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 22:38ㆍ山情無限/山
지리산
(智異山)
지리산의 자연
1. 명칭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전설 속의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였으며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 일컬어왔다. 지리산은 또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렸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는데 간혹 남해바다에 이르기 전 잠시 멈추었다 해서 두류산(頭留山)으로 적기도 한다[동국여지승람].
이와는 달리 두류산이란 명칭에 관해서는 지리산의 전체적인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고 두리뭉실하며 또 사방으로 산들이 첩첩이 둘러쳐 있기 때문에 이를 뜻하는 우리말 '두루', '두리', '둘러'가 한자로 표기ㆍ전착되는 과정에서 두류(頭流)로 되었다는 최근의 새로운 주장도 있다.
전설에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씨조선을 개국하려 할 때 전국의 명산에 기도를 올려 자신이 갖고 있는 창업의 뜻을 물었는데 유독 지리산만이 반기를 들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지리산은 반역산(反逆山), 불복산(不伏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속시킴은 물론 역적을 지리산록의 전라도 지방으로 귀양보냈다고 전한다. 때때로 이 전설에 맞춰서 지리산(智異山)을 '지혜롭고 기이한 산', '지혜와 다른 산'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또 지리산의 어원을 여기서 찾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과장이나 착오이다.
지리산(智異山)은 원래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와 지리산(智利山)이었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문수보살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하여 갖가지 다른 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山)'이란 뜻으로 지리산(智異山)으로 적는다고 한다.
이처럼 지리산의 한자표기는 지리산(智異山)이 맞는데 가끔 지리산(地利山), 지리산(地異山) 등 음이 같은 것을 취한 오기도 보인다.
2. 위치와 면적
우리나라의 척추격인 태백산맥에 남으로 달리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다시 한 가지를 뻗어 서남방향으로 틀어 달리면서 속리산, 덕유산을 일구어놓고 마침내 그 남은 여새를 몰아 꾸며놓은 거대한 산악군(山岳群)이 바로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영ㆍ호남지방의 경계상에 위치하며,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주능 선이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주위의 고산준봉을 거느리는 남녘의 지붕인 셈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전남, 전북, 경남의 3개도와 5개군 15개면에 걸쳐 있으며 국립공원 면적은 485.00평방킬로미터, 둘레가 320㎞로 약 800여 리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포용하고 있다.
경ㆍ위도상으로 동경 127도 49'50"(함양군 금서면)에서 동경 127도27'50"(남원군 주천면)까지, 북위 35도13'00"(구례군 토지면)에서 북위 35도27'00"(남원군 운봉면)까지 위치하며 동서간의 도상 직선거리는 34㎞, 남북간의 도상 직선거리가 26㎞에 달한다.
참고로 지리산 국림공원의 토지이용 현황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산지로 형성되어 있는데 임야가 전체의 98.6라는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고 계곡 주변에 형성된 농경지는 전체의 0.3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 농경지 또한 화전과 개간을 통해 이루어진 논과 밭이 많으며 논도 대부분 계단식 천수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垈地)는 공원구역 안의 저지대에 대개 산발적으로 분포 되어 있고 달궁계곡과 화개골 주변에는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기도 하다.
3. 산세와 지질
지리산은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하여 동서로 장장 1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는 우리나라 최장의 주능선과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대소 15개의 지능선이 함께 어루러져 웅장한 단일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의 자태가 마치 소가 누운 모습이라고 많이 얘기하곤 한다.
대체적으로 지리산은 천왕봉, 써리봉, 연하봉, 칠선봉, 남부능선 등 몇 군데의 노출된 암석지대를 빼고는 산 전체가 토심이 깊고 비옥해서 온통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는 중후하고 장엄한 산세를 그 특징으로 한다.
지리산은 중생대 '쥬라'기(紀)의 대지각 변동과 제3기 단층작용에 의해 형성된 만장년기(晩壯年期) 산괴(山塊)로서 경상계(系)ㆍ낙동통(統)의 침식경사면에 편마암과 화강암이 부정합으로 와층(瓦層)되어 나타나는데, 요곡과 단층 작용을 받아 지질구조가 복잡하다.
화강암은 일반적으로 소구역을 차지하여 구릉지를 형성화고 있는데 풍화작용이 현저하여 비교적 신선한 부분이 노출되고 있으며 대부분은 조립(粗粒) 내지 세립(細粒)의 각섬석화강암에 속하고 소량의 흑운모를 함유하기도 한다. 특히 장석(長石) 반문(斑紋)의 크기가 직경 10cm 이상이 되는 것이 흔한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암석학적 현상이라 한다. 전반적으로 지리산의 지표는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배수가 양호한 사양질 또는 식양질의 토양으로 형성되었으며, 부식물이 많고 유효토심이 깊어 예로 부터 울창한 원시림이 뒤덮고 있었다.
4. 기후
지리산은 해안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고 산세가 높으므로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온의 일교차와 한서의 차이가 심한 편이다. 한여름 마을 근처의 산록지방이 30도씨를 웃돌 때 산정(山頂)은 20도씨 이내에 머물기 때문에 표고(標高)에 따라 평균 15도씨 안팎의 기온차이를 보인다.
천왕봉에서 최고기온은 25도, 최저기온은 영하 30도 이하를 기록하기도 하는데 겨울철 차가운 북서풍에 실려온 추위는 실제 체감온도를 훨씬 떨어뜨린다.
지리산의 연평균 강우량은 1,200mm 이상이며 여름철에 연강우량의 60이상이 집중되어 계곡에서 급류에 의한 조난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기도 한다. 한편, 겨울철에는 강설량이 많기로 유명하여 칠선계곡과 한신계곡은 겨우내 1~2m 정도의 만년설이 쌓여 이듬해 5월경에야 녹는다.
지리산은 맑은 날씨에도 곧잘 계곡의 기류가 상승하여 구름으로 변하기 때문에 맑고 청명한 날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며 기상변화에 따른 운무와 안개가 자주 낀다. 연평균 맑은 날이 80~100일 정도이고 하루 동안에도 수시로 기상이 급변하는 전형적인 산악날씨의 특징을 보여준다.
풍향은 대체로 우리나라 여느 지역처럼 여름철에는 남풍 혹은 남동풍이, 겨울철에는 북서풍과 북풍이 많이 분다. 산록지대의 마을에는 지리산맥이 가로 막아주어 풍속이 연평균 초속 1~2m정도로 미약한 편이지만 산정에서는 거목을 뿌리채 뽑아 넘어뜨릴 정도의 강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청파(菁坡) 이륙(李陸)은 그의 [지리산 유산기](遊山記)에서 지리산의 기후에 관해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이 지나도 녹지 않는다. 6월 서리가 처음 내리고 7월이면 눈이 오고 8월이면 얼음이 크게 언다. 첫 겨울이 되면 눈이 몹시 와서 골과 구렁이 모두 편평하여지므로 사람이 왕래할 수 없게 된다. ....산 아래에는 뇌성과 번개가 치고 큰 비가 와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구름 한 점 없다. 산이 높고 하늘에 가까우니 기후가 평지와 아주 다르다"라고 적고 있는데 그때 당시와 지금은 얼마간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지리산에 첫눈이 오는 시기는 11월 초순경이고 이듬해 3월말경 눈이 녹기 시작한다. 첫 얼음은 10월 중순쯤 얼고 4월말경 녹으며 그리고 첫서리는 10월 초순경이나 9월말경 내린다.
참고로 지리산의 녹음은 4월 초순~중순경 우거지기 시작하고 4월말~5월초에 진달래가, 5월말~6월초에는 철쭉이 만발하고 그리고 단풍은 10월 중순~11월 초순경에 본격적으로 물든다.
5. 식물상
한랭한 고산지대와 온난한 산록지대를 이루고 있는 지리산은 토질이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나무들의 생육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지리산에는 목본식물이 245종이 분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대표수종인 소나무가 근간을 이루고 남부지방의 대표수종인 서나무, 그리고 지리산 대표수종인 졸참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다. 이러한 기본수종과 더불어 산중(山中)지대에는 굴참나무가, 산정(山頂)에 이르면 가문비나무ㆍ분비나무ㆍ물푸레나무ㆍ신갈나무 등이 많이 분포한다. 그리고 천왕봉 일대에는 저온과 강풍 때문에 왜형화(矮型化)된 사스레나무, 좀고채목, 물앵두나무, 털진달래, 붉은병꽃나무, 등이 군생 또는 혼생하고 있어 남한 고봉의 식물군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세석고원의 수십만 그루에 이르는 철쭉군락도 장관이고, 화엄사 입구에 있는 수령 300년의 올벚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한편 초본식물 중 특이한 점은 백두산에서만 자생한다던 백두산초와 금강산에서만 자생한 것으로 알려진 여우꼬리풀이 천왕봉에서도 자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석고원 일대의 애기괭이밥, 나도옥잠화, 누운제비꽃 등과 노고단의 원추리 군락도 지리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식물상이다.
예로부터 지리산에는 다양한 약용식물이 분포하여 국내 최대의 약초 산지로서 각광을 받았는데 지금도 구례 산동지방의 산수유를 비롯하여 당귀, 복분자, 만병초 등 질 좋은 약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지리산의 식물종류는 앞서 목본식물 245종과 함께 초본식물 579종 등 총824종인데 이를 용도별로 분류해보면 약용식물 174종, 식용식물 285종, 식용 겸 약용식물 92종, 경제수종 16종, 미이용식물 423종이다.
6. 동물상
지리산은 야생동물 서식에 알맞은 울창한 수림과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야생동물에게는 낙원이다. 지금까지 학계에 조사ㆍ보고된 지리산 서식동물은 포유류가 15과 41종, 조류가 39과 165종, 곤충류가 215종 등 총 421종이다. 포유동물 중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향노루(216호), 하늘다람쥐(328호), 반달가슴곰(329호), 수달(330호) 등과 대륙사슴, 오소리, 목도리담비, 표범, 청설모, 붉은박쥐 등이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 그러나 위의 동물 중에서 안타깝게도 구체적으로 생존이 확인되지 않고 목격자들의 믿기 어려운 목격담에근거한 것도 있고 또 지금쯤에는 거의 멸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종류도 있는 실정이다.
혹자는 표범과 호랑이의 서식을 조심스럽게 점치기도 하는데 일제시대와 6.25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동물의 서식은 확인되고 있었지만 전쟁의 북새통에서 멸종 혹은 이동한 것으로 대부분 믿고 있다. 표범이 차일봉과 왕시루봉 등지에서 극소수가 서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은 편이다. 또 근자에는 세석 근방에서 호랑이 새끼를 목격했다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1963년 학계에서 조사할 때는 멸종했다고 단정 내린 바 있다.
반달곰은 1960년대초 자유당 고위관리가 칠선계곡 등에서 3년여에 걸쳐 무려 40여 마리를 포획하는 등 밀렵의 성행으로 거의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78년 10월 9일 한국일보 야생동물 취재반이 천왕봉 동쪽인 산청군 삼장면 '물가름' 근처 해발 900m 무명능선에서 두 마리의 아기곰을 촬영하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지금도 지리산에 최소한 반달곰 정도는 서식하고 있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낙관적으로 장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수달은 함양군 마천면에서 산청군 생초면에 이르는 약 20㎞의 엄천강 일대에 100여 마리가 집단서식하고 있음이 1979년 3월 야생동물 보호협회의 현지답사에 의해 확인된 적이 있지만 양질의 모피 때문에 항상 남획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 최근 MBC 취재반이 수달의 배설물 등 흔적을 발견한 적은 있지만 촬영에는 실패하여 멸종의 우려를 갖게 하는데 또 다른 수달 서식지로 덕천강과 섬진강을 얘기하기도 한다.
1968년 미국인 타이슨 박사와 이대 김헌규(金憲圭) 교수가 각각 4000마리, 400마리 등으로 그 수를 추정한 바 있는 사향노루도 만병통치약, 정력제에 특효가 있다는 사향(麝香)때문에 늘 희생의 위험이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만복대와 반야봉, 노고단 일원과 웅석봉 아래 마근담 등이 주서식지로 알려져있으며 '지리산 사향노루 보호위원회'(회장 우종수)가 1978년 조직되어 사향노루 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지리산에 금렵조치가 내려진 1972년 이후 지리산에는 번식력이 좋은 멧돼지, 노루, 토끼, 담비 등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덫과 올가미에 의한 밀렵행위와 함께 지리산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어서 과연 야생동물의 수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알 수 없는데 그래도 눈 쌓인 지리산 곳곳을 살펴보면 야생동물의 발자국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점차적으로 지리산의 야생동물들이 자체번식을 통해 늘어가고 있다는 희망적인 조짐이 증거이다. 인간과 야생동물이 서로 공존하는 지리산, 야생동물들의 힘찬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리산이 되도록 보다 철저한 밀렵근절과 보호대책이 시급한 때이다.
7. 지리10경
지리산은 그 크기가 장대한 만큼 수많은 절경과 비경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특색있는 자연경관 10개를 들어 지리10경이라 부른다. 1972년경 지리산악회 우종수 회장이 발표하면서부터 공식화 되었는데 지리10경을 접하는 데는 당연히 계절적ㆍ시간적 조건과 날씨ㆍ일정상의 문제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때때로 세석철쭉, 피아골단풍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폭주하는 부작용도 없지 않다. 각자가 느끼는 감동과 생각에 따라서는 다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으나 참고로 실어본다.
노고운해
지리산 서쪽 최고봉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구름바다이다. 멀리 남해 바닷가에서 몰려온 구름이 주변의 산야를 가리고 노고단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면서 마치 속세를 떠난 천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노고단 주변의 원추리꽃, 진달래, 철쭉들과 어울려 그려내는 자연적 조화가 신비스럽다.
직전단풍
매년 10월 중순부터 지리산 제일의 활엽수림 지대인 피아골계곡은 단풍으로 울긋불긋 물들어간다. 설악의 단풍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것이 많은 사람들을 압도적인 분위기로 몰고간다. 산도 붉고(山紅) 물도 붉게 비치며(水紅) 사람도 붉게 물든다(人紅) 하여 삼홍(三紅)의 명소로 친다.
반야낙조
심원계곡 건너 서북병풍이 짙은 암영을 드리우면서, 하루의 고된 장정을 마친 태양이 휘황찬란한 황금빛을 발산하며 고요히 사라져가는 모습은 경건함 마저 느끼게 한다. 반야봉이 주능선상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이 황홀경을 접할 때는 호젖함과 함께 사념에 젖어들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벽소명월
태고의 정적과 고요함 속에서 주변의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벽소령의 명월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 맑은 날 밤 창백한 달과 쏟아질 듯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의 세계는 적막한 느낌이 드는 벽소령의 독특한 분위기와 만나 신비경을 그려낸다.
세석철쭉
매년 5월말 6월초에 걸쳐 수십만 평의 광대한 세석고원 일대는 철쭉의 연분홍 빛으로 곱게 치장한다. 막바지 봄날에 접어든 때에 수십만 그루를 헤아리는 철쭉은 결코 뽐내거나 호사스럽지 않게 시야를 가득 메우고 꿩들은 한가로이 목청을 돋구어, 고원 특유의 정경이 낭만적이고 목가적이다.
불일현폭
쌍계사 뒤편 숲길을 거닐다보면 험준한 협곡 속에 천지를 진동하듯 백척단애(百尺斷崖)에서 포말로 부서지며 쏟아지는 천하절승 불일폭포가 나온다. 마치 한폭의 동향화를 연상케 하는 불일폭포는 비말(飛沫)로 흩어지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일단 학연(鶴淵)에 고이었다가 다시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2단식 폭포인데 온통 바위절벽으로 둘러싸인 주위의 경관이 장관이다.
연하선경
세석과 장터목 사이 연하봉에는 철 따라 향기 그윽한 꽃들이 만발하고 기암 괴석은 천 년의 고색창연한 이끼를 입고 서 있다. 한신계곡을 넘어온 운무가이 봉우리에 잠시 머물면 신선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날 것만 같은 꿈 같은 선경이 펼쳐진다. 탁 트인 전망, 기암괴석, 주변의 기화요초(奇花瑤草)와 고사목,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천연의 조화를 이룬다.
천왕일출
사방이 막힘없이 탁 트인 천왕봉에서는 동틀 무렵 끝없이 펼쳐진 회색 구름 바다 저 멀리서 서서히 서기가 어리다가 오색광채의 거대한 태양이 천지개벽의 순간을 알리듯 떠오른다. 천왕일출의 이 거대한 파노라마는 예로부터 3대의 공적을 쌓아야만 맞이할 수 있다 할 정도로 극히 만나기 힘든 경이와 감탄의 장관이다.
칠선계곡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뒤덮고 시푸른 옥류는 심연에 잠시 머물다 요란한 포말음을 토해내며 폭포에 쏟아져 내려, 비경의 연속을 이루어내는 지리산 최고의 계곡이 칠선계곡이다. 태고의 신비한 정적을 간직한 거대한 밀림, 하얗고 반들거리는 암반 위로 씻기듯 흘허내리는 시원하고 맑은 계류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천혜의 계곡이라고나 할까.
섬진청류
섬진강은 전북 진안, 장수지방에서(전북 진안군 백운면 봉황산의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기름진 평야지대와 산구비를 감돌아 하동포구를 통해 멀리 남해바다로 흘러드는 300리의 유장한 물줄기이다. 지리산 서남쪽을 거쳐 지날 때는 그 푸른 강물 위에 지리산 산자락을 실어 남국의 남만과 흥취를 한층 돋운다. 은빛 백사장도 곱거니와 청류 위에 뜬 거룻배가 이채롭다.
지리산 우뚝 솟아
하늘 높이 뻗었는데
천 골짝 폭포에서
물안개가 자욱 인다
어화 저 청학이
나를 조롱하누나
어찌 종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리오
지리산 주요 등반로
1. 주능선 종주 코스
노고단산장 (4㎞)→(1:20분) 임걸령 (3.5㎞)→(0:40분) 노루목 (0.5㎞)→
←(1:10분) ←(0:30분) ←(0:10분)
(0:10분) 삼도봉 (2㎞)→(0:30분) 화개재 (2㎞)→(0:40분) 토끼봉
←(0:40분) ←(0:30분)
(3㎞)→(1:00분) 총각샘 (3㎞)→(0:50분) 연하천 (1㎞)→(0:20분) 삼각
←(0:50분) ←(0:40분) ←(0:20분)
고지 (5㎞)→(1:20분) 구벽소령 (2㎞)→(0:30분) 신벽소령 (4㎞)→
←(1:30분) ←(0:30분) ←
(1:10분) 선비샘 (5.5㎞)→(1:40분) 영신봉 (0.5㎞)→(0:20분) 세석산장
(0:40분) ←(1:30분) ←(0:20분)
(1㎞)→(0:30분) 촛대봉 (3.5㎞)→(1:00분) 연하봉 (5.5㎞)→(1:00분)
←(0:20분) ←(1:00분) ←(1:00분)
장터목 (0.7㎞)→(0:20분) 제석봉 (1.8㎞)→(0:30분) 통천문 (0.5㎞)→
←(0:10분) ←(0:30분) ←
(0:20분) 천왕봉
(0:10분)
총거리 45㎞ 등정시간 13시간 20분
하산시간 12시간 00분
노루목과 삼도봉 중간능선 북쪽에 위치한 반야봉은 노루목이나 삼도봉에서 반야봉으로 가게되는데 양쪽 모두 오름길은 40분이 소요되며 내림길은 30분정도 소요된다. 다만 여기에 표식하기에 어려움이 있어 생략하고 말로 설명하였다.
남한 최장ㆍ최고 능선의 장쾌한 마라톤 산행 110여리 지리산 서쪽의 최고봉 노고단에서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까지 장장 110여리가 넘는 남한 단일 산의 능선등반 코스 중 최장, 최고의 코스다. 해발 1,300m~1,900m의 고봉준령을 넘나드는 45㎞의 긴 장도이기 때문에 체력과 함께 사전준비에 당연히 빈틈이 없어야 한다. 등정ㆍ하산거리까지 합치면 보통 60~70㎞가 넘는데 일정상으로 2박3일~3박4일이 다소 벅찰 지경이다. 하지만 능선 곳곳에 샘터와 산장, 야영장이 알맞게 위치하고 등반로도 뚜렷하며 아울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있는 하산길도 중간중간에 많이 있어서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가장 일반적인 등정ㆍ하산 코스로는 화엄사계곡 코스, 백무동 기점의 하동 바위 코스와 한신지계곡 코스, 중산리 계곡 코스와 법계사 코스, 대원사 계곡 코스 등이 있다.
전망좋고 유서 깊은 명소가 즐비
이 능선 종주 코스는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와 여러갈래의 지능선, 숱한 계곡을 두루 살펴볼 수 있어 전망이 뛰어나고, 변화있는 등반길과 색다른 지형 그리고 유서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 명소가 즐비하여 사시사철 같은 길을 걷더라도 항상 색다른 풍치를 자아내고 상큼한 감흥에 젖을 수 있다. 3일~4일간 산과 대화하며 걷는 맛도, 또 완주를 해냈을 때의 뿌듯함도 결코 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고귀하고 추억어리 이 지리산 종주산행 경험을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간직하게 된다.
지리산 등반의 대명사격에 해당되고 또 마라톤 산행에 비유되기도 하는 이 주능선 종주는 여러 사정상 대체로 연휴나 휴가철 아니면 찾기 힘든 장거리 산행인데 여담이지만 1980년대 들어서부터 이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새로운 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틀 사흘씩 걸리는 주능선 종주를 하루 만에 해내는 일종의 기록등반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주능선을 왕복하고 화엄사로 빠지는 약 100㎞ 거리를 무려 15시간대 이내에 수행해 낸 그룹도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인으로서는 상상키 힘든 일이다. 하여튼 일반 산행속도보다 몇 배나 빠르고 몇 곱절의 체력소모를 감내한 이와 같은 괴이한 산행(차라리 주행이 옳을까)도 여러 가능성에 도전하는 나름의 시도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와 이유가 있을 듯 하다(필자가 얼핏 [기네스북]의 속보행군 기록을 살펴본 바로는 물론 각기 처했던 상황, 여건이 다르지만 앞서의 기록이 [기네스북]에 적힌 미국 병사들의 60여㎞, 11시간대 기록보다 빠르다).
그러나 자연과의 정서적 교감을 이루어내는 산행문화 속에서 어찌 보면 스포츠화된 이런 기록산행을 필자로서는 굳이 권장ㆍ옹호할 생각은 없다. 각설하고 주능선 종주 첫 기점인 노고단에 대해 알아보자.
첫 기점 노고단은 옛 신단자리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경사 17~18도로 완만하게 전개된 약 100여 정보의 고원지대이다. 해발 1,507m 노고단은 일명 길상봉으로도 불리는데 신라시대 때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祭祀) 부분에 보면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이하의 명산대전에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中祀)를 지내는 오악(五岳)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地利山),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 부악(父岳, 지금의 팔공산)이었다"라고 적혀 있어 신라 때부터 지리산을 남악(南岳)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제사를 올리던 곳이 노고단이며 남악사(南岳祀)라고 전하는데 그럼 이처럼 나라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신라가 국가적 차원에서 올린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 사학자 이이화 씨는 이런 국가의식은 그때 당시 민중들이 받들던 성모신앙(聖母信仰) -민간에서 떠돌던 무속신앙의 큰 흐름- 과는 다르고 또 남악사를 세운 뜻에는 민중들의 별도의 성모사당인 성모사를 누르기 위한 면도 있었을 것으로 분석한다. 그렇다면 결국 신라가 시조의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는 남악사를 세운 의미는 이전까지 민중들 차원의 성모신앙을 국가적 차원에서 흡수하고 또 화해하려는 제스쳐가 아니었던가 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어찌 됐건간에 신라때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지리산에 단을 쌓고 지내던 지리산 제사의 전통은 고려, 조선조까지 변함없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를 산신으로 받들어 모셨는 데 장소는 노고단이 아닌 천왕봉과 휴천면 남호리 쪽으로 옮겨간 듯하다. 조선시대 세조 2년(1456년)에 노고단 남악사가 구례군 산동면 내산리의 평지로 옮겨져 제례가 행하여졌는데 일제시대에는 이러한 관(官)주도의 남악사 제례가 일체 중지되고 지금 남악사는 1969년에 화엄사 앞으로 옮겨와 구례군 축제일에 약수(거재수 물)를 바치며 제를 지내고 있다.
민족사와 함께 변모해온 노고단
신라시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이었다고도 얘기되는 노고단은 한편 일제시대때 미ㆍ호주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 52동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솟아 내를 이루며 흐르는 노고단,후련한 전망과 빼어난 경관 등이 피서지로서 더할 나위없이 좋았을텐데 호텔,공회당, 교회당 등을 비롯하여 발전소, 영화관, 간이 풀장까지 구비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대개 마음씨 고운 선교사 양반네들이 주된 이용객으로 매년 수백 명씩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벽안(碧眼)의 서양인을 4인거에 태워 이를 지고 힘들게 노고단까지 오르내렸을 구례지방 조선인 인부들의 모습이 누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나라 잃은 식민지 때, 천하절승 지리산의 중요한 모퉁이마저 홍콩식 조차계약으로 다시 외국인들에게 할당해주어야만 했던 그 서글픈 시대상황 때문에서도 말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한 이후 근 한 달간 이상 김지회의 반란군들이 이곳 별장촌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하여 그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점령하면서 빨치산 거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버려 지금은 그 옛 건물 흔적만 공허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1948년 12월쯤 별장 건물들이 불타 파괴되면서 이 당시 노고단 주변의 수목들도 때아닌 피해를 입어 지금도 노고단 일대에는 큰 수목이 보이지 않고 싸리나무 등 관목류만이 앞다투어 자라고 있다.
예로부터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鐘石臺), 관음대(觀音臺), 만복대(萬福臺), 집선대(集仙臺), 문수대(文殊臺), 청련대(靑蓮臺) 등 명승지가 산재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중에서 종석대, 만복대, 문수대, 청련대의 지명은 지금도 찾을 수 있다. 관음대는 결국 종석대와 같은 것으로 보이며 집선대는 화엄사계곡 상류 쪽에 지명이 남아 있지만 미심쩍기도 하고 청련대는 노고산장 남쪽 400m 지점 일대의 바위군을 말하는 것 같다. 노고단에서는 또한 전망이 좋아 멀리 무등산이 확연하고 어떤 사람은 맑은 날 한라산까지 보인다고도 말한다.
봄철의 진달래ㆍ철쭉, 여름철의 원추리 군락 등도 장관인 노고단의 정상을 올라와보면 주능선의 웅대한 자태와 함께 남쪽으로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흰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것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느껴진다. 현재 노고단 정상 일대에는 KBSㆍMBC방송 송신탑과 그 부속 건물이 있고 청학동 도인들이 3일간 공들여 쌓은 거대한 돌탑(케룬)이 서 있다. 얼마 전까지 통신부대가 상주했으나 지금은 철수하고 없고 옛 막사와 철조망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문명은 가혹하게도 '반란의 산'을 보복했다
노고단 고원 중앙부에는 현대식 야영장 및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200명 수용규모의 붉은 벽돌로 지은 3층건물 노고산장이 있다. 1988년 1월경 완공된 이 현대식 산장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직영하고 있는데 난방용 히타와 자판기까지 구비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돈만 있으면 취사장비, 야영장비 등 거의 모든 것까지 대여해주는 셈이다.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 냄새가 짙은 산장이다. 전에는 그 옆 좌측에 40여 평 규모의 단층 슬라브 산장이 함태식 씨를 관리인으로 해서 운영되었다. 내무부 예산으로 1971년 건립된 이후로 털보 함태식 씨는 어떤 때는 지나친 간섭이라고 욕 먹을 정도로 산행질서를 바로잡는 데 헌산하고 노력한 결과 한동안 '조용하고 깨끗한 노고단'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때와는 달리, 그리고 지금은 새 산장이 들어서면서 피아골 산장으로 좌천ㆍ추방당한 함선생의 처지와는 달리, 요즘 노고단은 마치 복작대는 어느 저잣거리를 연상케 한다.
반란의 산, 반역의 산, 지리산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를 '성삼재 도로'라는 문명의 보복행위 때문에 가장 직접적이고 첨예한 변화를 맞이한 곳이 바로 노고단이다. 2차선 관광도로가 노고단 턱밑 3㎞ 아래 지점까지 과감하게 뚫리고 포장이 완료되면서부터 연휴나 휴가철만 되면 도로를 가득 메운 관광버스와 각종 차량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들 차량을 이용하여 수많은 행락객들이 손쉽게 해발 1,500m의 산정까지 몰려들어 노고단은 어느 여타 유원지와 다를 바 없을 정도다. 지리산 관광 대중화시대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치고는 너무도 장송곡풍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이 모자란다 아우성치니 대뜸 종석대 발목을 대패질하듯 깎아내리고 위락 시설 부족을 즐비한 가건물 상점들이 대신 메꾸어주는 진풍경이 속출하는 오늘의 노고단은 곧 남한 유일의 해발 1,500m 산상도시일 뿐이다.
노고단 고개에서 반야봉과 첫 인사
노고단산장 우측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서부터 주능선 등정은 시작된다. 좌측에 옛 별장건물의 앙상한 골격이 보이고 몇 년 전 새로 조림한 잣나무가 많이 있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점차 진달래, 철쭉이 나타나다가 곧 노고단 고개에 이른다. 여성의 엉덩이로 짓궂게 표현되는 반야봉이 드넓은 가슴을 드러내고 심원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서 오른쪽 산판도로를 따라 20여분 오르면 노고단 정상에 이르게 되지만 등반로는 바로 산기슭으로 내려서서 노고단 북쪽사면을 횡단하듯 가게 된다.
참나무 숲이 울창하여 터널을 이룬 편한 길이 계속되고 약 20여 분 정도 가면 평편한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장승터이다. 1988년 11월 6일 제1회 '민족통일 대장군'과 '민중해방 여장군'등 장승 2기가 있던 곳이다. 당초 임걸령 샘터 남쪽 공터에 세우려 했지만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이곳에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9년 5월경 누군가에 의해서 전기톱질을 당해 사라져버리고 없다.
하늘을 가린 빽빽한 참나무숲을 잠시 걸어서 나오면 전망이 탁 트이면서 능선 평지길이 나온다.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곳인데 여기서 잠시 뒤돌아보면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길과 만나는 곳에 돌무더기와 비슷한 곳이 있다. 지난 1970년대초쯤 고교생 3명이 세석에서 노고단을 향해 겨울등반을 하던 중 폭설 속에 갇혀 조난당해 결국 그 중 한 학생이 동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비명에 간 학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리산악회에서 세운 비목이 있던 자리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거대한 화원을 이루는 피아골과 심원골 사이의 이 능선을 비목령(지도상에는 '돼지령'으로 적혀있기도 하다)으로도 부른다.
이곳은 또한 왕시루봉 능선의 섬세한 굴곡과 만복대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피아골과 심원계곡이 장쾌하게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능선길이며 완만하다. 1,424고지를 거쳐 구상나무숲을 지나오면 가을철 억새가 춤을 추는 돼지평전을 가로지른다.
초적들의 근거지였던 임걸령에는 맑은 샘이
마치 포근한 엄마 품을 연상시키는 반야봉이 돼지평전 억새밭 너머로 떠받쳐 있는데 '돼지평전'이란 어원은 마늘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돼지평전을 지나면 진달래 군락이 다시 한 차례 나타나다가 싱그러운 초원지대인 잘룩한 능선안부를 거치게 된다. 어렵지 않게 구상나무, 잣나무숲으로 들어서면 피아골계곡으로 빠지는 임걸령 삼거리가 나오고 평탄한 숲길을 따라 얼마 안 가 임걸령 샘터가 이어진다. 조선 명종(明宗) 때의 초적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된 임걸령(林傑嶺)은 아늑하면서도 맑은 물이 솟아 야영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임걸년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걸령 부근에서는 마구와 활촉 등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는 황호랑이 막터라는 곳이 있다. 옛날 약초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곳에서 자다가 기발한 지용(智勇)을 발휘하여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주능선 등반구간 중에서 노고단~임걸령 4㎞가 가장 편한 코스에 속하는데 옛날 화랑들이 말을 타고 달려 화살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과장된 전설이 있을만큼 순탄한 편이다. 임걸령에서는 다소 경사 급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데 얼마 안 가 다시 평지 능선길이 펼쳐진다. 산죽과 단풍나무, 잣나무,구상나무 등이 울밀한 숲을 가다보면 노루목이 나온다.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의미도 되지만 그보다는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암두(岩頭)를 이루고 있어서 노루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노루목에서는 좌측으로 반야봉을 오르는 길과 우측의 반야봉 남쪽사면을 횡단하는 갈림길이 전개된다.
사방으로 거침없는 전망, 반야봉
좌측길을 통해 약 40여 분 오르면 반야봉 정상인데 구상나무숲이 울창하고 진달래, 철쭉이 꽃동산을 이룬 곳을 지나 싱그러운 초원길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지리산 3대 주봉(-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의 하나로서 지리산 중앙부에 위치하는 반야봉은 불교적 의미로 보면 지리산의 주봉이 된다. 지도상으로나 혹은 먼 곳에서 조망하더라도 두개의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지금 반야봉 표석이 있는 곳은 일명 '반야봉 상봉'이라고 불리며 헬기장을 거쳐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봉우리는 '반야봉 중봉'이라고 불린다) 6ㆍ25 당시 각종 포탄이 정상부에 작렬했는지 대머리처럼 초원과 노출된 일부 암석 등이 보이고 구덩이도 많다. 지리산 중앙부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거침없는 전망이 아주 좋은 반야봉은 넓은 산자락 속에 숱한 골짜기를 품고 있어 봉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일한 산이라 말할 수 있다. 반야봉 자락 부근에는 희미한 길들이 어지럽게 얼크러져 있지만 찾는 이는 드문 편이며(반야봉을 중심으로 한 등반로는 3곳 정도 있다. 이 중 심원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데 원시림과 전망 좋은 능선길이며 돌고개로 빠지는 7㎞코스와 소위 '심마니능선'이라 불리는 반선으로 빠지는 긴 능선 코스는 아직은 험로를 헤치며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주능선에서 떨어져 나와 벅차게 올라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하는 저 때문인지 두 번 이상 찾기조차 힘들다. 남성적 명칭에 여성적 면모를 지닌 반야봉 주변의 울창한 원시림은 보기 힘든 장관이고 겨울철 흰 눈을 뒤집어쓴 설산의 모습은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옛날 지리산 반야봉에 올랐던 서경덕이 읊은 시조 한 수를 감상하자.
지리산은 우뚝 솟아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올라가 보매 마음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험한 바위는 장난한 듯 솟아 봉우리들이 빼어났으니
아득하기만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
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산은 다만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
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일까.
반야봉을 올라 하산할 때는 노루목으로 내려오기 약 300m 전방에서 좌측으로 갈림길이 나 있으므로 거기를 지나 이름 모를 무덤을 거쳐 진달래 군락을 오르면 삼도봉(三道峯)에 도착한다. 삼도의 경계를 이루는 암봉, 삼도봉은 일명 날라리봉으로 적기도 한다.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 이름 중에서 가장 천박한 느낌을 주는 유일한 명칭인데 연유는 이렇다. 삼도봉의 바위 모양이 낫날 같다 하여 '낫날봉'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날라리봉'으로 되었다고 하고, 달리 삼도봉 주위의 봉우리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처음 명명할 때 '나란이봉'이던 것이 '닐리리봉', '날라리봉'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찌 됐든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명칭은 달리 부르는 게 합당할 듯하다. 삼도봉에서 보이는 전망 역시 훌륭한데 불무잔등 능선과 피아골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에 토기봉이 복스럽게 걸려있다. 삼도봉에서 바위 벼랑 밑을 비껴 내려오면 경사 급한 내리막길이 투박하기 그지없고 어느덧 헬기장이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한다. 지리산 종주 코스 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고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간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터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 등이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옛 물물교역 루트인 화개재를 지나면 토끼봉
화개재에서 남쪽계곡(칠불사계곡, 연동골)을 따라 희미한 길이 나 있는데 범왕일 목통마을에 닿는 이 길은 뱀사골산장 물품을 나르는 길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 뱀사골계곡 쪽으로 200m 내려가면 뱀사골산장과 함께 샘터가 나온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점차 경사를 더해가는 힘든 길이지만 울창한 구상나무, 전나무숲을 거닐어 진달래 관목지대가 펼쳐지는 정상에 오르면 전망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또 4월말경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진달래가 토끼봉 정상을 온통 붉게 물들여 진한 꽃내음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곳이다. 뒤돌아보면 듬직한 반야봉과 뒤쳐져 따라올 듯한 노고단이 훤하고 천왕봉, 세석, 명선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연봉의 위용도 가관이다.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가끔 지도상에 이라 한자 표기한 것은 일종의 오기로 지적할 수 있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토끼봉 남쪽 능선길을 따라 20여 리 내려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듯 치솟은 구상나무숲을 내려서면 갖가지 잡목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져 나뒹구는 경사길을 오른다. 능선 평지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돌밭길을 서서히 오르면 총각샘 이정표 앞에 도착한다. 이제까지 오던 길은 울창한 수해를 이뤄 더없이 시원하고 청량감있는 행보가 이어진 길이었다.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에 있으며 커다란 벼랑 밑에서 신기하게 샘이 솟아나는데 지난 1970년 7월경 지리산악회 사람들이 수소문 끝에 발견한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서 이용하던 샘이었다고 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재차 발견한 샘이다. 재차 발견한 사람이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었기 때문에 혹은 심마니 노총각에서 각기 유래돼 총각샘이라 이름 지었지만 명명할 때는 장터목의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이라서 이것과 대비시킨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게 흠인데 샘터 앞에 공터가 있어 야영은 가능하다.
총각샘으로부터 경사도 있고 힘도 드는 길이 나온다. 미끄러운 바위벼랑을 기듯이 오르면 차츰 완만해지다가 명선봉 부근의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면 내리막 흙길로 변하고 연하천산장에 이른다. 명선봉 능선길은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여 숲속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숲속 평지 연하천(烟霞泉)에 이르면 마치 요정들의 별세계에 온 듯하다.
앙상한 고사목과 조화 이룬 '피의 능선'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답지 않게 맑고 시원한 물이 계류가 되어 흐르는 연하천은 남, 북, 서 3면이 아늑하게 감싸여 있는 숲속인데 주변에는 야영하기에 적합한 평지가 많고 공터에는 이름 모를 무덤도 보인다. 약 5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연하천산장은 1982년 건립된 50평방미터 남짓한 아담한 건물이다. 연하천이란 서정적 느낌의 말을 굳이 해석한다면 '오묘한 대자연(烟霞) 속의 정취어린 샘(泉)'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여기 연하천과 연하봉(烟霞峯) 등은 지리산악회(전신은 연하반{烟霞伴})에서 명명하였다.
연하천 산장에서 동쪽으로 질퍽거리는 길을 가면 삼정리와 영원사로 가는 북부능선길이 좌측으로 나 있고 여기를 올라서면 전망이 탁 트이면서 삼각고지에 도착한다. 화개면, 마천면, 산내면의 경계점인 삼각고지에는 옛 6ㆍ25 당시의 벙커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 계곡이 남부군(南部軍)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빗점골인데 삼각고지와 명선봉 일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는지 몰라도 혹자는 벽소령까지의 능선을 '피의 능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앙상한 고사목과 기암이 조화를 이룬 오르내리는 능선길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른다.
높이 10m가 넘는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이 입석바위를 형제바위라고 한다. 옛날 성불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智異山女)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버려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이다. 비박 하기에 괜찮은 관통굴이다. 연하굴에서 두서너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나들다가 북쪽사면으로 내려서면 나무뿌리와 모난 돌길이 펼쳐지고 벽소령 공터로 나오게 된다.
지리 10경 중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한 벽소령(일명 뱁실령)은 화개면과 마천면을 잇는 작전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종주 등반 코스 중간지점에 해당되는 곳인데 이정표가 1㎞ 이상의 거리를 두고 동편과 서편에 각각 두 곳 있다. 서편의 벽소령을 '큰 벽소령', '구(舊)벽소령'으로 부르고 동쪽을 '작은 벽소령', '신(新)벽소령'으로 부른다. 벽소령의 샘, 뱁실샘은 구벽소령 남쪽 소로길을 200m쯤 내려가면 공터에 솟아나고 있다. 지난 1970년대초 작전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능선 위로 등반로가 나 있었지만 지금은 넓고 편한 작전도로를 따라갈 수 있다. 잡목이 우거지고 낙석도 많은데 벽소령을 지나는 이 작전도로는 화개면 신흥에서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까지 연장 38㎞의 비포장도로이다. 작은 벽소령에서 능선 소로길로 올라 경사진 흙비탈길을 한참 오르면 전망이 트이면서 남쪽으로 깍아지른 듯한 깊은 골짜기가 눈에 선한 1,400m급의 봉우리에 다다른다.
"고원(세석고원)을 벗어나 주능선을 서쪽으로 8㎞쯤 가니 우뚝한 봉우리 하나가 나섰다. 꽃대봉(1,426m)이라는 그 이름은 여순사건 이후 제2병단 빨치 산들이 그 봉우리를 뒤덮은 꽃밭이 너무나 아름다와 그렇게 불려왔다는 얘기였다"(이태 지음 하권 81쪽에서 인용).
애틋한 전설을 지니 선비샘은 사라지고
꽃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에서 비교적 편한 길을 가다가 덕평봉 남쪽 사면을 돌아 내려가면 넓다란 평지와 함께 선비샘이 나온다. 옛날 선비샘 아래 상덕평(上德坪)마을에는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 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 끔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몇 년 전까지 실현되고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조처하였기 때문에 이 씁씁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선비샘에서 남쪽으로 상덕평을 거쳐 의신마을로 내려가는 약 7㎞의 지름길이 있다. 자칫 대성골 쪽으로 빠지기 쉬으므로 방향을 잘 잡아 비상시 하산길로 이용하면 괜찮을 듯하다.
선비샘에서 덕평봉을 다시 감싸듯 오르면 세석 영신봉까지는 수없이 오르내리는 힘든 구간이 연속된다. 울창한 숲길에다 간간이 대성골이 훤히 트이는 전망 좋은 쉼터도 있고 또 여름철 온갖 꽃들이 만발한 능선안부도 있어 지루한 감은 없고 아기자기한 산행의 맛이 더하다. 한참 가다보면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로 우뚝 서 있는 칠선봉이 나온다. 마치 그 암봉들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따로 이정표가 없으므로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칠선봉에서 두어 번 암봉을 넘으면 북변의 경사 급한 바윗길이 나타난다. 노출된 나무뿌리에 의지하여 힘들게 이곳을 올라서면 영신봉이 바로 코앞에 다가선다. 영신봉에 오르면 사방이 두루 조망되면서 광활한 세석고원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꿈 같은 거대한 화원, 세석고원을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세석고원은 그 둘레가 12㎞, 약 30만 평의 면적을 차지한다.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평전,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식 표기이므로 세석고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매년 5월말~6월초에 만개하는 수십만 그루의 철쭉이 장관인 세석의 식물대는 상ㆍ중ㆍ하 3대(帶)가 뚜렷하여 식물연구의 좋은 교육장 노릇도 하고 있다. 초원지대인 상대, 철쭉군락의 관목지대인 중대, 그리고 구상나무와 굴참나무의 하대가 등고선별로 분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세석고원의 면모가 드러난 계기는 약 100년전(혹은 300년 전이라는 얘기도 있음) 큰 산불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15세기경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 김일손 등의 기행문에서도 세석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는 걸로 보아 타당한 얘기 같다. 세석고원 서쪽사면에 자리잡은 세석산장은 1983년 66평방미터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6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산장 전에는 고 허우천 씨가 관리하던 구산장이 세석고원 중앙에 위치했지만 지반이 튼튼하지 못해 철거된 바 있다.
지난 1972년부터 매년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진주산악회 주최로 '철쭉제'가 열리곤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 대혼잡을 이루고 되레 철쭉이 훼손당하는 부작용이 따르자 폐지되었다. 지금은 야영장 정비공사와 등산로, 배수로 공사가 거의 완료단계에 와 있는데 그동안 그만큼 야영질서가 엉망이었다는 말도 된다.
세석산장에서 촛대봉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폭 1~2m 정도로 잘 다듬어진 길이며 좌우로 철쭉꽃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올망졸망한 바위들의 군집체인 촛대봉은 그 바위 모양들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다 해서 그렇게 부르는데 천왕봉이 가까이서 어서오라는 듯 반기며 한신골과 도장골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인다. 촛대봉에서 잠시 비탈길을 내려서면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타게 된다. 지도상에 나와 있는 삼신봉을 확인해볼 겨를 없이 지나치고 들꽃이 만발한 능선안부(헬기장이 있는 곳)를 지나면 연하선경(烟霞仙境)으로 유명한 연하봉에 이른다. 기암이 솟구쳐 있고 싱그러운 초원 위엔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수놓는 전망도 일품인 곳이다.
호젓한 분위기에서 일출을 맛볼 수 있는 일출봉
연하봉을 넘어서면 평탄한 초지 능선안부를 거쳐 넓고 평탄한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도장골이 길게 패여진 모습이 환하고 남쪽방향으로 지능선이 하나 뻗어 내려간다. 소위 '일출봉'(日出峰)이라 부르는 곳이다. 장터목산장에서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다소 멀기도 하고 더구나 날씨마저 장담할 수 없는 날이면 괜한 헛걸음이 되기 일쑤여서 아예 포기하기 십상인데 이럴 때 이곳 일출봉을 한번쯤 찾는다면 좋을 듯하다. 장터목에서 20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고 또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수려한 경관 속에서 무엇보다 호젓한 분위기에서 일출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망무제격으로 탁 트여버린 천왕봉의 일출이 차라리 단순하고 산문적인 느낌마저 든다면 이곳 일출봉에서는 죄측에 듬직하게 천왕봉의 암영을 걸어놓고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다. 번잡스럽고 부산한 장터목의 새벽, 그 흐트러진 분위기 속에서 더구나 고행의 길을 1시간여 올라야 하느니보다 차라리 간이 화장실과 야영할 곳도 넉넉한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느긋하게 일출을 감상하시길.....
일출봉에서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 옛날 시천(矢川)주민과 마천(馬川)주민들 이 물품교역을 하던 곳이라는 장터목{場基項)에 이른다. 5개 방향으로 등반로가 연결되고 더구나 천왕봉을 오르려는 일종의 전초기지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노고단 다음으로 지리산에서는 번잡스러운 곳인데 주변에는 무분별할 정도로 야영장이 수없이 파헤쳐져 있다. 장터목산장은 지난 1971년 9월에 처음 세워질 때 지리산장이라는 이름으로 33평방미터, 40명 수용의 반(半)지하식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지만 지금은 폐쇄되고 대신 82평방미터, 80명 수용의 새산장이 목조 2층 마루방으로 1986년 9월 문을 열었다. 그나마 폭증하는 많은 등산객을 수용하지 못해, 휴가철은 물론 눈이나 비가와 야영하기가 불편한 날에는 심하게 붐비는 곳이다.
장터목샘(일명 '산희샘')은 중산리 쪽 20m 아래에 위치하며 역시 많은 사람이 길게 줄 서서 식수를 받으려고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산희샘이란 명칭은 지리산악회 회원 안기호(安琦浩) 씨의 따님 이름 산희(山姬)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곳에서 동쪽으로 20여 분 못 간 곳에 천왕봉 성모사에 향화(香火)를 받들었던 향적사(香積寺) 터가 있다.
제석봉 비탈 횡사목의 처참한 사연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산장 우측으로 경사 급한 돌밭길을 오는데서 시작된다. 구상나무숲과 기암이 보이다가 어느덧 고사목과 황량한 초원지대 제석봉(帝釋峰)이 나오는데 이 처참한 몰골의 사연을 들어보면 가관이다. 6ㆍ25 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던 제석봉은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 장관의 삼촌되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내면서부터 수난을 당한다. 그러다가 후에(이 도발 사건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를 인멸할 양으로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횡사시켜버렸다.
불법적 도벌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인위적인 방화로 지금의 제석봉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멀리서 제석봉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천왕봉 턱밑에 흉칙한 마른 버짐 자국이 생긴 것처럼 볼상사납기 그지없다. 자연 스스로의 노쇠과정 속에서 운치나 있을 고사목이 아니라 횡사목이라는 데서 그 어떤 미적 세계도 발견할 수 없는 지리산 임상 수난사의 처연한 기념물인 셈이다. 그나마 몇 그루씩 남아 있던 횡사목들마저 점차 쓰러져가고 있어 결국 얼마 안 가 제석봉 일대는 황무지로 변할 듯하다. 또 비만 오면 물을 머금지 못하고 그대로 흙탕물을 토해내는데 이점 때문인지 장터목샘과 제석단샘도 갈수기에는 종종 물이 고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지리산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었던 일부 인간 송충이들 때문에 오늘날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후손들이 더욱 목말라하고 있어 그 화를 톡톡히 입고 있는 셈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함태식 씨가 노고단 구산장 관리인으로 있을 당시, 모 종교집단이 노고단에서 제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물로 돼지와 닭을 근처 샘터에서 잡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맑던 샘물이 뿌옇게 변하면서 얼마 후에는 고갈되어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아마도 신성한 샘물, 그 근원에서 피를 뿌리는 일을 벌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벽소령 작전도로 확포장 문제로 얘기를 나누던 중 자연의 섭리와 결부시켜 함태식 씨가 필자에게 들려주던 일화인데 지금도 그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고두고 후회가 든다고.
제석봉 이정표에서 철사다리를 내려서면 좌우로 암벽 비탈길이 고산지대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소위 '톱날능선'이라 부르는 암봉연릉길이 이어진다. 한 능선안부를 거쳐 얼마 오르면 칠선계곡 원시림 장관이 눈에 들어오고 통천문(痛天門)에 이른다.
통천문을 비집고 승천하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하늘에 오르는 길목, 통천문은 깍아지는 벼랑 속으로 작은 통로가 있어 그 사이를 비집고 오르게 되어 있는데 몇 해 전까지 허우천 씨가 설치한 나무사다리로 힘겹게 오르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철사다리를 타고 갈지(之)자로 편하게 오를 수 있다. 통천문 위로 해서 잠시 평탄한 길이 나오다가 거대한 암벽비탈과 만난다. 우측으로는 사태난 듯 아찔한 낭떠러지기이고 그 옆의 튼튼한 쇠줄에 의지하여 스릴있게 오르게 된다.
천왕봉을 오르는 막바지 지점인 이곳 벼랑지대는 8ㆍ15해방 직전 엄청난 굉음을 토하며 붕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의 중산리(中山里)지역 사람들은 이 때문에 무슨 큰 변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데 결국 일제가 망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되찾게 된 일이 그것이었다. 남명 조식(曺植)의 싯귀에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오히려 울리지 않는다"라는말도 있지만 천왕봉의 암석이 떨어져 나가면서 천왕봉이 울었으니 그렇게 생각 했음직도 하다. 그후에도 이곳은 여러 차례 붕괴돼 중산리계곡을 너덜지대로 만들어놓았는데 단순한 자연적 변동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인위적 요인도 작용한 듯하다. 로타리산장 관리인 조재영( 52세) 씨는 통신골(일명 죽음의 계곡)일대에서 불법적인 수석채취가 행해져서 이런 붕괴사고를 빚었다고 말하고 갖가지 기계를 동원하여 암석을 잘라서 캐가는 이들의 단속 없이는 끝내 지리산을 완전히 망쳐버릴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천왕봉 정상은 칠선계곡 등반로와 만나는 곳에 안내판이 있지만 100m쯤 더 가야 한다. 해발 1,915m로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은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은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암괴로 이루어져 있다.
드디어 천왕봉
사방을 빙 둘러보아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장쾌한 전망을 가진 천왕봉은 하늘에 닿을 듯 웅대한 기상으로 우뚝 솟아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에 해당된다. 천왕봉 정상에는 몇 차례 푯말이 바뀌면서 지금은 "........ 1,915m", "한국인의 기상은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각각 양면에 음각된 높이 1m 정도의 타원형 돌비석이 세워져있다.
천왕봉 정상 서쪽 암괴에 '천주'-하늘을 떠받치는 기둥-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여기서 조금 내려온 능선 평지(공터)가 옛 성모사당이 있던 자리이고 그 아래 공터가(지금 철창이 성모상의 복귀를 기다리며 설치되어 있는 곳) 옛 산장터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토굴식 석조산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6ㆍ25 이후에도 몇 년간 존속되었지만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 없다. 천왕봉 정상에서는 야영할 만한 공간이 여러군데 있지만 식수가 없고 화장실도 없어 큰 불편이 따른다. 비록 법계사 쪽으로 500m 가파르게 내려간 곳에 천왕샘이 있지만 갈수기에 말라버리기 일쑤다.
천왕봉에서의 연계 한산코스로는 남쪽 법계사-중산리 코스가 가장 지름길로 많이 이용되고 장터목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 백무동 쪽으로 하산하는 것도 부담없다. 동쪽으로 중봉-써리봉-치밭목산장-대원사 코스도 18㎞로 길지만 잡아볼 수 있고 날씨와 제반 여건만 허락한다면 북쪽 칠선계곡 코스도 택할 수 있다.
주능선 대장정을 천왕봉에서의 조망으로 마무리한다.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북쪽을 바라보면 함양읍내 건너 멀리 백운산, 덕유산 연릉이 연자색으로 둘러 있고 가까이 창암산, 법화산이 또렷하다. 중봉-하봉-도리봉 연릉을 넘어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악산, 가야산의 암봉이 희끗희끗하고 동쪽으로는 응석봉의 기나긴 능선이 성곽처럼 누워 있으며 경호강 물줄기가 아른거린다. 남쪽으로는 첩첩이 요동치며 야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남해 바닷가가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낸다. 서남방향으로 광양 백운산이 가물거리고 서쪽으로는 긴 곡선을 그리며 지리산 주능선이 뻗어 있고 반야봉, 노고단도 쉽게 어림된다. 서북방면으로는 인월, 운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멀리 성수산이 보이기도 한다.
2.화엄사 계곡 코스
노고산장 (1㎞)→(0:20분) 무넹기 (2.5㎞)→(0:20분) 집선대 (1㎞)→
←(0:30분) ←(0:40분) ←
(0:20분) 중재 (4㎞)→(1:00분) 제3야영장 (1.5㎞)→(0:20분) 화엄사
(0:30분) ←(1:20분) ←(0:40분)
총거리 10㎞ 등정시간 3시간 40분
하산시간 2시간 20분
사시사철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수월한 코스
지리산 주능선 등반의 관문역할을 하며 노고단을 오르는 대표적인 등반로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의 집단시설지구에서 화엄사를 거쳐 10㎞의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길은 코재부근을 제외하곤 비교적 수월한 편이고 안내판과 안전시설도 충분하여 어느때나 안심하고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가와 식당, 여관이 즐비한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얼마 오르면 매표소가 나온다. 성인 1인당 1,200원으로 지리산 입장료 중에서 이곳이 제일 비싼 편이다.
우측 계곡 건너에 백색의 프라자 호텔이 보이고 얼마 안 가 다시 우측에 국립공원 남부 관리사무소 건물과 남악사(南岳祠)가 있는 곳이 나온다. 화엄사 앞에서는 포장도로가 끊기고 노송과 전나무가 빽빽한 곳에 화엄사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가 수두룩한 거찰, 화엄사
우리나라 10대 사찰, 31본산의 하나인 화엄사(華嚴寺)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으며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증축되었다. 그후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게 되면서부터 화엄사는 늘 많은 대중이 모이는 큰 절이 되었다고 한다. 화엄사는 임진란 말기인 정유재란(1597년) 때 왜병의 방화로 전소 되었는데 이때 장육전(각황전의 전신)과 화엄경 80권을 새긴 석경(石經)도 모두 파괴되어버렸다. 30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화엄사를 벽암선사가 1630년 복구하고 숙종 25년(1699년)에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재건하였다. 6ㆍ25 전란때도 화엄사의 부속암자가 폐허로 변했는데 다행히 화엄사만은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
화엄사 경내에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으뜸이라고 하는 국보 67호의 각황전을 비롯하여 동양 제일의 석등(石燈)인 국보 12호 각황전 앞 석등과 불국사의 다보탑과 더불어 한국탑의 쌍벽을 이루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국보 35호 4사자 3층석탑 등 국보 3점과 보물 4점의 문화재가 있다. 그리고 화엄사 앞 개울을 건너 지장암 옆에는 일본 벚꽃의 원조로 알려진 수령 300년의 올벚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인조 때 벽암선사가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표시하기 위해 심은 것이라 사홍목이라고도 하는데 8ㆍ15해방 때 거센 바람에 나무중턱이 부러졌다.
원효, 도선, 대각 등 선덕고승이 배출되기도 한 화엄사의 경내에 들어서면 조선 선조의 여덟번째 왕자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의 필체로 알려진 '智異山 華嚴寺'라고 쓰인 글 편액이 눈길을 끈다(현재 불이문 뒤편에 걸려 있다).
전나무가 높이 치솟아 있는 길을 따라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와 종루를 거쳐 웅대한 대가람이 펼쳐져 있는 대웅전 앞뜰이 나온다. 서쪽의 웅장한 목조건물이 바로 각황전이고 주위에 영산전, 나한전, 원통전, 명부전 등의 건물이 있다.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화엄사 경내를 나와 화엄사 오른편의 담장을 끼고 평탄한 길을 20여 분 오르면 계곡 오른쪽 방향으로 철다리를 건너게 된다. 잘 다듬어진 길 옆에는 한 키를 넘는 산죽소로길이 전개된다. 용소와 제2야영장을 거쳐 큰 고목나무가 서 있는 써나무터를 어렵지 않게 올 수 있고 여기서 다시 철다리를 건너면 제3야영장에 도착한다.
노송숲이 우거진 곳에 식수대와 화장실, 야영장이 잘 구비되어 있다. 제3야영장부터는 다소 경사진 길을 걷게 되지만 잘 다듬어진 계단식 돌길이다.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가 짙은 녹음을 드리워 여름에도 시원하기 그지없는 오솔길이다. 길가에 참샘터가 있지만 잘 마르는 편이다. 돌거지와 국수등의 안내판을 지나면 돌계단을 올라 자그마한 등성이를 넘게 되는데 이곳이 중재이다. 건설부 계획에는 장차 이곳에 50평방미터 면적의 휴게소가 들어선다고 한다. 비교적 화엄사계곡 코스는 등반로가 뚜렷하고 이정표도 많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다만 부속암자로 난 길과 희미한 옛 길등이 얽혀 있기도 하므로 이 길로 빠지지 않도록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계곡과 다소 멀리 떨어진 경사 급한 길을 오르면 투박한 돌길이 펼쳐지고 시원한 물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오면서 길 오른편에 자그마한 폭포를 보게 된다. 이곳이 집선대이며 이곳에서 식수를 보충해야 한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힘들어서 '코재'
집선대부터는 경사 급한 너덜지대를 올라야 하기 때문에 다소 힘들다. 속칭 '코재'라 하여 등반하는 사람들의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는 곳이다. 혹자는 '궁둥이길'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소 짜증스런 경사지대를 오르면 편편하고 전망이 훌륭한 반석에 도착하게 되는데 여기가 눈썹바위이다.
밤재능과 원사능 사이로 펼쳐진 화엄사계곡이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구례읍도 보인다. 눈썹바위에서 돌계단길을 조금 오르면 무넹기이다. 노고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도랑을 파서 인위적으로 화엄사 계곡으로 넘어가게 했다고 해서, 즉 물을 넘겼다는 뜻으로 무넹기라 부른다. 이처럼 노고단의 물을 화엄사계곡으로 넘기게 된 이유는 일제 미나미 총독 때 전국적인 대가뭄이 있어 구례 벌판의 마산 저수지에 물을 가두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도로와 마주치는 곳에서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노고단산장이 나온다.
교통과 숙박
한마디로 지리산 주변에서 교통체계와 숙박시설이 가장 완벽하게 구비된 곳이 바로 화엄사 집단시설지구이다.
구례읍까지는 버스로 10분 남짓한 거리이고 구례구역까지도 20여분 걸리는 교통이 편한 곳이다. 전라선 열차편을 이용했을 때는 구례구역에서 완행버스가 수시로 있고 요금은 280원이다. 한편 구례구역에서 화엄사까지 택시요금은 3,000원선이다.
남원ㆍ전주방면(24회), 광주방면(12회), 부산방면 직통버스(13회), 진주ㆍ마산ㆍ순천방면(각 3회)의 직행버스 편이 있는데 일단 구례읍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진입하여 다시 갈아타고 화엄사로 들어온다면 배차회수도 많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욱 편리하다. 아직은 서울 등 대도시와 구례 사이에 고속버스편이 편성되어 있지 않은데 역시 남원, 전주, 광주, 순천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다시 직행버스로 갈아타는 방법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화엄사 집단시설지구에는 지리산 주변에서는 유일하게 호텔과 콘도미니엄이 자리잡고 있고 또 장급여관도 수두룩하다. 민박촌은 황전리에 있는데 성수기와 비수기에 다소 가격차가 있지만 보통 여관은 10,000~15,000원선에서 결정된다.
야영할 만한 곳으로는 화엄사를 지나 조금 오른 곳에 제2ㆍ제3야영장이 잘 조성되어 있다.
* 지리산녀와 지리산가 *
지리산녀는 구례현(求禮縣)의 여자로 자색이 아름답고 부도(婦道)를 다하는 정절의 여인이었다. 백제 어느 왕이 그 미모를 탐하여 들이려 하였으나 지리산가(智異山歌)를 지어 부르며 한사코 따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편}과 [고려사], {악지} 참조). 같은 백제가요인 정읍사(井邑詞), 무등산곡(無等山曲), 방등산곡(도적떼들에게 욕을 당하는 아낙이 자기를 구원하러 오지 않는 남편을 풍자하면 지은 노래), 선운사가{기한이 넘도록 정역(征役)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며 지어 부른 노래} 등과 함께 백제 여인의 정절을 읊은 노래인 지리산가의 가사는 애석하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한편 백제 개루왕의 세 번에 걸친 집요한 수청요구를 재치있게 극복하지만 그 때문에 고낭을 당하여 남편이 실명되고 끝내는 고구려로 가서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都彌)의 처가 바로 지리산녀라는 얘기도 있으나 알 길 없다.
* 지리산 다(多) 등반 기록 *
부산 대륙산악회의 성산(成山) 씨가 1955년부터 1982년까지 200회 지리산 등반을 기록하고 있고 지금도 계속 지리산을 찾는다. 비교적 교통도 불편했던 1960, 70년대에 꾸준하게 지리산을 찾았던 점에서 성산씨의 기록은 큰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광주의 장형석(59세, 목포의료원장)씨는 지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주말마다 계속 동부인해서 지리산을 찾는 사람으로 남몰래 알려져 있다.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한 느낌을 주는 지리산이 마냥 좋다고 하는 장씨는 주로 노고단 주변을 많이 찾았는데, 지금까지 약 500회 이상 등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피아골 코스
임걸령 (3.5㎞)→(1:00분) 용수암삼거리 (0.5㎞)→(0:20분) 피아골산장
←(1:30분) ←(0:10분)
노고산장 (4㎞)→(1:00분) 질매재 (1㎞)→(0:30분) 피아골산장
←(1:40분) ←(0:40분)
(1㎞)→(0:20분) 구계포계곡 (1㎞)→(0:10분) 삼홍소 (2㎞)→(0:30분)
←(0:30분) ←(0:20분) ←(0:30분)
선유교 (2㎞)→(0:30분) 직전리
←(0:30분)
노고단 코스 : 총거리 11㎞ 등정시간 4시간 10분
하산시간 3시간 10분
임걸령 코스 : 총거리 10㎞ 등정시간 3시간 40분
하산시간 2시간 10분
지리산 제일의 단풍 터널길로 널리 알려져
구례군 토지면 직전리에서 노고단이나 임걸령까지 울창한 원시림 속의 계곡길 14㎞를 오르는 코스이다.
가을철 단풍이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지만 봄철의 진달래, 여름의 울창하고 시원한 녹음, 겨울의 환상적인 설경 등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진 계곡이 이 피아골이다. 흔히 피아골에 관해서는 6ㆍ25 직후 적과 아군, 즉 피아(彼我)간의 치열한 싸움터였기 때문에 피아골이지 않은가 하는 얘기도 있고 피아골의 어감이 피를 많이 흘린 골짜기라는 연상을 심어주어서 그런지 6ㆍ25 당시 국군과 빨치산들의 격전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과거에 김진규, 노경희 주연의 반공영화 [피아골]이 나온 탓에 빨치산 소굴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해 [남부군]의 저자 이태 씨는 보급문제의 곤란 등 때문에 실제로 피아골을 근거지로 삼았던 도(道)단위 이상의 빨치산 부대는 없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에선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석주관(石柱關)싸움에서 피아골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한다. 경상ㆍ전라도의 길목인 천연의 요새 석주관에서 칠의사(七義士)가 이끄는 승병과 의병들이 왜병과 맞서 싸우다가 모두 숨졌는데 이때 의병들의 피가 내를 이루며 흘렀다 하여 피내골(血川谷)로 부르다 피아골로 전화되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러나 석주관이나 피내골은 피아골과 지역적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이 또한 잘못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피아골이라는 말은 실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稷田谷)이라 하다가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며 지금도 피아골 입구에 직전리(稷田里)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연곡사는 한때 의병들의 근거지
구례에서 혹은 하동방면에서 섬진강변을 따라오면 외곡리 검문소가 나오고 여기서 북쪽으로 2차선 포장도로를 다시 달리면 차창 밖으로 산비탈을 가득 메운 계단식 다랑이 논들이 많이 눈에 띄고 연곡천이 좌측으로 요동치며 흐르고 있다. 연곡사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토지면 내동리 평도(平道)부락이고 여기서부터 피아골 등반이 시작된다(구례에서 직전마을까지 운행되는 완행버스편을 이용할 수도 있다).
민박집과 상가 건물이 있는 평도부락을 얼마 오르면 당재(堂峙)와 새미산 기도원으로 오르는 길이 우측에 보이고 다시 조금 가면 넓은 주차장과 광장이 나온다. 아직 집단시설지구 공사가 완료 안된 듯 곳곳이 파헤쳐져 있는데 매표소를 지나 조금 가면 우측에 연곡사가 나온다. 연곡사(燕谷寺)는 신라 진흥왕 6년(545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임잔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5년 소요대사(逍遙大師)가 복구하였지만 6ㆍ25동란 때 다시 파괴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81년 3월 구(舊)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것이며 경내에는 국보 53호인 동부도(東淨屠)와 국보 54호인 북부도(北淨屠)를 비롯하여 보물 4점 등 문화재가 있다. 또 연곡사는 구한말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고광순(高光洵) 등 수백 명의 의병이 진을 치고 유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高)의사의 순절비가 경내 좌측 동백숲속에 있다. 옛날 연곡사 경내에는 밤나무가 많아 왕가(王家)의 신주목(神主木, 位牌木)으로 봉납해왔고 또 지체 높은 승통(僧統)이 있어 승려들도 호기가 당당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옛보다 여러모로 초라한 느낌까지도 드는 절이다.
연곡사에서 나와 비포장도로를 따라 가면 좌측으로 갖가지 홈 파인 기암 위로 옥류가 시원하게 흐르는 것이 아름다운데 이렇게 30여분 가면 직전마을에 도착한다. 서울대 연습림 사무소가 길가 좌측에 있고 상가와 민박집도 보인다.
신비한 토종벌의 세계
피아골 일대는 널이 알려진 것처럼 한봉(韓蜂, 토종벌)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가을~이듬해 봄철 이곳 상가에서도 벌꿀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 벌들의 세계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토종 벌통 하나에는 보통 여왕벌 1마리를 최고 통치자로 수십 마리의 수펄, 그리고 2~3천 마리의 일벌들이 나름의 위계질서를 이루고 조직적인 분업생활을 하며 산다. 부지런히 꿀을 채집하여오는데 봄, 여름, 가을 동안 이렇게 해서 채집된, 하얗게 엉겨붙은 꿀을 가을에 사람들이 채취한다. 그리고 5월경에는 새끼벌을 치는데 이때는 사람이 벌통 주위에 상주하면서 이들을 새로운 벌통에 무사히 입주시켜야 하는 다소 까다로운 일이 생긴다. 기존의 집에서 분가할 때는 수천 마리의 벌들이 마치 집단시위를 벌이듯 주위를 맴돌다가 나무나 바위에 잠시 머무는데 이때(2~3시간 안에) 새로운 벌통으로 옮겨야지 만약 방치하면 가출하여 깊은 산야를 방황하게 된다. 소위 '자연석청'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때 놓쳐버린 벌들이 깊은 산속으로 옮겨와 자체적으로 바위틈이나 통나무 속에 살면서 꿀을 채집하여 생긴 것들이라고 한다.
토종꿀이라고도 말하는 이 한봉벌꿀은 꽃을 찾아 이동하면서 치는 양봉꿀보다 우수하고 효과가 뛰어나 고가에 팔리기 때문에 지리산 인근 주민들의 목돈 마련에 심심치 않게 기여하고 있다.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해마다 새끼를 쳐서 벌통도 늘려가기 때문에 유망한 소득 업종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이제껏 지리산의 온갖 꽃들이 풍부한 밀원(密源)을 제공하였지만 숲이 우거지고 점차 밀원이 줄어드는 추세라 어떤 마을에서는 양봉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덩치가 큰 양볼벌이 토종벌을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보호구역내에 양봉 벌통 반입은 규제된다. 벌통 앞에서 가만히 앉아 바라보면 때때로 번짓수 잘못 찾아 남의 집에 들어온 벌이 그집 벌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육각형의 틀과 크기로 벌집을 지어가는 벌들의 신비한 공학세계도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연곡천 담수어가 줄어들고 있어
직전마을에서 산모퉁이를 하나 돌면 직전 윗마을이 다시 나타나고 민박집과 상가가 십여 채 보인다. 지난 1982년경 피아골 일대에 종합 학술조사를 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자료와 필자가 들은 바를 토대로 지리산 지역 민물고기 서식 종류를 참고로 나열해보면 꺽지(꺽저기), 피라미 등이 주종을 이루고 여름철 범람 후에는 뱀장어, 메기 등도 상류로 물을 차고 올라온다. 섬진강을 가까이 끼고 있는 연곡천에는 뱀장어, 피라미, 갈겨니, 쉬리, 돌고기, 눈동자개, 메기, 동사리, 밀어, 꺽지 등이 쉽게 목격되고 은어, 황어, 잉어, 모래무지, 참마자, 미꾸리, 줄공치, 숭어, 쏘가리 등도 연곡천 하류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지리산의 계류는 대개 맑고 수온이 낮아 다양한 종류의 어류가 산란ㆍ서식하기에는 부적당한 일면이 있다고 하는데 또 제피나무 껍질을 말려서 빻은 가루 등 독극물에 의한 폐해와 밧데리 등 전기충격에 의한 불법 어획 행위도 담수어 어류상을 빈곤케 하는 또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섬진강과 그 연안 계곡 등은 그나마 다양한 어류상을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북쪽 엄천강 일대의 연안 하천에는 남강댐 건설과 인근 석재공장에서 내뿜는 뿌연 돌가루물 때문에 담수어가 옛날보다 급격히 줄어드는 안타까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직전마을에서 선유교까지는 30여 분 남짓 걸리는 넓은 길이다. 스기(杉)나무와 침엽수가 새로 조림된 듯한 선유교에서는 철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바로 계곡 우측으로 오르는 옛 길도 보인다. 시원하고 깨긋한 계류를 바라보며 선유교를 건너면 울창한 숲속에 야영장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옛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표고를 재배하였다고 한다. 수백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야영장을 지나 반반하게 잘 다듬어진 돌길을 오르면 갖가지 활엽수가 울창하다. 졸참나무, 생강나무(아구사리), 오리나무, 서나무, 갯버들, 신갈나무, 산초나무, 초피나무, 등이 눈에 띄는데 가히 수목 전시장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 이 피아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곡에 홈 패인 암반으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2~3m의 아담한 폭포가 보이며 잠시 두 갈래 길이 나오지만 어디로 가나 다시 만나고 쉴 만한 바위 반석이 나오는데 계곡 건너편에 일본목련(후박나무)숲이 눈길을 끈다.
산도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게 물들여지는 삼홍소
진달래가 몇 그루씩 보이고 계곡에는 아름다운 소들이 이어지면서 어느덧 삼홍소(三紅沼)에 도착한다. 1986년 11월 준공된 길이 30m의 삼홍교가 가로놓여 있는데 다리 위에서 보면 좌측 계곡가 바위에 '삼홍쏘'라는 페인트 글씨가 보이고 위쪽으로는 아담한 폭포가 서너 개 정도 이어져 있어 멋진 신비경을 이룬다. 울창한 수림과 흰 포말을 이루며 흐르는 계류가 장관인 삼홍교를 건너면 투박한 길이 잠시 나타나고 맞은 편 계곡(합수골)에는 폭포수를 이룬 지류가 흘러 내려온다.
오른쪽으로 잠시 꺽어지던 길을 가다보면 와폭의 연속인 계곡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구계포(九階泡)계곡에 이른다. 철다리(구계포교)가 놓여 있어 여기에서 위쪽을 보노라면, 완만한 암반 위로 영롱한 오색구슬들이 함박 쏟아지듯 층층계단을 타고 흐른다. 피아골의 계곡미의 극치를 이룬 곳이며 뒤에는 울창한 수림 속 잔잔한 수면 위에 천수를 다한 고목등걸이 얼굴을 처박고 있어 고풍스러 분위기도 보여준다.
구계포교를 건너 조금 가면 텐트 7~8동 칠 수 있는 평지가 나오고 얼마 안가 시원한 포말음과 함께 남매폭포가 나타난다. 높이 3~4m의 쌍폭포인데 짙 푸른 소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뼈속까지 시원하게 하며, 아래쪽으로 멋진 소들이 이어진다. 얼마 안 가면 다시 10m의 와폭이 눈에 보이다가 기억자(ㄱ)형 비박지가 있는 거대한 바위들과 만난다. 성벽 밑을 거닐 듯 높이 15m 정도의 이 바위병풍 밑을 지나면 출렁다리를 거쳐서 쇠줄을 붙잡고 경사 급한 곳을 오르게 된다. 거목들이 우거진 이곳을 오르면 평편한 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완만한 길을 얼마 안 가 피아골 삼거리이다. 용수암과 질매재 방향의 두 물줄기가 모이는 곳이며 또 두 방향으로 각기 등반로가 전개되는 갈림길인 피아골 삼거리 숲속 공터에는 피아골 산장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직전마을에서 이곳 피아골 삼거리까지는 거의 경사라곤 느낄 수 없을 만큼 완만하기도 하지만 계곡 양쪽으로 각기 길들이 나 있다. 대체로 잘 다듬어진 흔적이 역력한 걸로 보아 예로부터 도벌이 심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점은 피아골 일대에 거의 침엽수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수림상태에서도 증명되는데 흔히들 말하는 '피아골 원시림'이라는 얘기도 달리 표현하자면 옛 수림상태가 잘 보존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다만 온갖 활엽수들만이 밀집ㆍ군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피아골 단풍도 어떻게 보면 이러한 부조리한 일면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인골 한 트럭분이 나왔던 피아골산장터
피아골산장은 지리산의 뭇 산장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계곡변에 위치하고 있다. 좌우로 물이 흘러서 산장 앞에서 만나는 그리고 양쪽으로는 능선이 둘러쳐 있어 금방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지난 1984년 82평방미터, 60명 수용규모로 이 산장이 지어졌는데 온통 돌투성이닌 주변과는 달리 지금 산장터는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산장 앞 50m 전방에 있는 화장실 건물터도 마찬가지(함태식 씨의 설명에 의하면 풍수지리상 산장에서 앞의 합수물이 안 보여야 천혜의 명당인데 바로 화장실 건물이 그 역할을 한다고). 1984년경 산장을 지을 때 유일한 흙지대인 지금의 산장터에서 거의 한 트럭분의 매장된 인골이 나왔다. 옛 빨치산들의 유해인데 지리산 여타 지역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누렇게 잘 썩은 이 뼈들은 그후 무슨 특효가 있다고 믿은 나병환자들 차지가 되었다.
아직껏 역사적으로 복권되지 못한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영혼마저 올바로 천도되지 못하고 구천에 맴돌아야 하는, 비참하게 이 골짜기에서 죽어간 패배자들을 잠시 생각해본다.
피아골산장 동쪽에는 암봉 하나가 눈에 띈다. 옛날 사명당(유정)이 피아골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곳 위에서 의병을 작전 지휘하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흰덤봉('흰 무덤'이라는 뜻)으로 불리는 봉우리이다.
피아골산장에서 서쪽으로 가면 경사가 심하고 투박한 돌밭길을 올라 질매재에 이르고 여기서 노고단까지 능선길로 해서 오를 수 있다. 피아골산장 우측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산죽도 듬성듬성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계속 가게 되는데 얼마 안 가서 좌측에서 지류와 만나는 곳에 아치형 교각의 철다리가 나온다. 길이 20m, 폭 1m의 불로교이다. 철다리를 건너면 용수암(龍水岩) 삼거리 이정표가 있고 갈림길이 전개되는데 여기서 가파른 좌측 비탈길로 올라야 한다. 10여 분 오르면 길이 잠시 완만해진다. 다시 나무뿌리가 노출된 길을 갈지자를 그으며 힘들게 오르면 평탄한 산죽밭이 나온다. 옛 초암터이다.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많은 흙길을 오르면 뒤로 왕시루 능선이 나타나고 또 한차례 오르면 좌측으로 암봉이 보인다.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들이 서서히 짙어지는데 이렇게 약 1시간 넘게 오르면 삼도봉과 불무잔등 능선 전모를 드러내다가 임걸령이 훤히 보이는 능선위에 올라선다. 잣나무를 돌아서 숲을 오르면 임걸령 삼거리가 나온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질매재까지 그리고 임걸령 삼거리까지는 급경사길이다. 식수 준비하고 쉬엄쉬엄 여유를 갖고 오르기 바란다.
피아골 종녀촌의 기이한 전설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종녀(種女)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성신(性神)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이 절대 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녀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타의에 의해서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불행한 운명의 길을 대물림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녀들의 피눈물 어린 통한의 인생 살이와는 달리 많은 종녀들을 거느린 성신어머니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성신(性神)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은촛대에는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성신상과 남근(男根)이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던지면서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우곤 했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피아골 종녀촌의 애절한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우리 중ㆍ근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과 숙박
일단 기차나 직행버스를 이용하여 구례읍까지 와서 다시 완행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연곡사 앞 주차장까지 가는 버스는 06:40~18:40까지 2시간 간격으로 배차되어 있고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피아골 직적부락까지 가는 버스로는 08:30,11:40, 15:40, 17:30, 19:40에 구례읍에서 떠나는 완행버스가 있다.
내동리 일원에 집단시설지구 공사가 한창이고 직전부락에도 민박집은 넉넉하다. 표고막터 건너편에 야영장이 있고 피아골 산장 앞에도 야영할 공간이 있다.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짓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김지하의 [지리산]
4. 왕시루봉 능선 코스
노고단산장 (1.5㎞)→(0:30분) 문수대 (2.5㎞)→(0:40분) 질매재 (5㎞)
←(0:40분) ←(1:00분)
→(2:00분) 느진목재 (2㎞)→(1:00분) 왕시루봉 (8㎞)→(3:00분) 토지면
←(2:30분) ←(0:40분) ←(4:30분)
총거리 19㎞ 등정시간 9시간 10분
하산시간 7시간 10분
인적 드문 지리산 외곽의 50여리 비경 능선
노고단에서 구례군 토지면 소재지까지 장장 19㎞의 인적 드문 험한 능선 코스이다. 왕시루봉 남(南)사면의 드넓은 억새밭이 장관이라 만복대 능선 코스와 더불어 가을 산행 코스로 알려져 있는데 한편으로는 갈증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힘든 능선길이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하고 식수 준비와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 아무래도 이 코스에서는 노고단에서 왕시루봉까지 11㎞가 해발고저차도 심하고 샘물 하나 찾기 힘들기 때문에 초행자들은 체력안배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구간에 해당되지만 아침 일찍 노고단에서 출발한다면 당일 하산에 별 무리가 없는 편이다.
노고 운해를 보며 기암 절경 문수대로 향해
노고단산장에서 남쪽으로 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얼마 후에 구례벌판과 화엄사계곡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초원ㆍ관목 지대가 나오게 된다. 좌우로 기암 절벽이 솟구쳐 있고 전망은 막힘없이 탁 트인 곳인데 노고단산장이나 부근 야영장에서 1박 하면서 아침 산책 삼아 이곳에 들르면 섬진강의 물안개가 피어 올라 사방이 구름에 잠긴 장면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봉두산(鳳頭山), 조계산(曹溪山), 모후산(母后山), 무등산(無等山)이 구름 위에 작은 섬처럼 둥둥 떠 있는 멋진 풍경이다.
길이 정상 쪽으로 휘어지면서 방송 송신탑과 부속건물이 있는 곳으로 콘크리트 포장된 갈림길이 나타난고 여길 오르면 정문 앞에 이른다. 이정표 있는 오른쪽 소로길로 접어들어 내려가면 기암과 초지가 펼쳐지고 다시 얼마 안 가면 노고단 남쪽 산기슭을 감돌면서 숲길로 내려가게 된다. 산죽이 잔잔하게 서 있는 잡목 우거진 돌밭길을 20여 분 가면 문수대(文殊臺, 1,280m)가 나온다. 노고단 부근에 아니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50m가 넘는 아찔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아름드리 침엽수가 울창한 절벽 밑 공터에는, 주변의 산죽을 베어 그걸 엮어서 지붕을 얹은 암자 한 채가 있다. 지금은 이곳에 젊은 수도승 성문(聖文, 29세) 스님이 혼자 살고 있다. 바위 절벽 밑에서는 희한하게도 넉넉한 샘물이 솟아 나오는 전망 좋고 시원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90여 년전 화엄사 승려 초운대사(楚雲大師)가 창건한 문수암(文殊庵)이 있었던 옛 절터인데 지금도 좌측에 그 터가 남아 있고 질매재로 가다보면 또다른 옛암자가 있다. 아무래도6ㆍ25전란통에 옛 문수암 건물도 무사하지 못했던 듯한데 이상하게도 문수암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이 이상 알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문수암에서 식수 보충하는 것을 잊지 말고 떠나길 바란다.
문수대를 뒤로 하고 평지 돌길을 조금 가면 샘물이 또 하나 솟는 곳에 야영한 흔적이 있고 여기서 다시 산죽길을 따라 얼마 오르면 능선과 만난다.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곳인데 이제부터는 산죽과 참나무가 빽빽하고 그 사이로 문수리계곡, 피아골이 간간이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마냥 가면 된다.
사거리인 질매재부터는 스릴 만점
풍도목(風倒木)이 처참하게 나뒹굴기도 한 평탄한 길은 얼마 후 끝나고 경사 급한 미끄러운 흙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좌우로 벙커 흔적이 보이다가 잘룩한 능선안부 질매재(長嶝峙)에 이른다. 마치 질매(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피아골 삼거리와 문수리 계곡으로도 길이 훤히 나 있는 사거리이다.
질매재에서 얼마간 오르막길을 오르면 장등(長嶝)에 이르고 능선 서쪽 사면 길을 따라 각종 기암들을 구경하며 가게 된다. 굴곡이 심한 오르내리막길에 다가 잡목들이 우거져 이것을 헤치며 가는 때가 많다. 그리고 양쪽이 거의 급경사인 칼날 능선길을 가기 때문에 등반의 묘미랄까 스릴감 넘치는 길이 펼쳐지는데 앞에 문바우등(文岩峰, 1,198m)이 바라보이는 고대(高臺)에서 뒤돌아보면 진달래 관목지대 너머로 노고단의 훤칠한 면모가 드러난다.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문바우등을 향해 오르면 암봉인 문바우등 정상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계속 서쪽사면을 따라 비껴 지나가면서 갖가지 기암괴석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간다. 잠시 동쪽사면을 넘나들던 길이 완만하게 내려가 싸리나무와 진달래가 밀집되어 있는 완경사 흙길을 오르는데 광활한 경사면에 억새가 무성하다. 문수리 방향으로는 헬기장이 있는 드넓고 평탄한 초원지대가 내려다보이고 바로 정면을 바라보면 왕시루봉은 암담할 정도로 높기만 하다. 시선을 좌측으로 돌리면 우유 빛깔처럼 희뿌옇게 섬진강이 보이고 피아골 진입로가 확연한데 기세등등하게 남으로 뻗어내린 남부능선 자락은 잣둣날 그대로다.
왕시루봉을 향해 싸리나무를 헤치며 발걸음을 떼놓으면 시푸른 산죽터널을 갈지(之)자를 그리며 기약없이 내려가기만 한다. 무덤 하나가 나타나고 피아골 쪽으로도 헬기장이 보이지만 이내 잡목숲 사이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왕시루봉을 다시 올라붙을 생각에 지루한 내리막길이 마냥 밉기만 하다.
느진목재에서는 본전 다 털리고 다시 새롭게 올라가야
해발 1,000m도 채 안되는 느진목재에 오면 토지면 내서리 남산(南山)마을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길과 만난다. 느진목재에서 잡목 우거진 오르막길을 서서히 오르면 한숨 돌리라는 배려인지 평지길이 잠시 나타나면서 단풍나무와 산죽이 우거진 길을 다시 오른다. 가다보면 기억(ㄱ)자형 바위와 병풍 둘러친 듯한 바위, 그리고 두 쪽의 바위가 연이어 서 있기도 한데 산죽이 짙어갈수록 경사도 높아가다가 능선 위에 다다르면 양 갈래길이 나온다. 우측길은 전망 좋은 바위에 오르는 길일 뿐이니 좌측길을 택해 평탄한 능선 소로길로 사뿐히 걸어가면 된다. 남쪽으로 한참 편한 길이 계속되다가 무덤을 지나면 서서히 전망이 트이면서 황금빛 억새 물결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억새밭을 누비며 얼마간 내려오면 우측으로(서쪽 방향) 잣나무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고 있는 넓은 길이 보인다. 여기를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외국인 별장촌의 공공건물과 관리인 사택이 넓은 연못과 함께 나온다.
애당초 노고단에 있던 외국인 별장촌이 6ㆍ25전란 때 폐허화되고 또 노고단이 번잡스러워지자 1957년경부터 이곳 왕시루봉 일대로 옮겨와 자리잡게 되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20년대쯤에 홍콩처럼 99년간의 조차계약을 맺어 노고단을 미ㆍ호주 등 외국인 선교사들 하계별장지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 계약이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유효한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왕시루봉에는 외국인 개인별장 11여 채와 테니스 코트 2동, 간이 풀장, 탁구장이 있는 교회건물, 창고 1동 등이 있다. 호텔과 공회당, 자가 발전기, 심지어 젖소를 사육하여 생유까지 지급했다는 옛 노고단 시절보다는 규모도 물론 축소됐거니와 소박한 생활의 일면까지 느껴진다. 1962년부터 구례군 황전면이 고향인 단아한 체구의 이강협(李康協, 71세) 씨가 관리인으로 계속 상주 근무해오고 있고 여름철에만 잠시 들르는 외국인들도 필요한 모든 물자 등을 직접 지고 올라온다고 한다. 개인별장 건물은 서북쪽의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넘으면 있는데 마치 백설공주 등 동화의 세계에서나 나옴직한 통나무집들이 숲속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어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난다. 그런데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우리네 서민들의 삶을 구차하게 떠올리지 않아도 이곳 외국인들의 별장을 바라보는 마음 한구석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수만 평의 광활한 왕시루봉 남사면은 억새 천국
처음 들어오던 길로 다시 나오면 아래쪽에 밀양 박(朴)씨 묘소 6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이하게도 왕시루봉 자락에는 무덤들이 즐비하여 하산하다가 20~30기 정도는 목격할 수 있다.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너무도 아름답다. 구례평야와 함께 산야를 감돌며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 그리고 건너편 백운산(白雲山)의 웅자(雄姿), 그 어느 것 하나도 감탄사를 멈출 수 없는 절경을 이룬다.
억새밭을 내려오며 잣나무와 소나무가 정원수처럼 이어지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바짝 마른 개울을 건너면 오른쪽으로 방향이 꺽이면서 소나무숲 터널을 지나고 진달래, 철쭉도 무수하다. 잠시 후 앞에 기암기봉이 나타나면서 전망이 탁 트인 초원이 다시 나오는데 능선길을 버리고 오른쪽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이후로는 뚜렷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되는데 비록 소나무 숲으로 가지만 햇볕을 정면으로 받기 때문에 후덥지근하고 짜증스럽기까지 한다. 한 시간여 내려간 곳에 논배미가 나타나며 토지면이 시야에 가까워진다. 이곳에서 몇 갈래의 길이 보이지만 토지면 소재지로 방향을 잡으며 내려오면 무난하다. 단산리에서 다리 건너 토지면 농협창고 앞에 오면 구례행 완행버스가 연결된다.
교통과 숙박
이 코스를 노고단에서 하산하는 과정으로 택한다면 가장 편한 방법은 성삼재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구례읍에서 08:00~18:00까지 매1시간 간격으로 성삼재를 오르는 정기노선 버스가 있다. 구례읍 완행버스 터미날에서 출발 화엄사 앞 주차장에서 잠시 정차한 후 성삼재까지 곧바로 오르는 데 약 50분 소요되고 요금은 800원이다(다만 여기에 별도의 입장료 800원이 또 추가된다. 그리고 겨울철과 늦가을, 이른봄에는 결빙문제 때문에 차량통행이 금지되므로 아울러 참고 바란다).
앞서 지적했듯이 왕시루봉 능선 코스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당일하산을 원칙으로 계획을 짜야 한다. 물론 왕시루봉 근처에 야영 정도는 가능하지만 차라리 무거운 텐트라든가 짐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필수 안전장비(윈드쟈켓, 보조 수통, 간식 등)만을 간단히 챙겨 속보산행을 강행한다면 토지면까지 무난하게 하산이 가능하다. 중도에 기상이 악화되고 체력에 이상이 오면 질매재에서 피아골 삼거리(피아골산장이 있음)로 하산하던가 느진목재에서 피아골 내서리(內西里) 쪽으로 빠지면 된다.
토지면에서 오르려면 구례읍에서 20여 분마다 있는 완행버스를 타고 20여 분쯤 가 토지면에서 하차하여 단산리로 들어서야 한다. 토지면에는 민박집과 여관 등이 없으므로 구례읍에서 1박할 것.
5. 만복대 능선 코스
정령치 (4㎞)→(1:30분) 만복대 (2㎞)→(0:40분) 묘봉재 (1㎞)→
←(1:00븐) ←(1:20분) ←-
(0:50분) 작은고리봉 (3㎞)→(0:40분) 성삼재
(0:30분) ←(0:50분)
총거리 9㎞ 등정시간 3시간 40분
하산시간 3시간 40분
* 황금빛 억새 능선을 따라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 *
지리산 서쪽 최고봉인 노고단에서 종석대,고리봉,만복대,세걸산,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지는 단단한 방책 능선이 바로 서북능선이다. 마치 지리산 속살을 보호하듯이 북으로 길게 감싸안고 있는데 서북능선을 등반하는 데는 여러 기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운봉면 수철리에서 세동재(世洞峙)를 거쳐 세걸산(世傑山)으로 오르는 코스와 운봉 우무실절에서 바래봉까지 비포장 산판도로를 따라 오르는 방법, 그리고 산내면 내령리와 부운리에서 팔랑재(八郞峙),부운재(浮雲峙)등으로 각각 오르는 희미한 길도 있다. 그러나 서북능선 등반에는 보다 치밀한 준비와 주의를 요하기도 한다.
1989년 5월 15일 새벽 4시경 전주에서 모집관광(가이드 산행)차 왔던 일행 147명 중 10명이 세걸산 부근에서 조난당하여 그 중 이(李)모(37세, 회사원)씨가 숨지고 나머지 9명은 출동한 경찰, 공단직원 등에 의해 다행히 구조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총 32㎞의 거리를 8시간 동안 마쳐야 하는 다소 무모한 산행 스케줄에다 날씨까지 악화되어 생긴 비극인데 결코 서북능선 등반을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지리산 역사의 첫 페이지는 달궁의 마한왕조
여기에는 현재 관광도로가 관통하여 지나가는 정령치에서 성삼재까지 9㎞구간을 소개하기로 한다. 두 기점 중 어느 곳에서 출발하더라도 약 4시간 정도 걸리는데 정령치가 해발높이로 따져 더 높다. 만복대 북쪽 다름재로 빠지는 갈림길을 빼고는 능선 위로 난 등반로도 확연하고 샘도 정령치 부근과 만복대 남쪽사면에 위치하므로 초심자들도 안심하고 오를 수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만복대 능선 코스는 가을철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는 전형적인 가을 산행 코스로 손꼽힌다. 차라리 요란하고 번잡스럽기까지 한 단풍관광보다 광활한 황금빛 초원 능선을 호젓하게 걸으며 만추(晩秋)의 정취에 흠뻑 젖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등반기점인 정령치(鄭嶺峙)-한자로 달리 正嶺峙로 표기하기도 함-는 기원 전 84년(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는 기원 전 78년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고 기록됨)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햐여 정(鄭)장군을 이곳에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또 하나 이와 비슷한 유래를 가진 것으로 황령재(黃嶺峙)-지금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 불확실하지 만덕동리 뒷산 '황나드리'라는 곳으로 추정된다-가 있고, 한편으로 노고단 입구의 성삼재(姓三峙)와 바래봉 남쪽의 팔랑재(八郞峙)도 각각 각성받이 3명 장군과 8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수비성터라는 얘기도 있다.
마한에 관한 구체적 역사기록은 그리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공식적 역사기록으로 보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 26년(서기8년) 10월에 백제군에 의해서 마한의 국읍(國邑)이 함락되고 이듬해 4월 원산성과 금현성 등 나머지 두 성마저 정복당해 결구 마한이 멸망한 것으로 나온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 그러나 이 기록과는 달리 부족국가 마한이 그 후에도 계속 존속된 듯하다.
온조왕 34년(서기 16년) 10월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며 백제에 반역하다가 토벌당한 기록과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 복암성(覆巖城) 들어 항복했다는 기록(모두 '삼국사기'이 나오는 걸로 보아 또 3세기 후반 중국과 교류한 점이라든가 4세기경 마한의 일부세력이 전라도 해안에 진출하였다는 기록('일본서기') 등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마한의 잔여세력이 멸망 후에도 계속 항거ㆍ유랑하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볼 때 심원계곡 달궁(達宮, 月宮)마을에 일종의 망명국가로 쫓겨 들어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한 부족국가도 혹시 이들 유랑의 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김경렬씨는 지리산 달궁의 마한동성은 백제 온조왕의 마한 정복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하고 지리산의 마한왕조는 후에 지리산이 김해 가락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걸로 보아 가야세력에 의해서 정복된 것이 유력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확실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이 부분은 더욱 밝혀져야 하겠지만 지리산 심원계곡 일원에 자리잡은 마한 왕조는 곧 지리산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셈이다.
옛 수비성터 정령치에서 식수 준비라고 출발해야
아직도 옛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령치에는 지금은 넓은 산상 주차장과 휴게시설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식수는 달궁 쪽 도로를 따라 150여m 내려가면 구할 수 있다. 정령치 공터에서 남쪽으로 빤히 올려다보이는 산불감시 초소 건물을 향해 소나무와 잡초 우거진 길을 오르는 것에서 등반은 시작된다.
일단 자그마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억새와 싸리나무 우거진 능선안부가 잠시 나오고 잡목이 빽빽한 경사길을 오르게 된다. 여러 갈래로 늘어진 노송과 참나무가 있는 다소 벅찬 길을 조금 가면 높이 10m쯤 되어 보이는 바위 옆을 비켜 올라 경사도 완만해지면서 잠시 후 평탄한 바위밤석 위에 도착한다. 바로 눈앞에는 유순하게 흘러내린 만복대가 다가오고 사방의 전망이 탁 트인 게 시원하다. 운봉평야가 멀리 내려다보이고 꾸불꾸불한 정령치 도로도 확연하다. 반야봉의 튼 덩치는 이후로 줄곧 호위라도 하듯이 옆을 따라붙개 되는데 여기서는 노고단과 천왕봉도 고개를 빼꼼이 내밀어 보인다.
이곳 전망 좋은 쉼터에서 평지 능선길을 따라 얼마 가면 수천 평을 헤아리는 보드라운 초원의 능선안부로 내려가게 된다. 일단 만복대 자락에 들어선 느낌을 강하게 받는데 허리께 차는 억새들이 바람에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억새향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능선안부에서 억새를 헤치며 완만한 오름길을 가다보면 잠시 후 오른쪽으로 능선이 하나 갈라져 뻗어 있고 능선 위로 소로길이 보인다. 요강바위, 다름재로 빠지는 전라남ㆍ복도의 경계선이다. 만복대로 오르는 길은 왼쪽으로 휘어져 계속되고 경사도 있다.
만복대 정상에선 화려한 억새 향연이 벌어져
해발 1,433m 만복대 정상에 올라서면 동남쪽으로 약 200m 정도의 능선이 누워있고 남ㆍ북쪽에 두 개의 완만한 골짜기가 펼쳐지는데 주위가 온통 황금빛 초지일색이라 전형적인 시골 초가집을 연상케 한다. 돌무더기와 몇 개의 구덩이가 패어 있는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산동지방 쪽으로는 경사 급하게 절벽을 이루고 있고 남쪽방향으로는 시암재 주차장과 도로가 보이고 노고단 방송 송신탑이 선명하다. 노고단-임걸령 능선도 뚜렷한데 반야봉은 앙증스러운 일면을 느끼게한다. 노출된 작은 바위들이 동남쪽으로 몇 개 보이고 왜소한 진달래, 철쭉도 몇 그루 찾을 수 있지만 만복대는 전체적으로 보아 한번쯤 나뒹 굴고 싶은 수만 평의 광활한 초생지대이다.
만복대에서 남쪽으로 경사 급한 초원길을 내려서면 좌측으로 어지럽게 희미한 길들이 나 있다. 샘으로 가는 길이다. 싸리나무가 무성한 곳인데 만복대 남쪽 내리막 능선길에서 동쪽으로 200m쯤 다시 꺾어 내려오면 야영장터와 함께 만복대 샘이 나온다. 수량도 많고 시원하기 그지없다. 샘에서 나와 싸리나무 군락을 헤치며 다시 능선 위로 오면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참나무와 산죽이 우거진 내리막 길이 계속된다. 등반로가 왼편으로 휘어지는 듯하다가 전망이 좋은 기암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되고 다시 길을 가로막은 잡목숲을 헤치며 얼마 안 가 억새숲이 장관인 헬기장이 나오고 내리막길은 아직도 계속된다.
계곡 물소리가 왼쪽으로 들려오고 잠시 뒤돌아보면 만복대 정상이 아득한데 억새의 노란색, 사리의 은회색, 산죽의 푸른색, 참나무잎의 주황색빛이 마치 수직 스펙트럼같이 보인다. 이 코스의 최저지대에 속하는 묘봉재(卯峰峙)에는 또 하나의 헬기장이 있고 심원ㆍ산동 쪽으로 희미한 길이 교차한다. 이 만복대 능선을 등반하다보면 지형적으로 특이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심원 계곡 쪽 동쪽사면은 대개 완만하고 반면 산동지방 쪽 서쪽사면은 거의 급경사를 이룬다. 남원, 곡성, 구례, 운봉 등 큰 도읍으로부터 차단된, 바로 이 천연적 요새다운 면 때문에 마한의 피난왕조는 물론이요, 한동안 심원계곡 일원에 진을 치기도 한 빨치산측도 유리하게 버틸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다른 얘기지만 묘봉재 부근이라든가 몇몇 야트막한 고개(재)에는 참호 흔적이 무성하다. 6ㆍ25 전후의 옛 흔적인지 아니면 그후 군사상 필요에 의해 구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억새와 잡목이 우거져 평화와 생명이 무심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송곳처럼 뾰족한 작은 고리봉에서 속세로
묘봉재에서는 한동안 경사진 길을 올라야 한다. 잡목 우거져서 보행에 지장을 받을 정도인데 얼마 후 능선평지에 올라서면 앞에 작은고리봉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을 지나 작은고리봉으로 올라가다보면 정상으로도 길이 나 있지만 동쪽사면을 스치듯 횡단하는 길도 있으므로 여길 이용하면 고리봉 남쪽사면에 곧 다다른다.
성삼재가 가깝게 다가와 있고 이제는 내리막길과 평지길뿐이다. 소나무숲을 내려와서 잡목터널을 지나면 헬기장이 나오고 성삼재를 오르내리는 차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온다. 다시 잡목터널을 뚫고 20여 분 가면 곧 성삼재다.
교통과 숙박
성삼재까지는 구례읍에서 정기노선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있지만 정령치에는 없다. 남원에서 정령치까지 택시요금이 12,000원 정도 하므로 이 편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데 운봉읍에서 버스를 타고 고기리로 와서 8㎞를 걸어 오를 수도 있다.
정령치에 있는 휴게소도 아직은 여름 휴가철 정도나 개점하는 가건물식 임시매점에 불과하여 야영할 수밖에 없다. 정령치와 만복대 등에 야영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고 성삼재에서 3㎞ 더 올라간 노고단에 역시 현대식 산장과 넓은 야영장이 있다. 굳이 민박한다면 정령치에서 20여 리 떨어진 달궁과 고기리 부근을 찾을 수 있다.
이 코스는 대절버스를 이용한 단체관광 형식으로 찾는다면 당일산행 코스로 충분하다. 물론 서울 등지에서는 1박2일 코스가 된다. 봄철이나 가을철에 메마르고 건조한 만복대 억새밭을 지날 때는 특히 산불에 조심해줄 것을 새삼스럽게 당부한다.
6. 뱀사골 코스
반선리 (2㎞)→(0:40분) 제3야영장 (2.5㎞)→(0:40분) 병풍소 (1.5㎞)
←(0:30분) ←(0:30분)
→(0:20분) 제승대 (1.5㎞)→(0:40분) 간장소 (4.5㎞)→(1:10분) 화개재
←(0:20분) ←(0:30분) ←(1:30분)
총거리 12㎞ 등정시간 4시간 00분
하산시간 3시간 10분
아름다운 소와 담이 연속되는 지리산의 빼어난 계곡 명소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서 화개재까지 12㎞의 완만한 계곡을 오르는 코스이다.
여름철을 피하고 가을 단풍을 노려라
뱀사골계곡은 반야봉과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수림지대를 맑은 계류가 기암 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아름다운 소(沼)와 명소(明所)를 일구어놓은 경치가 빼어난 계곡 중 하나이다. 가히 폭포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계곡이지만 수없이 많은 명승지를 안고 있는 계곡인데 철다리 10여 개가 중간중간에 가설돼 있고 경사 급한 곳도 없는 넓은 등반로가 차라리 산책로에 가깝다.
때문에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안심하고 찾아올 수 있는 곳에 해당된다. 다만 연중 등반객의 70이상이 여름철에 몰려 오염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될 정도로 번잡스럽다. 가을철 단풍도 훌륭하여 많이 소개되고 있는 편이고 겨울철에도 웬만한 장비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때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참고로 지난 1980년대 초반에 전주 모대학 학생 6명이 이웃 심원계곡 쪽에서 야영하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참사도 있었으므로 어느 계곡보다도 유역 면적이 넓은 이곳 뱀사골계곡에서의 야영은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특히 깊은 소(沼)에서 물놀이하다 익사하는 사건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므로 호기는 금물이다.
뱀사골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분분하다. 옛날 석실(石室)부근에 배암사라는 절이 있어서 뱀사로 줄여 부르다가 뱀사골로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뱀소(沼)에서 유래되어 뱀소골, 뱀사골로 부른다는 한 가닥의 얘기도 있다. 반면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 부른다고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예로부터 송림사(松林寺, 지금의 전적기념관에 위치)에는 칠월 칠석날 밤이면 주지스님이 없어져 마을사람들은 부처가 되어 승천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서산대사가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 칠석날 장삼 속에 극약 주머니를 달아 주지스님에게 입혀 예년처럼 독경을 읽도록 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새벽녘이 되자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큰 뱀이 송림사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뱀의 뒤를 쫓아가보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뱀소에 죽어 있어 그 배를 갈라보았더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뱀사골은 이처럼 뱀에 얽힌 얘기도 많고 또 실제로 한동안 뱀이 많이 잡히는 골짜기로 유명했다. 지금은 마구 잡아 그 수효도 격감된 상태라고 하지만 그래도 건강식, 강정제로 그 수요가 끊이질 않아서 뱀탕(湯)과 뱀술(酒)을 파는 집은 뱀사골 주변뿐만 아니라 지리산 주변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489년 4월 중산리 쪽으로 해서 천왕봉을 오르던 김일손(金馹孫)은 그의 기행록에서 "매우 고생스럽게 전진하는데 이제 뾰족뾰족 솟아오르는 산죽을 함부로 밟고 또 차며 나가니 뱀이 지나가고 도마뱀이 우글거려 길을 막는다"고 적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지리산 주변 각 군현(郡縣)의 토산물로 백화사(白花蛇)가 자주 등장한다. 최근에는 흑질백장(黑質白章)이나 홍사(紅蛇), 청사(靑蛇) 그리고 커다란 살모사 등을 잡아 한몫 챙긴 사람들도 있어서 지리산 인근 주민들에게는 뱀 잡는 일도 꽤나 유익한 일감이다. 대개 자루와 집게를 들고 숲을 누비지만 어느 곳에서는 높이 30여cm의 그물망을 쳐직진(直進)성향의 뱀들을 무더기로 훑기도 한다.
옛 송림사터에 자리잡은 전적기념관
반선리(伴仙里)주차장에서 매표소를 지나면 각종 기념품과 건강식품, 음식을 파는 현대식 2층 상가건물이 이어지고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전적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옛 송림사(松林寺)터에 자리잡은 지리산 전적기념관(戰蹟記念館)은 연면적이 462평방미터의 2층 건물로 1979년 11월 23일 건설부와 국방부가 약 2억원의 예산으로 건립하였다. 제1전시실에는 지리산 전적에 관한 각종 자료와 사진, 모형, 그리고 당시 국군과 빨치산들이 사용하던 장비와 물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은 6ㆍ25에 관한 각종 전적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어 반공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에 뱀사골과 반야봉, 심원계곡 일원이 빨치산 근거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金智會)와 홍순석(洪淳錫)을 1949년 4월 9일 이곳 반선마을에서 사살했기 때문에 여기에 세웠다고 한다. 과거 같은 동족끼리 살점을 뜯고 피를 흘리며 싸워야 했던 비극적 역사의 한 단면을 상기 시켜주는, 지리산 주변에서는 그나마 유일한 곳이다. 단지 안타까운 점은 전시된 자료와 기록들이 대부분 군경(軍警) 토벌대측의 전승(戰勝)에 관한 것이라서 최근 수기류 등으로 출간된 빨치산측의 여러 문제제기에 부합되지 않는 것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보다 객관적인 민족사의 한 페이지로 새롭게 정리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이곳을 불행한 역사 속에서 비운에 숨겨간 군경은 물론 빨치산까지, 그리고 당시 양민들의 억울한 죽음까지도 최소한 진혼할 수 있는 화합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전적기념관을 나오면 계곡 옆으로 뚫린 폭 3~4m 콘크리트 포장길이 계속된다. 이 길을 포기하고 계곡변 소로길을 택해 오를 수도 있는데 결국 두 갈래 길은 석실 부근 제3야영장에서 만난다. 감나무가 10여 그루 있는 야영장에는 화장실과 간이매점도 있다. 커다란 바위굴 석실과 정진암(岩)을 보고 조금 올라가면 용이 머리를 흔들고 승천(昇天)하는 모습과 같다는 일명 흔들바위 요룡대(搖龍臺)가 나타나고 다시 얼마 오르면 반야교가 나온다. 길이 10m, 폭 20m의 철다리이다. 여기서 얼마 안 가 탁룡소(濯龍沼)가 나온다. 긴 암반 위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물줄기가 장관이다. 탁룡소에서 금포교를 건너면 용이 못 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라는 뱀소가 나오고 병(甁)모양의 병소와 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병풍소 등 기묘한 형상의 소가 연이어진다.
절경 뒤의 슬픈 이야기, 산판도로와 오염
천장이 아치형인 명선교와 옥류교를 거쳐 개울가로 철제난간이 30여m나 계속되는 곳에 소위 정진스님이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제승대가 있다. 제승대에서 30여 분쯤 계곡을 몇 번 건너면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소금가마가 빠졌다는 간장소가 나오고 이제껏 편하던 길은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밭길로 변한다. 뱀사골 상류의 이 일대를 '들돌골'(擧石谷)이라고 하고 작은 지류와 합쳐지는 곳이 몇 군데 나타나며 경사도 차츰 높아진다. 가끔 어지럽게 난 희미한 길들이 명선봉, 반야봉 쪽으로 나 있는데 옛 빨치산 루트와 도벌꾼들의 통행로이다. 뱀사골계곡 등반로가 잘 다듬어진 이유도 옛 도벌꾼들의 산판도로가 상류까지 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끔 지도상에 삼차, 막차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모두 산판차량이 드나들던 당시의 명칭이다.
고목이 나뒹굴기도 한 선명한 등반로를 한참 오르면 울창한 숲속 평지에 뱀사골산장과 야영장이 나온다. 1978년 10월 8일 '반야봉산장'이란 이름으로 조립식 철제건물에 지나지 않았던 뱀사골산장은 그후 보수ㆍ개축하여 지금은 8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149평방미터 면적의 아담한 건물로 변했다. 1989년 12월 개통된 뱀사골 산장의 전화번호는 0671-33-1732번이다. 반야봉의 큼직한 덩치 아래에 위치하여 샘물도 풍부한데 주변이 지저분하여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임을 알게 해준다. 산장에서 200m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바로 뱀사골 정상부인 화개재가 나타나 삼도봉과 토끼봉 방향으로 계속 등반할 수 있다.
교통과 숙박
남원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인월을 거쳐 반선리까지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배차되고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서 오는 직행버스가 인월에서 정차하기 때문에 여기서 30분 거리인 뱀사골의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숙박은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 민박집이 다수 있고 산내면 부근과 달궁에도 민박촌이 많이 있는 편이다. 연휴, 휴가철, 인원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보통 8,000~10,000원 정도 한다. 야영은 석실 부근과 계곡 곳곳에 산재해 있어 불편은 없으리라 본다.
7. 칠불사 코스
토끼봉 (3.5㎞)-→(0:50분) 1293고지 (4.5㎞)-→(1:20분) 칠불사
←-(1:20분) ←-(2:00분)
(5㎞)-→(1:30분) 신흥
←-(2:00분)
총거리 13㎞ 등정시간 5시간 20분
하산시간 3시간 40분
토끼봉에서 하산 지름길로 가끔 찾는 소외된 능선길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사(七佛寺)에서 토끼봉까지 8㎞의 능선 코스이지만 교통문제 때문에 신흥(新興)에서 출발하므로 실제로는 13㎞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이 코스는 토끼봉에서 최단 하산 코스로 가끔 이용될 뿐 굳이 식수도 부족한 짜증스런 능선 오르막길을 택해 오르려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하다.
신흥의 삼거리에서 좌측의 비포장 2차선 도로를 따라 한참 오르면 범왕리 오송 마을에 도착한다. 수각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우측 다리를 하나 건너면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원 범왕리를 거쳐 칠불사로 오르는 지름길이 각각 있다.
산에 오르는 이치를 새삼 확인하며 고되게 올라
한편 목통마을에서는 계곡을 따라 화개재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뱀사골 산장의 물품을 운반하는 길로도 이용된다. 우선 이 칠불사 코스를 오르려면 칠불사 우측 샘터에서 식수를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토끼봉까지는 완전한 능선길이라 식수도 없고 또 토끼봉에서 뱀사골산장, 총각샘 혹은 연하천까지 연계코스까지도 감안하여 식수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칠불사 우측 샘터 위로 산죽숲길을 오르면 소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여기서부터 완만하던 오름길은 차츰 경사 급한 미끄런 흙길로 변하고 갖가지 잡목들로 빽빽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등반로도 뚜렷하고 리본도 많이 매달려 있다. 서쪽 산비탈을 가로지르는 듯하던 길이 다시 경사 급한 길로 접어들쯤 해서 야영한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북동방향의 이 오르막길은 범왕리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길과 능선 평지에서 만나고 이후로는 참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길이 펼쳐있고 대성골, 삼정골이 아득하게 내려다 보인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장중한 산울림으로 들리는 길이다.
평지길과 오르막길이 번갈아 교체되면서 바위 위로 올라서면 토끼봉이다.
이 코스의 등반 기점인 해발 700m의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칠불사(七佛寺)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
전설에 의하면 가락국(駕洛國)시조 김수로왕의 7왕자가 인도에서 온 외삼촌 보옥선사(寶玉禪師, 長遊和尙)를 따라 지리산 이곳에 입산수도하여 모두 성불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수로왕 62년, 서기 103년이었다고 하는데 이 자체로 보면 흔히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말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보다 무려 270년이 앞선 시기이다. 그리고 종래의 불교 북래설(北來設)과는 달리 이 땅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직수입됐다느는 남래설(南來設)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논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아직껏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된 것은 아니고 다만 전설로 전해올 뿐이다.
칠불사는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요람
지금도 칠불사 입구에는 허왕후가 성불한 일곱 아들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영지(影池)가 남아 있고 또한 수로왕이 머물며 범왕사(梵王寺)를 세웠던 범왕리(凡王里), 허왕후가 머물며 천비사(天妃寺)를 세웠던 대비리(大比里)의 지명이 지금도 전한다.
[다큐멘타리 지리산]의 저자 김경렬(金敬烈) 씨는 보옥선사의 불교 전래는,그가 지리산에 들어와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깨우쳐 불법을 전수하고 한때 꽃을 피웠다 할지라도 뿌리깊은 토속신앙, 산천제신(山川諸神) 숭배사상과의 심한 갈등으로 그 전개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면서도 그러나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온 악기와 음곡은 토속음악에 수용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 {잡지 악조}(雜志 樂條)에는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와 거문고를 배워 속명득(續命得)→귀금(貴今) 선생→안장(安長)과 청장(淸長)→극상(克相)과 극종(克宗)으로 이어지는 전수체계를 통해 옥보고 스스로가 지은 30곡이 전해 내려온다고 적혀 있다. 물론 여기서도 쟁점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음악의 전수자들이 어느 연대 사람이고 또 운상원이 어디였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운상원이 과연 7왕자와 보옥선사가 들어와 수도한 칠불암 전대(前代)의 운상원인지 아니면 운봉지방 근처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옥보고가 보옥선사라는 얘기도 있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한편 칠불사에는 불가사의한 온돌방 아자방(亞字房)이 지금도 전해 내려온다. 지금은 지방문화재 144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독특한 온돌구조 때문에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 건축사전]에가지 올라 있는 가히 국보급의 문화재이다. 1949년 음력 정월경에 불에 타버려 구들만 보호되다가 1982년경 복원되어 지금은 스님들의 선방으로 쓰이고 있다. 아자방은 중앙에 십자형 통로가 있고 둘레에 높은 좌선방(坐禪房)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 이중식 온돌은 통로나 높은 방이 모두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보통 한 번에 일곱 짐 정도의 장작을 세 개의 아궁이에 지피면 두 달 정도는 온기가 유지된다고 한다. 아자방 축조연대에 관해서는 신라 지마왕(祗摩王) 8년(서기 119년)과 신라 효공왕(孝恭王, 897~911년) 때라는 두 가지 얘기가 있는데 아자방을 축조한 사람은 두 시기 모두 담공선사(曇空禪師)로 전해지고 있다.
칠불암은 통일신라 이후로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으로 내려오면서 고려시대 때 정명, 조선시대 때는 벽송, 부휴, 추월, 서산대사, 인허, 월송, 무가, 백암, 금담, 대은, 초의 등 고승들이 거쳐간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에 중건하였는데 순조 20년(1830년)에 아자방 건물인 벽안당(碧眼堂)이 역시 실화로 소실되었다가 금담 대운 두 스님이 복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인 보광전을 비롯 아자방 건물인 벽안당 등 옛 시설들은 거의 다 갖추었지만 규모는 예전에 못 미친다고 한다. 1980년초 당시 고위 권력층인 허(許)모 씨가 복구사업과 도로공사를 지원했다는 풍문도 들린다.
교통과 숙박
구례읍에서 07:00~18:00까지 하루 8차례 화개를 거쳐 신흥까지 오는 완행버스가 있고 또 의신마을로 들어가는 4차례의 버스편을 화개에서 타고 역시 신흥에서 내리면 된다. 범왕리까지 들어가는 버스편은 단 한 차례 있는데 대개 저녁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나온다. 민박할 수 있는 곳과 야영할 수 있는 곳이 범왕리와 칠불사 주위에는 거의 없는 편이다. 신흥마을에 민박집이 몇 곳 있는 편이고 쌍계사 쪽 집단시설지 구내에 다수의 민박집이 있으므로 이곳을 이용하는게 좋을 듯하다. 보통 7,000~10,000원 하며 때에 따라서는 가감되기도 한다.
8. 삼정리 코스
삼정리 (4㎞)→(1:30) 작전도로갈림길 (2㎞)→(1:00) 주능선갈림길
←(1:10) ←(0:30)
(1㎞)→(0:20) 연하천
←(0:20)
총거리 8㎞ 등정시간 3시간 10분 하산시간 2시간 20분
숲속의 별세계 연하천으로 편히 오를 수 있는 지름길
마천면 삼정리(三丁里)에서 연하천산장까지 8㎞ 정도의 지름길이다. 당일 산행 코스로 혹은 연하천에서 하산할 때 가끔 찾을 수 있다. 거의 절반쯤은 벽소령 작전도로를 따라 가므로 길은 편하고 뚜렷한 편이다. 1989년 5월 5일 필자가 이 코스를 오를 때는 한창 봄나물들이 솟아날 때라 마침 하정(下丁)마을{삼정리하는 지명은 곧 양정(陽丁), 음정(陰丁), 하정(下丁) 이 세 마을을 합해서 부르는 말이다}에서 아침 일찍 나물 뜯으러 떠난 아주머니 두 분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인걸과 아미 선녀의 애틋한 이야기
두 아주머니가 가끔씩 '우~~우~~'하고 마치 가축몰이하는 듯한 소리를 내는데 도회지 사람들이 산 정상에서 외치는 '야호~~'소리와는 달리 긴 여운을 남기며 광대골을 울리고 있었다. 지리산 인근 사람들은 '야호~~' 소리 대신 '우~~우~~'하는, 예로부터 우리네 조상들이 일종의 신호방법으로 혹은 감탄사격의 외침소리로 즐겨 사용하던 것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천박한(?)느낌이 드는 '야호~~' 소리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또 폐부 깊숙이서 날숨 소리로 내는 것이라 소리의 파장도 길게 뻗어나가는 듯했다.
벽소령 도로를 따라 취나물, 개발딱주, 두릅 등이 많이 보였다. 잎에서 독특한 냄새가 나는 취나물은 무척 많은데 무쳐 먹거나 혹은 말려서 기름에 튀겨 먹는데 맛이 고소하고 향긋하다. 마치 잎이 개(犬)발처럼 생겼다 해서 그렇게 부르는 개발딱주도 뽀송뽀송한 어린 잎 줄기를 역시 무쳐 먹으면 맛이 그만인데 좀더 자라 잎이 나오면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이때가 제철이라고 한다. 역시 이때 새순이 튼 것을 꺾는 것으로 두릅이 있다. "와 옻나무는 붙잽고 있는기라요? 그건 두릅이 아니라요." 두릅나물 꺾어주겠다고 어설프게 나섰던 필자에게 한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외친다.
꾸불꾸불 산비탈을 깎아내린 작전도로는 계속된다. 도중 두서너 번 우측에서 물이 흐르는 개울을 만나고 사태난 듯한 인조너덜을 보고 산모퉁이를 돌자 주능선 쪽에 바위군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저기가 어딘가요?" "부자(父子)바위라고 하데요. 아부지가 지 자슥들을 데리꼬 가는 모습이랍디더."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날개옷을 훔쳐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후 하늘나라에서는 아미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주었다(이 쌀바위는 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버렸다고 한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2녀를 낳아 하늘 아래 첫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버렸다. 그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石門岩)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벽소령에는 부자바위가 솟아 올랐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라고 한다.
벽소령에 있는 부자바위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세 자녀가 걷는 모습이다. 한 아주머니는 벽소령 도로공사 때 마천 주둔 공병대 병사들이 몇 명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위를 잘못 건드려서 라고 설명한다. 쌀바위를 얘기하는지 알 길은 없다.
봄나물과 지리산 산불 사이의 묘한 함수관계
오곡밥을 싸온 아주머니들과 함께 요기를 하고 나서 당일 노고단까지 달려야 하는 필자의 일정 때문에 작전도로를 벗어나 우측 가파른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여담이지만 1950, 1960년대에는 지리산에 큰 산불이 몇 건 있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는데 1957, 1958년경 세석에서 써리봉, 대원사 부근까지 무려 20여 일간 산불이 계속된 적이 있었다. 당시는 6ㆍ25 때의 각종 포탄들이 산속에 남아 있어서 이들 불발탄들이 불속에서 터지는 바람에 진화작없도 그만큼 어려웠다고 하는데 결국 비가 와서 겨우 꺼졌다고 한다. 그리고 한 20여 년 전과 15년 전에도 장당골과 한판골 일대에서 각각 보름간 계속된 산불이 있었다. 이들 산불들은 흔히 산불이 난 곳에는 그 이듬해 봄나물이 많이 난다고 믿은 사람들 때문에 종종 일어나기도 했다는 얘기인데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벽소령 작전도로에서 경사 급한 비탈길로 접어드는 곳에는 리본들이 많이 매달려 있으므로 삼정리에서 1시간 이상 오른 곳부터는 우측을 유심히 살피며 오르길 바란다. 고목이 많이 쓰러져 있는 돌밭 비탈길을 따라 선명한 길을 한참 오르면 우측에 샘이 있고 앞에 텐트 한 동을 칠 수 있다. 여기서 바위 옆으로 다시 오르면 산죽이 짙어지면서 능선 위로 올라선다. 중북부능선이라
고 불리는 일명 삼정리 능선길 위에 올라선 것이다. 참나무와 잣나무숲이 울창한 산죽 소로길을 평탄하게 남쪽으로 따라 오르면 진달래도 많이 보이고, 인적 드문 한적한 길이라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약 20여 분 가면 이정표가 나오고 다시 주능선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다시 20여 분 가면 연하천 산장이 나온다. 이 코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작전도로에서 우측 비탈길로 접어드는 것이 문제이고 또 연하천에서 하산할 때도 중북부능선길을 따라가다 우측으로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좀 까다롭다. 특이한 지형지물이 없는 데다가 안개 낀 날에는 방향감각마저 잃기 쉬우므로 연하천에서 동쪽으로 1㎞ 주능선을 타고 오다가 여기 이정표에서 다시 20여 분 거리를 가면 우측으로 산죽 소로길이 보인다. 가파르게 내려서는 길인데 연하천산장 물품을 져나르는 길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다닌 흔적이 뚜렷하다.
교통과 숙박
마천에서 삼정리행 완행버스가 08:20~20:30 사이에 5차례 있다. 20여 분 소요되는데 최근에 2차선 확포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서 앞으로 더욱 편리해질 것 같다. 마천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4,000원 정도 한다. 아직은 삼정리 쪽에 민박집이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에 마천에서 민박을 해야 한다. 야영할 만한 곳으로는 삼정리 앞 솔밭과 벽소령 도로변에 많이 있고 역시 물도 넉넉하다.
* 지리산과 문학 *
지리산이 포괄하고 있는 드넓은 삶의 영역과 지리산이 가지는 역사적 내용으로 인하여, 지리산을 매개로 한 문학은 고금을 통틀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영재우적(永才遇賊)이라 하여 지리산과 덕유산 중간의 육십령 통로에 할거하고 있던 도적떼들을 문학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김시습의[만복사저포기]는 다소 허황된 듯하지만 중세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남원의 만복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선 중기 김종직, 김일손, 이륙의 지리산 기행문들은 모두 우리나라 기행 수필문학의 명작들로 평가된다. 여기서 김종직의 [유두듀록]은 사실적 산문 형식의 기술을 통해 지리산의 해동청 잡는 모습을 비롯 몇몇 풍물들을 적고 있으며 김일손의 기행문은 섬세한 필치와 수사적 표현양식이 단연 돋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꼽히는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타령] 등도 넓은 의미에서 지리산을 무대로 한 것들이다. 익히 아는 [춘향전]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변학도가 잔치를 벌일 때 유독 운봉현감만이 춘향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있는 점이다. 지리산을 가까이 하고 있는 운봉현감의 이러한 처신은 아마도 지리산 속의 잠재적 변혁세력과 결코 무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흥부전]의 무대가 운봉 여원치에서 함양 팔랑재까지라는 것은 책 속의 지명이 말해주고 있으며, 남원군 동면 성산리는 흥부전의 원고장이라고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변강쇠타령은 거의 등구ㆍ마천을 그 지역적 배경으로 한다.
근대로 와서 지리산 문학을 살펴보면 몰락 양반가의 손자 석이와 소작인의 딸 순이의 비극적 삶을 내용으로 한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박경리의 '토지'도 악양면 평사리가 작품의 배경이다. 김동리는 '역마'에서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이 낀 주인공의 떠돌이 생활을 그리며 일제의 자본침
탈로 붕괴되어가는 조선시재 장터의 모습을 애환깊게 다루고 있다.
6ㆍ25와 빨치산 투쟁이라는 비극적 역사가 휩쓸고 간 다음 지리산 문학은 곧 분단문학의 선상에서 논의된다. 그러나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지리산 문학의 잉태과정은 이데오롤기적 제약 때문에 진통을 겪는다.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은 바로 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라며 최초로 산사람들의 얘기를 진혼곡 형식으로 읊고 잇다. 뱀사골 마뜰마을을 배경으로 한 오찬식의 '마뜰', 문순태의 '피아골'과 철쭉제, 김주영의 '천둥소리', 박경리의 '천둥소리'도 모두 지리산의 비극적 역사를 그 테마나 소재로 하고 있다.
1970년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은 본격적으로 지리산과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지리산'은 실제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도 픽션으로의 한계와 지식인적 관점에 머물고 말았다. 이에 비해 1980년대에 등장한 이태 씨의 '남부군'은 작가가 체험한 생생한 빨치산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의 역사 기록물인 '남부군'은 바로 1980년대가 말해야 할 지리산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1980년대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있다. 여순반란사건에서부터 휴전 성립 시기까지 전남지방과 지리산을 무대로 입산자와 그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특히 이 책은 이제껏 지리산과 관련된 분단문학이 갖고 있던 역사허무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분단된 역사 속에서의 민중들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그리고 사랑과 분노를 감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9. 대성골 코스
세석산장 (0.5㎞)→(0:10분) 세석입구 (1㎞)→(0:20분) 음양수샘 (0.5㎞)
←(0:10분) ←(0:30분)
→(0:10분) 1,400m갈림길 (3㎞)→(1:00분) 큰세개골 (1㎞)→(0:20분)
←(0:20분) ←(1:30분) ←(0:30분)
작은세개골 (4㎞)→(0:30분) 대성리 (1㎞)→(0:30분) 절터 (1㎞)→
←(0:40분) ←(0:40분) ←
(0:30분) 의신마을 (절터에서 의신마을이 아닌 대성교로 빠지는 길도 있으며
(0:40분) 시간은 의신마을에 오르내리는 시간과 비슷하다.)
총거리 12㎞ 등정시간 5시간 00분
하산시간 3시간 30분
빨치산 몰살의 비운을 간직한 정갈한 맛의 협곡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 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의 방면에서 빨치산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힌 대성골 전체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순덕(정순덕)이 가늠하기에도 1만 명의 대병력이 대성골에 빽빽히 들어찬 것이다.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스무 발 이상이 동시에 작렬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체들이었다. 하루종일 퍼부어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추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에 떨어지는 시커먼 물체는 휘발유가 가득 차 있는 '드럼통'이었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 쯤인가 대성골 골짜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날려보냈다. 바로 소이탄(燒夷彈)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혀 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정충제 기록, [실록 정순덕], 상권, 272~276쪽 발췌ㆍ인용)
쫓겨 지친 대원, 소대, 비무장이 속속 박다내골(일명 의신골, 하동군 화개면)로 모여들었다.
박다내골은 험한 바위가 우뚝우뚝 솟은 험상궂은 골짝
저마다 배낭을 털어 비상 쌀알을 씹는다 나눠준다.
지휘관들은 수군수군 머리를 짰다.
박다내골을 눈치챈 토벌대는
사단병력을 총동원
박다내골을 몽땅 포위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태세
포탄과 총알이 나무뿌리를 날리고 바위를 쪼갰다.
악, 악, 여기 저기서 육박전
아, 처참한 비명 아우성
굉음
눈보라
흙보라
피보라
비행기는 가끔 소이탄을 떨어뜨려
빨치산을 태워 죽인다.
포위 나흘째
올가미는 바작바작 좁혀왔다.
박다내골 마지막은 비장해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팔로군 출신 인민군 장교 5연대장 김모는
'조국과 인민이 주는 마지막 훈장'이라며
동료 여섯을 그들 소원대로 차례로 쏘고
남은 한 방으로 자기의 심장을 쐈다.
1952년 1월 18일의 일이다.
죽은 자 가운데는
노영호 사령관을 따라
짧은 생애나마 노사령관을 그렇게도 사모해마지 않던 구빨치 허귀연이 끼어 있었다.
이때 단 한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으니
5연대장의 연락병 임창해(당시 20세)다.
허리에 총을 맞고 신음중 국군에 구출되었다.
이 '죽음의 골'에서
이영회와 노영호 두 지휘관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약간의 대원을 이끌고
필사적,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1952년 9월 광주형무소에서
노영호의 동생 노영수는
우연히도 임창해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허리부상을 앓고 있었다.
둘은 꿈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예, 수백 명은 죽었을기라요."
"경냄이 녹아난기가......비무장까지 합치모온 8백은 넘을끼더."
(이기형 지음, {죽음의 골}, [실록 연작시 지리산], 일부 인용)
대성골 참극의 진상은?
이상의 기록은 1952년 1월 18일 소위 백야전(白野戰) 사령부 제3기 토벌작전 때 이곳 대성골에 사면초가격으로 몰린 빨치산 수백 명이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던 사실을 적은 것이다. 의신마을 정윤균(鄭允均, 59세) 씨는 전후 대성골은 마치 숫더미와 같았는데 여기에 서캐가 낀 것처럼 하얀 인골들이 널려 있었다고 증언하고 후에 나병환자들이 몰려와 나병에 인골이 어떤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추스려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성골 상류인 '폭포수골'과 세석 서쪽 병풍바위 아래쪽 일대에서 인골을 목격한 사람은 많다. 당시 아비규환의 협곡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빨치산들의 유해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대성골을 등반하다보면 큰 거목이 별로 눈에 안 띄고 대체로 팔뚝 굵기의 잡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당시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의 빨치산 투쟁에 있어서 커다란 분기점을 이룬 백야전 사령부의 강력한 토벌작전 중 가장 큰 작전이자 전투였던 이 대성골에서의 '빨치산 몰살 사건'은 이처럼 여로모로 확인된다.
그런데 '실록 정순덕'에서는 대성골이 그후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고 적으면서 빨치산들의 대화형식을 빌어 약 칠팔천 명이 몰살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정순덕이 약 만 명 정도의 빨치산들이 몰려들었다는 얘기와 함께 이것은 상당한 의문이 따른다. 과연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을까? 부질없는 숫자놀음 같지만 기록의 정확성을 기한다는 의미에서 한번 검토해보기로 한다.
우선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을 군경측 기록인 '공비연혁'을 보면 1952년 1월 5일 현재, 즉 대성골 참극이 벌어지기 전 지리산 일대 잔존 공비수를 1,250명으로 추정하고 있고 그 사건 두 달 후인 3월 31일 현재에 잔존 공비수를 332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1,000명 정도의 인원감소를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도 대성골에서 뿐만 아니라 지리산 전역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실록 정순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실제 군경측 기록을 보면 대성골 참극이 과연 있었는지조차 의문시될 정도로 대성골에서의 지대한 전공기록에 무관심한 듯한데 이런 분위기는 '남부군'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부군' 하권을 보면 당시(남부군에서는 백야전 사령부가 3기 작전기간을 1952년 1월 9일~31일까지로 잡고 있어 시기적 차이가 있다) 남부군 주력부대가 대성골에서 크게 벗어난 곳을 이동하지 않았는데도(중산리 - 삼신봉 - 한신골 - 벽송사골 - 백무골 - 중산리골 - 세석 - 칠선봉 - 대성골 - 삼정골 - 빗점골)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획을 그은 대성골의 비극에 대해서는 따로 적고 있지 않다('남부군' 하권, 138~166쪽 참조). 다만 백야전 사령부가 설치될 때, 즉 1951년 11월 지리산을 포함한 소백산맥 일대의 잔존 빨치산 수를 1,500~1,6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 역시 같은 빨치산 기록인 '실록 정순덕'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 숫자도 그나마 악양보투 때와 수도사단 제1차 대공세 때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실록 정순덕'에서는 엄청남 과장과 착각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이기형 씨의 '죽음의 골'이란 시에서 나오는 수백 명(혹은 800명 이상)의 사망자 수가 그런 대로 정확한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박다내골'과 '대성골'은 지명상으로나 실제상으로 다소 차이가 있음은 굳이 생략하기로 한다.
영험한 대성골 등반은 의신마을에서부터
위와 같은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의 등반은 대성교나 의신(義信)마을에서 시작된다. 세석까지는 계곡과 능선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 짙푸른 수해(樹海) 속으로 파묻히다가 다시 탁 트인 전망으로 이어지는 등반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세석까지는 12㎞이고, 대성동계곡에 큰 폭포나 소가 별로 눈에 안띄어 경관은 뒤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래도 때묻지 않은 느낌을 주는 계곡 중의 하나이다. 하동ㆍ구례방면에서 화개(花開)를 거쳐 진입하게 되므로 시간만 주어진다면 화개동천(花開洞川) 주변의 명승과 역사의 숨결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등반기점은 두 곳이지만 대성교에서 가파른 지능선을 오르는 것보다 의신마을에서 출발하는 것이 다소 수월한 편이다. 옛날 의신사(義神寺, 1478년경 건립되고 서산대사가 거처하던 곳으로 전한다)라는 절이 있었던 지금의 의신마을은 임진란 당시 전란을 피해 모여든 3성씨(姓氏)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그후 여러 사람들이 이주해와 한때는 이곳 산골 오지마울이 130여 호에 달하기도 했으나 6ㆍ25를 거치면서 마을이 전소당하고 또 이농현상 등으로 인해 지금은 40여 가구 170여 명의 주민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의신마을에서 동남방향으로 자갈 깔린 넓직한 길을 가노라면 산비탈을 일궈 놓은 밤나무 등 과수단지가 나온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전망 트인 길이 계속된다. 남부능선에서 화개천 방향으로 주름치마폭처럼 첩첩이 흘러내린 산자락이 장관이다. 뒤돌아보면 명선봉 - 토끼봉 연릉이 위엄있게 가늠되고 의신마을과 주변 논배미가 선명하다.
야산지대 특유의 소나무숲 오솔길을 따라 몇 번인가 산구비를 감돌아 오르면 평지길로 나오고 감나무 몇 그루가 잡초더미 속에 덩그랗게 서 있는 절터에 도착한다. 대성교 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엤 능인사(能仁寺)터이다. 샘물도 흐르고 평지도 얼마간 보인다.
계곡과 멀리 떨어진 등반로는 완만하고 뚜렷하다. 한참 가다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하던 길이 다소의 오르막 돌길을 거쳐 후박나무가 우거진 대성동에 이른다. 주변에 논밭터가 보이고 민박집 건물과 상점도 두서너 집 있다.
지금의 대성동(大成洞)마을은 원래 원(愿)대성리에 있던 마을이 1960년 후반 이곳으로 옮겨와 형성된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 4㎞ 더 들어간 산골에 있던 원대성리 마울주민들의 불편을 감안하여 정부의 배려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성교 위쪽 협곡을 막아 수력발전소를 세운다는 개발 계획도 있었지만 그후 유야무야된 듯하다. 대성동에서 오던 길을 바라보면 사방이 온통 꽉 막힌 느낌이 드는 게 그런 소리가 나왔음직하다.
옛 원대성마을은 잡초더미에 묻히고
대성동 이정표에서 바위벼랑 사이로 비껴 올라서면 계곡과 멀어진 완만한 오르막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곳곳에 논밭터, 집터 흔적이 무성한 원대성마을터에 도착한다. 좌측 산비탈 위쪽에 너와집 한 채가 보이는데 서울에서 기도객 한 명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원대성마을에서 조금 가면 좌측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와 만나는 곳인 작은 세개골이 나오고 여기를 건너서 산죽숲길로 접어들게 된다. 옛 움막터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큰세개골까지는 어렵지 않은 길이다. 좌우측 산비탈이 깎아지른 듯 협곡을 이룬 곳에 비교적 넓다란 공터도 보이는 곳이 큰세개골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 미끄런 흙길을 오르게 되는데 경사도 있고 비가 올 때면 여간 질퍽거리지 않는 곳이다.
잠시 평탄한 곳을 지나가 돌밭길로 올라서면 좌측으로 작은 지류를 끼고 가게 된다. 여기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동쪽으로 휘어진 듯한 길을 따라 힘든 비탈길에 올라서면 지능선 평지가 나온다. 여기서 동북방향으로 꺾어서 지능선에 올라붙어야 하는데 다소 까다로운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무덤 있는 곳을 지나서 참나무가 무성하고 큼지막한 기암이 솟구친 오르막길은 그칠 줄 모르다가 잠시 후 한숨 돌릴 수 있는 평편한 반석이 우측에 나온다. 10여 명 정도는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곳이고 전망도 후련하다. 여기서 남부능선의 고사목과 기암들의 아기자기한 맛도 훌륭하지만 대성골의 깊고 넓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것은 더욱 일품이다.
산사태 난 곳을 조심스레 비껴 오르면 해발 1,400m 갈림길이 바로 나오고 이제는 별 어려운 오르막길이 없는 탄탄대로가 펼쳐진다. 이곳 갈림길에서 남쪽길이 청학동, 불일폭포 등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길이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오르면 거대한 기암이 우뚝 솟아 있고 보통사람 한 키 정도의 참나무숲이 펼쳐지는 능선길이 마냥 즐겁다.
협곡을 오르면 세석의 전모가 드러나
멀리 촛대봉이 당당하게 그 위용을 뽐내듯 서 있고, 완만하고 드넓게 흘러 내린 세석의 지세가 대파노라마를 연출해낸다. 거림골 상류의 물소리도 정겨운 하모니를 이루는 경관이 아주 멋진 곳인데 세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도 단연 최고다.
잠시 밑으로 내려가던 길은 어느덧 완만한 평지를 지나게 되며 속속에 옛 집터 흔적이 무성하다. 구한말 일제시대부터 세석을 청학동이라 믿은 비결장이들이 찾아들어 이 일대에서 많이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의 세석고원이 근대 이후 나타난 모습이기 때문에(몇 백 년 전의 큰 산불 때문이라고) 청학동으로서의 구비요건을 나름대로 완벽하게 갖춘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리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일제시대 정신대를 피해 이곳에 숨어 지냈다는 신흥(伸興)의 어느 할머니 얘기로는 당시 번듯한 기와집에 장독, 절구통까지 갖추고 근처 평지를 일궈 감자 등도 심으며 넉넉하게 살았다고 한다. 흔히 청학동에 관한 말로 떠도는 "처음 들어온 사람은 망해 돌아가고, 중간에 들어온 사람은 흥하며 늦게야 들어온 사람은 터가 없다"(先入者還 中入者興 未入者不及)는 얘기와는 달리 그 후 전란통에 이곳은 폐허로 변한 듯하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낭만의 신년만필'에서 말했듯이 "온 조선 사람이 죽든 말든 나 한 몸, 한 가족이나 살면 그만이다는 식의 피난심리를 조장하는 짓들이나 벌이던" 이들 청학동행(行) 비결파 사람들의 행적이 과연 일제시대 식민치하에 놓여 있던 당시 상황에서 어떠했는가 하는 가치판단은 유보하기로 하자.
한편 '남부군'에서 이태 씨가 말하는 세석고원의 토담집의 위치도 이곳에서동쪽으로 얼마큼 내려간 곳인 것 같다. 지금은 '세석입구'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거림골에서 올라오는 등반로가 나 있지만 과거에는 음양수샘 밑 이곳 평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도 옛 허우천 씨 초막이 있던 곳으로 희미한 옛길이 있다.
지리산에서 가장 신비하고 멋진 음양수샘
이곳 옛 집터에서 조금 오른 곳에 음양수(陰陽水)샘이 있다. 완만한 평지에 거대한 돌출바위가 있고 그 밑에서 신묘하게도 두 줄기의 샘물이 흘러나온다. 지리산의 여타의 샘보다 운치도 있고 신비한 느낌이 드는 석간수(石間水)샘인데도 예로부터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간이천막을 치고 주변에서 기원하며 지냈다고 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부터 각종 천막들이 철거되어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찾기 힘들다. 햇볕이 드는 곳이 양수(陽水), 그늘진 곳이 음수(陰水)라고 하며 두 줄기의 물은 음양화합의 의미처럼 한 군데로 합쳐진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여름철에도 물맛이 아주 시원한 이 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대성골에는 호야(乎也)와 연진(蓮眞)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버렸고, 아내를 찾아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음양수샘에서는 참나무숲을 지나 구상나무숲으로 들어가게 된다. 도랑물이 군데군데 흐르고 편한 길이다. 세석 입구 이정표에서 거림골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고 세석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10여 분 오르면 세석산장에 도착한다.
교통과 숙박
화개에서 의신마을로 들어가는 버스가 10:30, 12:35, 14:30, 18:20 등 하루 네 차례 정도 있고, 의신마을에서 화개로 나오는 차는 07:30, 11:20, 14:30, 17:50분 경에 있으며 약 30여 분 소요된다(차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변동될 수도 있다).
의신마을과 대성동에서 민박이 가능하며 일반적으로 5,000~8,000원 정도 한다. 야영할 만한 곳으로는 대성교 주변과 큰세개골, 음양수샘 등에 군데군데 있고, 장마철만 피한다면 계곡가에서도 가능하다.
10. 남부 능선 코스
세석산장 (2㎞)→(0:40분) 1,050m갈림길 (3㎞)→(1:00분) 한벗샘 (5㎞)
←(1:00분) ←(1:20분)
→(1:20분) 삼신봉 (1.5㎞)→(0:40분) 송정굴 (3.5㎞)→(1:10분)
←(1:20분) ←(0:30분) ←(1:40분)
생불재삼거리 (2.5㎞)→(0:40분) 불일폭포휴게소 (3㎞)→(0:40분) 쌍계사
←(1:30분) ←(1:00분)
(0.5㎞)→(0:20분) 용강리
←(0:20분)
총거리 20㎞ 등정시간 7시간 40분
하산시간 6시간 30분
주능선 종주에 버금금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경능선
100여 리의 지리산 주능선이 동서로 길게 누워 있고 여기에서 다시 T자형을 이루며 세석 연신봉에서 남쪽으로 갈래를 뻗어내린 험준한 능선이 바로 남부 능선이다. 지리산 주능선 종주가 2차원직 선(線)이라 한다면 남부능선 등반은 가히 대지리의 3차원적 입체감마저도 느끼게 하는 지리산의 또다른 자랑이요 긍지라 말할 수 있다.
세석에서 삼신봉까지는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을 경계를 이루고 삼신봉에서는 다시 아쉬운 듯 청학동을 품에 안고서 좌우로 능선이 갈라져 내려간다. 등반기점을 어느 곳에서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4~20㎞가 보통이고, 100여 리가 넘는 장거리산행 코스도 잡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석에서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까지의 짧은 코스가 부담없이 등반할 수 있는 곳이고,삼신봉에서 생불재, 쌍계사로 빠지는 20㎞ 남짓한 코스 또한 남부릉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코스로 손꼽을 수 있다.
석문까지는 어렵지 않은 기암 능선길
갖가지 기암과 전망이 일품이고, 그리고 스릴과 아기자기한 산행의 묘미가 뒤따르기는 한데 역시 식수가 부족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닌 관계로 일기가 불순한 날에 초행자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7~8년 전 겨울에 석문 위쪽 능선에서 눈에 파묻혀 동사한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여기에서는 세석에서 쌍계사까지 20㎞ 코스를 소개하며 세석산장에서 하산하는 과정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세석산장에서 세석입구 이정표와 음양수샘을 지나 대성동계곡 코스와의 갈림길(1,400m) 이정표까지는 40여 분 남짓 소요되는 평탄한 내리막길이다(이 부분에 관한 자세한 것은 대성동계곡편을 참조바람). 갈림길 이정표에서 남쪽 능선길로 직진하면 진달래, 철쭉, 참나무가 우거진 길을 동쪽ㆍ서쪽 사면으로 왔다갔다 하며 가게 된다. 산죽도 눈에 많이 띄고 전망도 시원한 길인데 얼마 안 가서 석문(石門)에 이르게 된다. 높이 10여m, 폭 3~4m 정도의 운치와 위엄까지 갖춘 관통문이다. 대성골에서 불어 올라온 바람이 한기마저 느껴지는 석문을 지나 잠시 오르면 거림골이 훤히 열리면서 전망 좋은 바위 반석이 나온다.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경치도 멋지지만 뒤돌아보면 석문 너머로 백운대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바위군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잠시 오른쪽으로 휘어지던 길을 몇 번 오르내리면 산죽이 빽빽하게 우거진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기억(ㄱ)자형 비박지를 지난다. 바닥이 평편하여 야영한 흔적도 남아 있다. 산죽을 헤치며 계속 나가다보면 소나무, 잣나무도 몇 그루 보이는 잡목지대를 거쳐 드디어 평지 능선길이 나온다. 진달래와 싸리나무가 무성하고 오른쪽으로 뚫린 완만한 흙길인데 이제껏 고되게 오르내렸기 때문에 차라리 오솔길을 걷는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길 양쪽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패어 있는 것이[옛 참호 흔적(?)] 생생하다.
지리산을 보았노라!
잠시 후 헬기장이 나오고 길은 왼편으로 꺾이면서 내려가 한벗샘 이정표가 있는 능선안부(수곡재, 박단재로 불림)에 도착한다. 세석과 삼신봉의 중간지 점에 해당되는 이 일대는 '세석의 축소판'다운 남향의 완만한 초원ㆍ관목 지대가 펼쳐지는데 거림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자빠진 골'(혹은 '엎어진 뜰')이라 부른다. 한벗샘(달리 수곡샘, 박단샘이로도 부른다)은 이정표에서 거림골 쪽으로 200m쯤 내려간 곳에 위치하며 주위에는 옛 집터 흔적도 보이고 야영할 수 있는 평지도 있다(여기서 거림골로 내려가는 옛 길이 있다). 한벗샘은 남부능선에서 유일한 샘이기 때문에 여기서 생불재 아래까지 약 12㎞분의 충분한 식수를 준비해야 한다.
한벗샘 이정표에서 삼신봉까지는 허리께 차는 산죽숲이 아주 장관을 이룬 능선길이 이어진다. 여러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다소 힘에 벅차기도 한데 뒤돌아보면 일출봉 능선(중산릉) 너머로 천왕봉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고 있다.
동쪽사면의 참나무숲 터널을 지나서 다시 단천골이 내려다보이는 서편으로 넘어오면 외삼신봉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앞에는 암봉이 하나 버텨선다. 삼신봉(三神峰, 1.284m)이다. 매년 곡우절 청학동 사람들이 삼신제를 올리는 돌 제단이 갖춰져 있는 비교적 넓직한 정상에 올라와보면 전망이 장쾌하여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서쪽 멀리 왕시루봉에서 동쪽 써리봉까지 장대한 캐러반 행렬을 연상시키듯 대(大)지리의 맥이 살아 굼틀댄다. 180도로 의연한 기개를 뽐내듯 펼쳐진 지리연봉,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지리의 산자락뿐인데 어찌 지리산을 보았노라고 소리치고 싶지 않으리오. 지리연릉의 전망대, 삼신봉에서 남쪽을 발보면 백운산, 형제봉이 가늠되고 주변 야산이 잔물결 일렁이듯 펼쳐지며 그 너머로 남해의 바닷가의 섬들도 아스라이 보인다.
송정골과 아찔한 암봉들이 앞다투어 나타나
삼신봉 아래 산불감시초소 가건물에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곧바로 내려가는 길은 청학동으로 빠지는 길이고, 여기서는 오른쪽 능선을 따라 계속 등반하게 되는데 평탄한 오르막길 좌우로 가느다란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무성하다. 점차 기암 괴봉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다가 높이 10여m의 미륵바위가 보이고 얼마 후 거대한 바위 옆으로 오르면 길이 남쪽방향으로 꺾이다가 송정굴을 만난다. 등반로 오른편으로 10여m 옆에 위치하는데 페인트로 송정굴이라 씌여 있다. 길이 20m, 폭 10여m, 높이 1.5~2m의 비교적 넓직한 관통굴인데 북쪽으로 경사져 있다.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선생의 피난처였다고 전하며 비박, 야영지로 손색없는 굴이다.
송정굴에서 다시 나와 경사진 길을 조금 내려가면 아찔한 암봉들이 솟구쳐 있는 곳을 지난다. 처음 만나는 것이 높이 100m쯤 됨직한 신선대(神仙臺)이다. 여기가 내삼신봉(內三神峰)으로 불리는 곳이며 주변에 거대한 바위군들이 우뚝우뚝 서있어 마치 설악산의 어느 한 면을 보는 것 같다. 신선대 옆 경사 급한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얼마 안 가서 쇠통바위를 보게 된다.
높이 30~40m의 바위 위에 자물쇠가 얹혀 있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청학동 도인들은 학동마을에 있는 어가정(御軻亭) 위의 자물쇠 바위로 열어야(즉, 양 바위가 서로 만나야) 세계평화가 온다고 전설화되는 바위다. 지금까지 말한 이들 바위들과 또 조금 후에 나오는 독바위 등은 주변에 숱한 바위들이 산재하고 있고 별도의 안내판이 없으므로 그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 구별할 필요가 있다.
쓰러진 거목도 나뒹구는 경사 급한 서쪽사면을 내려오면 다시 잡목과 산죽 우거진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넓다란 공터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위쪽 작은 봉우리에 올라와보면 전망이 시원하여 신흥, 의신마을 등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곳 공터에서 산죽과 관목숲 지대의 경사진 흙비탈길을 쏜살같이 내려오면 생불재삼거
리 이정표가 나오고 길은 오른쪽 지능선으로 휘어진다. 다른 말로 성불재(成佛峙)라고도 하는 생불재(生佛峙)에서 청학동은 3㎞, 쌍계사는 6㎞이다.
불일폭포 포말음에 피곤과 갈증을 떨어내고
조금 가다 다시 오른쪽으로 경사 급한 돌밭길을 내려서면 불일폭포 상류의 계곡물과 만나는 곳인데 곳곳에 옛 집터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계류 왼편으로 건너서 흙비탈을 내려와 다시 계류를 건너면 새로 조림된 듯한 잣나무 단지 사이로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서나무, 노각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눈에 띄는 숲길을 청량감 있는 계류소리와 함께 편하게 걸으면 다시 옛 움막터, 숯굴 가마터 흔적이 간간이 눈에 띄고 작은 합수골을 지난다. 계류와 멀리 떨어진 산비탈을 가로지르며 얼마 후 오른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지류와 만나 산대숲 사이로 잡초가 무성한 옛 논밭터가 나온다.
불일폭포의 웅장한 포말음이 어렴풋하게 들려오고 눈길을 좌측으로 돌리면 옛 불일암터가 숲속으로 넓직하게 보이며 불일폭포로 가는 길과 만난다. 약 200여 미터 쯤 좌측 가파른 벼랑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높이 60m 지리산 최대의 불일폭포가 나온다. 2단폭포로서 비말로 흩어지며 쏟아져내린 물은 중간의 학연(鶴淵)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우렁찬 포말음을 토해내며 쏟아지는데 하늘마저 간신히 얼굴을 내밀 만치 사방을 빙 둘러친 원통형 수직 석벽 때문에 구슬처럼 알알이 튕기며 떨어지는 물줄기는 천지를 진동시킬 듯 요란하다. 깎아지른 절벽 곁에 고고하게서 있는 노송 어느 가지엔가 청학이 날아올 것만 같은 환상에 젖기도 한다.
불일폭포는 한편으로 볼 때 폭포 하단에 깊은 소가 발달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지난 1964년 당시 하동군수 한(韓)모씨가 엉뚱한 미의식을 발휘하여 치마폭처럼 여러 갈래로 층층이 흘러 내리던 물줄기를 단순화시킨다고 폭포 상단을 정으로 쪼았는데 하물며 그 공적을 기린다고 기념비까지 세웠던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다.
불일폭포에서 되돌아 나오면 불일폭포 휴게소가 있는 넓다란 공터가 나온다. 산죽지붕의 집 한 채가 있어 작설차와 불로주 등도 팔고 있는데 좌측에는 돌들을 겹겹이 쌓아
올린 소망탑이 눈길을 끈다. 앞뜰에는 갖가지 과실수가 심어져 있고 작은 연못도 갖춘 아늑한 평지다. 근처에서 야영은 가능하지만 민박은 할 수 없다. 이곳이 그 옛날 청학동이라 한동안 회자되던 곳인데 사방이 산자락에 감싸여 있고 비교적 넓은 공터인 점에서 수긍이 가기도 한다('지리산 청학동'편 참고 바람).
오솔길 따라 대사찰 쌍계사로 하산
불일폭포 휴게소에서 쌍계사까지는 2㎞, 지도상에는 나오지 않지만 작은 개울물이 쉼없이 졸졸졸 흐르는 그 옆을 따라 넓은 오솔길을 가게 된다. 도중에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노닐었다는 전설을 지닌 환학대(喚鶴臺)가 있지만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국사암 이정표에서 200m쯤 오른쪽으로 가면 진감선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큰 사천왕수(四天王樹)가 국사암에 자리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하체를 닮았다고 수군대근 특이한 나무이다.
쌍계사는 원래 신라 성덕왕 22년(서기 723년)에 대비, 삼법 등 세 스님이 당나라에서 남선종(南禪宗) 6대 조사(祖師) 혜능(慧能)의 머리뼈(頂相)을 가져다 모신 후 옥천사(玉泉寺)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그후 문성왕 2년(서기 896년) '옥천사'를 쌍계사(雙谿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쌍계란 절 앞에 두 개의 시내가 합쳐 흐른다는 지형적 특색에서 생긴 이름인데 지금도 쌍계사 들머리 입구에는 양쪽에 각각 '雙谿' '石門'이라는 각자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 글씨는 왕명(정강왕이 쌍계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함)을 기념하기 위해 최치원이 쓴 친필이라고 전한다.
삼법화상(三法和尙)이 당으로부터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봉안해 왔을 때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모시라는 꿈의 계시(康州智山下 雪裡葛花處)를 받았다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쌍계사 금당(金堂)자리라고 한다. 이곳은 아무리 눈이 와도 쌓이지 않고 곧 녹아버리는 신통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의미로 오늘의 '화개'(花開)라는 지명이 유래되기도 했다.
고운과 추사의 필체가 전해 내려와
쌍계사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처럼 전란을 맞아 폐허로 변해 지금의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 명부전, 적묵당 등 건물 대부분은 임진란 후 벽암(碧巖)대사에 의해 중수된 것들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뜰에는 최치원이 짓고 친필로 쓴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47호)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비를 세긴 사람은 환영(奐榮) 스님이라고. 이 비는 우리나라 현존의 몇 개 안되는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데 총 2,417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높이 약 2m의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임진란 때 왜병에 의해 파괴되어 금이 가 있고 또 6ㆍ25 동란 때 한 외국 군인이 총을 쏘아 상처를 입힌 흔적도 남아 있지만 그런 대로 온전하다. 1620년에 세워진 대웅전(보물 500호)을 비롯하여 각 부속건물이 아늑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웅전의 '世界-花祖宗六葉'이란 현판 글씨와 육조 정상탑이 있는 법당의 '六祖頂相塔'이란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다.
한편 쌍계사(옥천사 시절)는 진감선사 헤조에 의해 범패음곡의 원류를 이루고 신라에 범패음곡을 널리 보급시킨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혜조는 당나라에 가서 그곳의 신감(神鑑)에게 범패의 음곡과 창법을 배워와 12년 동안 옥천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고 한다. 경내의 팔영루(八泳樓)는 혜조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 음률로써 범패를 작곡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쌍계사에서 나오면 상가와 음식점, 민박집이 줄지어 서 있는 운수리 석문(石門)마을에 이르고 용강교 위로 화개천(花開川)을 건너오면 쌍계사 집단시설지구가 나와 직행버스, 완행버스가 연결된다.
교통과 숙박
쌍계사 집단시설지구에는 부산, 마산, 광주 등지로 연결되는 직행버스가 많고 구례행 완행버스가 역시 수시로 연결된다. 화개에서 갈아타면 더욱 편리하다. 민박집도 운수리와 용강리 쪽에 많고 불일폭포 휴게소에서는 민박은 되지 않고 야영만 가능하다. 청학동으로 해서 오르려면 하동에서 08:00, 10:20, 15:00에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완행버스가 있고 요금은 800원,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청학동 4㎞ 못 미쳐 묵계리까지 들어가는 버스도 08:00~19:00까지 6회 정도 있으므로 이것을 타고 조금 걸어 올라가도 무방하다. 청학동에 민박집이 여러 군데 있다. 남부능선 중간에서 야영할 만한 곳은 박단샘(수곡샘, 한벗샘) 부근밖에 없다.
11. 거림골 코스
세석산장 (0.5㎞)→(0:10) 세석입구 (3.5㎞)→(1:00) 1050m갈림길 (1㎞)
←(0:10) ←(1:30)
→(0:20) 휴게소 (1㎞)→(0:20) 850m갈림길 (2㎞)→(0:40) 거림마을
←(0:30) ←(0:30) ←(1:00)
총거리 8㎞ 등정시간 3시간 40분
하산시간 2시간 30분
기대와 설레임 속에 세석으로 꽃나들이 떠나는 길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거림부락에서 세석고원까지 8㎞의 짧은 계곡등반 코스이다. 대체로 길도 편하고 세석을 오르는 지름길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반면 계곡 자체가 특징적인 경관이나 빼어난 곳이 없어서 흠으로 지적되고 곡점-내대리-거림간 도로가 1차선 비포장길이라 교통이 불편한 문제가 따른다. 하루 네 차례 내대리(內大里)까지 들어오는 버스를 이용하여 내대리 버스 종점에서 내리면 3㎞정도를 걸어 올라야 한다.
한국판 셀파와 게으른 등반객
1차선 비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우측 청래골에서 내려온 물과 만나고 전형적인 농촌마을 판기부락을 지나게 된다. 왼편 거림천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고 대숲과 낙엽송떨기덤불숲이 길가에 나타나곤 한다. 계곡 건너 은암골을 바라보다 서쪽으로 꺾어 오르면 넓직한 주차장과 함께 아랫거림(巨林)마을이 나타난다. 도회지 기도객들이 지었다는 2층건물 천황사가 보이고 농가 주위에도 토종벌통이 많이 눈에 띈다. 여기서 100여 미터 올라가면 윗거림마을이고 민박집과 상점이 다수 있다.
해발 600여 미터 깊은 산골 마을인 거림부락은 20여 가구, 60~70명 정도의 주민이 토종벌을 치거나 각종 약초재배, 딸기 가지치기를 주업으로 하며 살고 있다. 한편으로 세석산장의 물품을 지어 올리는 일도 이곳 주민들의 중요한 부수입 거리가 되곤 한다. 보통 1kg당 350원 정도인데 아주머니들도 60kg 정도는 거뜬히 반나절에 배달하고 내려온다고 한다. 또한 세석에 철쭉이 필 즈음이나 여름 휴가철 일부 게으른(?) 등반객의 배낭을 대신 짊어져주고 수고료를 받기도 한다. 물론 일부의 경우지만 가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이름 그대로 거림(巨林)들로 가득 찼을 이 일대의 임상은 그러나 지금은 볼 품없이 변해 있다. 일제시대 때 곡정-내대리-거림간 산판도로를 뚫어 군수용이라 해서 숱한 아름드리 나무를 도벌ㆍ반출해갔기 때문이다. 그후에도 전란을 겪으면서 또 숯가마가 생기면서 일부 피해를 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무인지경의 비경을 간직한 도장굴
거림마을에서 길상암 쪽으로 들어가는 계곡을 도장골이라 부르며 아직도 이 계곡은 오염 안된 미지의 계곡으로 남아 있다. 촛대봉 남쪽사면으로 올라붙은 희미한 길과 계속 계곡을 따라 연하봉-일출봉 쪽으로 오르는 희미한 옛 길이 있지만 잡목이 우거지고 해서 초행자는 무리이다. 길상암에서 50여 미터 들어가면 좌측에 높이 10여 미터의 쌍폭포(일명 밀금폭포)가 나온다. 물이 많을 때는 두 줄기의 폭포수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여기에는 또한 넓다란 반석이 있어 200여 명을 거뜬히 수용할 수 있다. 무인지경의 비경을 간직한 도장골에는 옥류가 갖가지 소를 이루며 흐르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제1ㆍ제2 용소이다. 이들 용소는 크기도 크지만 넓고 깊어 아주 멋지고 또 오염 안된 자연 그대로의 정갈한 맛이 비할 데 없다. 그리고 7~8㎞ 쯤 들어가서는 20여 미터의 와폭인 와룡폭포가 때묻지 않은 상태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이상의 도장골 소개는 거림부락 혼순기(洪淳起, 38세)이장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도장골의 신비경이 빛볼 날을 기대해본다.
윗거림마을에서 공터에 올라오면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 앞을 지나 계곡(도장골에서 흘러온 물)을 건너면 거림골로 접어들게 되는데 약초를 가꾸던 밭터를 지나게 된다. 이제부터는 계곡 우측의 편한 길을 따라 오르기만 하면 된다. 따가운 햇볕을 차단하는 숲속 오솔길이고 경사도 밋밋한 편이다. 어느덧 허리께 차는 산죽밭을 지니다가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남부능선 중간의 한벗샘(일명 박단샘)으로 오르는 희미한 길이 계곡 건너편에 나 있는데 이 길과의 갈림길이다. 여기서 산죽숲을 따라 얼마 안 가 휴게소 이정표가 나온다. 계곡변에 휴식을 취하기 적당한 공간이 있다. 다소 울퉁불퉁한 돌밭길을 거슬러 오르면 이 코스의 중간지점인 해발 1,050m 갈림길에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촛대봉 방행에서 작은 계류가 흘러 내려온다. 과거에는 지금의 등반로가 아니라 이곳 갈림길에서 계곡을 따라 음양수샘 밑으로 등반로가 나 있었다. 지금은 물론 폐쇄되어 방치된 길이고, 가끔씩 약초꾼과 초막생활하는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릴 뿐이다.
1,050m 갈림길에서는 식수 준비를 잊지 않아야 한다. 이제껏 편하던 길은 여기서 끝나고 앞으로는 경사 급한 길이 한동안 전개된다. 촛대봉 방향의 작은 계류를 따라 잠시 오르면 방향이 북서쪽으로 꺾이면서 가파른 흙비탈이 나온다. 눈, 비 올 때면 어지간히 미끄럽고 질퍽거리는 길이다. 이곳을 올라서면 평편한 능선길이 전개되는데 남부능선이 좌측에 빤히 보이고 거림골 상류도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길이다. 경사가 한풀 꺾인 길을 얼마간 오르다보면 길가에 샘이 하나 눈에 띈다. 거림마을 주민들은 이 샘을 물이 차다 해서 소박하게 '찬물샘'으로 부른다고.
구상나무 울창한 길이 서쪽으로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세석 하단부를 거슬러 오르면 세석 중앙을 관통하여 흐르는 계류와 만나고 세석입구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10여분 오르면 세석산장이다.
약초와 산나물을 조심하라
이 거림골 코스는 위험요소가 없어서 사시사철 안심하고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세석의 철쭉이 필 무렵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곡점-거림간의 1차선도로가 차량으로 붐빌 때가 많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등반ㆍ야영할 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세석고원 주변에는 독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나물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사람들에게서 간혹 독초에 의한 식중독, 심지어 사망한 예가 생기곤 한다. 1970년 후반쯤 당시 서울 H대학에 재학중이던 학생 한 명이 세석산장(구 산장) 뒤켠에서 독초를 먹고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1967년 5월 21일경에는 모 야당 국회의원의 아들 설모군 등 진주 모대학 학생 3명이 누룽초를 약초로 잘못 알고 먹었다가 모두 비명에 숨져간 사건이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아버지의 당선을 산신에게 빌러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러 왔다가 참변을 겪게 되었다고 하는 데 비단 세석 뿐만 아니라 지리산 어디에도 독초는 많다. 섣부른 판단과 지식을 가지고 화를 입지 않도록 새삼 당부한다.
교통과 숙박
진주발 내대리행 직행버스가 07:05, 12:45, 15:55, 18:50에 있고 내대리에서 진주로 나가는 버스는 07:15, 08:45, 14:30, 17:45에 있다. 중산리행 버스가 곡점에서 정차하는데 이 버스를 이용하여 곡점에서 내대리까지 4㎞를 걸어도 무방하다.
민박은 거림마을에 약 150명 이상 수용 가능하고 내대리와 곡점에도 일부 있다. 야영할 수 있는 공간도 거림마을 주변에 많은 편이고, 계곡변에서도 야영할 만한 공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을 떠난 적이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 남부군(빨치산) 총사령관 李鉉相(1905~1953)이 남긴 한시 한 수다. 차길진 씨의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기린원, 1990)에서 인용. 전재함.
12. 한신주계곡 코스
백무동 (2㎞)→(1:00) 첫나들이폭포 (1㎞)→(0:30) 가내소폭포 (0.3㎞)
←(0:40) ←(0:20)
→(0:20) 오련폭포 (1㎞)→(0:30) 한신폭포 (5.7㎞)→(2:30) 세석산장
←(0:20) ←(0:20) ←(1:50)
총거리 10㎞ 등정시간 4시간 50분
하산시간 3시간 30분
폭포와 원시림이 어울어진 골짜기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험준하면서도 아름다운 계류가 인상 깊은 10㎞ 계곡 등반 코스이다(일명 백무동 코스라고도 한다).
과거에 각 산악회의 동계 빙벽 훈련장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여 근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등반로도 뚜렷하고 세석 북변의 경사 급한 오르막길을 제외하고는 그런 대로 완만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장마철은 물론 겨울철에도 북향의 깊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위험요소가 있다. 많은 적설량과 추위에 대비할 수 있는 방한장비를 꼭 갖추어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산불예방, 조난방지를 위하여 겨울철부터 이듬해 봄까지(대체로 11월 15일 경부터 이듬해 5월말까지) 입산을 통제하므로 이 점도 기억해야 한다.
토벌과 도벌의 묘한 뉘앙스
'깊고 넓다'는 의미인 한신계곡(寒新溪谷)은 일설에 의하면 6ㆍ25 당시 국군 토벌대장 한신(韓信) 장군이 이곳에 들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는 얘기도 있는데 신빙성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일반적으로 첫나들이폭포 위쪽부터를 한신계곡으로 지칭하고 그 아래쪽 계곡을 백무동계곡으로 부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백무동계곡은 다음과 같은 네 갈래의 큰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 칠선봉 부근 북쪽에서 발원하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흘러 내려오는 한신지(支)계곡, 세석 북변의 한신 주(主)계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바른재골, 곧은재골은 아직도 근 접하기 힘든 미지의 계곡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등반 기점인 백무동에서 매표소를 지나면 이정표가 처음 나타난다. 좌측길은 하동바위 코스이므로 곧바로 뚫린 넓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측에 야영장이 나타나고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첫나들이폭포까지 약 2㎞의 이 길은 1960년대초 벌채업자들이 도벌한 목재를 용이하게 운반하기 위해 닦아놓은 길이라고 한다. 폭 3m 정도로, 계곡과 다소 멀리 떨어진 울창한 숲속을 지나가게 되므로 시원하기 그지 없다. 길가에 샘도 있지만 지저분한 느낌이 들고 첫나들이폭포 못 미쳐 사태난 곳도 있다.
삼성흥업주식회사라는 벌채업소가 서울 영림서로부터 마천면 강청리, 삼정리, 추성리 일대 국유림내의 고사목, 풍도목(風倒木)에 한해서 벌채허가를 받은 것이 1963년 9월, 그후 남선목재와 서남흥업공사로 전매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1964년 4월 3일까지로 잡은 벌채목 반출기간과 허가지역이 늘어나고 또 급기야는 생목(生木) 아름드리 나무까지 마구 베어내 탈법적인 도벌로 변질하게 된다. 당시 소나무나 잡목 몇 그루 베어냈다는 이유 때문에 지역 주민들을 서슴없이 구속시키던 것과 너무나 판이한 대대적 도벌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만 하더라도 39명에 이르렀는데 해당 영림서, 군청, 면사무소, 경찰서, 지서의 공무원들과 심지어 청와대 비서까지 관련돼 있었다고 한다.
1959년 10월 국회에까지 비화되어 정치 문제화된 소위 '지리산 도벌사건'도 당시 권력 고위층의 삼촌이 바로 도벌주범이었듯이 이 사건도 해당 공직자는 물론 특권 위치에 있던 사람까지 야합한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의 주체인 서남흥업공업사는 과거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 출신의 지방유지들을 중심으로 하는 회사였다고. '토벌'과 '도벌' 묘한 뉘앙스다.
시원한 폭포수가 시퍼런 연못으로 곤두박질
울창한 잡목숲 터널을 빠져나올 쯤해서 점차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며 첫나들이폭포가 반긴다. 여기서 폭포 바로 위로 가로지르는 철다리를 건너게 된다. 위에서 첫나들이폭포를 내려다보면, 높이 20여미터의 시원한 폭포수가 시퍼런 연못으로 곤두박질치면서 피어올리는 환상적인 물안개가 아주 장관이다. 계곡 우측의 숲길로 난 길을 따라 다시 얼마 안 가 계곡과 접하게 되며 이후로 출렁다리를 좌우로 세 번 건너가게 된다. 짙푸른 수해에 감싸여 있는 주위의 경관 속에 넓직하고 매끄런 암반 위로 핥듯이 흐르는 계류가 빼어난 소와 폭포를 이루는 절경이 계속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가면 화장실 건물 한 채가 나오는데 여기가 합수지점이고 갈림길이다. 좌측길은 한신지계곡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면 가내소폭포가 나오고 한신주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가내소폭포 이정표는 한신지계곡 방향으로 50m쯤 올라간 곳에 서 있는데 그쪽에서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도 무방하다.
가내소폭포는 약 15㎞ 높이의 아름다운 폭포이다. 50평 남짓한 검푸른 소가 상당히 수심이 깊음을 단번에 알려 주는데 소 주변을 기암절벽이 감싸고 있어 아주 멋이 있다.
가내소폭포 좌측 흙비탈길을 올라가면 얼마 안 가 계곡과 만나 이곳을 건너게 된다. 계곡변 숲길을 따라가면 오층폭포 이정표가 나온다. 등반로에서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오면 다섯 개 정도의 대소 폭포가 연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련(五連)폭포라고 한다. 좌측으로는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우거진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한층 산수의 멋을 더한다. 오층폭포 이정표에서 산죽과 잡목터널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오면 계곡을 건너게 되고 여기서부터는 다소 벅찬 경사길을 올라야 한다. 물론 아름드리 참나무와 갖가지 활엽수들이 우거진 길이지만 비가 올 때면 질퍽거리고 미끄런 길이다. 지능선 고개마루턱에 올라서면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오면서 한신폭포 이정표가 서있다.
은밀한 곳에 한신폭포가
폭포는 이정표 있는 곳에서 80m 정도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으므로 얼핏 지나치기도 쉽다. 약 30여미터의 비스듬한 암반을 흘러 내린 물이 병주둥이 모양의 깊고 가느다란 연못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볼 만하다. 한신폭포는 지리산의 그 어느 폭포보다도 태고적 원시림이 하늘을 가린 계곡 깊숙히 숨어 있어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으므로 한번쯤 찾아보기를 권한다.
한신폭포 이정표에서 조금 가면 덩굴숲을 뚫고 지나야 하는데 좌측에 옛 산막터 흔적이 보이고 등반로는 계곡 옆을 지나게 된다. 이제부터의 계곡은 뚜렷한 특징이 없는 단조로운 느낌 일색이다. 등반로도 계곡 좌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완만한 오름길이 계속된다. 다만 울창한 원시림이 우거진 길이라서 시원하고 계곡과 가까워 식수 걱정은 없는 편이다. 한아름이 넘는 전나무도 간혹 보이고 야영장도 군데군데 찾아볼 수 있다. 약 1시간여쯤 이렇게 올라오면 옛 움막터가 있는 곳에서 작은 계곡을 건너게 된다. 여기가 촛대봉과 삼신봉 쪽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영신봉 방향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는 곳이다. 작은 계곡을 건너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영신봉 쪽 계류를 다시 건너면 경사가 심한 곳에 맞닥뜨린다.
노출된 나무뿌리와 모난 바윗길의 급경사를 오르게 된다. 어느덧 거대한 바위 앞을 돌아 조금 오르면 평편한 쉼터가 나온다. 우측으로 멀리 영신봉이 빤히 올려다보이고 폭포 비슷한 것이 있는 곳이다. 겨울철에는 빙벽으로 변하는 이곳에서 단단히 식수를 준비하고 약 2㎞ 남짓한 나머지 급경사 지대를 올라야 한다.
힘든 급경사 지대를 오르면 세석이 한눈에
태고의 정적이 감싸고 있는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오르노라면 멀리 백운산, 법화산 등 주변 야산과 백무 능선이 보이고 자주 짙은 운무가 끼기도 한다. 또한 겨울철에는 엄청난 적설량을 기록하면서 나뭇가지에 엉겨붙은 눈들로 인해 멋진 설경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큼직큼직한 야생동물의 발자국도 눈 위에 박혀있어 이곳 일대가 야생동물의 중요 서식지임을 추측케 한다.
갖가지 고사목이 쓰러져 뒹굴고 음침한 숲속에는 낙엽이 두툼하다. 서서히 휴식을 취하면서 드넓은 세석고원이 후련하게 펼쳐진다. 세석고원 중앙부에 올라온 것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200m쯤 철쭉 군락 지대를 내려오면 세석산장이 나온다.
교통과 숙박
전주에서 백무동행 직행버스가 5회, 남원에서 6회, 함양에서 1시간 간격으로 있다. 차라리 인월(引月)까지 일단 오면 두 방향에서 떠난 직행버스가 거쳐 가므로 기다리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백무동에 민박집이 다수 있고 야영장도 많은데 한신주계곡 안에는 계곡 상단부에 야영터가 얼마간 있지만 장마철에 위험함은 물론 최근에는 계곡의 오염 때문에 관리공단에서 야영과 취사지역을 정하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규제하고 있다.
13. 중산리 계곡 코스
장터목산장 (3㎞)→(1:00) 유암폭포 (0.5㎞)→(0:30) 홈바위 (2.5㎞)→
←(1:20) ←(0:40) ←
(0:40) 법천폭포 (1㎞)→(0:20) 칼바위 (2㎞)→(0:30) 법계교 (2㎞)→
(1:00) ←(0:30) ←(0:40) ←
(0:30) 중산리
(0:40)
총거리 11㎞ 등정시간 4시간 50분
하산시간 3시간 30분
명소가 줄 잇지만 투박한 지리산의 이색지대
중산리 집단시설지구에서 장터목까지 약11㎞의 투박한 계곡코스이며 일명 법정골, 칼바위골, 홍바위골 등으로 불리는 곳이다.
중산리 주차장에서 비포장 2차선 도로를 따라 한참 오르면 두류동에 도착한다. 상점과 민박집이 다수 있는데 약 20여 호 80여 명의 주민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두류동 매표소를 지나 순두류 자연학습원으로 난 도로를 따라 얼마 오르면 법계교가 나온다. 여기서 등반로는 좌측으로 가게 되고 여기 등반로 입구에 고(故) 허우천(許宇天)씨의 추모비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0살 되던 해에 홀연히 자취를 감춘 허우천 씨
'지리산 산신령'으로 널리 알려진 우천(宇天) 허만수(許萬洙) 님은 그의 나이 33살 때 지리산 세석고원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 보수하는가 하면 숱한 사람들을 안내하고, 구조하는 데 한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산이 좋아 처자식도 버리고 산에 들어와 홀로 살면서 산에서 여생을 마친 전형적인 산악인이었던 허씨가 설치한 나무계단 등이 제석봉-천왕봉 중간에 간혹 눈에 띈다(지금은 철사다리로 바뀌었지만). 수만 명을 헤아리는 많은 사람들을 안내, 구조한 허우천 씨는 1976년 6월 어느날 정든 세석의 철쭉꽃을 뒤로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의 나이 60살이 되던 해였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칠선계곡, 혹은 도장골, 또는 신선너덜에서 숨을 거두었으리라는 말만 무성할 뿐 지리산과 늘 벗하던 그의 최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6월 8일 진주산악회에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베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와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 하는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쯕빛으로 피어 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법계교에서는 천왕봉이 훤히 올려다보인다. 때로는 신비한 운무에 가려 있기도 하지만 겨울에 흰 설산의 웅자와 장엄한 기상의 그 뿌듯한 감동은 결코 잊지 못한다. 히말라야가 부럽지 않고, 곤륜산에 군침 흘리고 싶지 않으며 킬리만자로를 상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칼바위, 법천폭포, 홈바위, 유암폭포가 연이어져
법계교에서 소로길로 접어들면 다소 단조로운 느낌의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낙엽송 숲속에 공터도 보이고 계곡과 접하다가 잠시 오르막길이 나오면서 평지길이 펼쳐진다. 칼바위 이정표가 나오는 곳에서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 돌계단길은 법계사,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 계곡 쪽 길을 택해 올라야 한다. 칼바위는 이정표에 이르기 전(약 50m 전방) 좌측에 있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치솟은 모양이 칼날처럼 섬뜩한데 원래는 하나이던 것이 두 개로 쪼개져버렸다고 한다. 좌측 계곡변으로 가다보면 우측에서 흘러오는 지류와 만나고 여기 철다리를 건너면 경사 심한 비탈길을 올라서야 한다. 노송이 우거진 고대(高臺)에 들어서면 아찔한 절벽이고 계곡에 높이 15m 정도의 법천폭포가 보인다. 폭포 위쪽에 평편하고 넓직한 암반도 있고 수량도 풍부하여 물소리도 우렁차다. 법천폭포라는 명칭은 원래 법계사 쪽에서 흘러온 지류에 위치한다고 해서, 즉 법계사 쪽에 수원(水源)을 두었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었지만 실제로는 계곡 본류에 위치하므로 잘못된 명칭이다.
법천폭포 이정표부터는 울퉁불퉁한 길이 계속되며, 좌측 계곡의 경관은 거대한 바위들이 깔려 있고 그 사이로 계곡이 작은 폭포와 소를 이루며 흐르는 별 특징 없는 느낌을 받는다.
해발 1,100m 지접에 홈바위 이정표가 나온다. 길이 30m 정도의 넓직한 화강암 바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가 홈통처럼 깊이 패어 있어서 홈바위라고 부르는 듯하다. 쉬기에 적당한 홈바위부터는 마치 사태난 것처럼 거대한 바위들이 가득 깔린 곳이 나온다.
약 500m 이상 햇볕에 그대로 노출된 짜증스런 돌너덜길이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이 돌너덜은 천왕봉 남서쪽 사면의 암석들이 떨어져 나와 급류에 떠밀려 쌓인 것이다. 바위 곳곳에 페인트로 등반로 표시가 돼 있는데 중앙을 관통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매끈한 폭포수가 반겨준다. 크기는 10m도 채 안되는 아담한 이 폭포를 유암(油岩)폭포라고 한다. 명칭도 그렇지만 보기에도 기름칠한 듯 미끌미끌한 바위로 거침없이 물줄기가 내리쏟아진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유암폭포의 물을 보면 기름이 둥둥 뜨기도 한다고.
유암폭포에서 좌측 산비탈로 올라서면 울창한 수림 속이다. 우측 천왕봉 쪽을 바라보면 사태난 깊은 골짝기가 접근하기에도 섬뜩한 죽음의 계곡, 통신골이 보인다. 장터목 산희샘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류를 몇 번 건너서 경사 급한 길을 오르면 구상나무숲이 나타나고 야영장터가 곳곳에 눈에 띈다. 여기서 산희샘을 만나 능선으로 올라서면 장터목산장이다.
이 코스는 지리산의 여타 코스와는 달리 투박하고 지루한 느낌이 들어 대개 장터목에서 하산코스로 이용하면 괜찮을 듯하다. 겨울철에 큰 위험요소는 없어 보이고, 여름철에는 급류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천왕봉 암석 지대에서 그대로 흘러 내려온 물이 대피할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계곡변 야영에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면 계곡 상류 쪽 식수가 장터목에서 흘러 내려온 오염된 물 때문에 그리 위생적이지 않다. 지류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이용하도록 새삼 당부한다.
교통과 숙박
진주에서 중산리행 직행버스가 6:40~20:30분까지 약 40분 간격으로 있다. 약 1시간 30분 소요된다. 함양, 산청 방향에선 원지에서 내려 갈아타면 된다. 숙박은 중산리와 두류동에 다수의 민박집이 있으므로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보통 5,000원에서 8,000원 정도이다. 법계교 부근과 칼바위 부근에 야영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다.
頭流山 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桃花 뜬 맑은 물에 山影조차 잠겼서라
아희야 武陵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 曺 植 -
* 양단수란 중산리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과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삼정천이 각기 덕산(德山)에서 만난다 하여 이르는 말이다. 부근에 양당(兩塘)이란 마을이 있다.
지리산 / 김명수 지음 / 돌베개 / 2001.4.30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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