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의 원형격인, 100년 앞선 고지도

2009. 6. 28. 23:31山情無限/山



 
대동여지도의 원형격인, 100년 앞선 고지도가 잠자고 있다
신경준의 북방강역도…백두대간 개념 정립한 실학자의 역작


 

신경준의 산수고보다 약 100년 후인 1861년에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청구도, 동여도 등은 국보처럼 귀중하게 보존되어 있고, 김정호의 영정이나 동상, 기념표지석도 여러 곳에 세워져 전 국민적으로 선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토지리서를 집대성하고 백두대간의 논리를 정립한 신경준의 영정이나 동상은 찾아볼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단지 신경준은 팔도지도와 동국여지도를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신경준의 출생지인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는 놀랍게도 신경준의 고지도가 남아 있었으며, 그 지도는 신경준의 8대 직계후손 신장호씨(60)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20일 필자는 오랜 숙원이었던 신경준의 생가유적을 답사하기 위하여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을 찾았다. 그리고 신경준의 후손 신장호씨를 만나 신경준의 고지도를 확인한 후 한 지리학도로서 심장이 멈출 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이 지도는 이미 전북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며, 순창읍 가남리 그의 유적지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고지도는 신경준(1712-1782)이 군사 목적에서 작성한 것으로, 각각의 명칭은 북방강역도(北方江域圖·필자주=疆域圖의 오기)와 강화 이북의 해역도이다. 신경준은 조선 영·정조(1724-1800) 때의 실학자로 귀래정 신말주의 후손이다. 두 지도 중 북방강역도는 백두산에서부터 압록강·두만강까지의 거리와 지명, 동네이름 등을 적은 것이며, 강화 이북의 해역도는 강화도로부터 압록강 하구 사이에 있는 각 섬과 암초, 해안의 굴곡 등을 표시한 것이다. 둘 다 순 한지를 이용하였으며, 크기는 강역도가 73.5cm x 11.1cm로 창호지 한 장 정도이다. 해역도는 272cm x 83cm로 가로로 세 폭의 종이를 이은 것이다.'

조선 영조(1770)는 ‘문헌비고(文獻備考)가 이루어진 것은 신경준의 강역지(疆域志)에 의거한 것이라 하여 특별히 (공로를 치하하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 신경준이 대동여지도보다 약 100년 앞서 제작한 북방강역도 상의 백두산 부근.
백두대간의 머리부분인 소백산, 허향령, 보다회산이 보이며, 우측에 백두산 정계비가 보인다.


지세 파악과 지리 궁구의 근본 백두대간

산줄기를 알기 쉽게 만든 책이 산경(山經)이고, 물줄기를 정리한 책이 수경(水經)이다. 우리 국토의 산경은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영조 45년(1769)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경표이다. 수경은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1814년 강진에서 쓴 대동수경(大東水經)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산경과 수경을 합치면 나라 땅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일목요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산경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큰 줄기(白頭大幹)를 중심으로 많은 가지(正脈)들이 뻗어 있는 나무 모양과 같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살펴보면 서로 얽히고 설켜 있으나 결코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지 않으며 산줄기도 물줄기를 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경준은 43세 때인 영조 30년에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일하다 서산군수 장연현감을 지내고 58세 때 종부시정(宗簿侍正)을 끝으로 고향인 전라도 순창으로 낙향한다. 이 무렵 영의정이던 홍봉한은 그를 영조에게 천거해서 비국랑(備局郞) 직책으로 다시 관직에 오른다.

영조는 신경준이 지은 강계지를 보고 여지편람(與地便覽)의 감수를 맡겨 편찬하도록 한다. 여지편람은 말 그대로 땅 모습을 보기 쉽도록 만든 책인데, 바로 이 책의 일부가 산경표이다(한중기 글). 여지편람은 모두 2권 2책(乾冊·坤冊)으로 구성돼 있는데, 건책이 바로 산경표이며,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경표는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 산경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 등 모두 세 가지다. 산경표는 자연 지명인 산이름과 고개이름 등을 표기하고, 기술은 족보기술법에 따르고 있는데, 등장하는 자연지명은 총 1,650개이며, 이 가운데 산이름과 고개이름이 1,500개 정도이다.

산경표는 신경준의 산수고와 전혀 다른 책?
 
'산경표는 신경준의 산수고와는 체제, 내용, 양식이 전혀 다른 책‘이라고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는 '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논문에 다음과 같이 발표한 바 있다.

'산경표를 신경준의 작으로 단정하고 있으나 신경준이 지은 책은 아니다. 이의 근거로 일본 정가당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輿地便覽)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여지편람이 영조가 동국문헌비고 편찬의 과정에서 언급한 여지편람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점, 현전하는 산경표에는 19세기 초에 변화된 지명 등이 기재된 점, 산경표에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 신경준의 산수고는 우리나라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水經)과 수위(水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던 사실을 신경준의 산수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날줄(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한 것이다.

신경준은 왕명에 의한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함으로써 당시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정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동국문헌비고는 13고(考) 1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여지고는 17권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핵심적인 위치를 구성하였다. 이 여지고는 신경준의 여러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저술들을 종합 정리하는 차원에서 편찬된 것으로, 고려와 조선 전기 자료와 연구성과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전문적으로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한백겸, 유형원, 홍만종, 임상덕 등 관련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종합 정리하였다.

따라서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한백겸 이후 일련의 역사지리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지고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백과전서학적 연구에 개인들이 발전시켜 온 역사지리학의 연구성과를 정부적인 차원에서 최대한 결집시키면서 이룬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발전의 중요한 결과물이다.

대체로 책(文獻)은 정부 기관에서 편찬한 관찬서(官撰書)와 대동여지도와 같이 개인이 편찬한 민찬서(民撰書)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국토지리에 관한 관찬서로는 조선 전기에는 동국여지승람, 후기에는 동국문헌비고(輿地考)라 할 수 있다. 즉 관찬 집대성한 국토지리서가 신경준의 여지고라 평가된다.

산경표의 편찬자는 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나 최남선이 발간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근거로 여암 신경준이 산경표를 편찬하고 연구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위 3종의 산경표를 보다 정밀하게 비교, 분석하여 상이나 오류의 원인을 찾아내고 밝혀야 하겠다.

신경준이 산경표를 편찬한 시기 이전에 제작된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의 우리나라 부분, 그리고 우리나라 전도 중 가장 오래된 1557년경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보 제284호)를 보면 산경표의 대간과 정간, 정맥, 그리고 그로부터 가지 친 기맥까지 나타나 있다.

또 신라 말 도선국사가 남긴 옥룡기(玉龍記)에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해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이라는 내용과 성호 이익(1681-1763)이 편찬 집필한 성호사설에도 백두정간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에 기록된 백두정간은 다음과 같다.



▲ 신경준이 제작한 북방강역도.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북방 국경 이남의 평안도와 함경도를 담고 있다.


'백두정간 ;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祖宗)이다. 철령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여러 산맥이 모두 서남쪽으로 줄달음쳤다. 철령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서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본줄기이고 그 중간에 여러 갈래는 모두 서쪽으로 갈려 갔으니 이것이 풍수에서 말하는 버들가지(楊柳枝)라는 것이다…태백산 소백산 이상의 산세가 이러하므로 물이 모두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영남지방만은 동래와 김해를 좌우로 싸고돌아서 문막이가 되었다. 이것은 곧 산이 끝난 곳에 물이 합류된 형국으로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흔적없이 제거된 것이다. 왼쪽으로 동해를 옆으로 끼고 있어 큰 호수와 같이 되어 백두산의 큰 산맥과 더불어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같이했다…오른쪽 산맥은 지리에 이르러 끝났는데 그 상태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온 듯 웅장하고 기운차서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

위와 같이 산경표가 정리되기 이전에 이미 산경표의 개념이 지도제작 과정에 도입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경험으로 누적된 이론을 신경준이 족보기술식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산경표이며, 이 책은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지리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집대성한 지리서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1913년 조선광문회가 발간한 책명으로 당시 최고의 지리서인 산수고와 여지고를 바탕으로 기록을 추가, 보충하여 발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769년 영조가 강역지 편찬에 관해 물었을 때, 신경준은 360주의 각읍 지도를 따로 만들 것을 건의하였으며, 동국문헌비고 편찬을 진행하면서 영조의 명에 따라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제작하였다. 신경준의 산수고는 우리나라의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의 분(分)·합(合) 체계로 파악한 한국적 지형학을 정리하였다. 이 책은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이루고 있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지리서이며, 한국적인 산천 인식방식을 전해 준다. 산수고의 머리글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산(山)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은 물(水)이다. 산수(山水)는 열둘로 나타낼 수 있으니, 백두산으로부터 12산으로 나누어지며, 12산은 나뉘어 팔로(八路)가 된다. 팔로의 여러 물은 합하여 12수(水)가 되고, 12수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와 나누어지고 합함의 묘함을 여기에서 가히 볼 수 있다.’

조선광문회가 최성우(崔誠愚) 소장본을 대본으로 1913년 단행본으로 간행한 산경표(신연활자본)에는 ‘편찬자는 알 수 없다(撰者未考)’고 하면서도 서문(解題)에서 신경준의 여지고를 다음과 같이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

신경준의 여지고와 산수고는 이와 같이 우리나라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특히 조선의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水經)과 수위(水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날줄(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대동여지도는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지도로 신경준의 산수고나 산경표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거대한 산줄기로 국토의 근골(筋骨)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지었는데, 동해안·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각각의 강을 경계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하였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을 이루는 주요 산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청북정맥, 청남정맥 분기점까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두대간(白頭大幹) ; 백두산(白頭山) 연지봉(檎脂峰) 허항령(虛項嶺) 보다회산(寶多會山) 사이봉(沙伊峰) 완항령(緩項嶺) 어은령(漁隱嶺) 원산(圓山:장백정간의 분기점) 마등령(馬騰嶺) 괘산령(掛山嶺) 황토령(黃土嶺) 천수령(天秀嶺) 조가령(趙哥嶺) 후치령(厚致嶺) 향령(香嶺) 태백산(太白山) 부전령(赴戰嶺) 대백역산(大白亦山) 황초령(黃草嶺) 사향산(麝香山) 설한령(雪寒嶺) 낭림산(浪林山)'

이 지도에서는 백두산-소백산-허항령-보다회산-사이봉-완항령 등으로 표기되어 산경표의 기록과 대부분 일치함을 보이고 있다. 단 이 지도에 표기된 소백산은 산경표에서는 연지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백두산-연지봉(連枝峯)-소백산으로 표기되어 차이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 보다 정밀한 지도상 비교 분석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국가적, 민족적인 큰 업적을 남긴 여암 선생의 영정은 전주시 어린이박물관에 초라하게 게시된 것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고 하니 오직 가슴이 아플 뿐이다. 실학의 창시자를 유형원이라고 하고 집대성자는 다산 정약용이라고 하듯이, 우리나라 근래 지리학의 비조는 양성지(梁誠之·1415-1482)와 한백겸(韓百謙·1552-1615)을 들 수 있으나, 그 집대성자는 백두대간의 개념을 정립한 신경준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형석 교육학 박사·한국땅이름학회 회장·한국하천연구소 대표

 

산경표(山經表)
 
조선 영조 때에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산맥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으로 표의 기재 양식은 상단에 대간·정맥을 표시하고 아래에 산·봉·영·치 등의 위치와 분기관계를 기록하였다.

난외 상단에는 주기(註記)로 소속 군현을 명기하였다. 백두대간과 여기에 연결된 14개의 정간·정맥으로 구분되어 있다. 조선의 산맥체계를 수계(水系)와 연결시켜 정리한 책으로,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일본인이 분류하고 명명한 산맥구분 및 산맥명칭 이전의 조선의 전통적인 산지 분류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 1913년 조선광문회가 활자본을 간행하였다. 1책. 필사본. 규장각도서.

신경준(1712-178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로 호는 여암(旅庵)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휘릉별검(徽陵別檢)·전적(典籍), 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 정언(正言)·장령(掌令)을 지내고, 1762년 서산군수로 나갔다. 이어 장연현감·헌납(獻納)·사간(司諫)·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1770년 문헌비고 편찬에서 여지고를 맡아 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1771년 북청부사, 1773년 좌승지·강계부사·순천부사, 이듬해 제주목사, 17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의복(醫卜)·법률·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저서에는 여암집,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등이 있다.<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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