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4. 07:34ㆍ山情無限/山
그는 그렇게 산이 되었다
박영석 대장과 2인, 나는 '죽음'이라 말하지 않겠다
2011.10.31 / 소설가 박범신
▲ 소설가 박범신
간밤에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박영석 대장이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는 이미지가 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작년 이맘때던가, 남극탐험을 얼마 앞두고 재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성공했으니 안락한 생활을 할 때도 되지 않느냐고, 왜 또 그 험한 길을 굳이 가려 하느냐고 범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했다. "이렇게 살아있잖아요!" 그는 거두절미 자신의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탁 두들겼다. 나는 찔끔해서 섬광 같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뻔한 일상에 습관적으로 기대 살고 있는 내 유약한 삶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와 신동민·강기석 대원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는 뉴스가 들리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지금 나는 조사를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산악소설 '촐라체'에서 나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죽고자 가는 게 아니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고 모든 대륙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북극과 남극점을 발로 찍었다. 일찍이 어느 산악인이나 탐험가도 도달하지 못한 대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기록과 함께 그도 나이가 들었고, 올해로 꽉 찬 마흔여덟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새로운, 더 위험한 길을 향해 담대하게 떠났다.
▲ 마지막… 손 흔드는 박영석 대장…
실종 당일인 지난 18일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르기 시작한 박영석 원정대의 모습.
흰색 원 안에 손을 흔드는 이가 박영석 대장, 먼저 오르고 있는 이는 신동민 대원이다.
/대한산악연맹 제공
그에게 있어 자본주의 문명이 주는 달콤한 일상은 가짜이고 허울에 불과했다. 이미 그의 발밑에 깔린 히말라야 14좌에 새로운 '코리안루트'를 내겠다는 꿈은 그의 꿈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계속 가지 않겠나?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계속 갈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말하자면 누군가의 등대, 뒤따라오는 누군가의 지도가 되기 위해 이미 위대한 정상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길을 간 것이다. 그러니 그와 그들이 왜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히말라야 14좌를 처음으로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는 빙벽에 둘러싸인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고산 등반가들에겐 한 발 한 발이 모두 ‘무덤과 정상 사이’에 걸쳐져 있으므로 그곳에서 그들은 ‘지각이 더 맑아지고’마침내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는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대인에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존적 모럴이며 비전이다. 그들은 그러므로 야성을 거세당한 우리 대신 그곳에 갔으며, 걸었다. 놀라운 생의 비전을 우리 앞에 열어 보이려고.
차세대 산악인이라 손꼽혔던 신동민 대원은 고된 등반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동료들을 위해 묵묵히 ‘청국장이나 홍어찜’까지 맡아서 조리했던 덕인이었으며, 서른세 살의 강기석 대원은 베이스캠프에서 늘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아카데믹한 산악인’이었다는 말을 뒤늦게 듣는다. 박영석 대장은 물론, 그들에게도 ‘코리안루트’는 개인의 꿈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이상향의 뜻으로 쓰이는 샹그릴라는 본래 ‘언덕 저쪽’이라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언덕 저쪽’에서 신들메를 고쳐 신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산을 내려오며 손을 흔들어줄 것 같다. “산에 가야 산악인이지!” 박영석 대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렁우렁 귓속을 울린다. 그와 그들은 단지 산악인이 아니었다. 우리의 꿈을 대신 짊어지고 간 극상의 모럴, 참된 비전이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들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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