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3. 01:19ㆍ시,좋은글/詩
습작생 / 박덕규
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이 먼저이고요,
책꽂이의 책을 가지런히 하는 게 그 다음입니다.
책꽂이가 좁아 책을 책상 모서리에 쌓아올려야 하고요.
연필을 깎다 보니 손이 더러워졌죠.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촛불을 밝히는 일이 먼저이고요,
흘러내리는 촛농이 굳기를 기다리는 일이 그 다음입니다.
촛불이 만들어주는 그림자에 흰 종이를 내어 보여주지요.
그림자가 잠드는 때를 기다립니다.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정돈합니다. 필통, 수첩, 만년필,
저금통장, 동전, 묵은 교통카드, 영수증, 알약, 사진 여러 장…….
사진을 보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 버렸네요. 움푹 팬 눈이
우물이 되었고요. 그 우물 속으로 누가 두레박을 타고 내려옵니다.
오디오를 켜는 일이 먼저이고요, 음악을 듣는 게
그 다음입니다.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모은 여자가
허공에 떠 있습니다. 수학시험에 못 푼 문제들이
꼬리를 뭅니다. 도대체 이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박덕규 / 1958년 7월 12일 경북 안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 단국대 문예창작과에서 박사학위.
협성대 문예창작과 교수, 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
1980년 『시운동』에 「비오는 날」을 발표하며 등단.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
공동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1982)
시집 『아름다운 사냥』(1984), 『꿈꾸는 보초』(1988) 등
소설집『날아라 거북이!』(1996), 『포구에서 온 편지』(2000) 등
평론집『문학이 들려주는 49가지 속삭임』(1997), 『사랑을 노래하라』(1999) 등
시 쓴다면서 왜 자꾸 딴짓을 하니? 자질구레한 할 일이 그렇게도 많니? 시가 안 오니 이 일 저 일 핑계만 늘어나니?
영국 시인 엘리엇은, 시인이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무엇이 있을 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 말을 발견할 때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표현해야 할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는 척 시치미 떼고 기다리는 중이다. 겉으로야 한가하고 태연해 보이겠지만 안으로는 얼마나 애태우고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책상은 깨끗해지고 책은 가지런해지고 서랍은 잘 정돈이 되었구나. 이제 시가 오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안 왔니? 다시 책과 책상과 서랍을 어지럽혀 줄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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