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기행록 / 탁영 김일손

2009. 6. 28. 23:28山情無限/山

 



탁영문집 / 속두류록, 김일손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

 

우리가 김일손을 기억하는 것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이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같은 의지를 가진 개혁적인 청년학도였다.

 

탁영 김일손 濯纓 金馹孫(1464<세조10년>∼1498<연산군4년>)이 생존했던 15세기 후반기의 조선전기 정치사회는 낡고 병든 보수적 정치세력―勳舊派를 청산하고 새로운 도덕과 사회질서의 확립을 요구하는 변혁의 시기였다. 이 같은 현실에서 탁영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절개와 士林의 도덕관으로 새로운 정치사회의 질서구현을 위한 선봉자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현실 정치사회계의 도덕적 타락을 바로 잡고 사림세계의 도덕·正義가 생동하는 사회를 구현하려는 士林派와 구질서·기득권을 고수하려는 勳舊派의 첨예한 대립은, 탁영 선생이 史草化한 畢齋의 '弔義帝文'을 빌미로 하여 '史禍'로 비화되었다. 특히 탁영은 훈구파의 不道德과 현실 고수를 위한 부패타락 및 權貴化를 증오하고 온 몸으로 맞받아 저항하다가 무오사화로 인해 35세의 연세로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짧은 생애 속에서 남긴 탁영의 행적―시대의 고민과 저항의식을 표현한 저작들은 무오사화의 참혹한 변고를 겪으면서 거의 대부분 散佚되고 남아 있는 탁영의 극히 적은 遺著를 통하여 그의 무게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본관이 김해인 탁영 김일손은 함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까지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등을 배우고 이어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김광필, 정여창, 강혼 등과 함께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23세 되던 해인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1491년(성종 22) 장래가 촉망되는 문신(文臣)에게 주어지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혀 학문연구와 독서에 매달리는 영예를 누린다. 이어 정언, 이조좌랑 · 정랑 등을 두루 거치면서 공직자로서 자질을 더욱 향상시켰다. 한 때 글의 음운이나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알아오는 임시직인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정유라는 사람이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를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이렇게 공직자로서 직무에 충실할 즈음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종은 세조 때부터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에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사림파의 의견을 수용해 주어 여러 면에서 성리학을 접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곧은 관료이자 부정과 비리를 적발하고 시정하는 직책인 정언과 이조(吏曹)에 근무하면서 기득권층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비판했던 탁영( 길일손의 호)은 유자광, 이극돈 등 권신들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었다. 스승 김종직 또한 남이장군의 옥사(獄事)가 간신 유자광의 무고로 생각하는 등 훈구 세력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동안 사림파를 옹호해주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1498년( 연산군 4) 때마침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던 탁영은 스승 김종직이 중국의 초나라 의제가 항우에게 내민 사실을 애도해서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극돈이 이를 알고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라며 간신 유자광에게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엇보고 있던 훈구파들은 김종직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도모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하니 대노한 연산군은 죽은 김종직은 관을 쪼개어 목을 잘랐을 뿐 아니라 그가 쓴 책마저 불살라 버리고 관련자를 처형했다. 밝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보려던 선비 탁영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러나 훗날 바른 평가가 내려지면서 순조 대에 이르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자계서원에는 탁영이 생전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한 그루는 외줄기에 가지가 두 개, 다른 하나는 맹아(萌芽)가 수없이 많이 돋았을 뿐 아니라, 큰 줄기만 해도 모두 7개였다. 한 아름도 넘는 큰 나무였다. 탁영 수식목이라는 안내판이 있었으며 관리인은 2그루 다 탁영이 직접 심은 암나무라고 했다. 두 그루 사이에 탁영의 문학비가 서 있다

 

그는 거문고를 좋아했고 능숙한 연주가였다.

그가 남긴 거문고는 탁영거문고라고 해서 귀중한 유물이다. 김일손이 타던 거문고는 1490년경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옛 선비들이 사용한 악기로는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 근처에 살던 김일손이 남긴 지리산 등산록은 선비로서의 그의 기개를 알 수 있는 글이다.

 

 

 

 

두류기행록 /탁영 김일손

 

선비로 태어나 한 지역에 조롱박처럼 매여 있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질을 기를 수 없다면, 나라 안의 산천은 당연히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기쁘기도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것을 감안하면, 항상 뜻은 있어도 원하는 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

 

내가 애초에 진주의 학관(學官) 이 되기를 구했던 것은,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그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루(句漏) 의 수령이 되었던 갈치천(葛稚川)의 마음도 단사(丹砂)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두류산은 진주의 지경에 있는데, 진주에 도착하고 나서는 날마다 두 짝의 나막신을 준비하였는데, 두류산의 운무(雲霧)와 원학(猿鶴)이 모두 나의 단사이기 때문이었다. 학관으로 있던 2년 동안 녹봉만 축낸다는 비방에서 거듭 벗어나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드디어 한가하게 노닐고 싶은 뜻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한 번도 두류산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으니, 어찌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두류산을 마음속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매번 조태허(曺太虛) 선생과 함께 한번 유람고자 했으나, 조태허가 벼슬살이로 인해 나와는 왕래가 끊어졌다. 더욱이 오래지 않아 조태허는 어머니 상을 당해 천령(天嶺)으로 떠났다.

 

천령에 사는 상사(上舍) 백욱(伯勗) 정여창(鄭汝昌)은 나의 정신적 벗이었다. 올봄 도주(道州)에서 녹명(鹿鳴) 을 노래할 적에 그가 마침 내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두류산을 유람하자고 약속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국(相國) 은경(殷卿) 김여석(金礪石)이 영남에 내려와 살피면서 누차 편지를 보내와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찾아가지 못했다. 4월 11일 기해일에 그의 행차를 따라가 천령에서 만났다. 천령 사람에게 물으니, 백욱이 서울에서 이조부(二鳥賦)를 노래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지 5일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드디어 어긋나지 않고 서로 만날 수 있어서 오랜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매우 기뻐하였다.

 

상국 김은경이 나를 붙잡고 따라 가자고 하였으나, 나는 산행할 약속이 있다고 사양하였다. 상국이 간청하다가 내 의지를 돌릴 수 없게 되자, 노자를 주며 전송해주었다. 이어 공무에 매이고 너무 허약해서 유람에 따라 갈 수 없음을 한탄하며 섭섭해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천령에 새로 부임한 이잠(李箴) 선생은 바로 내가 성균관에 있을 때 경서(經書)를 가르쳐주신 분이었는데, 나에게 노자를 준것도 후하였다. 천령 사람 임정숙(林貞叔)도 따라나서서 세 사람의 행장을 준비하였다.

 

14일, 임인일.

드디어 천령의 남쪽 성곽의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오르니,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말을 달려 지나쳤다. 이 날 비가 물을 대듯이 내렸고 안개는 온산을 감고 있었다. 따르는 자는 모두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썼다. 진흙길이 미끄럽고 질퍽하여 서로 잃어서 뒤처졌다.

나는 말을 믿고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빼어났는데 축대의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石澗水)가 북쪽에서 흘러 그 속으로 흘러 내렸는데 졸졸 소리를 내는 듯 하였다. 그 위쪽엔 동, 서로 두 사찰이 있었는데, 일행은 모두 동쪽 사찰에 묵기로 하고 따르는 자를 가려서 보냈다.

내리는 비의 기세가 밤까지 계속되었고 아침까지 그치질 않았다. 마침내 절에 머물며 각자 낮잠을 잤다. 한 승려가 문득,

“비가 개어 두류산 가는 길이 보인다.”

라고 알려주니, 우리 세 사람이 놀라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세 개의 푸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듯 했다. 흰 구름이 가로지르듯 감싸고 있어 짙푸른 봉우리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조금 뒤에 다시 비가 내렸다. 내가 농담삼아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마음이 있는가 봅니다. 산의 형세를 숨겼다가 보여주었다가 하니 시기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어찌 산신령이 객을 오랫동안 잡아두려는 계책인지 알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 날 밤에 다시 맑아져서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백욱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 밤 기운을 받아 이때에는 속세의 찌꺼기라곤 전혀 없군요.”

라고 하였다. 나의 어린 종이 제법 피리를 불 줄 알아서 불게 하였더니, 빈 산에 메아리가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대하여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15일, 계묘일)

다음날 새벽에 나는 백욱과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등구사에서 1리 정도 걸어 내려갔는데 볼 만한 폭포가 있었다. 다시 10리쯤 가서 한 외딴 마을을 지났는데 그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험한 고개를 넘어 산허리를 거쳐 오른쪽으로 돌아 서북쪽으로 가니 바위 아래에 샘이 있어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 이어 세수를 하였다.

그곳에서 나와 한걸음에 금대암(金臺菴)에 닿았다. 한 승려가 나와·물을 긷고 있었는데 나와 백욱이 암자내로 들어섰다. 뜰 가운데는 모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반쯤 시들었지만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승복를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袈裟)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 도량(精進道場)이라고 했다. 백욱이 그럴 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精一)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깨우치게하여 번뇌와 졸음을 없애게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는 것도 고된일입니다. 배우는 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이루는 것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錫杖)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정오가 되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좁은 바위 계곡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물이 불어나 호수와 같았다. 아득히 상무주암(上無住庵)과 군자사(君子寺)를 바라보면서 가보고 싶었지만 냇물을 건널 수 없었다. 산길을 내려가려니 매우 험난해서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팡이를 앞으로 내짚으며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안장을 얹은 말이 산 아래에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는데, 겨우 한걸음을 옮기자마자 내가 탄 말만 한쪽 다리를 절룩거려 방아를 내려 찧는 것 같았다. 내가 백욱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절뚝거리는 노새를 타고 가는 풍미(風味)는, 시인이 참으로 면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라고 하였다.

시냇물 북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용유담(龍游潭)에 닿았다. 용유담 남북은 깊고 그윽하며 기이하고 빼어나서 풍진과 천 리나 떨어진 듯하였다. 임정숙이 먼저 도착하여 용유담 바위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길을 떠났다. 때마침 날이 맑아졌지만 물이 양쪽 언덕에 넘실거려 용유담의 기이한 장관은 볼 수가 없었다.

임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 이 고을을 다스릴 때,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재계하던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용유담 바위의 비늘 같은 모양들은 밭을 갈아엎은 것같이 완연한 흔적이 많았고 항아리와 가마솥 같은 부류의 것들도 있었는데, 모두 기록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용이 사용하던 그릇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산골짜기의 급류가 계곡의 돌을 굴려 오랫동안 서로 연마되어 이런 모양을 이루게 된 줄을 전혀 알지 못하니, 백성들이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허탄한 말을 좋아하는 것이 이처럼 심하구나.

용유담을 돌아 동쪽으로 나아가는데 길이 매우 험난하였는데, 그 아래를 보니 천척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사람과 말이 숨을 죽이고 거의 30리를 지나갔다. 강가 언덕에서 두류산 동쪽기슭을 바라보았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사이로 선열암(先涅庵)․고열암(古涅庵) 등을 가리키며 바라보았는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조각의 배가 약수(弱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듯하여, 한 걸음에 올라 보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길이 점점 낮아지고 산세도 점차 평평해지고, 물의 흐름도 점점 안정해졌다. 산이 북쪽에서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된 곳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겨우 10여 호 정도 민가를 이루고 있었다. 탄촌(炭村)이라고 하였는데, 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었다. 백욱이 말하기를,

“이곳은 살 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문필봉(文筆峯) 앞이 더욱 살 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앞으로 5, 6리를 가니 대나무 숲 속에 오래된 절이 있었는데, 암천사(巖川寺)라고 하였다. 토양이 평평하고 넓어서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절을 돌아 동쪽으로 1리를 가니, 천 길 절벽이 있었다. 사람들이 절벽 사이로 1리 정도 갈 수 있는 비스듬한 길을 뚫어놓았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북쪽으로 가니 임정숙의 전원(田園)이 있는 아랫마을로 나왔다. 임정숙이 자꾸 자기 집에 가자고 청하였지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려 물이 더욱 불어날까 근심이 되어 사양하기를,

“ 왕 자유(王子猷) 는 문 앞까지 갔다가 대 안도(戴安道) 를 만나지 않고 돌아갔는데, 지금 정숙과 여러 날 함께 유람하였으니, 집에까지 들어 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정숙이 발에 병이 나서 끝까지 모시고 다닐 수 없다고 하여 정숙과 작별하였다. 저물녘에 사근역(沙斤驛)에 이르렀는데, 두 다리의 통증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었다.

 

(16일, 갑진일)

이틑날 천령에서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말을 타고 1리 정도 가서 큰 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암천(巖川)의 하류였다. 서쪽으로 푸른 산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첩첩이 빽빽하게 들어섰는데 모두 두류산의 지봉(支峯)들이었다. 정오에 산음현(山陰縣)에 이르렀다.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니,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

산음을 돌아 남쪽으로 내려와 단성(丹城)에 이르렀는데, 지나온 계곡과 산들이 맑고 빼어나며 밝고 아름다웠으니, 모두 두류산에 서린 여운이다. 신안역(新安驛)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이르러 관에 투숙했다. 나는 이곳을 단구성(丹丘城)이라고 바꾸어 부르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단성의 수령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하게 보내왔다. 화단에 오죽(烏竹) 백 여 그루가 있어, 지팡이로 삼을 만한 것을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었다.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험하고 굽은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는데, 맑고 시원한 시냇물이 그 들판의 서쪽으로 흘렀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 3, 4리를 가니 계곡의 입구가 있어서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의 피어오르는 연기와 뽕나무 밭이 보였다. 시내 하나를 건너 1리를 나아가니 감나무가 겹겹이 둘러 있고, 산에는 모두 밤나무였다.

장경판각(藏經板閣)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다. 담장의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속에 절이 있고,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문 앞에 비석이 서 있는데, 바로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사명(大鑑師銘)이었다. 완안(完顔)의 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佛殿)이 있는데, 주춧돌과 기둥이 매우 질박하였다. 벽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영정(影幀)이 그려져 있었다. 거처하는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柳純)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단속(斷俗)이라 이름하였고,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겨 초상을 살펴보지 않았다.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 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옛스러웠다. 들보와 기둥이 모두 부패하였으나 그래도 올라가 조망하고 난간에 기댈 만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하였는데 바로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의 조부 통정공(通政公) 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그루를 심었고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러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서 곧장 시내 하나를 건넜는데, 덤불 속에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었다.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세운 것으로 돌의 결이 거칠고 추악하였으며, 그 높이는 대감사비에 비해 두어 자나 미치지 못하고, 문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북쪽 담장 내에 있는 정사(精舍)는 절의 주지가 평소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주위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다. 그 동편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해온다. 당 아래에 새로 지은 건물이 있는데, 매우 높아서 그 아래에 5장(丈)의 깃발을 세울 만하였는데 이 절의 승려가 수를 놓아 만든 천불상(千佛像)을 안치하려는 것이었다.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기이한 모양이 각기 달라 형용할 수 없었다.

주지가 거처하는 정사로 돌아와 절의 옛 문서를 열어보았다. 그 중에 백저(白楮) 세 폭을 연결한 문서이 있었는데, 정결하고 빳빳하게 다듬어져 요즘의 자문지(咨文紙)같았다. 그 첫째 폭에는 국왕 왕해(國王王楷)란 서명이 있으니, 바로 인종(仁宗)의 휘(諱)이다. 둘째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高麗國王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인데, 바로 고려 국왕이 대감국사에게 보낸 문안 편지였다. 셋째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씌어 있고, 황통(皇統)이라고도 씌어 있었다. 대덕은 몽고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고찰해보면 합치되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황통은 금(金)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다.

이를 보면, 고려 인종․의종 부자는 오랑캐의 연호를 받아들였던 것이고, 이들이 이처럼 선불(禪佛)에게 삼가하였지만,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에 유배되는 곤욕을 면치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하는 것이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또 좀먹은 푸른 비단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서체는 왕우군(王右軍) 과 유사하고 필세(筆勢)는 놀란 기러기 같아서 내가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이하도다. 또 노란 명주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는 그 자획이 푸른 비단에 쓴 글씨보다 못하였고, 모두 단절된 간찰(簡札)이어서 그 문장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또 육부(六部)에서 함께 서명한 붉은 칙서(勅書) 한 통이 있는데.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 것으로 절반이 빠져 있었지만,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할 만한 것이었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 산에 오르길 꺼려해서 하루 쉬었는데, 석해(釋解)라는 승려가 있어서 대화할 수 있었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 경태소(慶太素)가 광대 둘을 보내 각자의 기업(技業)으로 산행을 즐겁게 하였고,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 붓과 벼루를 받들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서 길을 떠났다. 광대가 생황과 피리를 불면서 먼저 길을 가고, 석해는 길잡이가 되어 동네를 나갔다. 돌아서서 바라보니, 물이 감싸고 산이 에워싸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아늑하여, 진실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승려들이 사는 곳이 되어 고사(高士)들이 사는 곳이 되지 못하였다.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큰 시내를 건넜는데, 바로 살천(薩川)의 하류였다. 살천을 따라 남쪽으로 비스듬이 가다가 서쪽으로 대략 20리를 지났는데, 모두 두륜산의 기슭이었다. 들은 넓고 산은 낮았으며 맑은 시내와 흰 돌이 모두 볼 만하였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하면서 계곡을 따라가는데 냇물은 맑고 돌은 자른 듯 하였다. 또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냇물을 아홉 번이나 건넜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판교(板橋)를 건넜다. 수목이 빽빽하여 우러러 하늘을 볼 수 없었고 길은 점점 높아졌다. 6, 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었는데, 크기는 백 아람,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그 머리에 오대산수륙정사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고 씌어 있었다. 읽으면서 좋은 글임을 새삼 깨달았는데, 다 읽어보니 바로 고려의 학사(學士) 권적(權適)이 송나라 소흥(紹興) 연간에 찬술한 것이었다. 절에는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장대하여 볼만 하였고 방이 매우 많았으며, 깃발은 마주보고 있었다. 오래된 불상이 있었는데,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불상은 고려 인종이 주조한 것입니다. 인종이 쓰던 쇠로 만든 여의(如意) 도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날은 저물고 비도 내려 절에서 묵기로 했다.

 

(17일, 을사일)

이튿날 아침 절의 승려가 짚신을 선물로 주었다. 골짜기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가는데, 오른편은 산이고 왼편은 냇물이어서 길이 매우 위험하였다. 숲 속을 10리쯤 가니 골짜기 입구가 조금 열렸다. 기름진 들판이 있어 밭을 갈며 살 만하였다.

또 10리를 가니, 거처하는 백성이 나무를 휘거나 쇠를 달구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이라 느낀다더니, 여기에 이러한 것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따라온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는 땅이 궁벽하여 이정(里正)이 기탄없이 횡포를 부려 백성이 번잡한 조세와 무거운 역으로 고통받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5리를 가서 묵계사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것 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니,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깨었는데, 별과 달빛이 환하여 깨끗하고 두견새가 어지럽게 울어대 정신이 맑아져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의 서형(庶兄) 김형종(金亨從)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일은 천왕봉에 상쾌한 마음으로 올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네.”

라고 하여, 일찌감치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

 

(18일, 병오일)

날이 밝자 행전을 차고 신발을 묶어서 차림을 단단히 하였다. 숲 가운데를 나아가는데 길이 매우 위험하여 쓰러진 나무가 앞을 가로막아 몸이 빠지기도 하였다. 그 아래는 모두 왕대였는데, 죽순이 땅에서 삐죽삐죽 나와 있어 어지럽게 발길에 채였고, 길에서 뱀을 만나기도 하였다.

저절로 쓰러진 나무들이 앞에 즐비하였는데 모두 편(楩)․남(楠)․예(豫)․장(章)의 좋은 목재들이었다. 몸을 굽혀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애를 써서 그 위를 넘기도 하였다. 이렇듯 좋은 나무들이 훌륭한 목공을 만나지 못해 동량(棟梁)의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빈산에서 말라죽는 것을 생각하니,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애석히 여길 만하지만 이 나무들은 천수(天壽)를 다 누린 것이로다.

나는 힘차게 걸어서 먼저 시냇가 바위에 앉아 기다렸고, 백욱은 힘이 부치자 허리에 끈을 묶고 한 승려에게 끌도록 하였다. 내가 그들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스님은 어디에서 죄인을 묶어오는 것이오?”

라고 하니, 백욱이 웃으며 말하기를,

“산신령이 도망친 나그네를 붙잡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백욱이 예전에 이 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희롱하여 대답한 것이다. 이곳에 다다르자 갈증이 심하여 따라 온 사람들이 모두 물을 떠서 쌀가루를 타서 마셨다.

여기서는 샛길이 없었고 천 길 바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모여 한 시내를 이루었을 뿐인데, 산 위에서 시내 가운데로 흘러내리는 모습이 은하수가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듯하였다. 큰 돌이 첩첩이 포개져 다리가 되었으나, 이끼가 끼어 미끄러워서 밟으면 넘어지기 십상이어서 오고가는 초동(樵童)들이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그곳이 길임을 표시해두었다. 나무 그늘이 하늘을 가려 햇빛이 새어들지 않았는데, 이런 험한 계곡에서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다섯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한 번 쉬기도 하면서 땀을 흘리며 힘을 썼다.

시내가 끝나고 조금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왕대 속을 헤치며 걸었는데, 산은 모두 돌로 덮여 있었다. 바위나 칡넝쿨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10여 리를 숨가쁘게 기어올랐다. 높고 가파른 산 하나를 오르니 철쭉꽃이 만개하여 별천지에 온 것처럼 기뻐서, 꽃 한 송이를 꺾어 머리에 꽂고, 따라온 사람들에게도 명하여 모두 꽃을 꽂고 가게 하였다.

세존암(世尊巖)이라고 하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만났는데, 세존암은 매우 가파르고 높았으나 사다리가 있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 십 리 정도 되는 거리였다. 기뻐서 따라온 사람들에게 힘내어 다시 올라가자고 말하였다. 여기서부터 길이 조금 낮아졌다. 5리쯤 더 가니 법계사(法界寺)에 이르렀는데,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나뭇잎은 이제 막 파릇파릇 자라나고 산꽃은 울긋불긋 한창 피었으니, 때는 늦은 봄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바로 올라갔다. 배〔船〕같기도 하고 문(門) 같기도 한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거쳐 지나가게 되었는데 길은 꼬불꼬불 돌기도 하고 꺾여지기도 하였으며, 골짜기는 휑하였다. 돌부리를 움켜쥐고 나무뿌리를 부여잡고서 겨우 봉우리 위를 올랐으나,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사방에 끼어 있었다.

향적사의 승려가 솥을 가지고 와서 넓은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샘을 이루고 있어,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쌀을 일어 밥을 짓게 하였다. 온 산에 다른 목재는 없고 삼나무나 노송나무 같은 나무만 있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비파나무인데 이 나무로 밥을 지으면 밥맛이 없다.”

라고 하였다. 시험해보니 과연 그랬다. 옛 사람들이 밥 짓는 땔나무를 고를 줄 알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두류산에는 감나무, 밤나무, 잣나무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열매가 바람에 떨어져 온 계곡에 가득하여 이곳의 승려들이 열매를 주워 주린 배를 채운다.”

라고 하는데, 이는 허망한 말이다. 다른 초목들도 오히려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데 과실이야 어떠하겠는가. 해마다 관아에서 잣을 독촉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항상 산지에서 사다가 공물로 충당한다고 한다. 매사에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에 이런 부류이다.

저물녘에 정상에 올랐는데, 정상에는 한 칸의 판잣집이 겨우 들어앉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판잣집 안에는 돌로 된 부인상(婦人像)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었다. 그 판잣집 들보에는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걸려 있었다. 또,

“숭선(嵩善) 김종직(金宗直) 계온(季昷),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하산(夏山) 조위(曺偉) 태허(太虛)가 성화(成化) 임진년(1472) 중추일에 함께 오르다.”

라고 쓴 몇 글자가 있었다. 일찍이 유람한 사람들의 성명을 차례로 보니, 당대 걸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당에서 묵기로 하였다. 겹으로 된 솜옷을 껴입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 몸을 따뜻하게 하고, 따라온 사람들은 사당 앞에 불을 지펴놓고 추위를 막았다. 한밤중이 되자 천지가 맑게 개어 온 산하가 드러났다. 흰 구름이 골짜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넓은 바다에서 조수가 밀려와 온 포구에 흰 물결이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듯하였고, 드러난 산봉우리들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 같았다. 돌무더기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외람되게도 마음과 정신이 모두 늠름하고 몸은 아득한 태초의 위에 있는 듯 하여 회포가 천지와 함께 흘러가는 듯하였다.

 

23일, 신해일.

날이 밝을 무렵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는데, 맑은 하늘에 연마한 구리거울 같은 해가 솟아올랐다. 배회하며 사방으로 바라보니, 뭇 산은 모두 개미집처럼 보였는데, 묘사하자면 창려(昌黎) 의 남산시(南山詩)와 부합되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선니(宣尼) 께서 동산(東山)에 오르셨을 때와 바로 들어맞는다. 어느 정도 회포를 품고 풍진 세상을 내려다보니 감개가 그지없었다.

산의 동남쪽은 옛 신라의 구역이고 산의 서북쪽은 옛 백제의 땅이다. 어수선하게 날아다니는 모기들이 독 안에서 생겼다 사라지는 것같이, 처음부터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이곳에 뼈를 묻었던가. 우리들이 오늘 탈 없이 올라와 구경하는 것도 어찌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망망하고 아득한 태평한 세월 속에서도, 생각하면 슬프고 즐거우며 기쁘고 근심스러워 갖가지 가지런하지 못한 일을 드러내어 말할 것이 있다. 그래서 백욱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그대와 악전(偓佺)의 무리를 맞이하여 기러기나 고니보다 높이 날며, 몸은 세상의 밖에서 노닐고 눈은 우주의 근원까지 궁구하여 기(氣)가 다하는 때를 볼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백욱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 종들을 시켜 제물 두 그릇과 술을 차리게 하여 사당 아래서 제사 지낼 것을 알리고 제문을 지었는데,

“옛날 선왕(先王)이 상하의 분별을 제정하여, 오악(五嶽) 과 사독(四瀆) 은 천자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고, 제후들은 봉지(封地) 내의 산천에만 제사를 지내며, 공경(公卿)․대부(大夫)는 각기 해당되는 제사만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후세로 내려와 명산대천에서 사묘(祠廟)에 이르기까지 그 아래를 지나는 모든 문인이나 행자(行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올리니, 신에게 고하는 것이나 신에게 기원하는 것이 모두 이러한 것들입니다.

두류산 만은 먼 바닷가에 있는 산으로 수백 리나 펼쳐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진산(鎭山)이 되었으며, 그 아래로 수십 개의 고을이 둘러 있어서 이 산에는 반드시 크고 높은 신령이 있어서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정기를 쌓아 백성에게 복을 내리는 것이 무궁합니다. 저는 진사 정여창(鄭汝昌)과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미워하여, 평생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아서 음사(淫祠)를 지날 때면 비난하거나 무너뜨리고서야 그만 두었습니다.

금년 여름 산을 유람할 뜻을 세우고 길을 떠나 이 산 기슭에 이르렀는데, 안개와 비가 온 산을 가려 이 산의 기이함을 마음껏 둘러 보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맑게 개니, 이는 한유가 마음을 정성스럽게하고 묵묵히 기도하자 형산(衡山)의 구름이 맑게 갠 것과 같으니 형산의 신령이 반드시 한유에게 박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거처하는 백성에게 물으니 이 신을 마야부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속이는 말입니다. 점필재 김공은 우리 동방의 박학다식한 큰 선비인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징험하여 이 신을 고려 태조의 비(妃)인 위숙 왕후라고 하였으니, 믿을 만합니다. 위숙 왕후는 열조(烈祖)를 이끌어 세워 삼한을 통일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으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백성들이 영원히 흠향하는 것은 순리입니다.

내가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만 집에 계신데, 서산의 해가 점점 기울 듯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한 걸음 옮기는 순간에도 애일(愛日)의 간절한 마음 을 늦춘 적이 없습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90세를 누린 것과 곽종(郭琮)이 어머니를 위해 장수를 빈 것이 서적에서 증험되니, 감히 산행을 위하여 고하고 노모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백반 한 그릇과 맑은 물 한 잔을 올리니 정결하고 공경함을 귀히 여기시어 부디 흠향하소서.”

라고 하였다.

제문을 다 짓고서 술을 따르려 하는데, 백욱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모두 마야부인이라 하는데 그대는 위숙왕후라고 확신하니,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면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위숙왕후든 마야부인이든 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산신령에게 술을 올릴 수는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백욱이 말하기를,

“‘태산(泰山)의 신이 임방(林放)만 못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하였고, 국가에서 분향을 할 적에 산신령에게 하지 않고 성모(聖母)나 가섭에게 하였으니, 그대는 어찌 하려 하십니까.”

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두류산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산을 진압하는 신령을 버려두고 음사(淫祀)를 번거롭게 행하는·것은 질종(秩宗) 의 잘못입니다.”

라고 하고서, 마침내 제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반평생 동안 운기(雲氣)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을 뿐, 그것이 허공에 있는 물건인 줄 몰랐는데 여기 올라와보니 구름이 눈 아래 평평히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구름이 평평히 깔린 곳은 대낮인데도 반드시 그늘이 드리웠을 것이다. 해질녘에 남기(嵐氣) 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석문(石門)을 통해 내려가 향적사에서 묵었다.

이 절의 승려가 치하하기를,

“이 늙은이가 이 절에 머문 지 오래되었는데, 올해에 상봉을 보고자 하는 승려와 속인들이 많았으나, 비바람과 구름에 가려 두류산 전체를 본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날씨가 흐려 비가 올 듯하였는데 상봉에 오르자 날씨가 맑게 개었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앞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금강대(金剛臺)라고 하였다. 바위에 올라보니, 흰 구름이 항상 감싸고 있는 기이한 봉우리가 무수히 보였다.

법계사에서 상봉에 이르고 또 향적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층층의 비탈길을 돌아서 갔다. 비탈진 바위에는 모두 석심(石蕈)이 나 있었다. 산은 모두 첩첩의 돌뿐이었고 낙엽이 돌 틈에 끼여 썩었으며 초목이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짧았는데 모두 동남쪽으로 쏠려 있고, 구부러지고 덥수룩하여 가지와 잎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는데 상봉 쪽이 더욱 심하였다.

두견화(杜鵑花) 한두 송이가 막 피기 시작하여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니 바로 2월 초순의 기후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산 위에는 꽃과 잎이 5월이 되어서 성대해지고, 6월이 되면 시들기 시작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백욱에게 묻기를,

“봉우리가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먼저 양기를 얻을 듯 한데 도리어 뒤늦게 피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땅과 하늘의 거리는 8만 리이고 우리가 며칠 동안 걸어서 상봉에 이르렀지만 상봉의 높이는 지상에서 백 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늘까지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양기를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고 홀로 우뚝 솟아 먼저 바람만 맞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생물은 높은 곳을 꺼릴 듯 하지만 높은 곳에 있으면 비바람을 면치 못하고 낮은 곳에 있어도 도끼에 찍히는 액운을 만나게 되니,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요?”

라고 하였다.

향적사 곁에 큰 목재 수백 개가 쌓여 있어서 승려에게 무엇에 쓸 것인지를 묻자 승려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호남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구걸하여 섬진강까지 배로 실어온 뒤 하나하나 옮겨다놓은 것입니다. 이 절을 새로 지으려고 한 지 6년이나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들의 학궁(學宮)에 대한 정성은 아직 미치지 못하는구나. 석가의 가르침이 서역에서 기인하였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어 문선왕(文宣王) 을 능가하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사교(邪敎)에 탐닉하는 것이 우리들이 정도(正道)를 독실히 믿는 것과 다르구나.”

라고 하였다.

이 절에서는 바다를 볼 수 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바다는 넓고 육지는 적은데, 우리 청구(靑邱)는 산이 평지보다 많고 국가의 인구는 날로 번성하여 수용할 곳이 없으니, 그대는 자비심이 많으니 어찌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두류산이 뻗어내린 뿌리를 거슬러 올라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평평하게 깎아내려 남해를 메워서 만리의 평원을 만들어 백성들이 살 곳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복전(福田)을 삼으면 정위(精衛)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도록 구름이 덮인 산 속 석실(石室)에서 금단(金丹) 을 수련하여 그네들 열반(涅槃)의 도를 버리고 저 장생(長生)의 도술을 배워서 두류산이 골짜기가 되고 남해가 뽕나무 밭이 되기를 기다리시오. 그런 뒤에 함께 장수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소?”

라고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인연이 맺어지길 원합니다.”

라고 하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가섭의 석상이 있었다. 당 안에는 찬(贊)이 적힌 가섭도(伽葉圖)가 있는데, 비해당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 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명산에 공적으로 보관해두고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유람하며 감상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라고 하여 가져가지 않았다. 백성들이 시주하여 가섭상에 복을 비는 것이 천왕봉의 성모상에게 비는 것과 같았다.

밤에 법당에서 묵었는데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이 휘몰아쳐 문짝을 후려쳤다. 사람을 엄습하는 찬 기운이 매우 사나워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25일, 계축일.

산 등성이를 타고 서쪽으로 내려갔다. 등성이의 북쪽은 함양 땅이고 남쪽은 진양(晉陽) 땅이다. 한 가닥의 오솔길이 함양과 진양을 나눠놓았다. 오랫 동안 방황하며 조망하다가 다시 그늘진 숲 속으로 갔다. 그러나 모두 산이 흙으로 덮여서 길을 찾을 수 있었고 매를 잡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솔길이 나 있어서, 상원사(上元寺)와 법계사로 오르던 길만큼 심하지 않았다.

산 정상에서 서둘러 내려와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이르렀는데 절은 평지에 있었다. 벽면에는 김언신(金彦辛)․김미(金楣)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고, 승려 30여 명이 정진하고 있었다. 대나무 숲과 감나무 밭 사이에 채소를 심어 식용으로 삼는 것을 보고서야 인간 세상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머리를 돌려 청산을 바라보니 안개와 노을이 드리우고 원숭이와 학이 노니는 선경(仙境)을 떠나온 회포가 벌써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주지 법해(法海)는 승려다웠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떠났다. 높은 길을 오르기 싫어 바로 시냇물을 따라 흰 돌을 밟으며 내려갔는데 맑고 그윽하여 즐길 만하였고, 지팡이를 짚고 서서 노니는 물고기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렀다. 절 앞에 맑은 못과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저녁 내내 놀 만하였다. 이 절은 시냇가에 세워져서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빼어나 유람 온 사람이 돌아가기를 잊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어두워질 무렵 절 안으로 들어가니, 이 절은 불법을 닦는 도량이라 하였다. 종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고 사람들이 떠들썩하여 멍하니 정신을 잃을 듯 하였다.

이 날 약 40여 리를 걸었는데 산길이 험준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모두 말하기를,

“잘 걸으십니다. 잘 걸으십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 역졸이나 심부름꾼이 달리는 말을 뒤좇아가는 것을 보고서,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번 산행을 하면서 처음에는 발걸음이 무거운 듯 했는데 날이 갈수록 두 다리는 점점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제서야 모든 일이 습성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26일, 갑인일.

나는 항상 쌍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이 날에서야 지팡이를 버리고 말을 탔다. 운중흥(雲中興)․요장로(了長老) 두 승려가 동구 밖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한 외나무다리에 이르러 요장로가 말하기를,

“근세에 퇴은(退隱) 선사가 신흥사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문도에게 말하기를, ‘손님이 오실 것이니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거라.’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등나무 덩쿨을 엮어 걸이와 고삐를 한 흰 말을 타고 빠르게 건너오는데, 외나무다리 건너는 것을 평지와 같이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절에 도착하자 스님이 방으로 맞아들여 밤새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인지 듣고 기억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작별하고 떠나려하니,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강씨(姜氏) 성을 가진 젊은이가 그 특이한 손님을 기이하게 여겨 말의 재갈을 잡고 그를 따라가려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채찍을 휘두르며 떠나는 바람에 소매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는데 젊은이가 황급히 그 책을 주웠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 잘못으로 속세의 하찮은 사람이 취하여 보도록 하였구나. 보배처럼 소중히 여기고 삼가하여 감춰두고 세상에 보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마치자 급히 떠나 다시 외나무다리를 지나갔습니다. 젊은이는 지금 백발 노인이지만 진양의 경계에 살고 있으면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 책을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고운 최치원인데, 죽지 않고 청학동에 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은 비록 상고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기록해둘 만하다. 나는 백욱과 시험삼아 그 다리를 건너보려 하였으나, 겨우 몇 걸음 나아갔는데 정신이 혼미하여 떨어질 뻔하여 되돌아와 시내 하류로 내려가 옷을 걷어올리고 건넜다. 걸어서 골짜기 입구를 나왔는데, 산에는 왕대가 많았고, 물은 동네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점점 촌락이 보였는데 서쪽 산기슭에 옛날 화개현(花開縣)이라고 하는 오래된 성루가 있었다.

5리를 가서 시내를 건너는데 수석(水石)이 늘어서 있었고 동쪽으로 1리를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였다. 두 바위가 마주 대하여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광제암문’이란 글자와 비교해보니, 크기는 더 커서 말〔斗〕만 하지만, 글씨체는 유사하지 않아서 아동이 습자(習字)를 한 것과 같았다.

석문을 지나 1리를 가니 귀부(龜趺)와 이수〔龍頭〕가 달린 옛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의 전액(篆額)에는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끝부분에 ‘전서국도순관(前西國都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라고 씌어 있었으니, 바로 광계(光啓) 3년에 세운 것이다. 광계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로 지금까지 600여 년이나 지났으니, 오래되기도 하였다. 인물은 보존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며, 운수는 흥하기도 하고 폐하기도하여 서로 끝이 없이 이어지는데 이 비석은 완연히 유독 썩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이번 유람에 비석과 묘갈을 본 것이 많았는데, 단속사 신행(信行)의 비석은 원화(元和) 연간에 세웠으니 광계보다 앞서고, 오대산 수륙정사의 기문은 권적이 지었으니 그도 한 세상의 문사(文士)였는데, 유독 이 비석에 대해서는 감회가 일어나니 그치지 않으니, 이 어찌 고운 최치원의 손길이 상존(尙存)하고 고운이 산수 사이에 노닐던 그 마음이 백세 뒤의 내 마음에 맺히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가령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 쫒아 다니며 고운이 외로이 떠돌며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들과 어울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고운이 오늘날 태어났더라도·반드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여 나라를 빛낼 문필을 잡고서 태평성대를 찬란하게 표현했을 것이며, 나도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이끼 낀 비석을 어루만지니 감개무량하였다.

다만 그 사(詞)를 읽어보니 변려문(騈儷文)으로 되어 있고 또 선사나 부처를 위해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니 왜일까? 아마도 그가 만당(晩唐) 때의 문풍을 배워서 그 습속을 고치지 못한 것이 아닐까? 또한 숨어사는 사람들 속에 묻혀서 세상이 쇠퇴하는 것을 희롱하며, 시속(時俗)을 따르면서 선사나 부처에게 의탁하여 자신을 숨기려 한 것은 아닐까? 알 수가 없다.

비석의 북쪽 수십 보 거리에 백 아람 되는 늙은 회화나무〔槐〕가 있는데, 뿌리가 시냇물에 걸쳐 있었다. 이 나무도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로 이 절의 승려가 후원에 불을 놓다가 잘못하여 회화나무 가운데까지 번져 거목이 쓰러지고 말았다. 썩다 남은 밑둥이 10여 자 남짓 되겠는데, 거처하는 승려들은 아직도 그 뿌리 위를 오가며 금교(金橋)라고 부른다. 아! 식물도 생기가 있어 돌처럼 장수(長壽)하지 못하는구나.

절의 북쪽에 고운이 올랐던 팔영루(八詠樓)의 옛터가 있어서 거처하는 승려 의공(義空)이 자재를 모아 누각을 세우고자 한다고 하였다. 의공과 잠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물어보니, 그 승려가 말하기를,

“관청에서 은어를 잡는데 물이 불어나 그물을 칠 수 없어서 조피나무〔川椒〕껍질과 잎을 물에 풀어 잡아야 하는데 승려들에게 채취해오라고 독촉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승려들에게 살생에 쓰이는 물건을 마련하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라고 하여, 나도 오랫동안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대사의 백성들이 이정의 포학에 시달린다고 들었는데, 쌍계사의 승려들도 물고기 잡는 물건을 바쳐야 하니, 산속도 편하지 않구나.

 

27일, 을묘일.

비 때문에 길을 떠나지 못하였다.

 

28일, 병진일.

쌍계사의 동쪽으로 다시 지팡이를 짚고 돌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위태로운 잔도(棧道) 를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몇 리를 가니,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 짓고 살 만한 곳이 나왔다. 세상에서 이곳을 청학동이라 하였다. 이어 우리들은 이곳에 올 수 있었는데,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는 어찌 이르지 못했는가. 아마도 미수가 여기에 이르렀는데 게으름을 피워 살피고 기록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청학동은 없는데 세상의 소문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인가.

앞으로 수십 보를 가니 가파른 골짜기가 나와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佛日庵)이라 하였다.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고, 사방의 산은 기이하고 빼어나 비할 데 없이 상쾌하였다. 동쪽과 서쪽으로 향로봉이 있는데, 좌우로 마주 대하고 있었고 아래에는 용추(龍湫)와 학연(鶴淵)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

“매년 늦여름이 되면 푸른 몸에 붉은 정수리와 긴 다리를 가진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이는데, 용추로 날아 내려 물을 마시고 곧 떠나갑니다. 이 암자에 거처하는 승려들은 여러 번 보았는데, 이 새를 청학(靑鶴)이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어찌 하면 청학을 곁으로 오게 하여, 거문고를 뜯으며 동반할 수 있을까? 암자의 동쪽으로 눈이 내리듯 하얗게 떨어지는 샘이 있는데, 천 길 벼랑으로 떨어져 학연과 용추로 들어가니, 이곳은 지극히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등구사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16일이 지났는데 지나는 곳마다 온갖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고 많은 골짜기 물이 다투어 흘러 기쁘고 놀랄만한 경치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곳은 불일암 뿐이었다. 또한 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미수가 찾던 곳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의심했지만 계곡이 높고 가팔라서 원숭이가 아니면 다닐 수 없고, 처자식을 데리고 소를 끌고 들어오더라도 용납할 곳이 없었다. 암천사(巖川寺)와 단속사 같은 곳은 모두 승려들의 도량이 되었고,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백욱이 말하기를,

“소나무와 대나무 둘 다 아름답지만 솔이 대만 못하고, 바람과 달 둘 다 청량하지만 바람은 중천(中天)에 그림자를 드린 달의 기이함만 못하며, 산과 물 모두 인자(仁者)․지자(智者)가 좋아하지만, 산은 공자(孔子)께서 ‘물이여, 물이여!’라고 탄식한 것만 못합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대와 길을 떠나 악양성(岳陽城)으로 나가서 큰 호수의 물결을 보고 싶습니다.” 라고 하기에,

나도, “그럽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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