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7. 22:42ㆍ시,좋은글/詩
밥과 자본주의
해방절 도성에 찾아오신 예수
고정희
오십억의 해가 뜨는 조용한 분단의 나라 해동조선에서
단군개천 오천년, 그리
통일염원 오십년 만에 드디어
해방절 운동이 시작되었다
감옥에 갇힌 자가 풀려나고
빚에 묶인 자가 빚을 탕감받으며
억울한 자가 그 억울함에서 위로받는가 하면
소작인이 자기 땅을 되돌려받고
권력을 쥔 자가 권력을 내놓으며
교회와 부자가 곳간문을 열어
여자나 남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 모두가
완전한 평등
온전한 권리와 밥을 되찾게 하는 해방절,
이 어마어마한 희년운동이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니,
과연 서울의 해방절 선포가
오십억 장정의 부활에 이를지
새빨간 거짓 부정 지옥에 떨어질지
비장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똥줄이 타는 어느 진보노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부디 오셔서 우리를 도우소서"
서둘러 텔렉스를 하늘나라에 보냈고
시간을 벌고 싶은 어느 보수노선 교인들은
"내탓이오 내탓이오" 스티커를 자가용 유리창에 부착했다
이에 마음이 약해진 예수께서는 행장을 꾸리시고
해방절이 준비중인 도성에 들어와
아무도 모르게
달동네에서 하룻밥을 묵으셨다
그러나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예수께서 머무신 이 달동네에는
미증유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해방절은 구십오년 팔월 십오일이었고
때는 아직 구십삼년 유월,
이름을 알만한 한 성직자가
예수 앞으로 걸어나왔다
사람의 본뜻을 저버린 역사의 벌을 누가
받아야 합니까?
사람의 평화
민족의 평화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나는 너희에게 칼을 주러 왔다. 선포하시던 이여
이 나라 이 민족이 지난 오십년 동안
반 평화
반 민족
반 해방속에서 갖은 수난을 겪고
동족상잔의 분단 대립 속에서
백가지 분열과 파당 싸움이 산천을 뒤흔들 때에도
우리는 당신이 주신 칼을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위임하신 평화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보소서 이 땅에는 아직도
밥줄의 주도권을 겁탈한 자들이
당신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보소서 이 세계는 아직도
전쟁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들이
힘없는 나라들을 종 부리듯 하며
이 지파와 저 지파를 협박하면서
서로 적대감을 부추겨 싸울질시켜 놓고
뒷전에서 이득이나 챙기고 있습니다
백성의 민안을 책임맡은 자들이 하는 일이란
혀끝 하나로 벼락부자가 되고
정의로운 시민을 사찰, 고문, 암살하면서
지금껏 권좌에 않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고백합니다
당신이 주신 평화의 칼을 들고자 합니다
오십년 동안 놔먹인 분단의 빙벽을 허물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금껏 사람의 뜻을 저버린 역사의 벌을 누가 받아야 합니까?
역사의 주도권을 쥔 자들입니까
주도권을 묵인한 우리들입니까
재난의 때에 말을 가진 자가 침묵하는 것은
이에 예수께서 지체없이 대답하셨다
형제여, 그대는 마땅한 질물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희에게 모든 척도를 주었다
너희 시대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너희가 아직 옳고 그름을 모른다 함은
내 아버지와 나를 모른다 함과 같다
너희 시대 안에서 일어난 잘못은
그것이 위정자가 저지른 죄악이라 해도
그것을 바로잡는 노력이 너희의 몫이다
이것이 역사의 주인 노릇이다
피를 보면 광란하는 악마의 자식들이
내 백성의 혀를 뽑고 눈알을 뽑을 때, 그리고
서러운 내 백성의 신음소리로 축포를 만들 때
평화의 칼을 가진 너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너희는 너희가 반드시 말해야 할 때 침묵하였고
달려가야 할 때 교회 안에서
복을 달란 소리나 요란하지 않았더냐?
재난의 때에 말을 가진 자가 침묵하는 것은
내 백성을 다시 십자가 형틀에 매다는 것과 같다
해방의 주체가 누구이냐?
또 나는 너희에게 묻겠다
분단체제 오십년을 넘기지 않겠다며
너희가 스스로 결정하고 너희가 스스로 선포한
해방절의 주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해방받을 사람이 누구이냐
내 앞에 앉아 있는 너희 자신이냐?
교적부에 이름을 올린 천만 신도냐?
내 백성이 갖지 못한 것을 다 가진 재벌교회들이냐?
하느님을 담보로
자기 분수 이상을 성취한 자들이냐?
성서를 팔아먹는 거짓말쟁이들이냐?
권력에 빌붙어 주님, 주님, 집회나 벌이는 자들이냐?
머리나 열심히 굴리고
궁색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자들아
한심하구나
내게 올 시간이 있었거늘
회개에는 아직 관심조차 없구나
없구나, 없구나
해방절은 자기 몸에 칼을 대는 혁명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 나라 해방절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몸에 칼을 대는 혁명이다
교회가 곳간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닫지 않는 혁명이요
주린 자가 다시는 주리지 않게 되는 혁명이요
억울하게 갇힌 자가 다시 갇히는 일이 없는 혁명이다
당연히 누려야 할 사람의 권리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람의 대우
당연히 차지해야 할 사람의 밥그릇
당연히 지녀야 할 사람다움의 세상을
내 백성에게 되돌려주는 혁명이다
해방을 되돌려주는 혁명이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아무도 배고프지 않으며
너희 중에 아무도 헐벗지 않으며
너희 중에 아무도 억울하지 않으며
너희 중에 아무도 궁핍하지 않은 사람끼리
해방절 예배를 백번 그럴싸하게 차린들
내 아버지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아버지가 알아듣는 말로 너희가 다시 나를 부르기 전에는
내가 너희를 다시 찾는 일은 없으리라
변명의 때는 끝났다
이제 내 평화의 칼을 들어라
그리고 너희 몸에 먼저 그 칼을 들이대라
그때 너희는 해방되리라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 비지땀을 쏟으시며
남쪽을 향하여 세 번 읍하시고는
남은 빚이 크도다, 책무가 크다
알아들을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며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했다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재림 예수를 보았다 증언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뜬소문이라 일축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해방절이 구십오년 팔월 십오일이었다
또 거짓말 해방인지 참 해방인지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비, 1992)
고정희(高靜熙, 1948년 ~ 1991년 6월 9일)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
《현대시학》에 〈연가〉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목요시’동인으로 활동했다. 1983년 《초혼제》로 ‘대한민국문학상’을 탔다.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다.
시를 쓰는 한편 광주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 법률 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며 사회 활동을 했고,
특히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 시집 -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평민사, 1979)
《실락원기행》 (인문당, 1981)
《초혼제》 (창작과비평사, 1983) 장시집.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눈물꽃》 (실천문학사, 1986)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창작과비평사, 1989)
《광주의 눈물비》 (도서출판 동아, 1990)
《여성해방출사표》 (동광출판사, 1990)
《아름다운 사람하나》 (들꽃세상, 1990) : 연시집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1992) : 유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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