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28. 23:20ㆍ山情無限/山
이 글은 [태백산맥은 없다] 252~260쪽, “대동여지도 이야기”부분입니다.
대동여지도 이야기
옛지도는 백성들의 일기장
고지도(古地圖)는 옛날지도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어디까지를 ‘옛날’로 치는가가 궁금해 참고서적을 뒤져 보았으나 그냥 ‘옛날’이라고만 적혀있었다. 그래서 일단 나는 항공사진을 이용할 수 없었던 시대에 제작된 지도를 고지도라고 말하겠다.
고지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그것이 평지에서 그려진다는 사실. 둘째, 작은 지도들이 합쳐져 큰 지도가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한다고 했었다.
그렇다. 지도는 조립되는 것이다. 고지도는 한두 사람의 초인적인 측량술에 의해 그려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답사만 가지고는 나라땅의 전체적인 윤곽이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저 지역의 작은 지도들을 조립하고 나면, 결과적으로 나라땅의 전체적 형상이 떠오르는 것뿐이다. 그 총체적 형상의 정밀도는 말할 것도 없이 개별 지형도의 정확도에 따른다.
게다가 지역의 지도라도 한 사람의 일시적인 능력으로 감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근처의 가까운 몇몇 지점을 대략의 거리와 각도로 가늠하여 그렸을 것이다. 그것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 연결하면 다소의 오차가 났을 것이고, 그러면 그것을 다시 가다듬었을 것이다….
고지도는 그처럼 누대에 걸쳐 현지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을 기록해놓은 역사책이다. 항공사진을 컴퓨터로 분석해 일괄작업하는 현대지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대동여지도에 실린 모든 선과, 지도표와, 1만여 개의 이름들은 반만 년 이 땅에서 살아왔던 백성들의 축적된 일기장인 것이다.
그래서, 대동여지도는 조립된 지도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은 조선시대 개별지도의 정확성을 반증한다. 개별지도를 분석하고, 재단하고, 편집해낸 김정호의 역량은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그처럼 ‘정확한’ 지도를 가능케했던 근본적인 원동력은 자료로 사용되었던 개별 군현지도의 정확성에 있다.
그리하여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의 업적도 업적이지만, 조선의 지리인식이라는 업적이 돋보이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이 지도의 선진국이었다는 확실한 물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그것을 김정호 개인의 신화적인 능력에 의한 업적으로 교묘히 날조, 왜곡해 놓았다.
물론 편집하는 사람의 솜씨도 중요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그러나 보배는 근본적으로 ‘서 말의 구슬’에서 출발한다. 대동여지도에서 서 말의 구슬은 그 때까지 축적되었던 조선의 총체적 지리인식이다. 대동여지도가 ‘조선의 업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김정호는 지도제작자다. 좋은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돌아다녀서는 안되는 직업의 사람이다. 예를 들어 18세기 프랑스의 단빌은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어냈다.
그러기에 대동여지도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연구해야 할 부분은 지도편집자로서의 김정호의 능력이다. 사실 지도편집자로서의 김정호는 ‘백두산을 여덟 번 오르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능력, 그것들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김정호의 논리와 과학
옛지도는 그리기 쉬운 물줄기부터 그렸다. 나머지 빈 공간은 저절로 산줄기가 된다. 1463년의 팔도총도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하천만 그려져있는 것이다. 몇몇 산이 구색 맞추기로 들어있긴 하지만, 산줄기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후의 지도에서 산줄기그림이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강줄기그림이 정교해진 덕이지, 산줄기 자체를 그려내는 기술이 개발되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을 오르지 않고 산을 그렸다는 증거는 고산자의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는 합수점을 감안하여 봉우리와 산줄기의 기슭을 분별한다.
19세기의 조선땅에는 혼일강리도, 조선방역도, 동국대지도 등 누대의 명품이 즐비했다. 군별·도별지도 또한 각 지역의 정보와 지형을 상세히 파악하고있었다. 대동여지도가 그려질 바탕은 넉넉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들의 표기법이나 축척이 통일되어있지 않아, 재구성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거였다. 그럴 때 김정호의 논리와 과학이 빛을 낸다. 그이는, 어떻게 하면 그런 군별·도별지도를 일관된 축척과 도법으로 제작되게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별·군별지도가 많이 있으나 서로의 축척이 다르고 도법이 달라 서로 잇대어 볼 수 없는 폐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전체지도를 만들고 거기에서 개별의 읍지도를 떠내 그것을 각 고을에 보내어 교정을 보게한 다음 다시 거두면 현실에 맞는 정교한 지도가 된다.
김정호의 지도는 특수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이가 추구하는 지도는 모든 국민이 보아 유익한 것이라야 했다. 평화시에는 백성을 다스리고 여행하는 데 쓰이며, 전쟁시에는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 쓰이는 것이 지도라고 믿었다.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은, 그처럼 중요한 지도를 쉽게 보급하고 정확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김정호의 신념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목판인쇄 수준은,
“사방 10리 평방의 상황을 파리 대가리만한 글자로 판각한다 해도, 지도 1촌 평방(2.5㎠) 속에 한두 개의 산이름, 강이름을 넣기 어려웠던”
정도였다. 그것이 김정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이는 포기하지 않고 지도표(地圖標)를 창안했다. 즉, 글자 대신 부호를 만들어 썼다.
세밀한 활자가 지원되지 않았던 시절의 지도는 글자를 종이의 빈 공간에 적당히 배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도상에 새긴 지명과 실제 위치 사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김정호는 청구도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나주 역(驛)’을 표기할 때 ‘驛’이라는 글자는 정확한 실제 위치에 표기하고, ‘나주’는 근처의 적당한 공간에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해설에 덧붙이기를 “지도를 전사(傳寫)할 때 그 점을 특히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런 부탁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베끼면서 ‘나주역’을 한데 묶어 적당히 옮길 가능성이 상존했다. 그래서 창안한 것이 지도표다.
동여도에서부터 ‘驛’이라는 글자 대신 ‘?’ 라는 부호를 사용한 것이다. 지도표는 모사과정에서의 오류를 줄인다. 또한 지도판독을 용이하게한다. 그것도 못 미더웠던지 아예 나무에 새겨버린 것이 대동여지도다.
지도표, 말이 쉽지 그것은 지도의 발전에 큰 획을 긋는 발상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김정호의 위대성은 백두산을 넘는다. 그뿐인가. 10리 이정표마다 점을 찍어 어디서나 거리 측정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통일된 도엽을 재구성했다. 인쇄된 지도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제책(製冊)에도 신경을 써, 병풍식 접기를 채택했다.
지금으로 치면 모두 특허감이다. 이런 일을 헀던 지도편집자를, 전국을 나돌아다닌 측량가로 묘사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지도편집자로서는 가장 쓸모 없는 시간이 아마 산에 올라다니는 시간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아십니까
○ 대동여지도는 나라 전체를 그린 전도(全圖)다.
아니다. 다 펼친다면 결과적으로 나라 모양이 드러나기는 하겠지만, 본디 나라 전체의 모양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지도는 아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도(全圖)는 가로 76.4cm, 세로 115.2cm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라는 목판본 지도다. 혹은 ‘대동여지도’에서 자잘한 것 빼고 뼈대만 추려 종이 크기로 축소, 인쇄한 것일 수도 있다.
○ 그렇다면 대동여지도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지도인가.
근본적으로 대동여지도는 고을이름 및 위치, 고을 사이의 거리, 모든 국가시설물, 산성 및 고현(古縣)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모든 정보를 자세히 표시하기 위해 만든 행정지도며, 군사지도다.
○ 대동여지도는 나무에 새긴, 목판본이다.
그렇다. 목판 한 장(40cm x 30cm)에 2면을 새겼으며, 목판의 갯수는 126장이다. 목판본으로 한 이유는 모사(模寫) 과정에서의 오류를 없애자는 것이요, 대량 인쇄가 가능하도록하자 함이었다.
○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인쇄한 대동여지도는 A4용지(20cm x 30cm) 227면으로, 책 한 권 분량이다. 그것을 다 펼쳐 잇대면 가로 4미터, 세로 8미터쯤 되니 교실 한 칸 크기다.
○ 대동여지도에는 산과 강만 그려져 있다.
아니다. 그러한 오해는 흔히, 지리부도에 실린 전도(全圖)를 대동여지도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한다. 대동여지도는 교실 한 칸 크기라 했다. 그것이 얼마나 자세한 지도인가는 사진을 보면 안다.
○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대동여지도를 보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216,000(이우형의 주장)으로, 당시의 도보 여행에 딱 알맞는 세밀도다. 이건 아주 특별한 비밀인데, 자동차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국립지리원 발행 1:250,000 지도 사기를 권한다. 값이 쌀 뿐더러, 최상의 정보와 편리함이 거기에 숨어있다. 대동여지도가 바로 그런 축척의 지도다.
○ 대동여지도를 보면, 섬들이 아무렇게나 그려져 있는데.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니다. 여지도는 1,105여 개의 섬을 수용하고 있는데, 목판에 새겨야 하는 현실을 감안, 거리나 크기 무시한 채 섬의 존재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 청구도의 의의를 설명해 달라.
청구도는 김정호가 삼십대 때 완성한 일종의 습작이지만, 지도제작의 일반적 원리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통일된 경위선 및 축척, 통일된 주기(註記), 지형의 생략법, 위치의 표기 및 판독법 등 과학적 지도제작을 위한 제반 사항을 청구도에서 확립함으로써, 나중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골격이 된다.
○ 대동여지도의 복간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몇 번 나온 얘긴데, 1861년의 대동여지도는 1857년의 동여도를 그대로 목판에 새긴 것이다. 단, 판각(板刻)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에 그려진 19,140여 지명 중 7,000여 개를 빼고 11,760여 개만 새겼다. 1985년 이우형이, 누락된 지명을 동여도에서 모두 찾아 대동여지도에 그려넣음으로써 124년만에 다시 출판한 것이다.
○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의 관계는?
1769년쯤에 편찬된 '산경표'와 1861년에 판각된 '대동여지도'는 지리인식에 있어 차이점이 없다. 간단히 말해, 산경표를 그림으로 그리면 대동여지전도의 골격이 된다. 단, 대동여지도에는 산줄기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산줄기의 명칭과 소속산이 확실하게 명시된 책으로는 산경표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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