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끝없는 도전 ③ 한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

2011. 5. 22. 23:02山情無限/등산학교

  

 

3개봉 연결등반과 가셔브룸4봉 등반

 

두 개의 8000m봉 횡단등반이 최초로 이루어졌던 1984년에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동구권의 새로운 별로 부상한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Jerzy Kukuzka와 거벽등반의 귀재 보이텍 쿠르티카Voytek Kurtyka 2인조 파티가 브로드피크 3개봉을 한 번에 등정해낸 것이다.

 

이들은 브로드피크를 서릉으로 올라 북봉7600m∼중앙봉8016m∼주봉8047m을 연결하는 8000m급 세 개봉 종주등반을 마무리했다.
1984년 여름, 쿠쿠츠카와 쿠르티카는 카라코람 브로드피크(일명 팔첸중가)에서 그들다운 색다른 스타일의 등반을 감행한다.

 

브로드피크

 

봉우리 하나하나가 등반 대상으로 손색이 없는 브로드피크 세 개봉 모두를 알파인스타일로 등반하는 것이다.

이들이 택한 북서릉 루트는 브로드피크 초등 후 27년만에 열리는 새로운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등반 스타일 때문에 계획 단계에서부터 충돌을 겪는다. 쿠르티카는 패배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인 반면 쿠쿠츠카는 치밀한 계획 따위는 탐탁찮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원하는 등반 루트도 달랐다.
쿠르티카는 북쪽에서부터 이 산을 가로지르려 했고, 쿠쿠츠카는 남쪽에서 시작해 3개 봉 모두를 연결하려고 했다. 결국 쿠르티카의 의견대로 루트를 잡게 된다.

 

브로드피크 3개봉 연결등반 4년 전부터 함께 줄을 묶어온 두 사람의 반목은 이미 뿌리 깊은 것이었다.
결국 쿠쿠츠카와 쿠르티카는 서로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이 원정을 마지막으로 결별하게 된다. 쿠쿠츠카가 8000m 14봉 완등 경주에 뛰어든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두 사람의 브로드피크 종주는 속전속결로 이루어진다. 3주 동안의 고소순응 등반에서 이들이 노멀루트를 통해서 7300m까지 올라간 일을 빼고는 사전 공작도 전혀 하지 않았다. 등반의 시작부터 주봉까지 총 4일 반이 걸렸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데 단 하루가 걸렸을 뿐이다.

 

7월 11일, 쿠쿠츠카와 쿠르티카는 베이스캠프를 떠나 암벽 아래에 도착했지만 온종일 불어대는 강풍 때문에 텐트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7월 13일 새벽 일찍 출발한 두 사람은 달빛 아래에서 등반을 했다. 암벽과 작은 암릉 그리고 설벽과 빙벽에서 떨어져 쌓인 거대한 얼음더미 사이를 뚫고 전진해 나갔다. 급경사를 이룬 암벽에는 빙벽에서 떨어진 눈과 얼음덩이들이 쌓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대한 빙탑이 위압감을 주는 빙벽의 급사면을 있는 힘을 다해 오르기 시작했다.
속도를 내기 위해 로프를 사용하지 않은 채였다. 이 산을 알파인스타일로 신속하게 돌파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들은 한동안 비박사이트를 찾지 못한 채 헤매다가 간신히 플랫폼처럼 생긴 비박장소를 찾아냈다.

 

다음 날인 7월 15일에 이들은 북봉을 올라 중앙봉과 북봉을 잇는 안부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비박장소를 찾았다.
비박지 전면으로 카라코룸 전체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계 제2위 고봉 K2의 웅장한 남벽과 거대한 발토로 빙하의 끝에 아름다운 초골리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으로는 가셔브룸 산군이 위용을 뽐내며 도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말루비팅·군양·취쉬·라카포쉬·쉬스파레 등 여러 연봉들이 들러리처럼 늘어선 채 솟아 있었다.

 

저 멀리 낭가파르밧의 고고한 자태가 봉우리들 사이로 신기루처럼 서 있었고,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오렌지빛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 웅장한 경관은 다음날 두 사람이 중앙봉에 도달한 16일 정오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이들은 7월 15일 북봉을 오르고 16일에 중앙봉을 올랐다. 두 사람이 암릉에 올라선 순간 눈보라 속에 휘말린다.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에 밀려 콜쪽으로 미끄러지듯 달려 내려갔다.

 

중앙봉에서 주봉 사이의 콜로 내려가는 루트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매우 위험했고 바람마저 심하게 불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75년 페렌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원정대의 중앙봉 초등자 5명이 하산 중에 눈보라의 기습을 받아 3명이 죽은 지점에 이르렀다. 
 

 ◇ 가셔브룸 4봉 서벽 최상단부를 등반 중인 유학재 등반대장. 가셔브룸 4봉 서벽은 1985년 쿠르티카가 초등한 지 12년 만에 한국산악회 원정대에 의해 재등된다.


쿠쿠츠카와 쿠르티카는 9년 전 이 지점에서 일어났던 조난자들의 잔류품을 발견했다.
쿠르티카는 카라비너가 걸린 하켄이 아직도 그대로 암벽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조금 아래쪽에는 눈 속에 박혀 있는 죽은 사람들의 피켈도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9년 전 비극의 주인공들이 남긴 잔류품을 바라보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길목을 서성거렸다. 바람소리가 마치 망령들의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다.

 

당시의 상황은 처참했다. 하산하던 폴란드 팀이 콜에 이른 순간 뒤에서 내려오던 한 대원이 동쪽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면서 자일이 끊어져버렸다. 다음 날 아침 나머지 대원 넷이 동료를 찾으려고 그 자리에 머물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더 큰 비극을 불러오고 만다. 고소의 극한 상황과 하룻밤을 더 싸우며 대원들의 체력과 인내심이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동이 틀 무렵이 되었음에도 눈보라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몰랐다. 결국 그들은 가지고 있던 자일을 이용해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력이 고갈된 한계 상황에서 하산해야 했던 그들은 하산 중에 두 명의 동료를 더 잃고 만다. 나머지 두 사람도 하산 중 추락을 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심한 동상만 입은 채 강한 의지력으로 버텨낸 것이다. 두 사람은 목이 터지도록 동료들을 찾아 해맸다. 그러나 동료들은 대답이 없었고 공허한 절규 소리만 바람에 휩쓸려 사라질 뿐이었다.

 

1975년 8월 1일 밤, 살아 남은 두 사람은 동료들의 도움으로 베이스캠프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베이스캠프는 비통에 잠겼다.
죽은 이들의 이름은 브로드피크의 한 바위에 묘비명으로 남겨졌다. 쿠르티카와 쿠쿠츠카가 발견한 것은 바로 그들의 유품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바람의 기세가 꺾이자 두 사람은 1982년에 처음 이 산에 올랐던 서릉루트를 통해 주봉으로 향한다. 짐을 줄이기 위해 비박용 장비를 콜에 남겨두었다. 쿠쿠츠카가 앞에 오르면서 한 바위 모서리에 이르러 뒤쳐진 쿠르티카를 기다렸다. 이 때 쿠르티카가 겁에 질린 눈빛으로 뒤쫓아 올라왔다. 쿠르티카가 쿠쿠츠카에게 와서 한 첫마디는 “하마터면 지옥에 갈 뻔했다”였다.

 

쿠르티카는 올라오면서 다른 팀이 설치한 고정로프를 이용했다. 그런데 로프에 그가 체중을 싣자마자 종이로 꼬아서 만든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져버렸다. 쿠르티카는 10여m를 굴러떨어졌지만 다행히도 설사면에서 제동이 걸려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노멀루트와 만나는 지점인 콜에서 네 번째 비박을 하고 다음 날 두 시간 반만에 브로드피크 정상에 섰다. 하산할 때는 초등루트에 남긴 발자국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던 중에 멀리 K2의 장대한 피라밋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두 사람과 마주친다. 그들은 히말라야의 노장이라 불리는 쿠르트 디엠베르거와 영국의 여성산악인 율리툴리스였다.

 

훗날(1986년) 이 두 사람에게 K2는 운명의 산이 된다. 율리툴리스는 영국 여성 최초의 K2 등정자라는 영광을 안고 눈보라 속에서 47세의 생애를 마감했고, 디엠베르거는 이 산에서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절단한다. 8400m의 비박지에서 구출된 디엠베르거는 율리의 남편에게 짤막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

 

“율리와 나는 산중의 산 K2를 올랐소. 난 이렇게 끝날 줄은 미처 몰랐소. 그녀를 빼앗아간 것은 정말 운명의 장난이었소.”
이렇듯이 8000m 고봉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무대가 되어가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히말라야 등반이 더 높은 난이도를 추구하는 거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3개의 고봉 종주등반이 이루어진 1984년, 히말라야의 한 거봉인 트랑고에서도 주목할만한 등반성과가 이룩된다.

 

노르웨이의 한스크리천 돈세트Hans Christian Donseth, 핀돌리Finn Doehli, 다그콜스루트Dag Kolsrud, 스테인 아세임Stein Ashein이 20여 일에 걸쳐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Great Trango Tower의 동봉 남서벽에 “노리턴No Return”이란 이름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 것이다. 이들은 힘든 등반을 끝내고 하강도중에 2명이 목숨을 잃고 만다.

 

 

등로주의 전형 보여준 빛나는 서벽

 

 '빛나는 벽’으로 불리는 가셔브룸4봉 서벽(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벽으로 평가됨)
 
한 해가 지난 1985년, 카라코람 히말라야에 있는 2500m의 한 거벽을 용감한 두 클라이머가 뚫고 올라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데 성공한다.
보이텍 쿠르티카와 로버트 샤우어Robert Schauer가 가셔브룸 4봉7925m의 서벽을 알파인스타일로 올라, 루트 초등을 이룩한다.

 

두 사람은 11일간의 비박을 견디며 2500m의 서벽 전체를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간다. 이 등반은 현대등반사에서 가장 과감한 등반으로 꼽힐 성과였으며, 등반사에 획기적인 기록으로 남을 최고의 거벽등반이었다. 그러나 당시 두 사람은 무명의 산악인이었다는 이유로 훌륭한 성과를 얻어냈음에도 매스컴으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서벽등반을 주도한 쿠르티카는 “8000m라는 높이만으로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다. 에베레스트의 노멀루트를 오르는 것은 육체적인 노력이 요구될 뿐 모험적인 요소와 기술적 요소에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 등반가들이 8000m를 고집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등반가치가 훌륭한 산인데도 높이가 낮다고 해서 등반을 기피하는 것은 히말라야 등반의 질을 낮출 뿐이다” 라고 역설한 것만 봐도 그의 등반 스타일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쿠르티카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가셔브룸 4봉의 서벽을 선택한다. 이 산은 8000m에서 불과 75m가 모자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벽이다. 그 동안 서벽은 첨예한 클라이머들로 하여금 외경의 마음을 갖게 하는 대상이었다. 영국·미국·일본 등의 많은 산악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왔으나,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1985년 6월, 두 사람이 서벽을 오르기 시작했으나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암질은 푸석푸석했고 하켄 하나 박을 틈도 없이 편편했다.
두 사람은 40∼80m 이상은 확보도 없는 상태로 등반을 했다. 설벽에는 깊은 눈이 쌓여 굴을 파듯이 전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등반을 계속해야 했다.

 

5일분의 식량만을 지니고 갔기 때문에 6일째의 밤이 되자 식량과 연료가 바닥나고 말았다. 비박색은 무서운 기세로 불어대는 허리케인에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이 나부꼈다. 이들은 편안하게 눕지도 못한 채 앉아서 이틀 밤을 지새워야 했다.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 속에 갇혀 있었다.

 

다음날은 날씨가 호전되었다. 극도로 지친 몸을 이끌고 살기 위해서 정상으로 필사의 탈출을 계속해 나갔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면서 러셀을 해나가는 쿠르티카의 걸음걸이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기아와 갈증으로 고통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단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며 죽길 원했다. 극도로 지쳐 있으면서도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주저앉기보다 사력을 다해 움직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죽음의 늪과 같은 서벽을 빠져 나와 평탄한 설릉에 도착했다. 서벽 등반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두 사람은 마지막 수십m를 남겨 놓고 정상을 포기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상까지의 행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정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4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북서릉을 따라 하산하면서 온갖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다.
그들은 그런 극한 고통을 견뎌내고 무사히 살아서 하산한다. 정상등정이 등반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서벽에서 체험한 극한등반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할 수 있었다. 이들의 등로주의를 구현한 서벽등반은 훗날 높게 평가되었다.

 

우리나라는 한국산악회 원정대(대장 조성대)가 1995년 첫 도전에 실패하고 뒤이어 재도전 한 끝에 1997년 7월 18일 유학재·방정호·김동관이 서벽 중앙립을 타고 정상에 이르는 ‘코리아 루트’를 초등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가셔브룸 4봉 서벽은 히말라야 거벽 중에서도 최난의 벽으로 손꼽히는 대상으로 1986년 폴란드의 유명 산악인 쿠르티카가 초등한 이래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난벽 중에 난벽이었기 때문에 국제산악계에서도 한국등반대의 성과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놀라워했다.

 

 

신기록 경연장이 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1990년 5월, 색다른 방법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시도되었다.

해수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상에 오르는 최고의 등고 기록이 나왔다.

8850m의 등고 모두를 오른 최초의 사람은 호주의 매카트니 스네이프(Macartney Snape·34세)다. 그는 1990년 2월 인도의 항구도시 캘커타 해변(0m)을 출발, 장장 700㎞에 이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까지 걸어간 후 등반을 시작하여 1990년 5월 11일에 무산소로 정상에 올랐다.


또한 이보다 더 긴 여정을 거쳐 등정에 성공한 기록도 나왔다.

1995년 2월, 스웨덴의 골란 클롭은 스톡홀름에서 자전거로 출발, 유럽대륙을 횡단한 다음 터키∼이란∼파키스탄∼인도를 거쳐 이듬해인 1996년 2월, 장장 12500㎞를 달려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까지 혼자서 장비와 식량을 옮긴 뒤 등반을 개시하여 5월말에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등반을 끝내고 자전거를 이용하여 오던 길을 역으로 달려 9월말 경에 스톡홀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등정 기록은 네팔 당국이 허가해 준 루트를 벗어났다고 해서 네팔 정부는 공식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에베레스트의 해발 높이는 8850m(현재 공인된 높이)로 이는 해수면에서부터 측량한 높이지만 이 산을 오를 때는 이 높이 모두를 등반하지 않고 베이스캠프가 되는 5400m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실제 등고 거리는 이에 못 미친다. 매카트니와 골란의 등반은 8850m를 모두 오르기 위해서 해수면 높이부터 시작해야 에베레스트의 높이 모두를 오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다.

 

1999년에는 죽음의 지대로 불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산소기구 없이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최장 체류 기록도 나왔다. 네팔 셰르파 바부치리(Babuchiri·35세)는 1999년 5월 6일 오전 10시 55분에 동생 2명과 함께 정상에 도착하여 텐트를 치고 21시간을 체류한 뒤 다음날 오전 8시에 하산해 최장 시간 동안 정상에 머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01년 4월, 11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하던 중 제2캠프에서 사진을 촬영하다 크레바스에 추락하여 사망한다. 바부치리의 정상 체류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며 아직까지 경신되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에베레스트 등정에 속도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최단 시간 등정 기록은 2003년 5월 26일, 10시간 56분 46초를 기록한 네팔의 셰르파 락파 겔루(Lhakpa Gelu)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네팔산악협회(N·M·A)가 주관한 스피드 클라이밍 원정에서 이룩한 기록으로 이때 그는 산소를 사용했다. 그의 등정 횟수는 통산 10회에 이르고 있다.

 

락파 겔루의 기록은 3일전인 2003년 5월 23일 셰르파 펨바 도르제(Pemba Dorjie)가 이룩한 12시간 45분의 기록을 2시간 이상 단축한 것이다.
20시간대로 등정 속도를 단축시킨 최초의 인물은 프랑스의 마르크 파타르(Marc Batard·37세)다. 1988년 9월 26일 단독등반으로 정상에 오른 마르크 파타르의 기록은 22시간 30분이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998년 10월 17일 네팔의 셰르파 가지(Kaji)가 이룩한 기록은 20시간 24분으로 파타르의 기록을 2시간 경신했고, 22년 뒤엔 2000년 5월 21일에는 셰르파 바부치리가 16시간 56분만에 무산소로 정상에 올라 가지의 기록을 경신한다.

 

2003년은 에베레스트가 초등된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1659명이 이 산의 정상을 올랐으며 이들 중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사람은 110명뿐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정상에 오른 사람은 등반대 일로 생계 수단을 삼는 셰르파들이다.

 

아파(Appa) 셰르파는 1990년 5월 첫 등정 이후 2002년까지 12회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개인 최다 등정기록을 세웠다. 그 다음은 앙리타(Angrita) 셰르파다. 그는 1983년 5월 무산소로 첫 등정에 성공한 이후 1996년까지 10차례나 무산소로 등정했으며, 1988년에는 동계무산소 등정을 성공시킨다.

 

2002년 5월 17일, 일본의 토미야수 이시카와는 65세 176일의 나이로 등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고령 남성 등반자가 된다.
같은 해 5월 16일에 이시카와보다 하루 앞서 등정한 와타나베 다마에로가 63세 176일의 나이로 정상에 올라 여성 최고령 등정자가 된다.
이렇듯이 21세기에는 고봉에서의 등반 행위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기록들이 속출하고 있다.

 

자유등반의 세계에서는 5.9 등급을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한계등급으로 여겨왔으나 기술체계의 향상으로 현재는 5.15b급의 세계까지 열렸다. 등산장비의 발달은 산의 고도를 낮추었고, 많은 정보가 축적되면서 등반 양상이 빠르게 진전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 고봉과 대암벽에서 인간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알피니즘,도전의 역사 - 이용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