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009. 12. 25. 17:38ㆍ山情無限/山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大東輿地圖》는 김정호가 1861년(철종 12)에 조선을 남북 22폭(또는 층)으로 나누어 만든 목판본 대축척 조선 지도책이다. 1864년(고종 1)에는 일부분을 수정하여 재판하였으며, 목판의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과 숭실대박물관 등에 현존하고 있다.
각 폭은 가로 80리, 세로 120리 간격의 동일한 크기로 접혀 있으며, 위와 아래를 모두 연결하면 동서 약 3m, 남북 약 7m의 초대형 朝鮮全圖가 될 수 있다. 거리와 방향, 위치의 정확성을 추구한 조선시대의 全圖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조선 지도집은 1834년(순조34)에 남북 29폭(또는 층)으로 나누고, 2책으로 묶은 《靑丘圖》로 알려져 있다. 《청구도》는 현재 10종 정도의 이본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정호 자신이 여러 이본을 만든 것인지, 후대에 필사자들의 필사 과정에서 여러 이본이 형성된 것인지 아직 분명하게 연구되어 있지 않다.
다만 18세기 후반기에 거리와 방향, 위치의 정확성을 추구했던 대축척 군현지도의 성과를 편리하게 볼 수 있는 형태로 편집하고,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수록한 지도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구도》 제작 이후 김정호는 지리지의 저작에 몰두한다. 18세기 후반기에 이룩된 대축적 군현지도의 성과 자체도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바탕을 둔 자신의 《청구도》 역시 완벽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지리 정보의 체계화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모든 지리지를 검토 비교하고, 새로운 지리지의 체계와 내용을 세워나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東輿圖志』와 『輿圖備志』이다. 『東輿圖志』의 최종 완성은 《대동여지도》가 완성되는 1861년에 이루어지지만 이미 《청구도》 제작 이후부터 꾸준히 이루어진 것이다. 지리지의 완성으로 지리 정보의 체계화가 이루어지자 김정호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지도집의 제작에 나서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東輿圖》이다.
《동여도》는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1856년과 1859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지도의 크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동여도》와 《청구도》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들어가면 두 지도집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지명의 수라는 측면에서 《동여도》는 《청구도》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둘째, 산을 고립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連脈式으로 표현하였다.
셋째, 지명의 위치나 하천의 유로, 산줄기의 흐름, 고을의 경계선, 해안선 등에서 상당히 많은 교정을 가하고 있다.
넷째, 地圖標를 특별히 삽입할 정도로 정보의 기호화를 추구하였다.
다섯째, 책으로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각 층마다 절첩식으로 하였고, 22층 자체를 모두 분리시키거나 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좀 더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임과 동시에 보다 효율적으로 지도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궁리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지도와 지지가 결합되었던 《청구도》에서 순수한 지도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여도》는 채색필사본이기 때문에 대중적인 보급에 한계가 있었다. 김정호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목판본인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이다. 즉, 《동여도》는 그 자체로서도 의미를 갖고 있지만 목판본 지도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저본으로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동여도》를 그대로 목판에 옮긴 것은 아니다. 목판을 목표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목판을 만들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에 비해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수록된 지명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것은 목판 판각의 어려움 때문에 지명이 너무 많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連脈式의 산줄기 표현이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山圖 형식처럼 더욱 단순해졌다. 이것 역시 목판 판각의 어려움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기호의 사용이 더욱 간단하게 바뀌었다. 이것은 채색필사본에서 색을 사용하여 구분하던 것과 달리 목판본에서는 흑백으로만 구분해야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변화들을 제외하면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거의 동일하다. 《대동여지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있다. 위치나 거리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지도는 정보가 밀집된 지역의 내용을 풍부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수도 한성부나 도성 역시 모든 지역의 축척을 동일하게 하면 하나의 점이나 원으로밖에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정보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김정호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도성도와 한성부지도(京兆五部)를 특별히 삽입하여 그려 넣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와 지지적 자료가 결합되어 있던 《청구도》와 달리 순순하게 지도적인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각 지역의 물산이나 각종 통계 정보를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김정호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동여지도》와 짝하여 볼 수 있는 지리지를 만들려고 했으며, 그것이 바로 『大東地志』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김정호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이 책이 완성되었다면 김정호는 아마 목판이나 활자본으로 찍어 보급하여 《대동여지도》와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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