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김정호 이야기

2009. 6. 28. 23:17山情無限/山

 

고산자 김정호 이야기

이 글은 [태백산맥은 없다] 243~251쪽, "고산자 김정호 이야기" 부분입니다.
내용의 대부분은 이우형의 글과 가르침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위대한 평민 김정호의 삶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는 황해도에서 났다. 고향은 토산(兎山), 출생년대는 1804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순조, 헌종, 철종, 고종까지 4대에 걸쳐 생존하다가 1866년(고종 3년) 63세로 사망했다. 자(字)도 분명치 않고 당호(堂號)도 갖지 못한, 한미(寒微)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정확한 지도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매진했던 조선 후기의 위대한 지리학자였다. 고산자는 그의 자호(自號)다.

평민 출신이었던 그가 당대 최고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해 지도제작에 필요한 국가의 온갖 정보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양반 후원자들을 두고있었기 때문이다. 평생의 동지이자 친구였던 최한기로부터 책과 정보를, 최성환으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병조판서 신헌으로부터 비변사 규장각의 국가기밀지도를 제공받았다.

지도(地圖)와 지지(地志)는 한 몸이다. 대동여지도의 위세에 가려 잘 부각되지 않지만, 김정호는 지지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3대 지지가 그것이다. 3대 지도는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말한다.

동여도지는 3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삼십대 때 청구도를 그렸다. 오십대 때 20책의 여도비지를 집필했고, 이를 기본으로 1857년 동여도를 제작했다. 1861년, 58세의 나이에 완성한 대동여지도는 동여도를 그대로 목판에 새긴 것이다. 단, 판각(板刻)의 어려움 때문에 7,000여 개의 지명을 뺐다. 종이에 그렸던 동여도에는 19,140여 개의 지명을 표시할 수 있었으나 나무에 새겨야 했던 대동여지도에는 11,760여 개밖에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보량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목판본 지도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첫째,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다는 장점. 둘째, 모사(模寫) 과정에서의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후에도 쉬지 않고 30권 15책으로 된 대동지지를 집필하였다.

이상이 고산자 김정호의 간략한 연보다. 이렇듯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의 제작에 평생을 바쳤던 사람이다. 업적으로 본 그이의 한평생은 방에 가만히 앉아 책 쓰고 지도 그리기에만도 부족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중의 책들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백두산을 여덟 번, 전국을 세 번씩 답사했다고 말한다. 누가 그런 얘기를 처음 지어냈을까. 왜 그런 얘기를 만들어냈을까.


왜곡보다 부끄러운 베껴쓰기

1934년의 조선총독부 발행 조선어독본 제5권 제4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일제가 창작했던 고산자 김정호의 일대기다.

김정호는 황해도 두메산골 쓰러져가는 초가의 소년이다. 지리에 관심이 있어 선생에게 물었으나 타박만 받았다. 벗으로부터 읍지도를 얻어보았으나 정확도가 뒤져, 서울에 올라와 궁중의 규장각에서 조선팔도지도 한 벌을 얻었다. 이것 역시 정확도가 결여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김정호는 지도가 이처럼 틀림이 많아서야 해만 되지 이로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력으로 나라의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에 걸친 천신만고의 긴 답사여행이 시작되었다. 팔도강산을 세 번, 백두산을 여덟 번, 드디어 대동여지도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이후 집을 서울의 서대문 밖으로 옮기고 소설을 지어 얻은 돈으로 생계를 이으며 다시 10년의 각고 끝에 과년한 그의 딸과 함께 목판의 판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배외심이 강한 대원군은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누설되면 큰일이라며 대노하였다. 지도의 목판을 압수하고 부녀를 옥에 가두니 결국 김정호와 그의 딸은 죽음에 이르게되었다.

아아 비통한지고, 때를 만나지 못한 김정호. 그러나 옥이 어찌 영영 진흙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가. 대동여지도는 일로전쟁이 시작되자 우리(일본)군사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도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는 김정호의 혁혁한 업적이 비로소 그 빛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로부터 육십 년이 지난 1993년, 광복 대한민국의 교과서에도 김정호 일대기는 여전히 나온다. 교육부 발행,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읽기 김정호 단원이다.

<산봉우리에서 지도와 실제 지형을 살피던 한 소년이 “엉터리야. 도대체 맞지를 않아. 그래, 내가 한 번 그려보자” 하고 결심한다. 이 소년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훗날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다. 서당 선생님에게마저 쓸 데 없는 짓 한다는 꾸중을 들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서울의 규장각에서 조선팔도지도 한 벌을 얻어 내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거 원, 대궐에 있는 나라의 지도가 이래서야 될 일인가?” 하며 지도를 구겨쥐고 탄식했다.

성인이 된 그는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떠난 지 10년, 그동안 팔도를 돌고,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러 차례였다. …(중략)… 서대문 밖에 집을 정하고 이야기를 지어서 생활을 하며 딸과 함께 지도를 새겨 드디어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이미 그의 나이 예순 살이 가까운 때였다.

그러나, 그 때 나라를 다스리는 완고한 사람들이 대동여지도를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라 오해를 했다. 김정호는 억울한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고, 지도의 판목은 압수하여 불사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우리 가슴속에 빛나고있다.>

사실의 옳고 그름에 앞서 두 이야기가 복사기로 밀어낸 듯 똑같다는 사실이 우선 놀랍다. 한국의 국어읽기는 일본의 조선어독본을 그대로 베껴쓴 것이다! 다소 비틀기는 했다. “일로전쟁에서 일본 군대에게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항을 뺐고, “팔도강산을 세 번, 백두산을 여덟 번 올랐다”는 구절을 “팔도를 돌고,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러 차례였다”로 바꾸기는 했다.

그러나 소위 대한민국의 국어교과서가 김정호 일대기를 싣기 위해 김정호에 관한 다른 사료들을 검토해본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 나라의 국어 교육을 책임진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게을러도 되는 것인지 무섭다. 그 사람들, 베끼면서 가슴 두근거리지도 않았을까. 낯 얇은 보통사람들은 부끄러워서라도 그 짓 못한다.

무엇이 날조 왜곡되었는가?

일제가 어떤 목적에서 김정호 이야기를 날조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곡된 사실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당시 조선에는 열 살 정도 소년의 눈으로 보아도 엉망인 지도밖에 없었다."
언급했듯 혼일강리도에서 대동여지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지도제작 수준은 동양 최고였다. 게다가 규장각이 시골소년에게 지도를 대출해주었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소리다. 당시의 조정이 국가경영의 기초적인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날조하기 위한 것이다.

(2) "대동여지도의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팔도강산을 세 번, 백두산을 여덟 번 답사여행했다."
최한기, 신헌은 김정호와 동시대를 살았던 김정호의 후원자들이다. 그들이 쓴, 김정호에 관한 어떤 기록도 고산자의 전국답사를 말하지 않는다. 오직 "기존의 지도들을 두루 모아 좋은 점을 따서 집대성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의 교통수준, 산악환경을 상식적으로 따져보아도 알 수 있듯, 답사여행 주장은 한 마디로 '자던 소가 일어나 웃을 일'이다.

(3) "김정호는 국가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누명을 써 옥사했고, 원본 판목은 불살라졌다."
불살라졌다는 대동여지도 원본 판목은 숭실대 박물관에 1매가 보존되어있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도 보존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김정호가 만든 여타의 어떤 지도나 지지도 몰수당한 적 없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전해지고있다. 또한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 당대의 어떤 문헌에도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게다가 김정호의 후원자였던 신헌 등이 국가기밀 제공죄로 처벌받기는 커녕 중용(重用)되었다.

이처럼 시종일관 날조되어 있는 김정호 이야기를 잘 보면 '일정한 목표를 향한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먼저, 자연인 김정호의 위대함을 비현실적으로 강조한다. 그것은 다음, 김정호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한 조선왕조를 비하하기 위한 복선이다. 김정호가 빛날수록 상대적으로 조선왕조의 우매함이 강조되는 것이다. 결국 조선왕조는 김정호를 옥사시키는 결정적 범죄를 저지르게된다. 이 모든 날조는 그러나 다음의 클라이막스를 위한 준비공작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이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 일본인의 육성으로 중계해드린다.

"아아 비통한지고, 때를 만나지 못한 김정호. 그러나 옥이 어찌 영영 진흙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가. 정의롭고 개화된 우리 일본이 김정호의 위대함을 알아보았도다. 그리하여 대동여지도는 일로전쟁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사업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일본인들의 그 거짓 애통함에 숨겨져있는 비밀을, 이우형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은 문화국가고, 조선은 야만국가다. 대동여지도의 가치를 알아보는 문화국가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 국어교과서를 쓰는 사람의 귀에는 일제의, "김정호의 혁혁한 업적이 비로소 그 빛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렸을까. 그리하여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우리 가슴속에 빛나고있다"고 베껴 먹었을까.

길거리로 내몰린 지도편집자

일제가 자기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책의 일환으로써 김정호 이야기를 날조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 조작극이 이제는 실명소설의 소재로까지 팔려다니고 있다. ?대하 지리소설 고산자 김정호?(자유문학사) 따위가 그것인데, 저자는 불문학을 전공한 대학교수 정소성씨다.

몇몇 실록 대하소설이 장안의 인세깨나 올려놓긴 했었다. 당연히 김정호 이야기도 장삿거리로 보였을 터다. 그런 목적의 소설이라면 김정호의 '답사여행'은 뺄 수 없는 소재가 된다. 김정호가 방 안에 틀어박혀 지도 편집하는 장면만 그린 소설이라면 누가 출판이라도 해주겠는가. 문제는 그런 경우 "이것은 소설이고 허구다"고 밝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이라고 강변한다. 최근의 대세 - 전국답사설은 사실이 아니다 - 를 의식하기는 했는지 정소성씨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계발하여 작가의 말에 썼다.

최근 학술서적이나 박사학위 논문을 보면 김정호가 직접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와 지지를 비교, 연구하여 청구도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를 엄밀히 검토해 보면 직접 가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사항이 부지기수로 담겨져있다. 청구도나 대동여지도에는 그 때까지의 어떤 지도나 지지에도 기록된 바가 없는 사항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에 관한 논리적이고 분노에 찬 반박은 이우형의 기고문(?사람과 산? 94년 10월, 127쪽)에 잘 적혀있다. 한 번 읽어볼 만하다.

이우형이 누군가. 김정호가 판각의 한계 때문에 대동여지도에서 뺐던 7,000여 개의 지명을 동여도에서 일일이 다시 찾아냈던 사람이다. 그것들을 대동여지도에 다시 새겨 대동여지도를 복간해낸 사람이다. 대동여지도에 관한 한 이우형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우형은 특히 정소성의 "대동여지도를 엄밀히 검토해 보면" 혹은 "그 때까지의 어떤 지도나 지지에도 기록된 바가 없는" 따위의 거짓말에 흥분했다. 정소성은 대동여지도를 엄밀히 검토해 본 적도, 여타의 지지나 지도를 살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저자 정소성은 주인공 김정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시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의 내용에 틀린 곳, 빼먹은 곳, 과장되어진 곳이 상당히 많은데 특히 산의 높이, 하천의 길이 등에서 그러하다."

거짓말!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택리지는 하천의 길이, 산의 높이 따위를 기록도 하지 않은 책이다! 책에 들어있지도 않은 내용을 "틀렸다"고 주장하는, 그 황당한 거짓말은 책을 읽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다. 고등학생 정도면 그 이름을 아는 책, 택리지를 읽어보지도 않은 저자가 어찌 여타의 관찬·사찬 지리지, 전국도, 도별도, 군현별도, 비변사지도를 일일이 훑어보았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김정호 당시의 조선의 측량술은 산의 높이를 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소성은 대동여지도를 엄밀히 검토해 보기는커녕, 당시의 지리학에 대해 거의 무지한 수준이다. 저자의 거짓말을 증명하는 일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행여 정소성이 "나는 택리지만 빼고 몇십 권의 지지를 읽었다"고 강변하더라도, 그의 논리는 자체로 함정이 있다. 그것은 무한 충분조건의 논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지도와 지지를 완전히 검토했어야 타당성을 갖는 논리다.

예를 들어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역참(驛站) 한 개에 대해 "그 때까지의 어떤 지도나 지지에도 기록된 바가 없으며, 김정호가 답사해서 얻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려면, 저자는 김정호 이전의 모든 지도와 지지를 읽었어야 한다. 저자가 참조한 지지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지지의 전부가 아닌 한 위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나라에 그런 책이 몇 권인가. 더구나 김정호는 참조했을 수 있는, 그러나 현재 전하지 않는 군현별지도, 읍지는 또 얼마인가.

대동여지도 하나 살피는 데에 이우형은 평생을 썼다. 정소성의 주장은 몇 줄밖에 안되는 서술이지만, 논리적으로는 평생을 바쳐도 입증해낼까 말까 하는 무리수다. 그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많은 자료를 검토한 것처럼 씌어있는 위 논리는 역설적으로 저자가 어떤 책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지도제작자였던 김정호에게 '전국답사설'은 모욕이다. 그것이 칭찬이 아니라는 사실은 역시 지도제작자인 이우형이 가장 잘 느낀다.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상업주의 출판이 김정호를 '신비한' 측량기사로 강등시켜 길거리로 내몰고 있다. '백두산 여덟 번, 전국 세 번'이 상식적인 도보여행으로는 달성시킬 수 없는 분량이기에, 정소성은 김정호를 '하루에도 수백 리 산길을 넘나드는' 홍길동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짓, 일제가 잘 써먹던 방법 아니던가. 백두산을 그리려면 백두산에 올라서는 안된다는 것은 지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식이다.

기고문의 마지막에 이우형은, 소위 사계의 대가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엉터리 소설을 거들고있는 고고학교수 최몽룡, 문학평론가 정규웅, 역사학교수 서영수 등이다. 그들은 "사실성을 놓치지 않은 책", "한반도를 세 바퀴 돌았다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소설로 입증한 작품", "실감나고 정확하게 그려진 답사 현장"이라고, 마치 김정호 시대를 살다온 사람들처럼 말했다.

그들은 그러나 지도나 지지에 관해 정소성씨만큼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특유의 인간관계에 얽혀 무조건의 지지를 보내고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설 김정호?가 '획기적이고 기념비적인 소설'이라고 결론지었다. 모르는 사람들까지 덤비니까, 이우형이 더 화를 낸 것이다.

자고로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누이가 밉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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