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프란치스코 교황, 회의에 가득 찬 한국을 발견하게 될 것

2014. 8. 21. 01:37이래서야/더불어살기위하여

 

 

[르몽드] 프란치스코 교황, 회의에 가득 찬 한국을 발견하게 될 것  

 

 

 


1984년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이 나라는 독재에 의해 탄압받고 상처 입은 상태였다. 4년전, 전두환 장군은 특수부대를 이용해 광주 항쟁을 유혈로 진압하였고, 수백 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8월 14일 목요일, 프란치스코 교종이 5일간 방문일정으로 이 나라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민주주의이긴 하나 여전히 상처받고 있다: 4월 16일, 페리[여객선] 세월호의 침몰이 이 나라에 깊은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약 3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5개월이 지나도 한국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있다. 한국인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이 참극을 직접 지켜봤던 것이다. 아이들은 배가 옆으로 기운 채 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휴대폰을 이용해 그들의 부모들에게 문자메시지, 사진, 동영상들을 보냈다. 즐거워하다가 공포에 질리고 끝내 절망하는 [모습들을]. 회피, 관할권의 갈등, 속수무책 [속에]. 아이들은 죽어 갔다.

 


서울은, 그 거대성(확대지향성)으로 인해 모든 것이 과잉인 도시이자, 격렬한 리듬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분위기가 무겁다. 최빈곤 계층에 대한 대한 지식인 사회의 불안감이 매우 크다. 투자자들에 따르면, 제도에 대한 신뢰의 위기로 인해, 한국인들이 과거에 신뢰했던 "굳건하고 확실한"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회의감들이 배가되고 있다. 정치평론가 심재훈씨는 "기차는 정시에 떠나는데, 승객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에게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1960년대에 경이적인 경제성장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국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다. [세월호]참사가, 주민의 안전을 희생해서라도 성장과 이익에 우선권을 인정한 정치-경제 시스템의 결함을 드러낸 것이다. 언론은 이 비극의 원인에 대한 개인적이고 대중적인 관심들의 뭉치로부터 매일 매일 부차적인 실(이야기)을 뽑아 냈다.

 


한국인들에게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사고 직후부터 추락한 소비는 계속 침체 중이다. 서울 중심의 광화문 광장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장이 세워졌던 서울시청 광장에는 수많은 노란 리본들(노란 국화는 애도의 상징이다)로 장식된 흰색 텐트들이 자발적인 참여자들로 인해 추모의 장소가 되고 있다. 한 게시물에서는 "이것은 여러분의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읽을 수 있다. 리본들 위에는 가책과 연민의 메시지들이 적혀 있다.("용서해 주세요") 통행인들도 노란 리본을 달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동대문 시장의 한 상인은 말한다.

 


40년전,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노동자가 이 구역의 작은 작업실에서의 [열악한] 근로 조건에 항의 하면서 분신하였다. 1961년 권력을 잡은 박정희 장군의 독려 속에서 "한강의 기적"이 시작되었다. 고기 맛에 굶주린 기업가들이 앞장선 계획경제로 한국은 세계정복에 나섰던 것이다.

 


<투기꾼들의 탐욕에 사로잡힌 국가>

 


성장은 달아 올랐다 : "Palli, Palli" ("빨리, 빨리"). 지도층들이 조장하는 긴박감에 나라는 긴장상태로 유지되었다. 대다수는 생산 위주의 목표에 동조했다. 40년동안 한국은 번영의 문들을 열고 나왔다. 1980년대 말의 민주화는 이러한 리듬을 감속시키지 않았다. 1인당 국민소득 25000달러, 세계 경제 15위로,한국은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때로 터무니없는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성공하는 듯 했다: 녹색 첨단 기술, 지능형 도시들 등. 그러나 "경제 민주화"는 제 때 이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결속력은 와해되고, 중산층들은 성장의 혜택에 대한 환상을 잃어 버렸다.

 


사람들은, 흑막 뒤에선, 언제나 이익이 안전 기준에 선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소기업들에서 매년 3000여명이 근로 사고로 사망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 20년간 재난들이 반복되었다 (다리 붕괴, 전철 사고 등). 세월호의 침몰은 비뚤어진 사회의 불안감을 폭로했던 것이다.

 


노인들은 국가 부흥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자신들이 왜 그토록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용인했는지 자문한다. (여기에는 가톨릭 교회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결국은 투기꾼들의 탐욕에 사로잡힌 국가가 생겨난 것이다. 젊은이들은 고도의, 그러나 고통스런, 교육 체제 속에서 몇 년을 보낸 후에도 취직에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들을 여객선 속에서 버림받았던 아이들과 운명적으로 동일시 한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들처럼 진압 경찰들과 대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망(SNS)을 통해 모이고, 촛불집회에 참가한다.
   "독재시대에 우리 부모님들은 하나의 [타도] 대상이 있었다. 오늘날의 고통은 제도로부터 나온다. 무엇에 대항하여 투쟁하나?"
시청광장의 추모식장 근처에 있던 한 학생이 자문한다.

 


<생산지향적인 기세가 비등하기 시작하다>

 


젊은 세대는 이 재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해 국회에서 다투고 있는 모든 진영의 정치인들 그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다수 집권당은 야당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능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치적 합의마저 부족해 보이며, 생산지향적인 기세가 비등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혁을 약속 했다. 그러나 2013년에 권좌에 올랐지만, 이미 그 미숙함들로 인해 권위가 실추되었다. [개혁] 작업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면] 이 나라는 지지자들의 조직과, 지역, 혈연 또는 파벌 등의 연대 조직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또한 퇴직 공무원들의 관행화된 "사기업으로의 이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회 시스템의 모든 단계에 선물(뇌물)과 특혜가 기생하며 조직들의 기능을 [방해하고 있다].

 

 

성리학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위계체제에 대한 존중과 희생정신이 국가 부흥에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어떤 한계점에 이르렀다. 후원과 야합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러한 관행들은 법률적인 관점에선 비난 받을 수 없지만,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격렬한 충돌과 계엄령을 동반한 태국 식의 혼돈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한국의 젊은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Philippe Pons (<르몽드> 서울 특파원)
번역: 파리이장

 

 

 

 

 

Le pape François va découvrir une Corée du Sud en plein doute

 

LE MONDE | 13.08.2014 à 11h26 • Mis à jour le 14.08.2014 à 08h18

|Par Philippe Pons (Séoul, envoyé spécial)

 

 

 

Préparatifs de la venue du pape François sur la place Gwanghwamun, au centre de Séoul. 

| KIM HONG-JI/Reuters

 

Lorsqu'en 1984, le pape Jean Paul II se rendit en Corée du Sud, le pays était muselé et meurtri par une dictature. Quatre ans auparavant, le général-président Chun Doo-hwan avait recouru aux unités d'élite de l'armée pour mater dans le sang une émeute à Kwangju, dans le sud-ouest du pays, causant la mort de centaines de civils. Trente ans plus tard, le pape François arrive jeudi 14 août pour une visite de cinq jours dans une démocratie, mais dans un pays également meurtri : le naufrage, le 16 avril, du ferry Sewol, qui a fait près de 300 morts, pour la plupart des enfants, a affecté profondément le pays.

 

Cinq mois après, la Corée du Sud reste sous le choc. Les Coréens ont assisté à la catastrophe en direct à la télévision. De leurs mobiles, les enfants prisonniers du ferry couché sur le flanc qui flottait encore envoyaient à leurs parents des messages, photos et vidéos, amusés, affolés puis désespérés. Tergiversations, conflits de compétence, impréparation : ils périrent.

 

Séoul, ville de tous les excès par son gigantisme, vit à son rythme trépidant habituel. Mais l'atmosphère est pesante. Le malaise est sensible, des milieux intellectuels aux couches les plus humbles de la population. La crise de confiance dans les institutions se double de doutes sur un modèle de développement, « robuste et sûr », selon les investisseurs, dont les Coréens étaient fiers. « Les trains partent à l'heure, mais les passagers ne savent pas où ils vont », commente l'analyste politique Shim Jae-hoon.

 

POUR LES CORÉENS, LE DEUIL N'EST PAS TERMINÉ

 

 

(이하는 <유료 구독>이기 때문에 저작권 문제로 게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