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

2009. 2. 15. 19:57역사/독도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는 지장(智將)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거친 반역의 섬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간단한 계략으로 정복했다.

512년 그는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섬에 도착했다. 사자 조각을 해안쪽으로 세운 뒤 유황불을 피워 마치 사자의 입에서 화염이 내뿜어지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북과 나각으로 굉음을 쏟아냈다.

이어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섬에 풀어 모두 밟히고 물려죽게 하겠다"고 협박, 진짜로 항복을 받아냈다. 울릉도 남양포구에 서 있는 사자바위가 그 물증이란 전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우산국은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의 땅으로 자동상속됐지만 사실은 한민족 유민과 왜구( 倭寇)들이 뒤엉켜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반복하며 살았다.

조선 초 대마도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옮겨살게 해달라고 청원해 왔으나 태종이 거절했다는 기록을 보면 소유권은 엄연히 조선왕실에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왜구들에 의한 피해가 끊이지 않자 울릉도에서 조선 사람을 모두 철수시키는 공도(空島.섬을 비움)정책을 택했다. 소유권자가 방치한 가운데 울릉도는 여전히 조선의 유민과 왜구가 다투는 분쟁의 섬으로 남았다.

조선왕실이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한 것은 왕조 말기인 1882년. 울릉도 내 조선인 마을이 불타는 등 피해가 잇따르자 고종이 검찰사 이규원을 파견했다. 검찰사는 울릉도 내 일본인과 면담하면서 이들이 울릉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믿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대일본국 송도(松島)'라 적힌 표목(標木)이었다. 메이지(明治)2년(1869년)에 세워졌으니 무려 13년간 울릉도가 일본땅으로 둔갑했던 셈이다.

검찰사는 높이 2m, 폭 30㎝ 크기의 푯말을 찍어내 태운 뒤 남은 재를 바구니에 담아 돌과 함께 깊은 바다에 던져버렸다. 조선왕실의 항의로 다음해 일본인들은 모두 섬을 떠났다.

푸른 바다에 솟은 화산섬 울릉도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우리 땅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희귀 동.식물을 안고 살아가는 기암절벽의 비경은 여전하다.

환경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묶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키로 한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항의한다는 소식이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이사부 장군이 지하에서 웃는다.


중앙일보 2002년8월13일  오병상 대중문화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