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신동민·강기석, 세 악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2011. 12. 1. 23:29山情無限/山

 

 

[조난 상보ㅣ안나푸르나 남벽팀 사고 & 수색기록]

박영석·신동민·강기석, 세 악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글·한필석 부장 / 사진·이한구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원 

 

 

 

 

첫날 등반 도중 예보와 달리 악천후로 변한 날씨 속에서 사고 당해


첫날 등반 도중 예보와 달리 악천후로 변한 날씨 속에서 사고 당해 박영석(동국대 OB·노스페이스 이사) 대장이 끝내 사라졌다. 후배 신동민(대구대 OB·노스페이스), 강기석(안동대 OB·노스페이스) 대원과 함께 깊은 눈을 뚫고 돌아올 줄 알았다. 늘 그랬다.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100여 m 떨어지고도 그랬고, 1996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에서 눈사태에 묻혔을 때도 눈을 훌훌 털고 일어났다. 당시 그는 갈비뼈에 금이 갔는데도 후배들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올랐다.

 

1998년 다울라기리에서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 그랬듯이 이번에도 두 대원의 손을 꼭 잡고 돌아오리라 기대했다. 몇몇 셰르파들은 그들이 산 너머 북쪽으로 내려오려니 기대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3차에 걸쳐 투입된 구조대의 수색 결과 모든 게 물거품으로 끝났다. 그는 갔다. 깊은 눈 속으로. 그가 늘 얘기했던 히말라야의 전설 ‘예티’가 되고 말았다.

 

 

▲ 마지막 인사. 신동민 대원의 확보 하에 등반 중인 박영석 대장이 설사면을 오르면서

하이캠프 부근에서 촬영 중인 이한구 대원과 김동영 대원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박영석과 신동민, 출정 앞두고 아내들과 애틋한 통화 나눠


박영석 원정대는 지난해 봄 안나푸르나 남서벽을 등반한 바 있었다. 한국을 출발해 다시 돌아오기까지 무려 65일간의 긴 원정이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제대로 등반한 날은 별로 없었다. 짙은 안개 아니면 눈발이 휘날리다 폭설이 퍼붓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기석 대원은 ABC(5,200m)에서 하이캠프(5,670m)로 오르다 낙석에 맞아 무릎 인대를 다쳐 헬리콥터로 후송되었고, 박영석 대장은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 계시던 부친의 부음을 듣고 서둘러 귀국했다. 박 대장은 그런 상황에서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갔지만 정찰과 적응을 위해 영국팀(대장 크리스 보닝턴) 루트 상의 해발 6,300m 지점까지 오른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 없이 원정이 끝나고 말았다.

 

올해 등반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신동민과 강기석 대원이 등반파트너를 이루고 이한구 대원이 촬영을 맡았다. 여기에 김동영(강릉대 OB) 대원이 지원대원으로 가세하고, 역시 지난해 참가했던 함희주 감독 외에 KBS 방송팀이 베이스캠프에 머물며 촬영을 담당했다. 박영석 대장과 강기석, 신동민 대원은 오랜 등반 파트너 사이는 아니지만 2008년 가을과 2009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아 루트 등반, 2010년과 2011년 중국 쓰촨성 다둬마인 등반 등을 통해 끈끈하면서도 든든한 관계가 되었다. 지난 봄 다둬마인 등반에는 이한구 대원도 동행해 정상 직전 설동에서 비박하면서 동료애를 다지기도 했다.

 

 

▲ 새롭게 덮인 눈을 밟으며 ABC로 오르는 대원들.

뒤로 타르푸출리(왼쪽·텐트피크)와 마차푸차레가 배경처럼 솟아 있다.

 


BC에 들어오기 전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김동영 대원은 고소적응훈련을 위해 쿰부 히말라야의 아일랜드피크 등반을 다녀오고, 선발대로 출국한 강기석 대원은 지난 여름 파키스탄 가셔브룸2봉(8,035m)을 등반했기에 고소적응 과정을 거치지 않고 포터들과 함께 9월 30일 BC에 도착해 캠프를 구축했다.

 

“맛있는데. 한데 뭔가 빠진 것 같아. 동민인 그게 문제야. 딱 하나 못 맞추는 거.”
신동민 대원은 2007년 엄홍길 대장이 이끈 로체·로체샤르 남벽 원정을 통해 박영석 대장에게 고산 거벽 등반 능력을 인정받고 ‘박영석 사단’에 합류한 고산 등반가였다. 184cm의 장신인 신동민 대원은 대구대 산악부 시절 알프스 3대 북벽과 드류 북벽을 한 시즌에 완등해낸 바 있는 클라이머로서 “해발 8,000m대의 히말라야 거벽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이 바위에 망치질해댈 정도로 괴력의 소유자”라고 박영석 대장이 극찬한 바 있다.

 

신동민 대원은 제과제빵 제조사로서 CJ푸드에서 일했을 만큼 음식에 일가견이 있었다. 게다가 넘치는 동료애 때문에 원정대원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늘 애써왔다. 그래서 그는 원정 때마다 식량담당이었고, 주방정리를 기꺼이 맡는가 하면 쿡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식사를 챙기곤 했다.

 

“등반도 중요하지만 산에서 맛있게 먹고 즐겁게 지내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여겨온 박영석 대장 역시 그 누구에게 뒤진다면 자존심이 상할 만큼 맛에 대해, 특히 조리에 대해 늘 자신이 넘쳤다. 한데 2008년 동민과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한 이후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틈틈이 뭔가 부족하다며 트집을 잡곤 했다, 지난 10월 9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대원들과 합류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 출정을 앞두고 아내와 통화 중인 신동민 대원. “자기야, 걱정하지마…”/“근무 중이니 걱정마세요”라는 안부에

 “네가 히말라야에 있는 걸 모르는 줄 아느냐”는 어머니의 답변을 듣고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 강기석 대원.

강 대원은 히말라야에 갈 때면 어머니께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하곤 했다.

 


안동대 출신인 강기석의 전공은 기계공학. 그래서 2009년 가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 이후 베이스캠프 전기시설뿐 아니라 통신장비와 컴퓨터를 담당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털털한 성격이면서도 원정에 관한 일을 할 때는 꼼꼼하다는 성격 덕분에 장비 담당까지 맡았다. 이번 원정에서 강 대원은 전기설비에 관한 한 자신감이 넘쳤다. LED 전구를 쓰면 같은 용량의 전력으로도 전구 100개를 밝힐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논리적으로는 맞았다. 하지만 해발 4,200m 높이의 베이스캠프에서는 달랐다. 무엇보다 가져간 자동차용 배터리의 상태가 나빠 솔라판 충전이 순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베이스캠프에서 저녁을 먹다가 전등불빛이 희미해지거나, 한밤중 작전회의 도중 전등이 깜빡일 적이 잦았고, 그때마다 박 대장이 쏜 화살은 강 대원에게 이마에 꽂히곤 했다. 그럴 때면 강 대원은 푸념하듯 박 대장에게 이유를 댔고, 박 대장은 한마디 더 나무라다가도 애교 넘치는 강 대원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동민과 강기석 대원은 같은 경북대학산악연맹 소속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지난해 여름 신동민은 강기석과 함께 북한산을 오르면서 “케이크를 만드는 재료는 비슷비슷하지만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다르듯 등반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며 “기석과 둘이 마음을 잘 맞춘다면 정말 좋은 명품 등반로를 안나푸르나 남벽에 낼 수 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또한 2007년과 2008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에서 촬영담당이었던 이한구 대원은 기록을 담당하고, 히말라야 원정이 처음인 김동영 대원은 짐 수송과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했다. 지난해 안나푸르나 원정 때 동행했던 함희주 촬영감독은 KBS 취재팀의 촬영 책임자이기도 했지만 박 대장이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선배이기도 했다.

 

 

▲ 어둠 속의 전진. 박영석 대장과 강기석 대원이 삼각 설전을 거슬러 남벽 아래로 다가서고 있다.

 


박영석, 신동민의 생일 케이크 선물에 짬뽕으로 화답


원정대가 등반을 시작한 것은 지난 10월 12일. 쿰부 히말의 촐라패스 트레킹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들어온 응원단과 함께 히말라야의 신(神)께 무사등반을 기원하는 라마제를 지내고 응원단이 베이스캠프를 빠져나간 날이었다. 이날 대원들은 퇴석지대와 빙하, 그리고 아이스폴을 지나 너덜지대와 초원을 가로지른 다음 아이스폴 하단에 ABC(전진베이스캠프·5,200m)를 구축하고 BC로 귀환했다.

 

이튿날 13일은 박 대장의 마흔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아침에 미역국이 나오자 감격한 박 대장은 “이제 등반을 시작하면 전화를 걸 기회가 없다”며 대원들에게 집으로 안부전화를 걸도록 했다. 박 대장과 신 대원은 아내와 애틋한 대화를 나누고, 총각인 강 대원은 모친과의 통화에서 히말라야 등반 중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고 말았다. 강 대원은 늘 그랬다. 모친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해외원정을 나갈 때면 한동안 연락하지 않거나 회사에서 잘 근무하고 있다고 둘러대곤 했다.

 

그날 저녁 신동민 대원은 제과제빵 조리사다운 솜씨를 발휘해 만들어낸 케이크를 내놓아 박 대장을 다시 한 번 감동시켰다. 신 대원이 케이크에 뭐라 쓸까 고민하던 끝에 적어 넣은 게 ‘축 생일 사랑해요’였다. 히말라야의 척박한 산중에서 생일 케이크까지 받은 박영석 대장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 대장님~, 생일 축하합니다~.”
박영석 대장은 후배들의 생일축하 노래를 들을 때에는 너무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글썽거리기도 했다.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한 이후 20여 년 동안 내 생일은 매번 비행기 안에서 잠든 채로 지내거나 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거, 너무 황홀하고 고맙다.” 

 

그리곤 잠시 후 박 대장은 “오늘은 100달러씩 꿔 준다. 한 번 따봐라”며 카드판을 시작했다. 히말라야 원정대 대원들이 날씨가 나쁘거나 체력회복을 위해 베이스캠프에서 쉴 때에는 잘 먹고 푹 자기도 하지만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술도 한 잔씩하고 카드를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포커 판이 벌어지면 결과는 늘 판돈이 몽땅 박 대장 주머니로 들어갔다.

 

 

▲ 박영석 대장의 마흔여덟 번째 생일 축하 케이크. / 박영석 대장이 출정을 앞둔 후배들을 위해 만든 짬뽕.

 


박 대장의 원정에 여러 차례 참가한 바 있는 이한구 대원은 이번 원정에선 꼭 박 대장의 주머니를 바닥 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박 대장의 생일 며칠 전 벌어진 제1차 포커 판에서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고 붙어보았지만 결과는 본인 지갑만 털리고 말았다. 박 대장 생일에는 치사하지만 꿔준 돈으로라도 이겨보려 기를 써보았지만 결과는 빈털터리였다.

 

박 대장의 생일날 밤은 그렇게 웃고, 툴툴대고, 어깃장 놓고 하면서 지나갔고, 14일 역시 산안개와 흩날리는 눈 때문에 BC에서 보내야 했다. 그날 정오경, 다음날 ABC로 올릴 장비와 식량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 박 대장은 손수 짬뽕을 만들어내 대원들을 감격시켰다.

 

짬뽕은 김치말이국수, 냉면과 함께 박 대장이 자랑하는 대표 메뉴. 출국 전 준비해간 온갖 재료를 집어넣고 만들어낸 짬뽕은 대원들에게서 “이 짬뽕은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상징”, “중국집 차려도 되겠다”는 둥 온갖 찬사를 끄집어냈고, 대원들이 후루룩 소리 내며 맛있게 짬뽕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박 대장은 배가 불렀다. 그러나 이 짬뽕 점심상은 결국은 박 대장과 신동민·강기석 대원에게는 최후의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오후 강기석 대원은 출정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려고 머리도 감고 장비를 라마제단에 올려놓는 등, 기도하는 마음으로 안전한 등정을 기원했다. 그 사이 안나푸르나 남벽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대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 사고 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 박영석 대장.

 

 

15일, 대원들은 지난해 설치했던 하이캠프 자리를 향해 등반에 나섰다. ABC에서 곧장 남벽 등반에 나서자니 어프로치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 벽 바로 오버행 바위벼랑 아래 하이캠프를 설치했다. 그런데 대원들이 서너 시간 뒤 하이캠프 자리에 올라섰을 때에 지난해 봄 데포시킨 장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이프하켄 20여 개와 스크루, 카라비너, 소형 가스버너 등 등반에 절대적인 장비들이었다.

 

크랙에 박아놓은 하켄에 장비꾸러미를 묶어놓았기에 누군가 빼가지 않는 한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라 믿었건만 눈사태에 묻혀 버리고 스노바 몇 개만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데포시켜놓은 장비를 믿고 그 외에 꼭 필요한 나이프 하켄 10개만 만들어왔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들 장비 때문에 카트만두를 다녀올 만큼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21일부터 날씨가 나빠진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16일 오후 ABC에 모인 대원들은 박영석탐험문화재단의 김덕환 국장과의 위성전화를 통해 ‘날씨가 계속 좋다가 21일 나빠진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히말라야 원정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삼한사온과 같은 날씨 패턴과 감(感)으로 일기를 예측했으나 이후 인공위성을 통한 일기예보를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등정을 앞두고는 기상예보업체를 통해 일기예보를 확인한 다음 정상 공격에 나서는 게 일반화돼 있다. 인터넷 중계에 이어 TV 생중계까지도 해낸 바 있는 박영석 대장에게 일기예보 확인은 당연한 일이었다.

 

21일 이후 정상공격에 나선다면 겨울이 바짝 다가오면서 춥고 해발 7,500m를 넘어서는 시속 100km에 이르는 제트기류가 형성되면서 강풍이 몰아치는  데다가 눈이 내릴 가능성이 높아 이번 등반이 무위로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박 대장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때문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열흘쯤 쉬고 등반하려던 계획을 수정, 사흘 앞당긴 17일 하이캠프로 올라서고, 18일 남벽 등반을 시작하기로 했다.

 

안나푸르나 남벽은 히말라야 거벽등반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인 벽으로 1970년 영국대가 초등반에 성공한 이후 1981년 폴란드 대 루트와 일본 대 루트가 나 있는데, 초등 당시 이안 클러프 대원이 C2 아래서 눈사태를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고, 일본 대 역시 등정에 성공했으나 대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82년에는 암벽등반의 귀재로 꼽히던 영국의 매킨타이어가 폴란드 팀 왼쪽으로 신 루트 등반에 나섰으나 7,150m 지점의 록밴드에서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산하던 중 낙석에 맞아 사망했다. 또한 1987년 일본팀이 영국 대 루트로 동계 초등에 성공했으나 2명이 사망했고, 1997년 12월 세계적인 산악인 아나톨리 부크레예프는 눈사태 위험 때문에 남벽 등반을 포기하고 서릉으로 등반하다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하기도 했다.

 

 

▲ 11월 18일 이른 시간, 박 대장이 30m 절벽을 올라선 다음 강기석 대원이 등반을 준비하고 있다.

 


“철수하길 잘 했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건너지…”


한국인들의 족적도 남아 있는 벽이다. 1990년 은벽산악회 원정대가 첫 도전했으나 해발 6,500m 지점에서 등반을 접었고, 1994년 경남연맹 원정대의 박정헌 대원이 셰르파 3명과 함께 영국 대 루트 변형루트로 오른 바 있다. 

 

박영석 대장은 영국 대 루트와 일본 대 루트 사이로 정상까지 잇는 길을 택했다. 이 루트는 외국의 유명 클라이머들도 관심 있게 보아오던 등반 라인이었다.

 

특히 1992년 프랑스의 세계적인 고산등반가 피에르 베갱(Pierre Beghin)과 장 크리스토퍼 라파예(Jean-Christophe Laffaille) 2인조는 이 길로 등반에 나섰으나 폭풍우를 만나면서 계획이 흐트러졌다. 하산 도중 자일을 걸어놓은 확보물이 빠져 베갱이 추락사했고, 라파예는 혼자 낙석의 포격 속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가, 겨우 10m 길이의 끊어진 자일 토막을 이용해 자일 하강하며 사투를 벌인 끝에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 기원. 강기석 대원은 무사 등반을 염원하기 위해 라마제단에 등반장비를 올려놓았다.

/ 염원. BC를 출발하기 앞서 라마제단 앞에서 무사 등반을 기원하는 박영석 대장.

 


박영석 원정대는 이렇게 험난한 새 길을 세 대원이 고정로프와 업다운(up-down·고소적응이나 캠프 설치를 위해 오르내리는 과정) 없는 알파인 스타일로 오를 계획이었다. 그로 인해 하산까지 4박 5일을 잡은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강기석 대원은 입은 옷 그대로 등반을 펼쳐야 했고. 침낭도 동계용과 춘추용 각 1개, 그리고 반쪽짜리 매트리스 3개가 비박장비의 전부였다. 여기에 먹을 것은 냉동건조식품과 고열량의 과자, 초콜릿, 사탕 등을 담은 지퍼백 두 봉과 육포 반 팩이 5일치 식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동민 대원은 무게를 1g이라도 더 줄이겠다는 생각에 옷은 물론 장갑에 달린 레이블까지도 잘라냈고, 황 감독은 대원들이 안쓰러워  헬멧에 다는 소형 캠코더인 ‘고프로’를 아예 가져가지 말거나 가져가더라도 힘들면 메모리카드만 빼내고 버리라고 당부했다.

 

“형, 그럼 고프로 가지고 내려오면 내 거죠?”

 

“그럼, 그까짓 거 얼마 한다고. 성공하면 기념으로 줄게.”

 

17일 오후 4시, 대원들은 한 명 한 명 하이캠프(5,670m)로 올라갔다. 검정색 투피스 우모복 차림의 신동민 역시 “조금 긴장된다”며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반면 노란 원피스 우모복을 입은 강기석 대원은 “무사히 등반하고 돌아오겠다”며 빙긋 웃었다. 역시 노란 원피스 우모복을 입은 박영석 대장 역시 “가슴이 벌렁대는 느낌”이라며 조금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준비를 많이 했다. 뭐니뭐니 해도 대원들을 믿는다”며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ABC를 출발한 공격대원들은 이한구, 김동영 대원과 함께 오후 7시40분 하이캠프의 좁은 텐트에 들어와 대원들의 반쪽짜리 매트리스 석 장을 깔고 다섯 명이 쭈그리고 앉아 차를 끓여 마시면서 다시 한 번 장비를 추리는 한편 휴식을 취했다. ABC에서의 활기찬 모습과 달리 모두 말이 없었다. 남벽은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 관한 한 백전노장인 박영석 대장도 긴장케 할 만큼 험난한 대상이었다.

 

 

▲ 눈사태…. 마치 폭우에 불어난 폭포수를 보는 듯하다.

 


공격조와 지원조 다섯 명은 18일 새벽 3시 임시캠프를 출발, 약 250m 길이의 플라토를 가로지른 뒤 50~60도 경사에 60m 길이의 삼각 설전(雪田)을 거슬러 올라 남벽과 빙하 사이에 형성된 커다란 틈인 베르크슈룬트 위쪽 설사면 상의 출발지점에 새벽 4시 도착했다.

 

등반은 4시10분 신동민 대원의 선등으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 구간은 약 30m 높이의 수직 절벽. 신 대원은 뜻밖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15kg 안팎 무게의 배낭을 짊어지고 어둠 속에서 확보물을 설치하며 등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 대원은 절벽 중간쯤에서 설치한 확보물에 배낭을 걸어놓고 등반에 나서, 해 뜰 무렵 벽 위로 올라선 다음 100m 로프가 끝날 때까지 설사면을 올려쳤다.

 

그 바람에 박 대장은 절벽을 올라선 다음 신동민 대원의 배낭을 끌어올리고 설벽 구간에서는 배낭 두 개를 둘러멘 채 등반해야 했다. 그런데 평소 체력이 좋기로 소문난 강기석 대원은 유난히 힘들어했다. 이한구 대원이 밑에서 지켜볼 때 ‘저게 남벽을 등반하겠다는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지친 모습이었다. 두 달 반 전 가셔브룸2봉을 등반하느라 지친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듯했다.

 

 

▲ 수색. 구조대원들이 삼각설전 아래 깊이 파인 베르크슈룬트를 살피고 있다.

/ 수색대원들이 자일을 타고 유력한 매몰 지역인 베르크슈룬트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수직 절벽을 올라서면서 세 대원은 제 컨디션을 찾아갔다. 박 대장은 대원들을 맨손으로 확보를 보는가 하면 밑에서 지켜보다 하이캠프로 돌아가는 이한구·김동영 대원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도 보였다. 햇살이 따가워지면서 강기석 대원은 원피스를 벗어 배낭에 얹고 등반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원조가 하이캠프를 철거해 정오경 ABC로 내려가서 공격조의 소식을 기다리던 오후 1시를 넘어서면서 안나푸르나 남벽은 안개와 눈보라 속에 모습이 희미해지고, 그 즈음 박영석 대장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가스와 낙석이 심하다. 눈도 내린다. 일기예보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달라!”

 

이한구 대원이 서울의 박영석탐험문화재단 사무실에 위성전화를 통해 확인했으나 이날 날씨는 ‘오전 오후 맑음’으로 변화가 없었다. “풍속이 조금 바뀐 것 외에는 변동사항이 없다”는 이한구 대원의 무전에 박 대장은 “그런데 날씨가 왜 이런가. 등반이 힘들다”며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ABC의 이한구 대원은 공격조의 등반에 방해될까 걱정스러워 무전을 자제하다 오후 2시30분경 다시 공격조에게 무전을 날렸다.

 

“상황이 어떤가? 철수하는가?”

 

“1~2피치 구간 하강 중이다.”

 

 

▲ 수색, 또 수색….

 


신동민 대원의 답신으로는 공격조는 이미 등반을 포기하고 철수하고 있었다. 이후 공격조가 하강에 신경 쓰느라 무전 교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 반쯤 지난 오후 4시경 이한구 대원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무전을 날렸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어디쯤인가?”

 

“야, 이거 강행하지 않고 철수하길 잘 했다. 다 죽일 뻔했다. 그런데 좌우로 눈사태가 심하다. 저걸 어떻게 건너지….”

 

곤경을 벗어났을 때면 보여주던 박 대장 특유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어투였다. 그러나 “저걸 어떻게 건너지…”는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이후 무전교신이 끊기고 한동안 교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 깨달은 이한구 대원과 김동영 대원은 어프로치 가능한 곳까지 최대한 올라가 랜턴 불빛을 기다리며 공격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흩날리던 눈은 함박눈으로 변하고 양도 점점 많아졌다. 예상대로라면 오후 7시 ABC에 귀환해야 하는데 대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눈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베르크슈룬트 속으로 하강하고 있는 구은수 대원.

/ 진재창 수색대원(오른쪽)이 삼각설전 눈속 깊이 박 대장의 자서전과 가족사진을 묻고 있다.

그는 “형, 미안해요. 이젠 산에 안 다닐 거예요”라면서도 “그러나 형을 찾으러 꼭 다시 오겠어요”라고 약속했다.

 


“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우리 둘이잖아”


“여긴 ABC ABC, 운행조 운행조, 등반조 등반조…. 야, 박영석! 대답해라.”

 

ABC로 돌아온 대원들과 촬영팀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점점 초조해지다 못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한구 대원과 김동영 대원은 참다못해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빙하를 거슬러 오르며 하산 예상루트로 두 차례나 올라가보았으나 허사였다. 간간이 눈사태 소리가 들려오자 이한구·김동영 대원은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위험지대에 머문다는 것은 사고를 자초하는 일이다 싶어 날이 밝으면 구조하러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ABC로 내려왔다. ABC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함효주 감독도 혹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까 하는 생각에 랜턴을 들고 밖에 나가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날 밤 세 대원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일 날이 밝자마자 이한구 대원과 김동영 대원은 ABC를 출발해 벽 밑으로 다가서려 했으나 플라토는 하루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밤새 산을 울리며 쏟아진 몇 차례의 눈사태에 변해 있었다. 김동영 대원은 선배 세 명의 모습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플라토를 뛰듯이 올라갔고, 그 사이 남벽에선 크고 작은 눈사태가 쏟아져 내렸다. 이한구 대원은 몇 차례나 “그러다 큰일난다”며 김동영 대원을 자제시켰으나 패닉 상태에 빠진 김 대원은 위험 크레바스 지대로 뛰어들곤 했다.

 

“야 이 새끼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젠 우리 둘이잖아….”

 

이한구 대원은 김동영 대원을 자제시키기 위해 욕을 해대면서도 두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이 대원은 오전 10시경 박영석탐험문화재단에 상황과 과정을 보고한 다음 오전 11시경 또다시 실종 예상 지역인 남벽 밑으로 다가가면서 수색을 펼쳤다. 그러나 세 대원은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벽 출발지점에 로프 끝부분이 발견돼, 이들이 벽 하강을 마쳤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 그들은 진정 저 빛과 함께 하늘 높이 올라간 것일까. 안나푸르나 정상부.


 

그 사이 국내에서는 대산련 이인정 회장과 박영석탐험문화재단 성기학 이사장, 원정을 후원한 LIG 임원들이 모여 긴급 사고대책회의를 하고 향후 사고 수습과 상황에 대한 모든 일을 이인정 회장이 맡기로 했다. 마침 네팔 등반이 잡힌 카조리 원정대의 유학재 대장(휠라코리아)와 촐라체 북벽 원정대의 김형일 대장(K2 익스트림팀)과 장지명 대원은 대산련의 구조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등반을 미룬 채 수색활동에 참가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21일 헬기를 타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유학재, 김형일, 장지명 수색대원은 이한구·김동영 대원, 셰르파 7명과 함께 벽 하단까지 수색한 결과 베르크슈룬트를 유력한 실종 지역으로 추정했다.

 

23일에는 대산련 김재봉 전무이사가 BC로 들어가 구조상황을 총괄 지휘하고, 26일에는 8,000m급 14좌 완등자인 김재수와 13좌 완등자인 김창호 대원과 대한구조협회에서 파견한 진재창·강성규·구은수 대원이 헬기로 BC에 도착하면서 실종자 수색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다섯 명의 구조대원들과 함께 카트만두에 도착한 실종자 가족들은 대원들이 헬기를 타기에 앞서 손을 꼭 잡으며 실낱같은 희소식을 기대했다.

 

그러나 눈사태와 크레바스 붕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산악인들과 셰르파들이 베르크슈룬트와 30m 절벽 상단에 이어 최종적으로 매몰이 유력시되는 플라토 일원까지 수색을 펼쳤음에도 세 대원은 끝내 흔적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수색은 눈사태 위험이 점점 높아지고 하이캠프와 ABC의 식량이 바닥남으로써 실종 10일째인 10월 28일로 끝을 맺고 말았다.

 

 

▲ 수색을 위해 하이캠프를 구축하는 수색대원들.

/ 실종대원들이 삼각설전으로 내려서기 위해 걸어놓은 6mm 캐블러 로프.

 


끝내 산이 되어 버린 세 악우


히말라야에는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새들이 있다고 한다. 그 새들은 다른 새들처럼 먹이를 찾아다니지도 않을뿐더러 나무나 바위 위에도 앉는 법이 없다. 그저 설산(雪山) 위 눈발과 눈부신 빙벽 위를 날아다닐 뿐이다.

 

그래서 그 새들이 언제 둥지로 돌아가고 무엇을 먹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그 새가 죽을 때는 부리와 온 몸에 눈을 묻혀 마치 ‘눈 새’처럼 허공에 떠 있다가 태양이 솟아오르는 순간 몸에 묻은 눈이 녹아 버림과 동시에 자신의 육체도 함께 증발해 무(無)로 사라진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그것을 그 새의 죽음이라 하지 않고 ‘빛으로 돌아감’이라 했다(2011년 다이내믹 부산 가셔브룸1봉 2봉 원정등반 기록 중에서).

 

이렇게 ‘눈 새’들이 빛으로 돌아가듯, 사람들이 “히말라야의 거벽에 새로운 길을 꿈꿔 온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세 산악인은 산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악인 모두가 나선 박영석 일행의 수색등반
30m 수직절벽 하강 마치고 설전 횡단 도중 눈사태 만난 것으로 추정

 

박영석 대장 일행의 실종소식이 전해지자 세 산악인을 찾기 위한 조치는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카조리 원정대의 유학재 대장과 촐라체 북벽 원정대의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은 출국 전날 사고소식을 듣고, 카트만두 도착 이틀 뒤인 10월 21일 BC로 들어가 수색활동을 펼쳤다. 또한 대한산악연맹이 파견한 김재수·김창호 수색대원과 대한구조협회가 파견한 진재창·강성규·구은수 대원은 26일 ABC로 곧장 올라가 27일과 28일 이틀간 수색을 펼쳤다.

 

 

▲ 구조에 참가한 대원들과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원.

뒷줄 맨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창호, 김재수, 유학재 대원, 김재봉 대산련 전무이사,

고 김형일 대원, 이한구, 김동영, 강성규, 구은수, 진재창.

 


첫 번째 유력 매몰지역은 2차 수색대인 유학재·김형일 대장이 추정한 삼각설전 약 30m 아래 베르크슈룬트. 그러나 3차 수색조 김창호 대원과 구은수 대원이 붕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차례에 걸쳐 베르크슈룬트 바닥까지 내려가 확인해 보았으나 실종자들의 소지품과 같은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수색을 원점으로 돌리고 실종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족적을 되짚어보기 위해 김창호 대원은 세 대원이 지난 10월 18일 새벽 애를 먹으며 등반했다는 30m 수직절벽을 올라섰다. 김 대원은 실종 대원들이 하강용으로 걸어놓은 6mm 캐블러 로프에 건 주마가 빠지는 바람에 순간 추락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김 대원이 벽 상단에 올라서자 바위에 잘 박힌 나이프하켄에 걸린 카라비너에 하강용 로프가 묶여 있었고, 그 나머지 로프는 잘 사려져 있었다.

 

이에 따라 수색대는, 사고자들이 무전기 2대와 위성전화기 1대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통신이 두절되면서 실종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하강을 마치고 하이캠프로 상부 빙하의 설전을 횡단하던 도중, 안나푸르나1봉의 주봉과 중앙봉 사이의 형성된 거대한 쿨와르 안에서 발생한 대형 눈사태와 붕괴된 세락이 덮치면서 매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눈사태 흔적을 따라 종단 또는 횡단하면서 육안으로 세 차례에 걸쳐 확인해 보았으나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BC의 지원대와 하이캠프의 수색대원 4명, 셰르파 11명은 구두와 무선교신으로 수색작업의 연장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후 수색 중단을 결정했다. 눈사태가 일어난 빙하 일원이 얼음처럼 단단하게 변했고 여러 번 더 발생된 눈사태로 더 두껍게 덮인 상태에서 수색활동을 연장한다 해도 큰 소득을 얻기는 어려운 데다 눈사태로 인한 2차 사고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다. 수색대는 10월 28일 오전 11시 사고 지역의 수색활동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전원 하산했다.

 

10월 29일 유가족과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 등이 사고 현장을 헬리콥터로 선회하며 돌아보고 베이스캠프에 내렸다. 그리곤 세 대원의 추모제를 가졌다. 추모제를 지내는 사이에도 남벽 우측에서 거대한 눈사태가 일어났고, 산 아래에서는 구름이 몰려 올라옴에 따라 유족들과 구조대원들은 급히 서둘러 헬기를 타고 남벽 일원을 뜻하는 안나푸르나 생춰리(Annapurna Sanctuary)를 벗어나야 했다. 헬기를 타고 벗어나는 시간에도 남벽은 흰눈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한편, 자신의 등반을 뒤로 미루고 선후배 산악인들의 구조에 참가했던 K2 클라이밍팀의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이 촐라체 북벽 등반 이틀째인 11월 11일 오후 4시경 추락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산악인들은 더욱 참담한 심경에 휩싸였다. 

 

 

▲ 안나푸르나 남벽 코리아 루트 개념도와 실종 예상 위치도.

 

 

월간산 [506호] 20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