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시마네현 옆 돗토리(鳥取)현의 현립박물관이었다. 돗토리 현립박물관은 옛 성터 안에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이 성을 찾아와 성주를 만났다고 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돗토리현의 ‘안용복 사건’을 전하는 자료로 18세기 오카지마가 남긴 ‘죽도고(竹島考)’와 ‘인부연표(因府年表)’, 그리고 당시 성주의 가신이었던 와다 시키부가 쓴 ‘공장(控帳·일지)’ 등을 내밀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왜인들은 이곳까지 찾아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안용복을 ‘안핀샤’로 불렀으며, 안용복은 얼굴이 검고 고향은 ‘동래부 부산 좌천1리’였다.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안용복이 일본에 첫발을 디뎠던 시마네현의 오키섬.
당시 이 섬은 돗토리성 소속이었는데, 돗토리 현립박물관에는
안용복의 일본 방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안용복은 처음 왜인들에게 나포돼 일본에 갔다. 울릉도에 출어하는 왜인들을 제지하기 위해 일단의 청년을 이끌고 울릉도에 갔다가 동료인 박어둔과 함께 왜인들에게 붙잡혀 일본에 가게 된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죽도고’의 ‘오타니가(家) 선인(船人)에 의한 조선인 연행’이란 항목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안용복이 끌려온 곳은 돗토리성의 부속 섬인 오키(隱岐)섬이었다(지금 오키섬은 시마네현 소속이다).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년) 3월18일, 오키섬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큰 섬 도젠(島前)과 도고(島後) 중에서 도고에 상륙했다. 필자는 직접 도고섬을 찾아가 안용복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본 관원들에게 ‘도해허가권’ 발급 따져
시마네현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2시간여 만에 도착한 오키섬 부두에는 ‘다케시마! 돌아오라 섬과 바다여’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이 있었다. 오키섬에서 안용복은 제법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한 주민을 붙잡고 안용복에 대해 묻자, 그는 필자가 한국인임을 직감한 듯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향토관으로 가보라”고 했다. 향토관 한쪽에는 다케시마와 관련한 별도의 전시 코너가 있었고 그곳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일본 시마네현이 자국 민영방송을 통해
방영하기 시작한 독도 영유권 주장 광고
‘…소화 27년(1952년) 1월, 한국이 이승만 라인을 선언하여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한 이래 그 영유권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케시마 근해는 일본해(동해) 굴지의 좋은 어장으로 풍부한 수산자원이 있는데,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시대인 지금 다케시마는 더욱 중요한 섬이 되고 있다.’
향토관에도 안용복에 관한 자료가 보관돼 있었다. 오키섬 도고에 끌려온 안용복은 이 섬의 책임자인 다이칸(代官·도주)에게 인도됐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일본어에 능했다. 안용복이 살았던 동래 좌천동이 왜관(倭館)이 있었던 곳이라 이들과 접촉하며 일본어를 익힌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은 나포돼온 처지임에도 굴하지 않고 다이칸에게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2005 년 03 월 01 일 (474 호) 주간동아 김래주/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