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5. 22:41ㆍ山情無限/山
비박, 자연의 오묘함을 터득하는 기회
이 용 대
요즘 한데서 잠을 자는 비박산행이 성행하고 있다. 또 비박만을 하는 인터넷 동호회라는 별난 모임까지 생겼다고 한다. 비박이란 한데서 밤을 지내는 노숙(露宿)을 말한다. 산속에서 한데 잠을 경험한 산악인이라면 비박이 등산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구구한 설명을 안 해도 대강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숙소가 없는 사람들이 지하철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내는 것을 노숙한다고 하고 이런 사람들을 노숙자라고 하지만 등산세계에서의 노숙은 그 목적부터가 사뭇 다르다.
마땅한 주거지가 없는 노숙자들은 생활의 방편으로 노숙을 하지만 산악인들은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살아 남기위한 최선책으로, 또는 등반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박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산에서의 노숙은 산행 중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불시노영(不時露營)도 있지만 천막무게를 줄여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한다거나. 훈련을 목적으로 의도적인 비박을 하기도 한다. 최근 비박은 백두대간을 단독 종주하는 사람들이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북쪽의 향로봉까지 남북 690Km를 종단하는 단독종주 자에게 텐트의 무게는 만만치 않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중량은 적이다. 1kg의 중량을 줄이면 10km를 더 갈 수 있다”라는 등산의 금언은 체험자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다. 전 국민적 관심과 열기 속에서 행해지는 백두대간종주는 지금 국내 산악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참여해서 영문판 종주기를 펴내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백두대간은 한국판 애팔래치아 트레일 이라 부를 만치 유명해졌다.
비박(Biwak)은 독일어다. 군대가 야영을 할 때 경계병이 밤을 지새우며 망을 본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영어권에서는 비브액(bivouac). 불어권에서는 비브아끄(bivouac)라고 하며‘ 어원은 불어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말의 ‘한둔’ ‘한뎃잠’이라는 말이 비박에 해당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의 어원은 잘 모르겠지만 산간지역에서 생계의 수단으로 약초를 채취하는 심마니들 사이에서 쓰인듯하다.
등산학교의 교과과정에는 비박 실기 과목이 있다. 비상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비박기술을 경험시키는 교육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아 비박을 하는 불시노영과는 달리 교육을 위한 의도적인 비박이다 보니 긴장감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에 들뜨게 마련이다. 강사 몰래 준비해온 술을 마시는 주박(酒泊)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어느 해 가을 비박교육현장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 긴 꼬리를 단 유성이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의 둔탁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깬다. 전망이 일품인 족도리봉 비박 사이트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시내의 야경은 갖가지 보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휘황찬란했다. 한 수강생이 잠을 못 이룬 채 뒤척이다가 침낭에서 빠져나오며 “선생님! 50평생에 처음 체험해 보는 죽여주는 밤입니다.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지 못했으니 그동안 인생을 헛산 것 같습니다.”라고 감동 어린 말을 건네 왔다. 그는 열심히 자기사업을 일구어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룬 기업가다. 졸업 후 그는 산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국내의 산은 물론 알프스와 히말라야 등지를 제 집처럼 드나들고 있다. 몇 년 전 그는 샤모니에서 엽서를 보내왔다. 발레 블랑쉬 설원의 별빛아래서 야영을 하면서 북한산에서 첫 비박을 하던 때의 감동을 서정적인 내용의 글로 전해왔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비박을 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샐 때였으며, 반짝이는 별들을 구경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였습니다. 밤하늘은 어느 위도 어느 경도에서 봐도 아름답지만 산위에서 볼 때가 제일 아름답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필자가 경험한 첫 비박은 감동적이기 보다는 태풍 속에 갇혀 날밤을 보낸 기억이 전부다. 그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직도 선명한 잔영으로 남아 있다. 한창 혈기 방장하던 30대 중반 때의 이야기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암벽뿐이던 시절이다. 당시 산의 자유를 찾아나서는 데는 직장이라는 사회적인 제약이 발목을 잡던 시절이었다. 주 1회로 제한된 암벽등반에 대한 갈증은 항시 아쉬움만 남겼다. 어느 해 여름 8월 중순의 더위가 절정에 이른 때였다. 광복절 연휴에 하기휴가를 덤으로 보태 동료 네 명과 외설악 천화대에 붙었다. 중간쯤에서 날이 저물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비박에 들어갔다. 출발 전날 태풍이 북상할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청취했지만 묵살해 버렸다. 하늘엔 주먹만 한 별이 총총했지만 자정 무렵부터 시속 40km로 북상하는 태풍의 진로에 노출된 채 공포의 중압감 속에서 밤을 보냈다.
낭만적인 비박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올랐던 천화대는 태풍 속에 휘말리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온 밤을 판쵸로 몸을 감싸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세찬 바람과 싸워야했다. 다행이 새벽녘에 바람이 자기 시작했고,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나의 첫 비박은 이렇게 끝났다. 대자연의 순리를 어긴 대가는 이처럼 혹독했다. 객기에 가득 찬 젊은 날의 허장성세가 빚은 나의 첫 비박은 이렇게 끝났다.
당시 비박용구는 카시미론 인조 솜으로 누빈 침낭과 군용 판쵸가 방풍용으로 쓰이던 때였다. 지금처럼 가볍고 성능이 뛰어난 고어텍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고통스러웠던 첫 비박의 체험은 산악인으로서 겪어야할 일종의 성장통이었다. 그날 천화대에서의 뜬눈으로 지새운 하룻밤은 비박(Biwak)이 아닌 비박(非泊)이었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극적인 비박을 감행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등반가 헤르만 불이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 단독초등을 이룩하고 하산하는 과정에서 날이 어두워지자 헤르만 불은 하산을 멈추고 비박을 한다. 험준한 벼랑 가운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쉴만한 공간이 없는 곳에서 동이 트기만을 기다리며 한 손은 바위 한 손은 스틱을 잡고 꼿꼿이 선 자세로 비박에 들어간다. 추락을 막을 확보용 줄도 추위를 막을 비박색도 없다. 영하 20도의 추위와 산소결핍증에 시달리며 졸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확인하고 스스로 놀란다. 그는 지옥 같은 비박을 끝내고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왔다. 살아 돌아온 직후 찍은 그의 사진은 29살 청년의 모습이 아니라 70세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하루 밤 동안에 평생을 모두 살아 버린 채 살아서 내려온 것이다. 고통스런 비박이 그를 70세 노인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폴란드의 유명 등산가 토모 체센(Tomo Cezen)은 극적인 비박을 여러 차례 결행한 강인한 사람이다. 그는 “누워서 자는 것이 비박이 아니다. 원하는 시각을 그냥 기다리는 것이 비박이다”라고 말했다. 등산의 세계에서 비박을 최상의 경험으로 평가했던 프랑스 등반가 가스통 레뷔파는 그의 저서 <별빛과 폭풍설> 서문에서 비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비박을 하는 사람은 산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ㅡ중략ㅡ 좋은 날씨에만 등반을 하고 한 번도 비박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산의 아름다움은 감상할 수 있을지 모르나 산의 신비와 밤의 어둠, 그리고 위로 바라다 보이는 하늘의 무한한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비박은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지혜를 배우고,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터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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