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끝없는 도전 ② 히말라야에서 만개한 알파인 스타일

2011. 5. 22. 23:00山情無限/등산학교

  

알피니즘,끝없는 도전 ② 히말라야에서 만개한 알파인 스타일

 

 

 ◇ 1975년 히든피크 무산소 속공등정 후의 메스너와 하벨러. 메스너는 히든피크를 등정한 지 불과 6주 뒤에 낭가파르밧을 단독등정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 등반사에서 1975년 8월은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 두 사람에 의해 이룩된 히든피크(가셔브룸 1봉)8068m 무산소 속공등정이 그것이다.

 

히든피크 2인조 등정은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최초로 실현한 값진 등반으로 평가된다. 이 두 사람은 이제까지 있어왔던 전통적인 대규모 원정방식에서 벗어나 오직 두 사람만으로 2000m에 이르는 히든피크 서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면서 57시간만에 올라 세계 산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들은 알프스의 4000m급 산을 오르는 방식으로 8000m급 고봉을 사흘만에 오른다.  히말라야에서 알프스식 등반을 감행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산소용구, 고소포터, 중간캠프, 고정 자일을 쓰지 않고 냉혹한 기상조건과 싸우면서 모든 짐을 처음부터 짊어지고 정상까지 오른다는 것은 강인한 체력과 의지력이 필요하며 이런 방식의 등반은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몇 갑절 더 어렵다. 또한 이런 방식의 등반은 죽음과 맞서야하는 경우가 많아 등반성이 더욱 높게 평가된다.

 

                                                                                                                        가셔브룸1봉(히든피크)

히든피크 속공등정으로 새 시대를 열다

메스너와 하벨러가 히든피크에서 최초로 이룩한 이 획기적인 등반방식은 이후 히말라야 등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대규모 극지법 등반에서 점차 소규모 경량 등반으로 그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더 어려운 등로를 목표로 한 등반이 출현한다.

 

알파인 스타일 등반은 1977년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모든 등반지역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알래스카, 페루 안데스, 파타고니아, 힌두쿠시, 카라코룸, 네팔 히말라야 등지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적용시켜 많은 원정대가 성공을 거둔다.
메스너와 하벨러는 히든피크 등반에서 베이스캠프까지 불과 12명의 포터를 동원했다.

 

산소용구를 쓰지 않은 채 오를 때 두 번, 하산할 때 두 번의 비박을 하는 속공등반을 해낸다. 스너와 하벨러는 약 200㎏의 적은 장비를 가지고 파키스탄으로 출발했다. 두 사람의 소규모 원정대는 뛰어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등반을 진행해 나갔다. 소수의 짐꾼을 고용한 이 원정대가 스카르두에서 베이스캠프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2주가 채 안 된다.


두 사람은 모든 장비와 식량을 짊어지고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한 번에 오르기로 결정한다. 발토르 빙하와 아브루찌 빙하를 넘어 첫 등반을 시작함과 동시에 고도 순응기간도 함께 하기로 했다. 이들이 처음부터 목표로 한 루트는 히든피크 북서벽에 있는,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루트였다.

 

8월 8일에 1캠프를 설치했다. 다음날 아침 가셔브룸의 계곡을 지나 북서벽의 중간 지점인 해발 7100m에 소형텐트를 치고 이곳에서 첫 비박을 했다.  사흘째가 되는 날 하벨러와 메스너는 교대로 러셀1을 하면서 정상 주변까지 올라간 다음 정상으로 연결된 능선으로 진출해 계속 전진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등산을 시작한 지 사흘만에 정상에 오른다. 이들의 등정은 히든피크 제2등으로 기록된다. 이날 등정을 끝내고 최종 비박 지점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몹시 지쳐 있었다.

 

이날 밤부터 폭풍이 불어닥쳐 텐트가 망가졌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게 되자 예정보다 일찍 출발해 올라왔던 루트를 따라 하산하기 시작한다. 암벽 지대를 통과한 뒤 체력을 아끼기 위해 배낭을 버린 채 맨 몸으로 신속하게 하산했다.

 

이들이 처음 히든피크 알파인 방식의 등반계획을 발표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한 계획을 실천하려는 두 사람의 무모한 모험에 대해 혹평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이 성공을 거둔 후에는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로 오른 최초의 선구자적인 행동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의 히든피크 등정은 전통적인 원정 방식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혁신적인 스타일의 등반 후 인터뷰에서 메스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히든피크 성공 후 나는 히말라야에서도 알프스의 북벽과 같은 어려운 등반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8000m급 봉에서도 단독등반이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벨러와 나는 만약 알파인 스타일이 불가능하다면 원정 자체를 미련 없이 취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좋은 날씨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이번 히든피크의 성공은 히말라야 등반에 전체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두 명이 단 5000불의 자금만 있으면 8000m봉의 등반을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자금은 누구나 쉽게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든피크 등반을 계기로 이후 히말라야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 본격화된다.
1980년 다울라기리 북동벽, 1982년 시샤팡마 남서벽, 1984년의 브로드피크, 1986년의 에베레스트 등반 등이 알파인 스타일로 이룩한 대표적인 등반이라 할 수 있다. 1980년 폴란드의 보이테크 쿠르티카Voytek Kurtyka와 영국의 알렉스 매킨타이어Alex Macintyre가 다울라기리 동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올랐으며 1982년에는 영국의 더그 스코트와 알렉스 매킨타이어와 벡스터 존스가 시샤팡마 남서벽을 3일간의 비박 끝에 정상에 오른다.

                                                                                                                                                                                                                                                                                                                                   

 

시샤팡마

 

 

히말라야 등로주의의 발전

히말라야 빅월 클라이밍의 대표 주자로 불리는 쿠르티카의 다울라기리 동벽 초등을 살펴보자.


당시 그의 파트너는 영국의 매킨타이어, 프랑스의 레네길리니, 폴란드의 루드비크 빌친스키Ludwig Wilczinky 등 단 네 명뿐이었다.
쿠르티카와 매킨타이어는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의 우정을 지닌 파트너였기 때문에 매사 호흡이 잘 맞았다.
이들의 우정은 1982년 매킨타이어가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도중 낙석에 맞아 사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쿠르티카는 등산에서는 파트너십이 제일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등반에서 참된 즐거움은 루트 자체에도 있지만 멋진 파트너와의 조화에 있다.
내가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을 선호하는 것은 대규모 등반대에서는 마음에 맞는 파트너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보이테크 쿠르티카는 히든 피크와 가셔브롬 2봉 최초의 횡단등반(1983년), 브로드피크의 최초의 횡단등반(1984년) 등 무수한 등로주의 등반을 해냈다. 예술적인 등반 대상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등산가로 꼽힌다.

 

다울라기리는 북동릉과 남동릉이 좌우로 뻗어 내리고 있는 거대한 벽이다.
이곳을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들이 다울라기리에 도착했을 때는 스위스 원정대가 북동릉을 시도하고 있었다. 
 

 ◇ 8번의 도전 끝에 초등정됐을 정도로 험준하기로 유명한 다울라기리. 쿠르티카는 다울라기리를 알파인스타일로 등정해낸다.

 

쿠르티카 일행은 스위스 원정대의 양해를 얻어 7500m 지점까지 고소순응을 겸한 등반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하산할 때 필요할지도 모를 식량과 장비를 이 지점에 데포1시켜 놓았다.

 

1980년 5월 6일을 정상 등정의 날로 결정한 이들은 새벽 달빛 속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이 벽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록밴드가 가로막고 있었다.  좀더 쉬운 빙설벽을 찾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곳의 암질은 역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확실한 홀드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바위 위로 살얼음이 깔려 있어 마땅한 확보 지점도 찾을 수 없었다. 이들 일행이 첫 밤을 맞은 비박지는 아주 좁은 레지2였다. 눈보라가 밤새도록 휘몰아쳤고 물 한잔 녹여 마시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튿날 비박지를 출발해 전진했으나 경사가 급한 빙벽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이곳의 얼음은 겨울철 알프스의 얼음 이상으로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둘째 날 비박은 첫날보다 더 끔찍했다. 여유 있게 침낭 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비박색Bivouac Sack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강풍과 눈보라를 막아내야 했다.

 

이들은 동벽의 전 루트 중에서 오직 두 곳만 로프를 사용했다. 빨리 오르기 위해서 로프의 사용횟수를 줄인 것이다. 삼일 째 되는 날 동벽의 전구간을 끝낼 수 있었으나 악천후 때문에 캠프에서 여러 날을 기다린 후 북동릉을 따라 네 명 모두 정상에 섰다.

 

                                                                                                                                             브로드피크

 

1984년에는 폴란드의 크지슈토프 비엘리키Krzysztof Wielicki가 브로드피크를 하루만에 등정한다.

0시 20분에 베이스캠프4900m를 출발한 비엘리키는 오후 4시에 정상에 도달해 밤 10시 30분에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온다. 표고차 3150m를 단독으로 하루만에 돌파한다.

 

또한 1986년에는 스위스의 에라르 로레탕Erhard Loretan과 피에르 베겡이 롱북 빙하에 전진캠프5850m를 설치하고, 8월 29일 밤에 출발해 혼바인 꿀르와르Hornbein couloir로 등반한다. 그들은 설동을 파고 비박을 한 후 이틀만인 8월 30일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다.

 

                                                                                                                                      에베레스트

 

이들이 하산에 걸린 시간은 불과 5시간이었으며 전 구간을 글리세이딩3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무게를 줄여 신속한 등반을 하기 위해서 텐트, 로프, 안전벨트조차도 휴대하지 않은 상태로 가벼운 침낭과 최소한의 식량과 물만을 휴대한 채 정상 등정에 성공한다.

 

고산 등반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한 알파인스타일에 대해서 국제산악연맹U.I.A.A은 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①등반대원은 6명 이내로 할 것.

②등반용 로프는 팀당 1∼2동.

③고정로프를 사용하지 말 것과 다른 등반대가 이미 설치해놓은 루트 상의 고정로프도 사용하지 말 것.

④등반에 필요한 사전 정찰등반도 하지 말 것.

⑤포터나 기타 지원조의 도움을 받지 말 것.

⑥산소기구를 휴대하거나 사용하지 말 것.

 

고소에서 수많은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을 하면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온 쿠르티카는 등고 자체만을 목표로 한 전통적인 등반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8000m라는 높이만으로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다. 에베레스트를 노멀루트로 오르는 것은 육체적인 노력이 요구될 뿐 모험적인 요소와 기술적 곤란도에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 전통적인 등반방식으로는 더 이상 등반의 어려움을 논할 수 없다. 100명의 클라이머를 모아 마칼루 서벽 직등을 하자고 한다면 아마 모두가 성공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 그 루트를 열었다고 말하겠는가. 3000m의 고정로프를 따라 오르내리는 행위는 더 이상 등반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세계를 놀라게 한 메스너

1978년 6월 30일, 라인홀트 메스너는 20㎏의 배낭을 맨 채 작은 짐을 들고 뮌헨 공항을 빠져나와 파키스탄으로 출발했다.
3년 전 피터 하벨러와 단 둘이서 알파인 방식으로 히든피크에 갈 때 200여 ㎏의 짐을 지니고 출발하던 때와 비교하면 그 1/10에도 못 미치는 짐이었다.

 

이렇듯이 행장이 가벼워지면 목적지까지 트레킹 속도가 빨라지고 짐꾼의 수가 적어져 이들을 감독하는 수고도 아낄 수 있다.
메스너는 죽을지도 모르는 놀이에 운명을 건다고 생각하며 단독산행을 위해 낭가파르밧으로 향했다.

 

메스너가 단독산행을 결정한 것은 그가 1978년 5월 에베레스트에서 전대 미문의 무산소 등정을 끝내고 돌아온 지 6주밖에 안 된 때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 세상의 관심을 집중시켜 명성을 얻으려는 공명심에 들뜬 사람이라고 메스너를 비난했고, ‘쇼의 명연출자’ 라고 비꼬았다.

 

또한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 빨리 불태워 버리려한다고 선의의 충고를 했으며 산악인들은 질투와 악의에 찬 시선으로 메스너를 매도했다. 그러나 메스너는 이 모든 혹평과 질시 속에서 탈출해 상상을 넘어선 세계에 자신을 던져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는 특별한 일을 하면 어느 정도의 보상이 따르는지 알고 있었으며, 명성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8000m급 고산에서 알파인 스타일의 등산을 처음 실현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불과 3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이번에 발표한 8000m급 고산의 단독행 결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또 한번의 충격을 주었다.

 

단독산행이란 알파인 스타일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가 없으며 알파인 스타일은 자연스럽게 단독산행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메스너는 이미 3년 전에 히든피크에서 알파인 방식의 등반을 경험한 후였기 때문에 그와 낭가파르밧 단독행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낭가파르밧 단독등반에서 메스너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보조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의 기본장비만을 사용하여 디아미르 계곡의 오지에서 시작해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 정상에 오르고 하산 또한 새로운 루트를 경유해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단독행을 실현한다.

 

 

알피니즘,도전의 역사 - 이용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