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8. 14:20ㆍ이래서야/더불어살기위하여
죄수복 입고 법정에 선 1987년 노무현은…
2013. 12. 27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김형태 변호사가 본 영화 ‘변호인’
‘속물’이 투사로 변신할 때까지만 다룬 편견 없는 영화
실물보다 더 변호사 같은 송강호, 편안함과 희망 선사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도 짧은 세무 변호사 ‘송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다섯 번의 공판이 시작된다!
1980년대 초 부산. 빽도 없고, 돈도 없고, 가방끈도 짧은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부동산 등기부터 세금 자문까지 남들이 뭐라든 탁월한 사업수완으로 승승장구하며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고 돈 잘 버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다. 10대 건설 기업의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으며 전국구 변호사 데뷔를 코 앞에 둔 송변. 하지만 우연히 7년 전 밥값 신세를 지며 정을 쌓은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국밥집 아줌마 순애(김영애)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구치소 면회만이라도 도와주겠다고 나선 송변.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진우의 믿지 못할 모습에 충격을 받은 송변은 모두가 회피하기 바빴던 사건의 변호를 맡기로 결심하는데...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
모든 합성된 것은 덧없다. 이 세상에 어디 합성되지 않고 저 스스로에게서 유래되어 저 스스로 영원한 게 있을까. 잿빛 겨울 하늘을 천천히 떠가는 저 시커먼 구름의 형상은 코끼리 같기도 한데, 조금 있으니 거인으로 바뀌었다가 어느덧 예쁜 여자 얼굴이 된다. 그러다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면 하얀 눈이 되어 온 천지간에 흩날릴 게다.
영화 <변호인> 마지막 자막이 다 올라가고 팝콘, 커피 냄새 가득한 영화관을 나와 저녁 하늘을 본다. 상고 졸업한 막노동꾼이 고시생이 되고, 판사가 되고, 돈 벌려고 고작 부동산 등기나 좇아다니던 속물 변호사에서, 고문으로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현실에 맞서 투사로 나서기까지 영화는 노무현의 ‘변호사 시절’을 그리고 있다. 마치 저 잿빛 하늘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구름 같은 그의 삶, 아니 바로 우리네 삶을.
우리 모두는 노 변호사의 <변호인> 이후의 삶도 다 알고 있다. 국회의원이 되고,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향해 명패 던지고, 지역감정에 맞서다가 계속 선거에서 떨어지고. 곡절 끝에 대통령이 되고 그리고 집 뒷산 바위에서 몸을 던지기까지.
그런데 <변호인>은 딱 1987년에서 멈추기에 이후 그의 삶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영화를 갖고 그리 흥분할 일은 아니다. ‘1987년까지의 노무현’을 편견없이 그저 영화로 보면 될 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랜만에 나에게 희망과 편안함을 준다. 마치 <춘향전>을 보듯이. ‘부림사건’ 재판 당시 학생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한 걸 멋지게 폭로하는 노 변호사는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치며 육모 방망이를 들고 나쁜 사또 변학도에게 저승사자처럼 달려드는 이 도령 같다. 비록 그 학생들이 징역 몇 년씩을 선고받고, 노동자 돕던 노 변호사는 구속까지 되지만 그래도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비록 현실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가 객관적으로는 분명하다고 여기던 시절이었으니까. 영화 내내 순간 순간 분통 터졌지만, 영화가 참 순진했다.
영화 속 재판 장면은 요즘도 되풀이된다. 얼마 전 미군기지 이전비용 문제를 제기해온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보안법 재판 때도 그랬다. 이적 감정을 한 검사 쪽 증인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남북이 합의한 통일 3원칙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합의한 건데도 잘못된 거냐고 내가 묻자 그래도 잘못된 거란다. 그럼 ‘자주’를 하지 말자는 거냐고 묻자 똑같은 자주를 이야기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이적성이 달라진단다. 무얼 근거로 구별해 내느냐고 하자 “그냥 딱 보면” 안단다. 그냥 딱 보면 빨갱이인지 아닌지 안다고?
영화 <변호인> 시절에는 극히 일부를 빼고는 판사고 검사고 기자고 형사고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줄은 알았다. 지금은?
정의는 사라지고 편가르기만 남았다.
공자님이 오셔서 공자님 말씀을 하셔도 ‘너 누구편인데’ 하고 추달을 당하실 판이다.
영화 속 송강호는 현실의 노 변호사보다는 덜 촌스럽고, 노 변호사보다 오히려 변호사스럽다. 오래전 그와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노 변호사의 요트 이야기며, ‘여자’ 이야기가 보수 잡지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리던 무렵이었다. “노 선배님, ‘라이방’(선글라스) 끼고 장충동 모 호텔에서 여자를 만나신다면서요?” “김 변호사, 나는 생긴 게 워낙 촌스럽고 표나게 생겨서 라이방 껴도 다 알아봐.”
영화 <변호인> 뒤에 이어진, 저 겨울 하늘을 떠가는 덧없는 구름처럼 스산한 삶의 이야기들. 노 변호사를 ‘속물’에서 ‘인권’으로 이끌어내고 감싸준 영화 속 자애로운 선배 변호사 실제 모델은 부산 인권변호사의 대부라는 김광일 변호사다.
1990년 민주당 김영삼이 민정당 노태우, 공화당 김종필과 3당 합당을 한 뒤 김광일은 김영삼 정부에 참여하고, 노무현은 ‘야합’이라며 이를 거부해 두 사람은 길이 갈렸다. 2002년 대선 때 김광일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되는 10가지 이유를 들었다. 노 대통령 탄핵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부림 3차 사건 재판 담당 판사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피고인들 편에서 재판을 하고 좌천되었다가 옷을 벗고 한동안 인권 변론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성조기 그린 군인모자 쓰고 다니며 어버이연합, 박정희 대통령 바로 알리기 모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노 변호사도 대통령이 된 뒤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라크 파병, 노동자 파업 진압 등 영화 속 ‘진보’ 노무현과는 다른 모습을 일부 보였지만, 그래도 진보 정치인의 상징으로 사람들 머리 속에 영원히 남을 게다.
모든 합성된 것은 덧없다. 하지만 덧없다는 건 그저 모든 게 변해간다는 뜻일 뿐이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기에 이 세밑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내 설교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말하고 싶다. ‘용기를 내시라’고. 주여,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우리에게 일자리를 위해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죄수복 입고 법정에 선 1987년의 노무현 <변호인>은 2013년의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김형태 변호사
출처 : 한겨레 신문
12월 27일(롯데시네마)
오랫만에 눈물나도록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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