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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이 2차 도항 때 숙소로 사용했던 돗토리성 인근의 동선사.
오키섬에서 구전되는 바에 따르면 안용복은 그를 조사한 일본 관원에게 “왜 왜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오는 데 일본 당국으로부터 ‘도해(渡海)허가원’을 발급받고 있느냐”라고 따졌다고 한다.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라면, 일본 당국은 두 섬으로 가는 왜인들에게 ‘도해허가원’을 발부할 리 없다고 보고 이를 따진 것.
이에 대해 도고의 다이칸은 대답이 궁했는지 안용복을 돗토리 성주가 있는 본토의 요나코(米子)로 보냈다. 요나코는 17세기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 사업권을 받아내 동해를 건너다닌 오타니(大谷甚吉)와 무라카와(村川市兵衛) 선단이 있던 곳이다. 이들은 울릉도에서 전복을 비롯한 어패류와 향나무 등을 대량 채취해 막부에 진상하고, 일부는 일본 전국으로 유통시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요나코 앞바다를 흐르는 수로를 1km쯤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었다는 오타니 선단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4대에 걸쳐 울릉도 사업을 한 오타니가는 막대한 돈을 벌어 50여 칸짜리 대저택을 꾸렸다고 하니, 울릉도에 대한 이들의 약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요나코에서 안용복이 성주를 만난 과정은 명확치 않다. 일본 측 기록은 안용복이 오타니 저택에서 두 달간 체류하며 관원을 통해 성주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했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직전 성주로부터 초대받은 것으로 돼 있다. 그 사이에 에도(江戶)에 있는 막부는 ‘울릉도·독도 도해금지 결정문’을 보내왔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안용복이 어떤 논리를 펼쳤기에 성주가 막부에 도해 금지 결정문을 보내주도록 상신했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 측 기록물은 성주가 막부에 상신한 것과 막부의 국서(國書)가 내려온 것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3개월을 머물고 그해 6월 초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안용복은 일본의 표류민 송환원칙에 따라 나가사키와 대마도를 거쳐 돌아오게 되었다. 울릉도와 독도를 되찾아왔다는 안용복의 포부는 대마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농토가 부족한 대마도는 돗토리성과 별도로 울릉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 대마도의 도주(島主)는 안용복이 갖고 온 막부의 국서를 빼앗고, 그를 일본으로 무단 월경한 죄인으로 몰아 동래부 관아에 고발해버린 것이다. 동래부로 인도된 안용복은 조선 조정의 당파 싸움과 조선 조정에 대한 대마도주의 간계로 인해 2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2005 년 03 월 01 일 (474 호) 주간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