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끝없는 도전 ① 머메리에서 메스너로 이어진 등반정신

2011. 5. 22. 22:50山情無限/등산학교

 

 



‘베리에이션 루트’를 주창한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는(absolutely inaccessible by fair means)’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후 이 정신은 1953년 낭가파르밧을 등정한 헤르만 불에게 이어졌으며, 라인홀트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낭가파르밧 단독 등정으로 이어졌다. 이 정신은 머메리즘으로 승화됐으며 현대 알피니즘을 대표하는 사조로 발전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는 말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격언이요 금언이다.
중학생 정도라면 이 정도의 격언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나도는 격언들은 누가 언제 지어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뜻이 퇴색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등반사에도 이런 말 한마디로 세계 등반사를 크게 바꿔 놓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다. 그는 ‘의지가 있는 곳에 루트가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마터호른의 즈무트 리지 초등에 이어 그랑 샤모(Grands Charmoz), 당 뒤 루퀸(Dent du Requin), 그레뽕(Grepon) 등의 침봉과 에귀 베르뜨(Aiguille Verte)의 꿀르와르, 에귀 드 플랑(Aiguille du Plan) 북벽 등을 등정했다.

 

 

마터호른(Matterhorn)

 

그랑 샤모(Grands Charmoz)

 

당 뒤 루퀸(Dent du Requin)

 

그레뽕(Grepon)

 

에귀 베르뜨(Aiguille Verte)

 

에귀 드 플랑(Aiguille du Plan) 


머메리가 활약한 1880년대 알프스는 전역에 걸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봉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그는 이전 선배들이 즐겨찾던 능선길을 버리고 위험이 도사린 험난한 벽에 길을 뚫고 올랐다. 그는 ‘더 험난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를 개척하며 정상을 올랐고, 등로주의를 제창하며 그의 이념을 실천해 나갔다. 머메리의 이런 주장은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걸어 오르는 등정주의와 구별하여 등로주의라 불렸다.

 

그러나 머메리의 등로주의는 당시 등반 전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등반계로부터 이단시됐으며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초등할 봉우리가 없어지자 자연히 등반가들의 눈은 험난한 침봉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등로주의는 그의 이름을 따라 ‘머메리즘(Mummerism)’으로 굳어졌고 현대 알피니즘의 대표적인 사조가 되어 오늘날 현대 알피니즘의 주류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머메리가 주창한 베리에이션 루트란 일반적으로 벽등반 루트를 따라 오르는 것이다. 그는 리지와 벽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등반 루트를 찾았으며, 그 과정 속에서 고난과 위험을 이겨내는 것이 알피니즘의 정수라고 생각했다.

 

등산의 역사는 1786년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07m)을 오르면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1786년부터 8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유럽의 4000m급 고봉들이 거의 등정되자 그 이전에는 관심이 없었던 무명봉과 침봉, 거벽 등이 새로운 등반 대상지로 부상했다.  

 

                                                                                                                              몽블랑(Montblanc)

 

머메리가 이런 등반 세계에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본 마터호른에 대한 깊은 감명 때문이었으며, 또 그에겐 그러한 벽의 길을 뚫고 나가려는 굳은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피니즘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는 결코 한 군데 머물러 있지 않았다. 머메리는 가이드 알렉산더 부르게너와 함께 빛나는 등반을 시작했으며, 훗날 가이드를 대동하지 않고 등반하기도 했다. 또 그는 몇몇 파트너와 함께 알프스 그레뽕을 종주한 뒤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밧(8125m)으로 등반을 떠났다. 

 

하지만 머메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유럽 알프스에서 이른바 ‘철의 시대’가 열리던 1882년의 이야기다.


당 뒤 제앙(Dent du Geant)을 오른 알렉산드로 셀라(Alessandro Sella) 형제와 마키니아 형제는 자신들이 초등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상 부근에서 ‘absolutely inaccessible by fair means(정당한 방법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는)’이라고 적혀있는 종이조각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들보다 2년 앞서 당 뒤 제앙을 등정했던 머메리가 남긴 쪽지였다.

 

                                                                  당 뒤 제앙(Dent du Geant)

 

이 봉우리를 등정한 이 팀은 나무쐐기와 로프, 사다리 등을 이용해 등반에 성공했다. 이것은 인공 보조수단을 등반에 활용한 첫 케이스였다. 그러나 머메리는 처음부터 그러한 보조수단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정신과 ‘by fair means’라는 글귀는 이후 머메리즘으로 승화됐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정리한 낭가파르밧 원정사를 살펴보면 그 첫머리에 1895년 영국원정대의 등반활동이 나온다.
이 기록엔 머메리가 디아미르샤르테(6200m)를 넘으려다 6100m 지점에서 실종됐다고 적고 있다. 메스너는 이 원정사를 통해 1932년 독·미합동대의 활동과 그 뒤 계속된 원정대들의 희생을 열거하고 있다.

 

등산가로서 머메리의 업적은 낭가파르밧의 접근이 남보다 한 시대 앞섰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의 등반 정신의 발로인 ‘머메리즘’은 벽 등반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디렉티시마’라는 직등 형식을 낳았고, 현대 등산의 무대를 알프스에서 일약 히말라야로 이행시키는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데 있다.

 

등산의 역사는 짧다. 등산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 비해 턱없이 짧지만 그 전개과정을 일일이 기록한다면 현대사에 못잖은 사건과 등장 인물이 등장한다. 또한 그 광범위한 무대와 시간들을 일일이 추적하기도 어렵다.

 

아놀드 런의 <등산 백년사>는 최초로 기술된 세계 등반사지만 여기에 기록된 등산의 역사는 1857년에서 1957년까지 100년의 한시성을 가졌을 뿐이다. 이 책에는 알프스 등산 황금기의 기록이 빠져있다. 이는 아놀드 런이 <등산 백년사>의 기점을 영국산악회(The Alpine Club)의 창립 시기인 1857년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요한 히말라야 8000m급 14봉에 대한 도전 기록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등산 백년사>에 머메리를 위해 한 장을 할애하고 있으니, 그가 세계 등산사에 있어 독특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등산 역사에는 시대가 새로운 사조를 낳고 그 사조가 행동과 형식의 혁신을 요구하면서 그때그때 큰 흐름을 바꾸어 나갔다.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소쉬르가 몽블랑 등정자에 대해 현상금을 내건 결과 1786년 몽블랑이 초등된 이후, 에드워드 윔퍼가 마터호른을 초등함으로써 알프스 황금기의 막을 내렸다.

 

이후 20세기의 히말라야 시대를 준비하고 예고한 머메리와 그 뒤를 이은 영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산악인들의 에베레스트와 낭가파르밧에 대한 도전과 희생의 자취는 세계 등산사에 빼놓을 수 없는 뼈아픈 사건들로 기록되고 있다.

 

낭가파르밧( Nanga Parbat) 

 

특히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과 그 뒤에 이어진 낭가파르밧의 단독 등정은 히말라야 원정의 내용과 형식을 크게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이 등반은 8000m급 고봉의 연속 등반과 단독 등정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놀라운 일을 해낸 메스너의 등반정신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메스너의 낭가파르밧 단독 등정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by fair means란 무슨 뜻인가요?” 장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테리가 이렇게 물었다. “by fair means란 기본적인 기술 이외에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등반하는 것을 말하죠.” 메스너는 독일어로 낭가파르밧 등반기를 쓰면서 이 부분만은 영어로 표기했으며 이 말을 자신이 낭가파르밧을 단독 등반한 기본 정신으로 내세웠다.

 

한편 메스너보다 25년 앞서 1953년 낭가파르밧을 초등한 헤르만 불의 <8000미터 위와 아래>에선 더욱더 구체적으로 ‘by fair mean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는 근대적 기술에 의한 보조적 수단을 쓰지 않고 당신의 말을 따라 by fair means, 즉 순수한 수단으로, 자기 힘으로 낭가파르밧을 올랐습니다.” 이 글 속에 등장하는 ‘당신’은 다름 아닌 머메리를 가리키며, 헤르만 불은 자기의 등정을 1895년 낭가파르밧에 처음 도전한 머메리에게 이렇게 보고한 것이다.

 

이처럼 헤르만 불과 라인홀트 메스너는 낭가파르밧을 오르면서 머메리의 등반과 정신을 이어받고 실천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by fair means’ 즉 ‘정당한 방법’이야말로 머메리의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머메리가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나 헤르만 불이, 그리고 다시 25년 뒤엔 라인홀트 메스너가 그의 정신과 행동을 따라 오른 ‘산중의 왕’ 낭가파르밧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위대한 등반가들의 정신을 보았다.

                                                                                              

 


알피니즘,도전의 역사 - 이용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