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을 빛낸 세기의 라이벌 / 이용대

2011. 5. 20. 01:28山情無限/등산학교

 

 

 

알피니즘을 빛낸 세기의 라이벌

 

라인홀트 메스너 VS 쿠쿠츠카 예지

 

 

 


20세기 최대 대결이라 불렀던 메스너와 쿠쿠츠카의 히말라야 14고봉 완등 레이스는 이탈리아의 메스너가 한 발 앞서 성취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을 순위별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 등산세계의 불문율이다. 등산은 스포츠의 영역을 넘어선 행동양식이기 때문에 심판. 순위. 규칙이 없는 세계다. 메스너가 쿠쿠츠카 보다 몇 개월 앞서 완등을 했다하여 메스너를 제 1인자, 쿠쿠츠카를 제 2인자라고 스포츠처럼 순위를 두어 구분하지 않는 것이 알피니즘의 세계다.

 

오늘날 세계최강의 등반가 자리에 우뚝 서있는 메스너와 쿠쿠츠카 두 거인이 걸어온 큰 자취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메스너는 유럽의 전통적인 선진문화권의 풍요로운 환경과 성숙된 등산문화권에서 활동한 덕분에 여러 후원업체의 지원에 힘입어 풍요로운 여건 속에서 등반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쿠쿠츠카는 동구권 폴란드의 낙후한 사회 환경과 뒤처진 등산 환경 속에서 몸으로 때우는 식의 맨주먹정신으로 어려운 등반을 해왔다. 8000미터급 고봉등정에는 막대한 원정경비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쿠쿠츠카는 산을 오르는 일보다는 ‘자금의 산’을 오르는 일이 더 어려웠다. 어느 때는 입산료를 아끼려고 폴란드 K2 여성원정대에 불청객으로 껴서 K2등산허가증으로 브로드피크를 무단으로 올라 파키스탄 관광성에 들켜 2000달러의 벌금을 무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돈을 아끼려다 결국 정상에 오르는 등산 허가요금 만큼의 비용을 빼앗긴다.

 

그는 메스너 보다 9년이나 뒤늦게 출발한 시점에서 선두주자인 메스너를 추격해 11개월 늦게 14봉 완등을 마무리했으니 그 놀라운 추진력과 집념에 갈채를 아끼지 않을 수 없다.

 

두 거인의 연보를 살펴보면 메스너는 1970년에 시작하여 1986년 로체를 마지막으로 14개 고봉을 완등하기 까지 16년이 걸렸고, 쿠쿠츠카는 메스너 보다 9년이나 뒤늦은 1979년에 시작하여 1987년 시샤팡마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8년이 걸렸다. 쿠쿠츠카가 14고봉완등을 마무리하고 돌아오자 한통의 축하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제 2인자가 아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다.” 메스너가 경탄하면서 보낸 축하 인사였다. 역시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보는 것이다.

 

메스너의 돋보이는 업적은 1978년에 이룩한 에베레스트 무 산소 등반이다. 연이어 같은 해에 낭가파르바트를 무산소로 단독 등정하여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세계적인 영웅이 된다. 1980년 그가 무산소 단독등반으로 또 한 차례 에베레스트에 올랐을 때는, 이 산의 주인으로 자처해온 자부심 강한 영국 사람들조차도 “인간이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이 이 산을 자기들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1953년에 자기들이 이 산을 세계최초로 정복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철인이라 불렀으며 1986년에는 히말라야 8000미터 급 고봉14개를 모두 오른다. 그는 두 차례씩 오른 4개봉을 합쳐 8000미터 ‘죽음의 지대’를 18차례나 체험한다. 이는 죽음의 지대를 가본사람이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14봉 완등을 끝냈을 때 전 세계 언론들은 몽상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꿈같은 일이 실현되었으며 이는 인간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승리라고 격찬했다. 이런 일은 인류가 달 착륙에 성공한 것에 버금가는 한계 도전의 역사로 평가되고 있다.


메스너가 처음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계획을 발표했을 때 유럽전체여론은 공명심에 들떠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미치광이 짓이라고 그를 비난했다. 의학자들은 설사 등정에 성공해도 산소부족으로 뇌세포가 파괴되어 식물인간이 되거나 하산 중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도전의지를 꺾지 않은 그는 등정에 성공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을 침묵시켰으며, 히말라야 등반에서 산소 맹신의 장벽을 허물었다. 그는 산소용구 없이 정상등정에 성공했고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한걸음 더나가 산소용구 없이 단독으로 낭가파르바트와 에베레스트를 연이어 한 번 더 오른다. 그가 이룩한 한계도전의 역사는 250년의 등산역사에 큰 획을 긋는 새로운 발상들이다. ‘무산소등반’ 단독등반’ ‘알파인 스타일등반’ ‘8000미터 3개봉 연속등반’ 등 독특한 등반형식을 창출해낸다. 이런 등반들은 금세기 최고의 등반가가 아니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며,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산에서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는 정당한 방법만을 고집하였으며, 진정한 모험은 산업기술을 사용한 보조수단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8000m산에서 산소를 쓰면 6000m의 산에서 산소기구 없이 행동하는 것과 같다’고 역설하며, 14고봉 모두를 무산소로 올랐다. 그는 행위만 앞세우는 등반뿐만 아니라 50여권에 이르는 등산서적을 저술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메스너가 이룩한 등반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초인의 영역으로 접근한 등반이라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금세기 최강의 등반가 메스너의 화려한 등반기록을 보면 엄동기(嚴冬期)의 등반활동이 한 차례도 없다. 이에 비해 쿠쿠츠카는 히말라야에서 엄동기 등반활동이 돋보인다. 다울라기리. 초오유. 캉첸중가 .안나푸르나 등 4개봉은 동계에 이룩했으며, 초오유와 칸첸중가는 동계 세계 초등정이다. 특히 어려운벽으로 이름난 안나푸르나 남벽은 남들이 오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뚫고 정상에 올라 8000미터 고봉에서 거벽등반의 새로운 족적을 남긴다.

 

쿠쿠츠카는 남들이 꺼리는 어려운 길만을 뚫고 올랐다. 그가 남들이 오른 길을 따라 오른 산은 오직 로체뿐이고 나머지 모든 산에서는 새로운 루트를 열어나갔다.

 

1981년 신 루트를 열며 단독으로 오른 마칼루는 등정증거가 없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다음 해 한국원정대의 허영호가 정상에서 쿠쿠츠카가 등정증거물로 놓고 온 무당벌레 마스코트를 발견하여 등정의혹에서 벗어난다.

 

무명의 등산가였던 그가 1979년 히말라야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1989년 로체 남벽에서 로프가 끊어져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에 오른 고봉편력은 매우 다채롭다. 41세의 나이로 요절한 쿠쿠츠카의 짧은 인생은 긴 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높은데서 이룩했다.

 

쿠쿠츠카는 한국 산꾼들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히말라야에서 조난했을 때 우리 원정대가 도와 준 일이 있었다.

1986년 그가 K2남벽으로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중 동료 1명을 잃고 3일 동안 굶주린 상태로 길을 잃고 헤매다 캠프 3에서 한국 K2원정대(대장. 김병준) 송영호대원의 보살핌을 받아 허기를 채우고 동상치료를 받은 후 줄을 함께 묶고 그의 안내로 B.C 까지 무사히 귀환한다. 당시 쿠쿠츠카가 오른 K2는 11번째의 8000m 봉이었다.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에서 IOC위원회가 8000미터 고봉을 완등 한 공로로 메스너와 쿠쿠츠카 두 사람에게 은메달을 수여하려고 했을 때 메스너는 이를 거절한다.

 

“등산은 창조적인 행위이며 순위를 비교해서 채점표에 표시하는 스포츠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거부의사를 밝힌다. 만일 메스너가 그 메달을 받았다면 알피니즘이 스포츠라는 정의를 받아드리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등산이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 또한 메스너다.

 

등산의 세계에는 경쟁이 없다. 상대와 맞대결하면서 순위와 기록을 겨루지 않고 그 성취를 내세우거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위라는 점이 다른 스포츠와 구별되는 점이다. 메스너와 쿠쿠츠카 두 사람은 경쟁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은 자기방식대로 각자의 길을 간 것 일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경쟁구도로 만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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