침식되어 생기는 반원형의 지형.



 

 ◇ 린 힐



 

 

 

 

 

 

 

 

 

 

 

 

 

 

 

 

 

 

 

 

 

린 힐 Lynn Hill 1961∼


1961년 미시건주에서 출생. 미국을 대표하는 전문 여성 자유등반가다. 암벽등반의 뛰어난 업적 때문에 1984년 미국 알파인클럽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세계 최강의 남성 클라이머들조차도 이룩해 내지 못한 엘캐피탄의 노즈(Nose)를 자유등반으로 올랐다. 1994년 루트를 프리화하기 위해 사전연습을 한 뒤 그레이트 루프(Great Roof)피치만을 빼고 나머지 모든 피치를 자유등반으로 올랐다.
스티브 셔튼의 확보를 받으며 등반을 시작한 그녀는 9월 19일 저녁 10시부터 등반을 시작, 23시간 동안 쉬지 않고 모든 피치를 선등으로 마무리 한 뒤, 다음날 저녁 9시에 등반을 끝냈다.
총 34마디의 노즈는 1957년 워랜 하딩이 다양한 인공등반기술을 구사하여 초등했던 루트로 그녀의 자유등반으로 최난도 피치의 등급이 5.13b로 매겨졌다.
그녀는 1995년 키르키즈스탄의 악수산군에서 그랙 차일드와 함께 등반을 하면서 러시아타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크랙을 28시간 동안 전 구간을 자유등반(5.12급)했다.
또한 알렉스 로우와 함께 약 1200m의 PK4810을 자유등반으로 초등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일 동안 이루어진 이 등반은 5.12b급의 고난도 루트개척이었다. 그녀는 1986년부터 12차례의 각종 국제자유등반대회에 나가 9차례나 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준 슈퍼우먼이다.

 

 


마끼 아리쓰네 1894~미상


1920년대 유럽 알프스에서 활동한 일본을 대표하는 산악인.
게이오(慶應)대학 출신으로 미국과 영국에 유학했다.
영국에서 ‘일본등산의 아버지’라 불리는 웨스턴(W.Weston)을 만나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권유로 스위스로 건너가 그린델발트(Glindel wald)를 중심으로 등산 활동을 시작한다.
1920년 베터호른(wetterhorn)과 아이거(Eiger)를 오르고, 1921년 몬테 로자(Monte Rosa)와 마터호른(Matterhorn)을 오른 후 아이거 동릉을 초등했다.
그해 말 귀국하여 일본에 본격적인 알프스식 등반방식을 소개하여 일본의 등반기술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25년 일본 최초의 해외원정대를 이끌고 캐나디언 로키(canadian Rockies)에 가서 앨버타(Mt, Alberta·3619m)를 초등했다.
1950년대 초 일본이 히말라야 8000m급 처녀봉인 마나슬루(Manaslu·8481m) 원정을 계획하는데, 그의 주도하에 히말라야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52년 첫 정찰 후 1954년과 1955년 두 번의 원정이 있었으나 원주민들과의 불화로 실패한다. 1956년 그를 대장으로 하는 거국적인 원정대가 조직되어 마나슬루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원정의 성공은 일본의 히말라야 원정에 불씨를 지피는 계기를 만든다.
그는 일본산악회의 제4대와 7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저서 <산행> <피켈의 추억> <마나슬루 등정기> <나의 산행> <마나슬루, 소년 소녀를 위해서>

 

 


마느뇨, 기도 Magnone, Guido 1918~미상


1950년대에 활동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산악인.
알프스 최후 과제로 불리던 쁘띠드류(Petit Dru)서벽을 1952년 7월에 초등하여 유명해졌다. 그는 이 등반에서 250개의 피톤을 사용했다. 쁘띠드류 서벽등반은 북면으로부터 볼트를 박아가며 줄사다리를 사용해서 서벽으로 진입 등반에 성공했다. 이는 1950년대 등반 활동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었다.
1951년 12월 리오넬 테레이(L.Terray)와 함께 남미 파타고니아(Patagonia)에 있는 난이도 6A1인 피츠로이(Fitz Roy·3441m) 침봉에 고정 로프를 설치하고, 1952년 2월에 초등정에 성공했다.
1954년 마칼루(8481m)를 정찰한 후 1955년 프랑코(J, Franco)가 이끄는 마칼루원정대에 참가하여 9명의 전 대원이 등정에 성공한다.
이 등반은 히말라야 원정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완벽한 등반이었다. 이때의 등반대원들은 당대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쿠지(couzy), 테레이, 프랑코, 마뇨느 등이었다.
1956년에는 무즈타그타워(Muztagh Tower·7232m) 남동릉을 초등반했다.
1959년 프랑코가 이끄는 자누(Jannu·7710m)원정에 참가해 테레이와 함께 정상에 섰다. 저서 'La facewdes Drus' (1953)

 


 

 ◇ 머메리, 앨버트 프레드릭



 

 

 

 

 

 

 

 

 

 

 

 

 

 

 

 

 

 

 

 

 

 

 

머메리, 앨버트 프레드릭 Mummery, Albert Frederick 1855~1895


현대등반의 기초를 다졌으며 영국산악인 최초로 8000m거봉에 도전했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신화적인 인물이다, 콘웨이(W. Conway)는 그를 평하여 “모든 세대를 통한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라고 말했고, 영(G.W. Young)은 “그가 너무 과대평가 되었으나, 등반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아무도 그를 과소평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 켄트(Kent)주의 도버(Dover)에서 부유한 피혁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병약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사회적 배경은 귀족적인 분위기의 영국산악회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를 ‘근대스포츠 등산의 비조’ 혹은 ‘등반사의 일대 반역아’로 불리었던 까닭은, 그가 안전하고 쉬운 루트를 통하여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던 당시의 일반적인 등산풍조에 대항하여 정상에 오른다는 사실 자체(등정주의)보다 좀더 어려운 루트를 택하는 새로운 모험적인 등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머메리즘(mummerism·등로주의)을 제창했기 때문이다.
그의 등반편력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안내인 부르게너(A.Burgener)와 동행하였고, 후기에 속하는 1890년대부터는 안내인을 동반하지 않는 가이드레스 등반(guideless climbing)으로 전환하였다.
1879년 위험한 루트로 알려진 마터호른의 츠무트 능선(zmutt Ridge)을 단 한번의 시도로 성공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1892년 그레퐁(Grepon), 1893년 당뒤르껭(Dentdu Reguin), 1894년 몽블랑(Mont Bland)의 올드브렌바루트(Old Brenva Route)를 초등했다.
그 외에도 에기뒤쁠랑(Aigdu plan) 북벽과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es)의 이롱델르릉(Hirondelles Ridge)에 도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95년 머메리는 콜리(J.N.collie), 해스팅스(G.Hastings), 그리고 구르카(Gurkhas)인 라고비르(Raghobir), 고만싱(Gomansingh)과 함께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Nanga parbat·8125m)을 원정했다. 규모가 크고 접근이 쉬워 이 산을 택했지만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자료도 없는 상태였다.
머메리가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보면 이들이 낭가파르밧 등반을 과소평가 한 것으로 보인다.
정찰을 마친 그들은 서쪽의 디아미르벽(Diamir Face)을 목표로 하였으나 식량부족과 구르카인들의 고산병으로 포기하고, 북면의 라키오트(Rakhiot) 계곡으로 가기로 했다. 콜리와 해스팅스는 포터들과 함께 식량보충을 위해 돌아가고, 머메리는 2명의 구르카인들과 서북능선의 디아마꼴(Diama col·6200m)을 횡단하여 라키오트 계곡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콜리파티가 라키오트에 도착했을 때 머메리 일행은 없었다.
그들은 온 길을 되돌아 출발점에 갔으나 머메리의 빈 텐트만 있을 뿐 그가 돌아온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눈사태를 만나 압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머메리는 히말라야 최초의 희생자가 됐고, 이 사고는 1934년과 1937년에 연이어 일어난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 비극의 전조였다.
저서로는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와 더불어 산악문학의 불멸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My climbs in the Alps and Caucasus' (1895)가 있다.
한국어 번역판으로는 오정환이 옮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가 있다. 이 책은 머메리가 히말라야로 떠나기 직전에 쓴 책으로 사후에 출간되었으며 당시 유럽 산악계의 강한 영향을 끼쳤다.

 

 


메르클 빌리 Merkl, Willy 1900~1934

 
독일의 산악인. 독일의 국유 철도기사였다.
돌로미테를 비롯한 동부알프스에서 대담한 등반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부 알프스에서도 훌륭한 빙벽등반을 하였다. 1929년 코카서스의 코쉬탄타우(koshtantau) 북릉을 초등정하고 우쉬바(ushba) 남봉을 등정하였다.
뮌헨파(Munich school)의 일원으로 1934년 비극으로 끝난 낭가파르밧 원정대의 대장이었다. 1932년 메르클은 1929년의 벨첸바하(W.Welzenbach) 계획을 답습하여 낭가파르밧에 도전하였다. 6명의 독일인과 보도담당여성을 포함한 2명의 미국인으로 구성된 독일·미국 혼성팀이었다.
그들은 포터의 도주, 악천후, 대원의 질병 등 여러 가지 장애로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결국에는 몬순이 시작되는 6월말에야 겨우 베이스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낭가파르밧이 위치한 서부지역은 몬순이 약간 늦게 분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등반을 시작했으나 몬순이 불어 닥쳐 7캠프까지 설치한 후 퇴각했다.
1934년 여름, 낭가파르밧에 재도전한 그는 1932년의 원정대원 2명을 포함 8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원정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1932년의 루트를 택해 순조롭게 4캠프까지 설치했다. 그러나 대원 드렉셀(A.Drexel)이 폐수종으로 사망하여 그의 장례를 치르고, 또한 셰르파의 식량이 떨어져 추가 공급을 기다리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7월 8일, 7480m 지점에 8캠프가 설치되면서 정상 등정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으나 몬순의 폭풍설이 불어 닥쳐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했다.
그러나 맹렬한 폭풍설 속에서의 후퇴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폭풍설 속에서 하산길을 잃고 헤매던 중, 셰르파 니마 누르부(Nima Nurbu)가 죽고, 이어 대원 빌란트(U.wieland)도 쓰러졌다. 메르클과 벨첸바하(w.welzenbach), 그리고 셰르파 앙 체리(Ang Tsering)와 게이레이(Gaylay)는 7캠프에서 굶주리며 밤을 새웠다. 숨진 벨첸바하를 텐트에 눕혀둔 채 나머지 생존자들은 6캠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지쳐 기진맥진한 메르클과 게이레이를 두고 앙 체링은 구조를 청하러 4캠프로 내려왔다.
4캠프에 미리 도착해 있던 아쉔브렌너(P. Aschenbrenner)와 슈나이더(E.schneider)는 앙 체링과 함께 메르클과 게이레이를 구조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으나 계속되는 폭풍설로 실패하였다. 메르클과 운명을 같이한 셰르파 게이레이의 행위는 고용관계를 떠난 헌신적인 미담으로 전해져온다.
결국 메르클 원정대는 4명의 대원과 셰르파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채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두 차례의 원정실패로 메르클의 지도력은 심한 비난을 받는다. 미지의 봉에 도전해서 눈보라 속에서 숨진 그에게 가해진 이 비난은 너무나 불행한 것이었다.
1953년 메르클의 의형제 헤를리히코퍼(K.M. Herrligkoffer)가 이끄는 원정대는 이 산에 맞서다 죽은 메르클의 한을 풀었다. 불(H.Buhl)이 단독으로 초등정하였는데, 이는 8000m급 봉우리에서 이룩한 최초의 단독 초등정으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Ein weg zum Nanga parbat' (1936)이 있다. 이 책은 메르클이 죽은 뒤에 의형제인 헤를리히코퍼가 편집하여 발간했다.
메르클원정대의 비극을 다룬 책으로는 한국어 번역판 <비극의 낭가파르밧>(프릿츠 베히톨드 저. 안미정 역)이 있다. 이 책은 생존대원 프릿츠 베히톨드(Fritz Bechtold)가 썼다.

 

 


메스너, 라인홀드 Messner, Reinhold 1944~


이탈리아 남티롤(Tyroll)의 빌네스에서 출생한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등산가.
남티롤 지방에서 등반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등반 토대는 오랫동안 활동해온 알프스 등반에서 기인한 것이다. 본격적인 등반활동은 197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 참가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 파두아대학 공학도로 이 원정에 참가했다.
메스너의 세계등산사적인 업적은 1978년 페터 하벨러와 둘이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하고 연이어 같은 해에 낭가파르밧을 무산소로 단독 등정한 일이다. 이 일로 그는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초인이라 불리었다. 1986년에는 세계 최고봉 8000m급 14개봉 모두를 완등하였다.
완등에 소요된 기간은 1970년부터 1986년까지 16년이 소요되었다.
그는 그 동안 50여권에 이르는 등산서적을 저술하는 등 한층 돋보이는 활동을 해왔다. 그는 보나티(W. Bonatti)·불(H. Buhl)·벨첸바하(W.welzenbach)의 정신을 계승하고, 기존의 난이등급에 7급을 첨가하여 스스로 7급 등반을 하면서 산악활동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는 익스펜션 볼트(Expansion Bolt)의 사용을 강력히 비난하고, 클린클라이밍(Clean Climbing)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능력과 기술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무산소등반 등을 해냈다. 등산은 보조수단을 쓰지 않고 순수한 수단(By fair means)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룩한 주요등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8년 아이거 북릉 초등·마르몰라타 남벽 직등루트 초등.
1969년 알프스 드르와트 북벽 단독 초등.
1970년 낭가파르밧 루팔측벽 초등.
1972년 마나슬루 남벽 초등.
1974년 아콩카구아(Aconcagua·6960m) 남벽 직등루트 단독등반·아이거 북벽 10시간만에 등정·마터호른 북벽 8시간만에 등정.
1975년 히든피크 북서벽 초등(페터 하벨러와 둘이서 최초로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
1976년 매킨리 머터나하트존네벽 초등.
1978년 킬리만자로(Kilimanjaro, 5895m)의 브리치월(Breach Wall)상단 1220m의 브리치 아이시클(Breach Icicle)을 12시간에 직등·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벽 단독 초등.
1979년 K2 등정.
1980년 에베레스트를 북측에서 단독 초등(에베레스트 2회 등정).
1981년 시샤팡마 등정.
1982년 5월 캉첸중가·7월 가셔브룸 2봉·8월 브로드피크 등정. 한 시즌에 8000m급 봉우리 3개 등정.
1983년 초오유 등정.
1984년 6월 25일 가셔브룸 2봉 등정에 이어 6월 28일에 히든피크 종주등반(하강 중 새로운 루트 개척).
1985년 4월 24일 안나푸르나 북서벽을 초등정하고, 21일 뒤인 5월 15일에 다울라기리 등정.
1986년 9월 26일 마칼루를 등정하고, 21일 뒤인 10월 16일에 로체 등정.
이로써 8000m급 14개봉 모두를 올랐다. 두 차례씩 오른 4개봉을 합쳐 모두 18차례나 8000m급 고봉을 올랐다.
그는 무산소, 단독등반, 알파인 스타일, 헤드트릭 등 독특한 등반 형식을 창출해낸 금세기 최고의 등반가다.
저서 'Der7-Grad' 1973년, 'Die Hera usforderung' 1976, 'Die Grossen wnde' 1977, 'Aufbruch ins Abenteuer' 1978, 'EVEREST-Expedition zum Endpunkt' 1979, 'Alleingang Nanga parbat' 1979, 'Arena der Einsamkeit' 1980, 'K2-Bergder Berge' 1980, 'Der GI serne Horizont' 1982, 'Mein Weg' 1982, 'berlebt alle14 Achtta usender' 1987 번역서 <검은 고독 흰 고독> 김영도 옮김, <죽음의 지대> 김영도 옮김, <제7급> 김영도 옮김, <모험으로의 출발> 김성진 옮김, <도전> 김성진 옮김,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김성진 옮김, <자유로운 영혼> 강용순 옮김, <산은 내게 말한다> 강현주 옮김 등.

 

 



 

 ◇ 바우어, 파울



 

 

 

 

 

 

 

 

 

 

 

 

 

바우어, 파울 Bauer, paul1896~미상


독일의 산악인. 위축된 독일산악계의 재건에 힘썼다.
쉐낭거 북벽(schonanger Nordwand)을 초등하고, 베터슈타인(Wetter stein)을 초등했다. 1929년 바우어가 조직한 코카서스원정대는 독일의 등반기술을 러시아에 전수해 주었으며, 러시아 등반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캉첸중가(Kangchen Junga·8598m)를 원정했다.
1929년 그가 지휘한 원정대는 캉첸중가 북동릉 정찰에서 7393m지점까지 올랐고, 1931년 재차 시도한 원정대에서는 대원 빈(W.Wien)이 7700m지점까지 올랐으나 대원 한 사람이 사망하여 끝내 실패하고 만다.
1936년 그가 꾸린 시킴(Sikkim)원정대는 시니올추(Siniolchu·6890m)를 초등정하였다. 1934년과 1937년의 두 번에 걸친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대참사를 겪은 독일은 우수한 히말라야 경험자들을 모두 잃게 되자, 그는 독일산악계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8년 제4차 낭가파르밧 원정대를 조직한 그는 직접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를 하면서 7300m지점까지 올랐으나 계속되는 악천후로 1934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수한다.
저서 'Im kampf um den HimalaJa' 1931, 'um den kantsch' 1933, 'Auf kundfahrt in HimalaJa' 1937, 'kampf un den HimalaJa' 1952, 'Das Ringen umden Nanga parbat' 1955


 


발마, 자크 Balmat, Jaques 1762~1834


몽블랑(Mont Blanc·4807m)을 초등정하여 근대 등산의 문을 연 사람이다.
1786년 8월 8일, 발마는 샤모니의 의사 미셀 파가르(Michel Paccard)와 함께 몽블랑을 처음 오른 사람으로 그의 직업은 수정채취업자 겸 사냥꾼이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몽블랑 등정이 근대적 등산의 개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발마는 1760년 샤모니를 방문했던 스위스의 소쉬르(H. B. de Saussure)가 몽블랑 초등자에게 상금을 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산을 등정한다.
발마와 파가르는 몇몇의 지방 주민과 함께 현재의 발로산장(Vallot Hut) 위치까지 올랐으나 초등정 때는 다른 루트를 택했으며, 이것은 동반자인 파가르의 의견으로 보인다. 등반 중 발마가 등반을 포기하려 했다는 증거도 있으나 1783년 첫 도전에 실패한 부리는 파가르의 성공을 시샘한 나머지 발마가 이 등반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부리는 발마를 부추겨 파가르가 설맹과 동상에 걸려 중도에 포기한 채 오르지 못했다고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을 유포했고, 발마 역시 이 역사적인 업적을 혼자 독점하려는 의도에서 거짓 증언과 허위선전을 했다. 발마는 용기와 모험심은 강했으나 성품이 비열하여 혼자서 영웅이 되려고 했다.
이 두 사람의 거짓 증언에 대하여 당대의 대문호 뒤마가 일방적인 모험담을 매끄러운 필치로 써서 세상에 발표하자 대중들은 이 사실을 믿어버렸다.
이후 파가르의 초등정 논쟁은 15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샤모니 광장에 몽블랑 초등정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될 당시까지만 해도 몽블랑 등정은 발마 한 사람만이 성공한 것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파가르는 동상 건립 대열에서 빠져버리고 소쉬르와 발마 두 사람의 것만 세워졌다. 이후 파가르의 동상도 함께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여전히 그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가르의 등정 의혹에 대해, 그 진상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영국의 유명 산악인 프레시필드(D. W. Freshfield)다. 그는 진실 규명을 위해 집요한 추적을 계속, 드 소쉬르의 증손자가 보관해 온 자료를 찾아내어 100여 년 동안 숨겨져 왔던 진실을 밝혀낸다.
그는 샤모니에 서 있는 소쉬르와 발마의 기념동상 옆에 오랫동안 버려져 멸시를 받아온 진정한 몽블랑 초등자인 파가르를 기념하는 또 하나의 동상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발마는 몽블랑 초등정 이후 파리 출신 여성 파라디(M. Paradis)와 네 차례나 몽블랑을 오른 후 채광업을 시작했으나 채굴작업 도중 사고로 사망한다.
그의 조카 손자인 오귀스트 발마(Auguste Balmat) 또한 등산 안내인이 되었다. 그는 지성과 헌신적인 책임감을 겸비한 등산가이드로 조부와는 달리 부와 명성에 초연했다.
오귀스트는 1942~43년 빙하학자인 포브스(J. Forbes)와 빙하 탐색을 하고, 1854년 알프스 황금시대를 개막시킨 베터호른(Wetterhorn·3701m) 초등정을 영국 등산가 윌스(Alfred Wills)와 함께 성사시킨다.

 

 


베히톨트, 프리츠 Bechtold, Fritz 미상~1962


독일 등산가. 1932년부터 1939년까지 네 차례나 낭가파르밧에 도전했으나 등정에 실패한 인물이다.
1934년 낭가파르밧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빌리 메르클 대장의 동료로 알프스와 코카서스에서 등반활동을 했다. 1932년 제1차 독일·미국 합동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참가했고, 1934년 제2차 원정(대장 메르클)에도 참가하여 비극의 현장을 직접 체험한 후 ‘비극의 낭가파르밧’이라는 유명한 조난 보고서를 남긴다.
1937년 칼빈(Karlwien)이 이끄는 제3차 독일원정대가 대장을 비롯하여 7명의 대원과 9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전멸했을 때, 파울 바우어(Paul Bauer)와 함께 현지에 가서 수색에 참여한다. 1938년 바우어가 지휘하는 제 4차 원정에도 참여했으나 7300m 지점에서 악천후로 철수한다.
1934년 10명의 대원이 사망한 대참사 때, 7캠프에서 고소증세를 보이는 셰르파들을 데리고 먼저 하산하여 목숨을 건진다.
그가 6캠프(6955m)를 통과할 때 엄청난 폭풍설에 휩싸였으나 기적적으로 생환한다.
저서로는 'Deusche am Nangaparbat' (1934), 국내 역서 '비극의 낭가파르밧' (프릿츠 베히톨트, 안미정 역), 'Nanga Parbat Advanture' (영문판·1935)가 있다.

 

 


벨첸바흐, 빌로 Welzenbach, Willo 1900~1934


독일을 대표하는 탁월한 등산가. 벨첸바흐, 빌헬름(Wilhelm)이라고도 부른다.
독일 뮌헨 출신으로 문무 겸장의 인텔리 산악인이며, 순수 빙벽등반의 장르를 연 알프스 북벽 등반의 맹장이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된 그의 북벽 등반 업적은 곧 1920~30년대 세계 등반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가 생전에 오른 북벽 루트들은 현재도 힘든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뒬퍼(H. Dulfer)가 초안한 기존의 난이등급에 6급을 첨가하여 근대적인 난이등급 체계를 완성했다.
1932년 동부알프스 빌더 카이저(Wilder Kaiser) 산군의 암장에 난이도를 6급으로 나누어 약 200여 개의 루트를 냈다. 벨첸바흐의 6단계 그레이딩을 벨첸바흐 스칼라(Welzenbach Skala) 또는 알펜 스칼라(Alpen Skala)라 한다. 그는 난이도를 석회암, 화강암, 빙벽 등 세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칼라는 등급을 뜻하는 독일어다.
1924년 그로스 비스 바흐호른(Gross wies bachhorn) 서북벽 초등시 동료인 프리츠 리겔레(Fritz Rigele)가 고안한 빙벽용 하켄을 사용해서 등반함으로써 빙벽용 하켄의 일반화에 공헌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빙벽등반 기술 발전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일이다.
암벽 틈새에 박는 록 하켄의 발명이 한스 피히틀(Hans Fiechtl)의 공로였다면, 아이스 하켄의 발명과 일반화는 리겔레와 벨첸바흐 두 사람의 공로다.
아이스 하켄의 개발과 보급은 1920년대 유럽 클라이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이 용구의 도움으로 눈, 얼음이 덮인 험난한 북벽들이 차례로 정복되었다. 벨첸바흐는 20세에 등산을 시작하여 34세에 낭가파르밧 7캠프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14년 동안에 940여 개의 봉을 등정했으며, 이중 50여 개가 초등반이다. 근대적인 그레이드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스 하켄을 보급하여 빙벽등반의 한계를 한 차원 높이는데 공헌한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그가 9년 동안에 이룩한 중요 북벽 등반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4년 그로스 비스 바흐호른 서북벽 초등
1925년 당데랑(Dent d’Herens) 북벽 직등으로 초등. 이는 같은 해 졸레더(E. Solleder)가 이룩한 치베타(Civetta) 북서벽 초등과 함께 1920년대를 대표하는 등반으로 높게 평가된다.
같은 해 리스캄(Lyskamm) 북벽 초등
1926년 그로스 글로크너(Gross Glockner) 북벽 초등. 체르마트 브라이트호른(Zermatt Breithorn) 북서면 초등.
글로크너 지역의 글로커린(Glockerin) 북서벽 초등. 아이스퀘겔레(Eiskogele) 북벽 초등. 1926년은 벨첸바흐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루트를 개척한 한 해였다.
총 149개의 산을 올랐으며, 이중 19개는 초등이다.
1930년 그로스 피셔호른(Gross Fiescherhorn) 북벽 직등.
1931년 그랑 샬모즈(Grands Charmoz) 북벽 초등.
1932년 그로스호른(Grosshorn) 북벽 초등.
1933년 네스호른(Nesthorn) 북벽 초등.
1929년 낭가파르밧 원정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었으며, 1934년 메르클(M. Merkl)이 이끄는 제2차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부대장으로 참가한다.
이 원정에서 몬순기 폭풍설로 인해 철수하던 중 질버 자텔(Silver Sattel) 부근에서 침낭도 없이 비박을 하고, 다음날 겨우 7캠프까지 왔으나 이틀 동안 식량과 연료 없이 버티다가 극적인 최후를 마친다.
눈보라가 계속 몰아치자 그의 동료들은 할 수 없이 그의 시신을 텐트 안에 남겨둔 채 철수했으나, 눈보라 속을 헤매다 그들도 모두 사망한다.
당시 벨첸바흐가 지나간 곳에는 ‘벨첸바흐 빙원’과 ‘벨첸바흐 꿀르와르’라는 지명을 붙여 그를 기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Willo Welzenbach Berg-fahrten' (1935)이 있다.

 

 



 ◇ 보나티, 발터



 

 

 

 

 

 

 

 

 

 

 

 

 

 

 

 

 

 

 

 

 

 

 

 

보나티, 발터 Bonatti, Walter 1930~


1950년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등산가. 그는 1950년대 중반 동계 북벽 등반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한 주인공으로 전후 알피니즘을 주도했다. 보나티는 두 차례에 걸쳐 그랑까 생(Grand Capucion) 동벽 등반에 실패한 후, 1951년 마침내 초등정에 성공한다.
1976년 초등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21세에 초등반한 루트를 46세에 재등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까 생 등반은 연속적인 인공등반방식(Continuous Artifactual Climbing)을 서부알프스에 최초로 적용시킨 것이었다.
1955년에는 드류(Dru)의 보나티필라(Bonatti Piller)라 부르는 남서필라(South West Pillar)를 단독으로 초등정한다.
그는 이 등반으로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용감한 시민상을 받는다. 그는 시상식장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인간은 모험을 하게 된다. 불가능의 매력은 그것을 포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보나타필라는 인공등반 A1~A2, 자유등반 V~Ⅵ의 난이도를 지닌 어려운 루트로, 그는 한 개의 볼트도 사용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등반을 성공시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6일이 소요된 이 등반에서 그는손가락에 심한 동상이 걸렸다. 이때 그는 1주일분의 식량과 장비를 자루(Duffle Bag)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방법은 요세미티보다 10년이나 앞선 것으로 홀링색(Hauling Sack)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1957년 고비(T. Gobbi)와 함께 몽블랑의 에크파일러 버트레스(Eckpfeiler Buttress)를 초등한다. 이곳은 대략 700m의 가파른 암벽과 500m의 암·빙 혼합구간과 600m의 빙벽으로 이루어진 낙석이 심한 매우 위험한 루트다.
1961년 마지막 미등의 벽으로 남은 6등급의 프레네이 중앙필라를 이탈리아와 프랑스 산악인 7명이 합동으로 등반 중 폭풍설에 휩싸여 그의 파트너 오조니와 3명의 동료를 잃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레종 드뇌르(Legion d’nonneurr) 훈장을 수여한다.
1963년 19세에 등정한 바 있는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워커 스퍼(Walker Spur)를 코시모 자펠리(C. Zapelli)와 6일 동안의 사투 끝에 동계 초등반하여 동계 등반의 이정표를 세운다. 1965년 마터호른 노드반트 직등(Matterhorn Nordwand Direct) 루트를 동계 단독 초등정한다.
이 해는 마터호른 초등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는 알프스에서 거벽 등반뿐만 아니라 히말라야와 남미의 거벽에서도 활동했다.
1954년 이탈리아 K2원정대의 최연소 대원으로 참가하여 정상 등정 대원 콤파뇨니(A. Compagnoni)와 라체델리(R. Lacedelli)를 지원하여 초등정에 공헌한다. 그러나 초등 당시 보나티가 초등의 영예를 차지하려고 공격조와 경쟁을 벌였다는 콤파뇨니의 모함으로 괴로워하다가 법정 투쟁을 벌여 누명을 벗는다.
1958년에는 캐신(R. Cassin)이 이끄는 가셔브룸 4봉(Gasherbrum Ⅳ·7925m)원정대의 일원으로 칼로 마우리(C. Mauri)와 함께 북동릉을 경유하여 초등정에 성공하였다. 같은 해 마우리와 함께 파타고니아의 세로또레(Cerro Torre·3020m)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세로모레노(Cerro Moreno·3506m)를 초등정한 후, 세로아델라(Cerro Adella) 산군의 연봉을 횡단한다.
1961년 다시 남미 페루의 안데스에 가서 네바도 니나샹카(Nevado Ninashnca·5638m), 세로파린 노르드(Cerro Parin Nord·5166m), 론도이 노르드(Rondoy Nord·5820m) 등을 초등정하였다.
이후 그는 모험 기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한다.
저서로는 'Le Mie Montague' (1962), 'on the Heights' (1964)- 'Le Mie Montague' 의 영문판, 'Berge-Meine Berge' (1964), 'The Great Days' (1974), 'The Mountain of My Life' (2001) 등이 있다.

 

 



 ◇ 보닝턴, 크리스



 

 

 

 

 

 

 

 

 

 

 

 

 

 

 

 

 

 

 

 

 

 

 

 

보닝턴, 크리스 Bonington, Christian 1934~


영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등산가. 영국은 물론 알프스·히말라야 등반에 풍부한 경험을 지닌, 현존하는 영국 등반가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런던 출신으로 16세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1953년 매키네스(Macinnes)와 스코틀랜드에서 동계 등반활동을 했다. 영국인 최초로 드류의 보나티필라를 오르고 치마그란데를 직등했으며 안나푸르나Ⅰ봉 남벽,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하여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새 시대를 연다.
그는 1956년 군에 입대했으나 원정등반에 관계하면서 이에 흥미를 느껴 제대 후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한다. 1957년 드류의 보나티필라와 치마그란데(Cima Grande)를 직등한다. 아이거(Eiger) 북벽을 두 차례나 실패한 뒤 1966년에 성공한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사진촬영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거 북벽 직등에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지의 사진기자 겸 보도기자로 참가하여 의 표지사진을 찍었다.
이 등반에서 그는 존 할린과 묘한 갈등을 일으켰으며, 그의 추락을 직접 목격한다.
1960년 안나푸르나 2봉(AnnapurnaⅡ·7939m)을 초등한다.
이는 그가 해낸 첫 번째 히말라야 등반이다. 1961년에는 눕체(Nuptse·7879m)를 오른다. 1970년 안나푸르나 1봉(8091m) 남벽 등반에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여 초등정에 성공한다.
이 등반이 갖는 등산사적 의미는 히말라야에서 이룩한 최초의 거벽 등반이라는 점이다. 이때의 등정자는 돈 윌란스와 드갈 해스톤이다.
1973년 브라마(Brammah·6411m)와 1974년 창가방(Changabang·6864m)을 초등정한다.
1975년 포스트 몬순(Post Monsoon)에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원정대를 조직하여 해스턴(D. Haston), 스코트(D. Scott), 보드맨(Boardman)이 2회에 걸쳐 영국인 최초로 정상에 오르게 한다. 이들 중 버크(M. Burke)가 단독 등반을 시도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1977년 카라코룸의 바인타브락(Baintha Brakk·7285m) 남서봉을 초등정한 후 스코트와 하산 도중, 스코트가 추락하여 양다리 골절상을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기상마저 악화된 가운데 5일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하산한다.
1978년 K2(8610m) 서릉원정대를 꾸렸으나 눈사태로 대원 한 명이 사망하여 실패한다. 이외에도 중국 신강지역의 미답봉 콩구르(Kongur·7719m)를 원정하여 알파인 스타일로 초등정한다.
1982년 에베레스트 동북릉 등반을 시도하였으나 ABC캠프를 출발하여 정상 공격에 나선 피터 보드맨(Peter Boardman)과 조 태스커(Joe Tasker)가 능선상에서 행방불명된 채 이 원정은 실패한다.
1985년 그는 디즈니랜드의 부호이자 세븐 서미츠 등정자인 딕 베스(Dick Bass)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저서로는 'I Chose to Climb' (1966), 'Annapruna South Face' (1971), 'Everest Southwest Face' (1973), 'The Ultimate Challenge' (1973), 'The Next Horizon' (1973), 'Chan-gabang' (1975), 'Everest the Hard Way' (1976), 'Quest for Adrenture' (1981), 'Konguer China’s Elusive Summit' (1982), 'The Everest Year: A Climber’s Life' (1987), 'Chris Bonington, Mountaineer' (1989), 'The Climbers : A History of Mountaineering' (1992) 등이다.



 

 ◇ 보드맨, 피터 데이비드



 

 

 

 

 

 

 

 

 

 

 

 

 

 

 

 

 

 

 

 

 

 

 

 

 

 

 

보드맨, 피터 데이비드 Boardman, Peter David 1950~1982


고난도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한 영국 등반가.
창가방(Changabang) 서벽(6860m)을 비롯, 알프스와 히말라야 카라코룸 등에서 수많은 고난도 벽 등반을 추구한 선구적인 산악인이다.
노팅검(Nottingham) 대학 출신으로 알프스의 라우터브룬네(Lauterbrunnen) 등을 등반하며 많은 경험을 쌓아갔으며, 1971년 드로와떼(Droites) 북동능에서 태스커(Joe Tasker)와 운명적인 만남 이후 우정을 키워가면서 브라이트호른 북벽의 제르바수티(Gervasutti) 루트를 함께 오른다.
1972년 최초의 해외원정 등반을 힌두쿠시(Hindu Kush)로 택하여 코히몬디(Kohi Mondi) 북벽을 비롯하여 5개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다.
1975년 보닝턴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참가하여 셰르파 퍼템바와 함께 정상에 선다.
남서벽 등반은 에베레스트 등반사에 영원히 기록될 장거로 안나푸르나 1봉 남벽에 이어 히말라야 거벽등반에 새 장을 연다.
당시 스코트와 해스톤이 첫 등정에 성공한 뒤 뒤이어 보드맨은 두 번째 등정자가 된다.
다음 해인 1976년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태스커와 함께 창가방의 서벽을 초등정한다.
당시 창가방 서벽은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난벽 중의 하나였다.
이 등반을 주제로 쓰여진 책이 이며, 함께 등반했던 동료 태스커가 쓴 의 일부분을 함께 묶어 번역한 책이 <창가방, 그 빛나는 벽>(허긍열 역)이다.
그는 1978년 보닝턴과 K2 서릉 초등을 노렸지만 눈사태로 대원 중 1명이 사망하자 등반을 끝내고 뉴기니로 가서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 피라미드(Carstenz Pyramid·4884m)를 오른다.
1979년 캉첸중가(Kangchenjunga·8586m) 북릉을 무산소로 등정한 후 가우리상카(Gaurisankar·7134m) 서릉도 등정한다.
1980년 K2(8611m) 재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콩가(Kongur·7719m)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1982년 보닝턴대의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하여 당시 미등으로 남아있던 북동릉을 산소 없이 알파인 스타일로 시도하던 중 5월 17일, 그의 영원한 친구 태스커와 함께 8220m 지점에서 실종된다.
이 사건은 영국 등산계의 크나큰 손실이었으며, 큰 충격파를 불러일으킨다.
10년 뒤인 1992년 에베레스트 정상 바로 아래서 일본대에 의해 태스커의 시신이 발견된다.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1983년 <보드맨-태스커 산악문학상>(Boardman-Tasker Award)을 제정한다.
두 사람은 유명을 달리 하기 전에 피터는 을, 조는 라는 창가방 서벽 등반기를 따로 남겼으며, 피터의 등정기 <빛나는 산>은 1979년 존리웰린 라이스 기념상을 수상한다.
그는 1966년 아이거 북벽에서 추락사한 미국 등산가 할린(J. Harlin)이 스위스의 레이진(Leysin)에 설립한 등산학교 I.
S. M(International School Mountaineering)의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는 (1972), (1978), (1982), <창가방 그 빛나는 벽>(허긍열 역·1992) 등이 있다.
아일랜드의 정치가이자 변호사.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알파인클럽(Alpine Club;1857년 창립)의 초대 회장(1858~1860)을 지낸 인물이다.
1827년 처음으로 알프스를 방문한 이래 매년 알프스를 찾았으며, 1863~1868년까지 알프스를 서부·중부·동부 세 지역으로 구분하여 란 제호로 최초의 알프스 지역 안내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현재까지도 정확한 안내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현재의 <알파인 저널·Alpine Journal>의 전신인 를 자신이 직접 편집하여 1859년에 출판하였으며, 알파인 저널도 발행한다.
저서로는 'The Western Alps' (1863), 'The Central Alps' (1864), 'The Eastern Alps' (1868) 등이 있다.

 

 


볼, 존 Ball, John 1818~1889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의 첫 도전자. 제네바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이며, 몽블랑 초등자인 파카르의 경쟁자였다.
주목할 만한 업적은 없으나 몽블랑 첫 도전자라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제네바의 성가대를 지휘했으며,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광을 많이 그렸다.
드 소쉬르가 몽블랑 첫 등정자에게 상금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듣고 1783년 파카르(M. G. Paccard)와 함께 첫 등정을 시도했으나, 둘 사이의 심한 갈등으로 실패한다.
1786년 파카르와 발마가 몽블랑 초등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질투심에 불타 파카르를 비방하는 글을 썼으며, 발마를 부추겨 파카르를 중상한다.
이후 몽블랑 초등에 대한 오랜 논쟁에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다.
그는 몽블랑 첫 등정을 시도하고, 일생 동안 이 산에 오르기를 열망했지만 나이가 들고 체력도 떨어져 결국 몽블랑 정상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불, 헤르만 Buhl, Hermann 1924~1957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의 등산가이며 8000m봉 최초의 단독 초등자이다.
산악도시인 인스브루크에서 출생하여 알프스 전지역의 난벽들을 상대로 등산 수업을 하였다.
그는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 세계적인 등반가다.
그는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야간에 단독등반을 하면서 스스로 냉혹한 채찍질을 하였다.
1947년까지 134개에 이르는 난봉들을 골라 등반했으며, 이중 11개 봉은 초등반을 기록한다.
돌로미테 지역의 최고 난벽 피즈바틸레 북벽을 단독으로 4시간 만에 올라 세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동부 알프스의 최대 난벽인 표고차 1800m 높이의 와츠만 동벽의 잘츠부르크 루트를 한겨울 밤 시간을 택하여 단독으로 9시간 만에 완등한다.
1953년 2월에 시도된 와츠만 동벽 등반은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앞서 자기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등반이었다.
1952년 여름, 8등을 기록한 아이거 북벽 등반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당대 유럽의 쟁쟁한 클라이머인 장꾸지, 레뷔파 등과 함께 줄을 묶은 이 등반에서 그는 가장 어려운 구간을 선두에서 리딩하였다.
이때 보여준 등반 솜씨에 대해 이 벽의 초등자인 하러조차도 그를 가리켜 ‘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솜씨였다’고 극찬하여 당시의 비평가들을 침묵시켰다.
그는 1953년 헤를리히 코퍼(K. H. Herrigkoffer)가 이끄는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1934년 이 산에서 희생된 메르클(W. Merkl)을 추모하기 위해 ‘메르클 추모원정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고소 포터의 부족으로 캠프 설치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에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공격을 시작할 때는 몬순이 불어 닥쳤다.
기상이 악화되자 대장은 정상공격을 중지하고 캠프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나 다시 기상이 호전되자 불, 에르틀(H. Ertl), 프라운 베르거(W.
Fraunberger), 켐프터(O. Kempter) 등 4명은 대장의 명령에 불복한 채 정상 공격을 결정한다.
5캠프까지 이들과 함께 오른 불이 단독으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정상으로 향하던 중 방풍의, 피켈, 카메라만 남기고 나머지 장비는 크레바스에 넣어둔다.
그는 7820m 지점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드디어 오후 2시 독일, 오스트리아의 숙명의 산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다.
이후 하산 과정은 너무도 유명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 차례의 비박을 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량의 혈액순환 촉진제를 복용한 그는 환청과 환각상태에 시달리면서 하산길을 재촉한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이 마비되고, 빈사의 상태로 40여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5캠프에 도착하여 에르틀의 도움을 받는다.
죽음을 극복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그에게 베풀어진 분위기는 너무나 냉랭했다.
퇴각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행위가 대장측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장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치료해주지도 않았다.
이후 동상 후유증으로 그는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한다.
1954년 불은 <8000m의 위와 아래>라는 낭가파르바트 등정기를 출간한다.
그러나 이 등정기는 대장의 사전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 하여 헤를리히 코퍼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이로 인해 불은 오랫동안 심적 고통을 받는다.
원정대 출발에 앞서 대원들은 원정이 끝난 뒤 등반에 관한 글을 발표할 때는 대장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대장은 저작에 관한 계약 위반을 빌미로 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57년 불은 슈무크(M. Schmuck) 대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브로드피크(8047m)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히말라야 등반 사상 가장 규모가 작은 소규모 원정대로 히말라야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최초로 실천한 등반대였다.
이들은 산소용구와 고소 포터를 쓰지 않은 채 전 대원 모두가 6950m 높이의 고소캠프까지 직접 짐을 운반하고, 대원 모두가 등정에 성공한다.
불은 이때 그의 생애에 두 번째로 8000m봉 정상을 등정한다.
이 등반을 끝내고 딤베르거(K. Diemberger)와 초골리사(7668m) 등반을 시도하던 중 짙은 안개와 폭풍설 속에서 철수하면서 눈처마 붕괴로 추락사한다.
저서로는 '8000m Druber und Drunter' (1954), '8000m의 위와 아래' (이종호역·1976·국내발췌 번역판), '8000m의 위와 아래' (김영도 옮김·1996·국내완역판) 등이 있다.



 

 ◇ 부리



 

 

 

 

 

 

 

 

 

 

 

 

 

 

 

 

 

 

 

 

 

 

 

 

 

 

 

브라운, 조 Brown Joe 1930~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걸출한 등산가다.
고향 친구인 윌란스(D.
Whillans)와 이상적인 등반 파트너가 되어 영국의 암벽뿐만 아니라 히말라야에서도 수많은 등반을 함께 한다.
그는 160㎝의 작은 체구였으나 의지가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윌란스와 함께 더비셔(Derbyshire)와 웨일즈(Wales) 등지에서 수많은 개척 등반을 한다.
1954년 윌란스와 함께 알프스에 가서 드류 서벽을 21시간 만에 등반하고, 블레띠에르(Blatiere)에 브라운·윌란스 루트(Brown Whillans Route)를 개척한다.
1955년 에반스(C. Evans)가 이끄는 캉첸중가 원정에 참가하여 밴드(G. Band)와 함께 정상을 오른 후 1956년 카라코룸의 무스타그타워(Mustagh Tower·7273m)를 등정한다.
1962년 파미르(Pamirs)의 코뮤니즘봉(Mt. Communism·7482m)을 초등정한다.
1973년 베네수엘라(Venezuela)의 미답봉 로라이마(Roraima·2810m)를 초등했으며, 1976년 트랑고타워(Trango Tower·6288m) 원정대를 꾸려 보이센(M. Boysen)을 초등시킨다.
그는 유명한 등산장비 제작업자로 랑베리스(Llanberis)에 장비점을 열기도 한다.
1970년대 한국에 널리 보급되어 클라이머들이 애용했던 ‘조브라운 헬멧’도 그가 보급한 장비다.
그는 등산에 관한 영화와 TV방송에 해설자로 자주 출현했으며, 영국 등산계의 우상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저서로는 'The Hard Years' (1967) 등이 있다.

 

 


브와뱅, 장마르크 Boivin, Jean-Marc 1951~1991


프랑스 산악인이자 모험가이다.
브와뱅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스키 활강 모험가이며, 빙벽 등반의 달인으로 행글라이딩 고공활강 기록을 갖고 있는 알파인 클라이머다.
그는 몽블랑 주변 4000m급 빙설암을 등반하고 스키로 신속하게 하강하는 방식의 익스트림 스키(Extreme Ski) 분야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으며, K2와 가셔브룸 고봉, 에베레스트와 같은 8000m 고산에서 행글라이딩으로 활공하여 하산하는 등 스키와 행글라이딩을 등산에 접목시킨 독특한 스타일의 등반을 창출하였다.
1991년 베네수엘라에서 패러글라이딩 활공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숱한 모험을 감행했다.
1972년 페를랭 북벽 직등 루트와 에귀유상놈의 브라운 패티 루트, 푸(Fou) 남벽, 드류의 아메리칸 다이렉트(Americane Directe)를 올랐으며, 단독으로 몽블랑 드 타쿨(Mont Blanc du Tacul)의 알비노니 가바루 루트와 모디카누리를 동계에 오르는 능력을 보여주면서 브와뱅 돌풍을 일으킨다.
1975년 패트릭 가바루(Patrick Gabarrou)와 함께 드로와떼 북벽과 에귀유 베르트(Aiguille Verte) 북벽 직등 루트와 제루바슈티 필라(Gerva Sutti Pillar), 몽블랑 드타클(Mont Blanc du Tacul)의 슈퍼 꿀르와르(Super Couloir)를 직등으로 초등하는 두드러진 성과도 이룩한다.
1978년 그의 첫 해외원정이 된 페루로 출발하기에 앞서 그랑드조라스 슈라우드(Shroud)를 단독으로 등반하여 2시간 30분 만에 끝내고, 높은 난이도를 지닌 라가드세고뉴 꿀르와르를 단독으로 초등정한다.
같은 해 페루의 와스카랑(Huascaran·6787m) 남벽과 피스코(Pisco·5780m) 북벽, 랑 퀴타라주(Quitara Ju·6100m) 북벽을 등반하고 3곳 모두 스키로 활공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는 1979년 베르나르 멜레(Bernard Mellet)가 이끄는 K2 원정에 참가하여 7600m 지점서 베이스캠프까지 1분에 200m씩 고도를 낮추며 13분 만에 활동하여 안착한다.
이것은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이룩한 도전기록이었다.
전 세계 산악계는 이 일을 격찬하였다.
이 일로 영국 정부는 그에게 ‘국제용맹스포츠맨상’(International Award for Valourin Sports)을 수여한다.
1980년 그는 색다른 모험에 도전한다.
행글라이딩과 스키를 이용하여 단독으로 마터호른을 오르고 내려오는 연장 등반을 성공시킨다.
마터호른 북벽을 4시간 10분만에 올라 정상에서 행글라이딩으로 활공하여 하산한 후 다시 마터호른에 올라 동벽으로 스키활강하여 하산하는 연장등반 기록을 이룩한다.
익스트림 스키와 행글라이딩을 조화시켜 스피드 클라이밍이란 독특한 장르를 창출한 것이다.
1982년 파타고니아 등반에 참여했고, 그랑드조라스(2시간 30분), 마터호른(4시간 30분), 아이거 북벽(7시간 30분) 등 3대 북벽을 14시간 만에 오르는 스피드한 기록을 탄생시킨다.
뿐만 아니라 푸(Fou)의 남벽을 오르고 드류의 아메리칸 다이렉트 루트를 연결해서 블라티에르까지 단 하루만에 끝낸다.
이런 스피드한 등반은 행글라이더 덕이다.
1985년 7월, 가셔브룸2봉(8035m)을 등정한 후 행글라이딩으로 25분 만에 베이스캠프에 안착하였다.
다음 해 콜롬비아의 리타쿠바(Rita Cuba·5200m)에서 패러글라이딩 활공을 한다.
1987년 4월, 르모앙(3412m), 르드류(3754m), 아데귀유베르트(4121m), 테쿠르트, 그랑드조라스 등 5개봉을 연장하여 활강과 등반을 하루 만에 끝낸다.
1988년 프랑스 에베레스트 등정 10주년 기념원정대에 참가하여 남동릉으로 정상에 오른 뒤 세계 최고봉에서 역사상 최초로 패러글라이딩 활공을 하여 베이스캠프에 안착한다.
브와뱅의 익스트림 스키 활강 수준은 55~65°의 급경사까지도 가능하다.
그는 “히말라야 8000m 14봉을 지겹게 오르내리는 일의 반복은 흥미가 없으며, 세계 각국의 색다른 지역을 바꾸어가면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빈, 칼 Wien, Karl 1906~1937


독일의 등산가이자 물리학자.
1937년 비극으로 막을 내린 독일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대장이다.
이 원정에서 대장을 포함하여 7명의 대원과 9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사망한다.
그는 1924년 벨첸바흐와 바우어를 만나 서부 알프스에서 많은 등반을 한다.
1925년 베터슈타인(Wetter Stein)에 3개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1926년 벨첸바흐와 함께 그로스 클로크너 북벽, 아이스코겔레(Eiskogele) 북벽, 글로커린 북서벽을 초등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등반은 1927년 몽블랑과 리스캄(Lyskamm)을 최초로 동계 종주한다.
1928년 릭머스(R.
Rickmers)의 파미르 원정에 참가했으며, 1931년 바우어(P. Bauer)가 이끄는 캉첸중가 원정에도 참가하여 7700m까지 오른다.
이 등반은 대원 1명과 셰르파의 추락으로 실패한다.
1933년 동아프리카 케냐(Mt. Kenya·5200m)와 메루(Mt. Meru)를 등반하고, 1934년 메르클(W. Merkl)이 이끄는 낭가파르바트 원정에도 참가한다.
이때의 원정은 3명의 대원과 6명의 셰르파 목숨을 앗아간 채 끝난다.
그러나 정상까지 4~5시간 거리를 남겨둔 채 등정 일보직전에 실패했으므로 그는 다음 등반을 기약한다.
1936년 시킴(Sikkim) 원정시 시니올추(Siniolchu·6890m)와 네팔 피크를 초등한다.
1937년 그는 자신을 포함한 7명의 우수한 대원으로 강력한 원정대를 조직한다.
2캠프까지는 등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눈사태로 일단 철수한 다음 6월 초에 재도전하여 5캠프를 구축한 뒤 전 대원이 휴식차 4캠프에 모였다.
비극은 이날 밤에 일어난다.
라키오트(Rakhiot Peak)의 빙벽에서 시작된 눈사태는 자고 있던 모든 대원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대원들은 침낭 속에서 평화스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고, 얼어붙은 시계는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극은 이 시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독일은 구조를 위해 바우어를 현지로 급파한다.
낭가파르바트는 정상을 인간에게 내어주기까지 실로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였다.
1953년 불이 이 산을 초등할 때까지 1895년 머메리의 비극을 시작으로 1934년 메르클대의 대참사와 1937년 빈대의 참사까지 셰르파를 포함하여 31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산이 되었다.
빈은 'Willo Welzenbachs Bergfarten'과 'Hartmann’s Kantschagebuch' (1931)을 편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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