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본 취나드

2011. 5. 19. 23:38山情無限/등산학교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42> 이본 취나드
인수봉‘취나드길’의 주인공 마음 가난한 억만장자 산사람
“수학공식 외우던 시간이 가장 아까워”
고교중퇴 후 등반에‘올인’한 암벽 천재
주한미군 시절 선우중옥과 인수봉 올라 등반장비·의류 회사 설립해 사업도 성공


 

 

 

연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자료를 찾아 리스트 업을 해놓은 산악인들의 숫자는 엄청난데, 한국의 산악인들에 대해서는 아직 말문도 트지 못했는데, 연말은 다가오고 연재는 마무리되어야 한다. 나는 내 집필실의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리스트들을 들여다보다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누가 어느 산에 올랐는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가장 인상적인 산악인인가? 누가 가장 성공적인 등반과 삶을 꾸려왔는가? 나는 자료 따위들을 모두 무시하고 내 마음 속을 깊이 들여다본다. 네 마음 속으로부터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산악인은 누구인가? 과묵하고 겸손한 사나이 이본 취나드(68)가 떠오르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본 취나드는 이미 ‘전설 속의 인물’이다. 우리 세대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바위질(!)을 하러다니던 ‘중딩’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나의 아버지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낡은 배낭의 브랜드가 ‘취나드’였다.

어린 눈에는 너무도 거대해 보였던 인수봉 앞에 서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 ‘못된 선배’들이 멋지게 뇌까려주곤 했던 판에 박힌 대사들이 있다. “저 벽이 보여? 저 벽으로 나 있는 저 멋진 등반 선이 보여? 저게 바로 ‘취나드길’이야. 잘 보면 두 갈래가 있어, 취나드A와 취나드B. 지금 너네들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고, 나중에 ‘대가리’ 크면 한번씩들 붙어봐. 오금이 저릴만큼 멋진 길이야.”

세월이 흘러 결국 취나드길을 완등하고 났을 때의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전설 속의 인물’이 펼쳐보였다는 무용담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주한미군이었대. 어느날, 한국 최고의 바위꾼 선우중옥 선배를 찾아와 함께 바위를 하자고 그랬다는데, 미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이 ‘당대 최고의 바위 천재’들이 이 길을 개척할 때 며칠이나 걸렸을 거 같애? 딱 하루야.

온사이트(아무런 정보도 없이 처음 접한 바위벽을 오르는 것)로 한방에 끝내버렸다구.” 맙소사, 이십대의 팔팔한 청춘인 내가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온몸으로 진땀을 흘리며 거의 죽기살기로 올라온 이 길을 온사이트로 올랐다구? 그것도 장비도 변변치 못했던 1963년에? 바위에 미쳐 사는 청춘의 가슴 속에서라면 이제 그 ‘전설 속의 인물’은 이미 신(神)의 경지에 올라서기 마련이다.

나이 들어서 알게 되는 이본 취나드라는 인물은 더욱 더 매력적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 등반의류 브랜드는 ‘파타고니아’이다. 전세계에서 공히 최고의 브랜드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 파타고니아의 창립자이며 현재의 회장이 바로 이본 취나드란다. 매출액 규모로 봐도 이미 억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선 사람인데, 그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방식은 더 없이 소박하기만 하여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본 취나드는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그는 아직도 1960년대에 만들어진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며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주워온 조개들로 끓이는 조개탕이다. 나를 가장 매료시킨 것은 등반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이본 취나드는 부탄 히말라야의 6,000m급 산을 초등했다. 하지만 그는 등반 직후 자신이 작성한 루트 개념도를 찢어버리고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다음에 오는 사람도 초등자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이 점에서 그는 “네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말라”던 게리 헤밍과 상통한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세계적인 거부(巨富)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가난하고 자유로운 히피로 남아있는 셈이다.

이본 취나드의 삶을 들여다보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민자이다.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전까지 프랑스어를 더듬거렸을 뿐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덕분에 미국의 초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는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특수학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그는 정규교육에서 어떠한 흥미로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그는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고 만다. 그가 원했던 일이란 물론 클라이밍이다. 해외의 경제 전문지들은 때때로 그를 가리켜 “가장 크게 성공한 고교 중퇴자”라는 식의 인터뷰를 싣곤 하는데, 정작 이본 취나드는 매우 담담하게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고, 학교에서는 그것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둔 것뿐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아까웠던 시간은 학교에서 수학공식을 외우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뜻에서 홈스쿨링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의 아이들 역시 정규교육을 거부하고 집에서 저 홀로 공부하며 컸다고 한다. 이본 취나드라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니 지면이 턱없이 모자란다. 그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일년치 연재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왜 그를 가장 매력적인 산악인이자 존경할만한 인간이라고 여기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본 취나드는 자연인이다.

“클라이밍하는 농부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들은 클라이밍할 필요를 못느낍니다. 대지에 뿌리박고 있으니까요.” 그는 세간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그 무엇과도 경쟁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사람이다. “저는 바위나 설산과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테니스를 즐기지만 누구와도 시합은 안 합니다. 대신 저의 장비와 등반기술 그리고 라켓 휘두르는 법에 집중할 뿐이지요.” 그가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등반은 쉽지만 글쓰기는 어려워”
7년 걸려‘빙벽등반’ 내고 소감… 장비 만들며 장비의 발전엔 부정적

이본 취나드는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암벽등반에 몰두하여 당대 최고의 루트들을 개척했다. 이들 중 등반사에 아로새겨진 것은 요세미티의 노스 아메리카 월 초등기록과 해머를 사용하지 않고 오른 노즈 초등기록이다. 그는 이 당시부터 이미 스스로 장비를 만들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장비를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결국 ‘취나드’라는 이름의 장비회사를 차려서 성공의 기초를 닦았다. 현재의 회사명은 ‘그레이트 퍼시픽’이다.

그는 스스로 장비를 만들면서도 그것의 발전이 등반의 자유를 축소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요즘은 암벽화의 기능이 너무 좋아져서 5.7급의 실력 밖에 갖추지 못한 사람이 5.10급의 바위벽을 수월하게 올라갑니다. 결코 자랑할만한 일이 못됩니다. 오히려 등반의 자유와 기쁨을 반감시키게 되는 거지요.”

이본 취나드는 모든 종류의 등반형태를 마스터했는데, 특히 빙벽등반 분야에서는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이룩하여 따로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빙벽등반>인데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이다. “등반은 쉽지만 글쓰기는 어려워요. 7년 동안이나 이 책 하나에 매달렸는데 다시는 안 쓸 겁니다. 글쓰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여하기에는 삶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모험을 즐기기에도 삶은 너무 짧습니다.”


산악문학가 심산

입력시간 : 2006/12/20 18:2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