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6. 22:49ㆍ山情無限/山
8000미터 위와 아래
낭가 파르바트 최초 등정기
헤르만 불 / 김영도 옮김
『8000미터 위와 아래』가 고급 양장(洋裝)의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국내에서 완역본이 발간 된지 13년만의 일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나는 헤르만 불의 8000m 위와 아래는 사람이 산에 오르는 한 계속 읽어야할 책이라 생각 한다.
이 책은 그저 서양의 헤르만 불이라는 한 산악인이 56년 전에 낭가파르바트를 오른 등정기라고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산에다 생애를 바친 한 산악인이 고산을 중심으로 눈부신 삶을 살아온 불꽃같은 흔적이 담겨진 기록이기 때문에 그렇다. 아직도 이 책은 반세기의 시공을 뛰어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잠시 빤짝했다 사라지는 베스트셀러 소설류와는 그 깊이가 다르다. 이 책은 그저 50년이 지난 시대적 유물이 아닌 불멸의 문화적 유산이다.
낭가파르바트하면 그저 히말라야 어디쯤에 있는 한 개의 봉우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나마도 등산 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산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최근 들어 낭가파르바트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 여성 산악인 고 미영이 이 산에서 추락사하면서 부터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연일 보도되는 T.V화면에 비춰진 한 여성의 죽음이 이 산의 이름을 그토록 유명하게 했다.
등반사적으로 볼 때 이 산이 지닌 의미는 다른 산과 달리 각별하다. 인류가 히말라야에 첫 문을 열었을 때 첫 희생자를 낸 무대가 낭가파르바트다. 1895년 근대알피니즘의 골간을 새로 세워 시대를 뛰어 넘는 기틀을 다진 머메리라는 산악인이 이 산에서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죽음은 히말라야 최초의 희생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머메리는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이 이 산으로 떠나기 직전에 탈고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라는 자서전에서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崇仰)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라는 유언과 같은 문장을 남기고 이 산에 묻혔다. 이 산은 머메리의 첫 도전으로부터 1953년 헤르만 불의 첫 등정까지 58년 동안 무려31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산이다.
고 미영은 이 산의 정상에 올라 “위대한 산악인 헤르만 불이 오른 이 산에 올라 더욱 감격스럽습니다.”라고 등정 소감을 밝혔다. 그가 죽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전해온 감격의 메시지가 그랬다.
『8000미터 위와 아래』는 감동적이다. 이 책은 단순한 등반기라기보다는 한 위대한 인간의 자서전이다. 헤르만 불은 처음부터 끝까지 삶의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그는 카라코람의 초골리사에서 33년의 인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오직 등산으로 일관된 외길을 살았다. 1947년까지 그는 알프스의 연봉들 중 가장 어렵다는 벽에서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밤에 단독등반을 하면서 134개에 이르는 난봉을 종횡무진으로 누빈다. 이중 11개봉은 초등을 기록한다.
1952년 여름 8등을 기록한 아이거 북벽등반은 그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 계기가 된다.
당대의 쟁쟁한 클라이머인 장꾸지. 레뷔파 등과 줄을 함께 묶은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을 리딩하면서 보여준 탁월한 등반능력에 대하여 이 벽의 초등자인 하인리 하러 조차도 ‘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솜씨’였다고 극찬하면서 당시의 비평가들을 침묵시켰다.
1953년 2월 낭가파르바트로 떠나기 전에 시도한 표고차 1800m 높이의 와츠만 동벽의 잘츠부르크 루트를 한 겨울의 밤 시간을 택해 9시간 만에 단독으로 완등을 한다. 이런 극적인 등반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등반으로 낭가파르바트 등반을 위한 자기시험이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제호(題號)가된 이 산의 위와 아래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장면들에 있다. 책 표지에 실린 두 사진중의 하나는 생기발랄한 29살의 청년이고 다른 하나는 60살을 훌쩍 넘긴 노인의 모습이다. 청년의 모습은 헤르만 불이 정상을 오르기 위해 캠프를 나설 때의 모습이며, 노인의 모습은 41시간 동안의 단독등정을 끝내고 캠프로 생환한 직후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그 당시 낭가파르바트 첫 등정이 얼마나 어려웠나를 보여준다. 이 사진은 지금까지도 산악 기록사진의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정상에서 1200m 아래, 직선거리 6Km 지점에 최종캠프를 치고 정상을 공략한다. 당시 방법으로는 캠프 3개를 더 두어야할 거리였다. 그는 새벽 2시에 단독으로 출발하여 17시간을 오른 끝에 정상에 선다. 1953년 7월 1일 저녁7시. 그는 무산소 단독등반으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섰다. 세계 초등기록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려 41시간 만에 살아서 돌아온다.
이것으로 60년간에 걸친 독일과 낭가파르바트의 악연은 종지부를 찍는다. 하지만 등반 중에 있었던 단독등정과 대장의 철수지시를 어긴 사실 등은 후일 논쟁의 불씨를 남겼고 법적인 소송으로 비화하는 또 다른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했다.
산은 오르기보다는 내려오기가 더 힘든 법이다. 그는 하산과정에서 아이젠 한 짝을 잊어버리고 8000m의 고소에서 꼿꼿이 선채로 죽음의 비박을 감행한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30여 미터를 내려가는데 1시간씩을 소모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온다. 이윽고 밤이 되자 60도 경사의 벼랑에 기대선 채 한 손은 바위를 잡고 한 손엔 스틱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막대기처럼 뻣뻣이 선채로 꾸벅꾸벅 존다. 잠들면 죽는다고 스스로에게 외치면서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산소결핍증에 시달리면서 하루 밤을 지샜다. 평생을 살아낸 하루 밤일만치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후일 이 산을 단독 등정한 메스너는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은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최고점에서 좌절했다면 그와 같이 초인적인 하산을 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를 현대등반의 신화, 슈퍼 알피니즘의 기수, 초인이라는 모든 수식어를 붙여도 지나침이 없는 이유는 8000m의 위와 아래를 오르내리면서 보여준 강인함 때문이다.
그는 안나푸르나의 모리스 에르조그, 에베레스트의 힐러리와 함께 8000m급 등정의 황금시대를 개막시킨 주역중의 한 사람이다. 낭가파르바트에 뒤이어 1957년에는 생애 두 번째의 8000m봉 브로드피크도 초등정한다.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자이언트 두 개봉 첫 등정 자가 된다. 그는 자서전 말미에서 ‘산은 항상 기억 속에 빛난다. 그것은 지금까지 걸어온 이정표요 앞으로 걸어갈 길잡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33세의 삶을 산의 품에 묻는다.
고급 양장(洋裝)의 『8000미터 위와 아래』는 텅 빈 서가를 채울 수 있는 소장본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재판을 내면서 역자는 서문에서 낭가파르바트에서 생을 마감한 고 고 미영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고 했다.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바트를 단독으로 초등한지 5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매순간마다 최선을 다한 그의 초인적인 등반이 신화처럼 전해지는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해답은 『8000미터 위와 아래』를 읽어보는 것 이외 정답은 없다. / 이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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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산악인이 있었다. 등산계에 전무후무한 등산가로 평가받는 인물. 바로 ‘헤르만 불’이다. 그는 생애 단 한 권의 책만을 남겼고, 책은 현재까지 산악 고전의 정수로 꼽히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8000미터 위와 아래』가 그것이다.
책은 히말라야 아니 세계 제9위봉 ‘낭가파르바트’를 인류 최초로 무산소 단독 등정한 기록이다. 불은 1924년 산악도시인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운명처럼 산을 가까이 하며 자랐다.
불은 북티롤 산군에서 등산 수업을 시작하여 돌로미테 암봉과 샤모니 침봉군 등 알프스 전 지역의 난벽들을 오르며 수많은 빙벽과 암벽을 섭렵했다. “비박이란 말만 들어도 언제나 로맨틱한 광경이 머리에 떠올라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그는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야간 단독 등반을 즐겨하였다.
알프스 3대 북벽(마테호른, 아이거 북벽, 그랑드조라스)은 물론 와츠만 동벽, 그랑 카프생 동벽 등 유명한 암빙벽 270여개 루트를 등반했으며 그 중 11개 코스는 초등이었다. 경이로운 등반기록이다. 그가 초인적인 기록을 달성한 데는 한 겨울에도 장갑 없이 언제나 눈덩어리를 손에 쥐고 다니며 단련한 노력의 결과였다.
왜 그토록 위험한 등반을 하는가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불은 노르만 네르다의 말을 인용 대답했다. “그 일로 우리는 즐거우니까!”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상이 얼마나 멋진가 알려면 사람이 적어도 한 번 벼랑 끝에 서서 밑을 굽어봐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953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바트(8,126m) 원정대에 참가하여 사선을 넘나드는 사투 끝에 7월 3일 단독 정상 등정을 성공한다. 그것은 8000미터 봉 인류 최초의 단독 등정이었고, 무산소 등정이었다.
“드디어 나는 이 산의 최고 지점에 섰다. 8,125미터의 낭가파르바트다! 더 오를 곳이 없었다. 주위는 작은, 펀펀한 설면인데 한 두 걸음이면 사방이 낭떠러지다. 저녁 7시였다. 지금 여기에 나는 지구가 생긴 이래 인간으로 처음 서있다. 내가 바라던 목표, 그 지점에 서 있다. 그러나 마음이 취해서 잠길 행복감도 즐거운 환희도 일어나지 않았다. 승리자로서의 고양된 기분도 없다. 이 순간의 의미를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모두 끝났다는 느낌뿐이었다.”
산에서 죽은 줄 알았던 불이 살아 돌아오자 사람들은 “28세의 젊은이가 하룻밤 사이에 80세의 노인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낭가파르바트 등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8000미터 위와 아래』는 헤르만 불의 처절했던 싸움의 기록이다. 그는 낭가파르바트 초등성공을 제일 먼저 머메리의 영전 앞에 보고했다. “나는 낭가파르바트를 현대의 기술적 보조 수단을 쓰지 않고 당신의 말대로 ‘공평한 수단으로’ 순전한 자기 힘으로 올라갔다.”라고.
머메리가 누구인가. 좀 더 어려운 루트를 택해 모험적인 등반을 추구하는 머메리즘(등로주의)을 제창한 산악인이다. 현대 등반의 기초를 다졌으며, “모든 세대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산악인”으로 꼽힌다. 머메리는 1895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 거봉 낭가파르바트에 도전한 산악인인 동시에 낭가파르바트 최초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헤르만 불은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4년 뒤인 1957년 히말라야 초골리사(7665m) 북동릉 상부 7,200미터 지점에서 실종된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세계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다. 그러나 산 중의 산은 K2와 낭가파르바트라고 한다. 그만큼 험준하고 무서운 산이다. 그야말로 생명을 담보하고, 신이 허락한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산이다. 2009년 7월 우리의 여성산악인 고미영 씨가 산화한 산도 바로 낭가파르바트였다.
낭가파르바트는 머메리의 산이었고, 헤르만 불의 산이었고, 고미영의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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