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25. 00:47ㆍ山情無限/山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사
등정은 난관을 통해 얻은 하나의 자유였다
글·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에베레스트 서릉은 로라(Lho La)에서 정상까지 길이가 장장 4.8km에 달하며, 난이도 5급의 암벽을 해야 하는 에베레스트 최고난도의 능선이다.
미국대의 서릉 초등… 최초의 에베레스트 트래버스
언솔드, 하산길 심한 동상으로 발가락 10개 잃어
1963년 미국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대는 서릉의 상부 난코스 암벽지대를 피하기 위해 북서벽의 혼바인 쿨와르로 우회하여 등정한 후 남동릉으로 하산해 역사적인 에베레스트 트래버스에 성공했다. 그들은 웨스턴 쿰 제2캠프(6,507m)에서 출발, 웨스트 숄더(7,150m)에 제3캠프를, 서릉 상의 7,650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두 번의 위기를 겪었다.
5월 17일 밤 자정 강풍이 제4캠프를 강타해 지원조 코베트와 오텐 대원이 잠들어 있던 텐트의 고정로프를 끊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의 텐트는 티베트 쪽 설벽으로 미끄러져 내리며 가속이 붙었다. 텐트 속에서 사람과 산소통, 식량, 장비가 뒤범벅되었다.
다행스럽게 그들의 텐트는 46m 추락하고 움푹 파인 레지(ledge)에 걸려 가까스로 정지했다.
▲ 혼바인 쿨와르 하단을 등반 중인 미국대
다음날 3명의 대원들이 머물고 있던 혼바인의 텐트가 허리케인의 위세를 견디지 못했다. 또 다시 텐트의 버팀 밧줄이 절단되고, 텐트가 강풍에 날려 설사면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대원들은 텐트 속에서 필사적으로 폴에 매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사력을 다해 텐트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강풍 속에서 몸을 숙인 채 아이스 액스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제3캠프로 하산했다.
5월 20일 그들은 등반을 재개해 제4캠프에서 다시 비박했다. 그들은 대각선 골을 따라 설원에 도달한 후, 옐로밴드(Yellow Bands) 하단부의 8,306m 지점에 위치한 작은 플랫폼에 도달했다. 지원조는 하산하고, 혼바인과 언솔드는 그 플랫폼에 2인용 텐트로 제5캠프를 구축했다.
다음날 그들은 각자 20kg의 짐을 짊어지고 제5캠프를 출발했다. 언솔드가 쿨와르(나중에 혼바인 쿨와르로 명명됨) 속의 폭 3~4m, 경사 50도의 무른 설벽에 갈지자(之)로 스텝을 깎거나, 아니면 쿨와르의 측면 바위를 이용하며 30m를 오르고 혼바인과 선등을 교대했다. 그들은 4시간 동안 겨우 120m를 전진했다. 쿨와르는 오를수록 어깨 넓이로 좁아져 사람 하나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매우 좁은 설벽으로 변했고, 높이 18m의 암벽이 쿨와르를 가로 막았다. 혼바인이 푸석푸석한 암벽을 오르려다 실패했고, 언솔드가 어렵사리 이 절벽을 돌파했다.
그들은 무른 절벽에 하강용 자일을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탈출로는 위쪽으로만 열려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기분이었다. 그들은 높이 30m의 황색 슬랩과 단단하게 얼어붙은 설벽을 돌파하고, 드디어 쿨와르를 벗어나 서릉 상부를 향했다. 그들은 시속 96m의 강풍 속에서 사력을 다해 마지막 암벽지대를 지나고 설빙지대에 도달했다. 3주 전에 사우스 콜 팀의 위태커 대원이 남동릉으로 등정하고, 정상에 꽂아 놓은 성조기가 12m 위쪽의 정상에서 바람에 펄럭였다. 그들은 오후 6시 15분 정상을 밟았다. 그들은 정상에서 20분간의 시간을 보냈다. 언솔드는 무전기로 미국의 유명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를 암송했다.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걸어 가야 할 먼, 먼 길이 있다.”
그날 남동릉으로 2차 등정한 미국 사우스 콜 팀의 저스태드와 비숍 대원들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 발자국을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그들은 남봉(8,763m) 밑에서 저스태드와 비숍 대원을 따라 잡았다.
그들은 자정 무렵 8,534m 지점에서 탈진해 더 이상 하산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텐트도 없이 두 사람씩 부둥켜안고 혹한과 싸우며 새벽에 사우스 콜로 내려왔다. 언솔드는 그 대가로 나중에 심한 동상에 걸린 발가락 10개를 모두 절단해야 했다.
프랑스대의 서릉 직등 루트 등정 시도
눈사태로 게라 대장과 다섯 셰르파 비극 당해
1974년 게라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등반대가 에베레스트 서릉 직등을 시도했다. 쿰부빙하 아래에서 이 능선의 등반 기점인 로라(Lho La)로 접근하려면 가파른 빙벽, 혹은 암벽을 돌파해야 한다. 로라는 티베트와 네팔의 국경 상에 위치, 그곳에서 야영하다가는 국경을 침범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네팔 당국은 프랑스대에게 로라고개를 우회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쿰부빙하 아래 좌측 암벽으로 등반을 시작해 웨스트 피크(웨스트 숄더) 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두 바위 사이 5,834m 지점에 제1캠프를, 로라 위쪽의 설벽 6,437m 지점에 제2캠프를, 웨스트 숄더의 산마루에 가까운 지점, 즉 6,940m 지점에 제3캠프를 구축했다. 그런데 이 루트는 눈사태의 통로였다.
9월 9일 저녁 거대한 눈사태가 제2캠프를 덮쳤다. 부등반대장 파요는 심설 속에 목까지 파묻혔다가 구조되었고, 피에르 대원도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다. 게라 대장과 4명의 셰르파가 눈사태에 파묻혀 실종되었고, 제1캠프에 있던 셰르파 한 명은 후폭풍에 180여 m를 날아가 추락사했다. 등반은 이 참사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 서릉직등루트 개념도
유고대의 서릉 직등 루트 등정과 비극
1979년 3월 31일 유고의 토네 슈카리아(Tone Skaria) 대장을 포함한 25명의 대원들과 7명의 셰르파들이 18톤의 장비를 에베레스트의 쿰부 베이스캠프(5,350m)로 운반했다. 그들은 프랑스대의 루트 좌측에 있는, 난이도 4급과 5급의 암벽 지대를 돌파하고, 국경 침범을 피하기 위해 로라(6,050m)고개의 좌측 쿰부체(6,640m) 설사면에 도달했다. 최종 200m는 난코스였다.
그들은 여러 동의 텐트들을 설치하고 설동을 파서 제1캠프(알피나 Alpina)를 구축했다. 그들은 4~5급의 록밴드를 돌파하며 웨스트 숄더 정상을 향했다. 그들은 가파른 사면 6,770m 지점에 제2캠프(인듀플라티 Induplati)를, 웨스트 피크 아래 7,120m 지점에 제3캠프(라지카 Rasica)를 구축했다.
그들 앞에 경사도 35도의 설릉이 2.4km 거리로 뻗어 있었다. 그들은 설릉 끝 7,520m 지점에 제4캠프(크르카 Krka)를 구축했다. 그들 앞에 가파른 바위능선이 솟아 있었고, 능선 상에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작은 암탑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막을 찢어놓을 것 같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진동했다. 시속 144km의 강풍이 5일간 등반을 방해했다. 강풍이 그친 후 등반을 재개한 그들은 8,120m 지점에 제5캠프(에네르고인베스트)를 구축했다.
5월 10일 그로셀리(Victor Groselj)와 만프레다(Marian Manfreda) 두 대원이 1차 공격조로 나섰다. 그들은 암벽지대에서 루트가 헷갈려 루트 파인딩에 고초를 겪었고, 산소장비가 고장을 일으켰으며, 또한 혹한으로 인해 심한 동상에 걸렸다. 만프레다 대원이 첫 번째 난코스인 침니(chimney, 난이도 V급)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돌파하고, 이 구간을 ‘만프레다 침니’라 명명했다. 그들은 서릉 상의 8,300m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날이 저물어 퇴각했다.
이틀 후 포드베프섹(Podbevsek)과 로바스(Robas)가 2차 등정을 시도했으나, 그들 역시 시간이 부족해 퇴각했다. 다음날 슈템펠리(Stemfelj) 형제, 즉 안드레이와 마르코, 차플로트니크(Zaplotnik) 세 사람은 강풍과 영하 35℃의 혹한 속에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 후 마르코는 산소장비 고장으로 인해 퇴각했다.
안드레이(당시 23세)와 차플로트니크(당시 27세) 두 사람은 난이도 2급과 3급의 루트를 오르고, 서릉의 두 번째 난코스인 난이도 5급 한 피치와 4급 두 피치를 돌파하고 오후 1시51분 정상을 밟았다. 그들은 혼바인 쿨와르 루트로 하산해 저녁 늦게 제4캠프로 귀환했다.
5월 15일 벨락(Belak), 보칙(Bozik), 두 대원들과 셰르파 앙푸도 등정에 성공했다. 유감스럽게도 에베레스트를 두 번 등정한 노련한 산악인 셰르파 앙푸는 혼바인 쿨와르를 통해 제4캠프로 내려서다가 추락사했다.
다음 글은 등정자 차플로트니크의 서릉 직등기의 초록이다.
고산등반은 자신과의 싸움
우리 세 사람은 밤 2시 제5캠프에서 기상해 등반을 준비했다. 텐트의 버팀 줄이 강풍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곧 끊어질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날은 우리가 생사와 씨름하는 고투(苦鬪)의 하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나는 오랜 숙원(宿願)을 실현하다가 동상으로 발가락들을 상실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여겼지만, 손가락들은 무사하게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릉 직등 루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인들 마다하겠는가?
우리는 산소를 분당 0.5리터 흐르도록 조정하고 오전 5시에 출발했다. 주변 아래쪽의 모든 산정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내가 선등하고 있었는데, 마르코가 뒤쪽에서 자신의 산소 밸브가 고장 났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예비 밸브로 교체했지만 여전히 산소가 새어나와 눈물을 머금고 하산했다.
나는 이런 불행한 사건에 분노가 치밀어, 분을 삭이려고 나의 아이스 액스로 바위를 세차게 내리쳤다. 아이스 액스, 바위, 제구실을 못 하는 산소 밸브, 모든 것들을 당장 박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 서릉 루트 개념도
눈 무더기가 산재한 가파른 바위벽으로 트래버스를 하니까 서릉에서 뻗어 내린 높은 걸리(gully)가 나타났다. 안드레이가 내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는데, 뒤에서 불길한 쉿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의 밸브에서 산소가 새어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내 산소 밸브로 그의 고장 난 밸브를 교체했다. 그래도 여전히 산소가 새어 나왔다. 나는 그 고장 난 밸브를 빼내어 절벽 밑으로 던져 버렸다. 산소통도 함께 던져 버리고 싶었다. 내가 말했다.
“안드레이, 내 산소장비를 휴대하고 앞장서게. 나는 무산소로 뒤따를 테니.”
그러나 그는 영하 40℃의 혹한과 시속 120km의 강풍이 맹위를 떨치는데, 산소 없이 등반한다는 것은 내 생명을 담보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안드레이의 고장난 밸브를 산소통에 다시 부착하고, 어디서 산소가 새는지 알아보려고 그 밸브에 침을 발랐다. 놀랍게도 침이 혹한으로 작은 구멍에 갑자기 얼어붙으며 쉿 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소리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그 구멍을 정신없이 계속 핥았다. 내가 그 금속 밸브를 얼마나 세차게 핥았던지, 내 혓바닥의 피부조각이 벗겨져 그 구멍에 달라붙어 얼어서, 우리가 등정을 마칠 때까지 그 밸브에서 산소가 다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걸리로 등반하는 중에, 홀드가 없는 수직 침니가 등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침니의 좌측 슬랩에 1차 공격조 만프레다 조가 설치한 백색의 자일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얼음 자일에 유마르(jumars, 등강기)를 걸고 크램폰의 발로 미끄러운 화강암 슬랩을 긁으며 침니를 오르고 있었다.
나는 1분간 4리터의 산소가 흐르도록 밸브를 조정했지만,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자일에 유마르를 걸고 오르면서, 숨이 막혀 악전고투했다. 안드레이는 침니 아래쪽에서 나의 등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나는 가끔 로프에서 미끄러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안전벨트가 조여들어 호흡이 곤란했고, 곧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어렵사리 로프의 맨 꼭대기에 도달했다. 산소를 절약하기 위해 산소장비의 밸브를 잠갔다. 걸리 위쪽은 두 개의 쿨와르로 갈라져 있었다. 전날 로바스와 포드베프섹은 오른쪽 쿨와르를 택해 올랐으나 뾰족한 암탑 위에서 등로가 막혀 퇴각했고, 다시 좌측 쿨와르를 통해 위쪽 능선에 도달했을 때는 오후 3시였다. 그들은 시간이 모자라 퇴각했다.
우리는 좌측 쿨와르를 오르고 능선 밑의 가파른 바위 스텝(rock step, 바위 절벽) 밑에 도달했다. 바위 스텝의 모서리는 매끄럽고 살얼음이 얼어 있는 데다가 홀드가 전혀 없었다. 배낭에서 자일을 꺼내 확보하며 등반하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허비될 것으로 염려되었다.
우리는 알프스에서 수차례 훈련했던 대로 확보 없이 단독등반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화강암 크랙에 아이스 액스 끝을 박으며 몸을 끌어 올려 능선 위에 도달했는데, 강풍이 나를 티베트로 날려 보낼 것처럼 무섭게 불어댔다. 안드레이도 확보 없이 스텝을 무사히 올라왔다.
우리들은 돌진하는 강풍의 맹공(猛攻)에 저항하기 위해 설벽 속에 손과 발을 깊숙이 찔러 넣어야 했다. 강풍이 주변의 바위들에 부딪치며 커다란 윙윙 소리를 냈다. 우리가 고도를 높여, 이제는 눕체 능선이 더 이상 남쪽 지평선을 가로막지 못했다. 마칼루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으나 로체가 여전히 풍경을 가로 막고 있었다.
우리들이 쓰고 있던 고글(goggles)은 얼음범벅이 되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설맹(雪盲)에 걸릴 위험을 감수하며, 1분 간격으로 고글의 얼음을 닦아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파른 설릉에 바위 스텝들이 산재해 있어서, 이곳을 돌파할 때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 에베레스트 서릉
옐로밴드 하부는 슬랩 위에 설벽이 덮여 있었고, 또한 가파른 절벽 구간도 있어서 돌파가 어려웠지만, 밴드의 중앙 부분부터는 등반이 수월해졌다. 아마 우리가 등정에 너무 몰두했기 때문에 사소한 사건들은 망각의 강으로 영원히 흘려 보낸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풍이 우리를 능선에서 날려 보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사실은 잊으려 애써도 망각할 수 없었다.
위쪽 능선에 제2의 난코스 ‘회색 스텝(Grey Step, 일명 Grey Towers)’이 불쑥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높이가 100m나 되었고 수직벽 또는 오버행으로 이루어졌다. 스텝의 좌측 2~3m 지점에 크랙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직등 가능성이 엿보였다. 크램폰을 벗으려고 장갑을 먼저 벗었다. 그러나 안드레이가 스텝의 우측 모서리를 돌아가, 스텝의 남서벽 쪽으로 등로를 찾아냈다.
벽의 첫 번째 구간은 좌측 크랙보다 더 난코스인 것처럼 보였으나, 차츰 수월해졌다. 내가 푸석푸석한 바위의 작은 레지 위에 올라서니 무시무시한 가파른 절벽이 내려다 보였다. 남서벽에서 한 번 실수로 슬립하면 웨스턴 쿰까지 2,500m를 수직으로 추락할 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쳤다.
설벽에 작은 발판을 깎고 무른 암벽에 피톤을 박았다. 장갑을 벗고 안드레이의 확보를 받으며 오버행 크랙에 달라붙었다. 나의 맨 손가락에 얼음 같은 바위의 냉기가 즉시 전해 왔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 암벽을 몇 발짝 오르니까 손가락은 얼어서 마비되었다. 나는 밸브에 최대량의 산소가 흐르도록 조정했지만, 그것은 혹한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 등에 짊어진 15kg의 짐이 나를 자꾸 아래쪽으로 끌어내리려 안달했다.
나는 핸드홀드가 부서지며 아래쪽 눈밭으로 추락했지만, 안드레이의 침착한 확보 덕분에 무사했다. 나는 오버행에 다시 덤벼들었다. 조금 위쪽에서 이번에는 풋홀드가 부서지며 두 손의 손가락 힘으로 암벽에 매달려 버둥거리다가 다시 추락을 반복했다. 안드레이가 시계를 보고 나서 12시15분 전이라고 했다. 나는 오버행 좌측 밑의 혹처럼 튀어 오른 암각에 자일 올가미를 씌우고, 그것을 풋홀드로 이용하려 했지만 올가미가 곧 벗겨져 실패했다.
나는 어렵사리 작은 풋홀드를 찾아내, 그것을 딛고 의지력을 총동원해 눈 덮인 작은 레지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고산 등반은 산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투쟁이라고 생각되었다. 즉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일이 최대 관건(關鍵)이었고, 죽음 아니면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와 맞닥뜨릴 때도 있었다. 즉 고산 등반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는 좁은 레지를 따라 우측 크랙까지 이동했다. 이곳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등반해야 했고, 손가락이 이내 혹한으로 마비되었다. 나는 2cm의 얕은 크랙에 피톤을 박았다. 하늘에 구름떼가 몰려들고 있었다. 파노라마 속의 마칼루를 거들떠볼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그 순간 애지중지했던 마칼루는 관심 밖의 대상이 되었고, 그 생지옥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후등자 안드레이가 등반하는 동안 피톤이 그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졌다. 우리 두 사람은 사실상 그 피톤에 의존해 절벽에 매달린 셈인데, 그 피톤이 부러지지 않고, 혹은 빠지지 않고 버티어 낼 수 있을까 가슴 졸였다. 나는 그 순간 공포심을 떨쳐버리고 오직 행운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레이는 등강기에 의존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몸은 로프와 안전벨트에 옥죄여, 그는 절반쯤 질식 상태에 빠졌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절벽에서 발 디딤돌을 찾아내고 나에게로 무사히 올라왔다. 내 기억 속에서 과거 알프스에서서 그와 겪었던 혹독한 훈련 등반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우리들은 함께 매일같이 폭염과 폭우 속에서, 심설과 진흙탕 속에서 얼마나 자주 사력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던가? 우리들은 과거에 심었던 것을 이제야 수확을 거두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는 변함없는 우정으로 함께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산에서는 친구와의 우정이 등정보다 더 값진 가치를 지닌다.
▲ 직등루트를 등정한 유고대의 안드레이와 차를로트니크 /
불가리아대의 프로다노프. 무산소등정 후 실종됐다(오른쪽).
우리는 산소통을 새것으로 교환하고 빈 산소통을 심연 속으로 던져버렸다. 다음 피치는 안드레이가 선등했다. 나는 그의 확보를 받으며 재빠른 동작으로 뒤따라 올랐다. 우리는 드디어 3시간 만에 ‘그레이 스텝’의 꼭대기에 올랐다. 그 사이 강풍은 허리케인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동료들과 무전교신을 했다.
“토네 대장님, 우리는 방금 난코스 ‘그레이 스텝’을 돌파했어요. 3시간 후면 우리가 정상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자네들, 정말 잘했어.”
“토네 대장님, 지금 몇 시예요? 시간이 너무 늦은 건 아닌가요?”
“자네들, 전혀 늦지 않았어. 지금 12시야. 우리는 계속 무전기를 켜 놓겠어.”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레이 스텝’ 밑에 있을 때, 15분 전 12시였고, 이 스텝을 등반하는 데 세 시간쯤 걸렸는데, 대장은 아직도 12시라 하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나는 안드레이에게 시계를 다시 살펴보라고 당부했다. 그는 시계를 보고 대답하기를 틀림없이 12시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세 시간 전에 나의 추락에 마음이 동요되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혼동해 9시를 15분 전 12시로 잘못 보았던 것이다.
나의 손가락은 얼어서 밀랍처럼 백색이었고 무감각 상태였다. 구름이 파노라마를 가려 버렸다. 설사면이 점점 좁아지다가 걸리로 변했다. 그 걸리는 점점 가파르게 치솟아 정상 밑의 스텝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8,600m 위쪽 지대에 도달했다. 능선은 가파르게 뻗어 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혹한 속에서 더 이상 장갑을 벗지 않아도 등반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능선은 칼날 모양의 형태를 취했으나 바위가 단단해 로프를 배낭에서 꺼내지 않았다. 능선 마루를 손으로 잡고 크램폰 발로 남서벽의 수직 슬랩을 긁으며 등반했다.
우리는 암벽 등반에 심취해 우리의 위치가 어딘지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2, 3m 위까지 오르면, 다시 2, 3m 위쪽 지점을 새로운 도달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미끄러운 암벽에서 찾아내기 힘든 작은 풋홀드를 발견하기 위해 얼음이 얼어붙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고글을 벗고 등반해야 했다.
우리는 마지막 가파른 스텝을 올랐다. 경사가 완만한 사면이 나타났다. 강풍이 눈을 날려 보낸 곳에는 검은 자갈이 드러났다. 가파른 설릉 위의 정상에 중국대가 4년 전 설치한 ‘중국인들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알루미늄 측량 삼각대가 보였다. 나는 안드레이를 기다렸다가 그를 앞장세웠다. 가셔브룸 1봉(히든피크, 8,068m)에서는 내가 먼저 등정했으니, 이번에는 안드레이가 먼저 등정할 차례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결국 내 주장을 따랐다.
우리는 정상에서 포옹하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눈물이 나왔다. 등정은 난관을 통해 얻은 하나의 자유였다. 나는 무전기를 잡았다.
“토네 대장님, 우리는 정상에 올랐어요.”
나는 감격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서릉 상부를 등반 중인 유고대의 안드레이.
불가리아대의 서릉 직등 루트 무산소 등정과 비극
1980년부터 1983년까지 5개 등반대가 서릉 직등 시도에서 고배를 마셨다. 영국 소규모 등반대가 웨스트 숄더의 꼭대기 7,150m 지점에서, 일본대가 서릉의 8,750m 지점에서, 1982년 스페인대가 8,500m 지점에서, 프랑스대가 서릉의 유고 루트 7,619m 지점에서, 미국대가 롱북빙하에서 웨스트 숄더에 오른 후 7,925m지점에서 모두 발길을 돌렸다.
1984년 3월 10일, 아프라모프(Avramov) 대장이 이끄는 24명으로 구성된 불가리아대는 에베레스트의 로라고개 밑에 집결했다. 가장 유능한 산악인은 크리스토 프로다노프(Hristo Prodanov, 당시 41세)인데, 그는 1981년 로체를 단독 등정했고, 이번에는 에베레스트를 서릉 직등 루트로 무산소 등정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로라고개에서 시속 96km 이상의 사나운 강풍을 만났는데, 강풍으로 인해 며칠씩 등반이 중단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고 텐트가 강풍에 날려가 버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4캠프에서는 두 동의 텐트를 설치하자마자 버팀 줄까지 날려갔고, 제2캠프에서는 3동의 텐트들이 날려가 대원들이 생존을 위해 설동을 파야 했다. 강풍은 그들의 원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4월 19일 프로다노프와 셰르파 링데는 8,120m 지점에 제5캠프를 구축하고, 다음날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오전 9시 무전 연락에서 프로다노프는, 만프레다 침니를 등반하던 중에 예전 등반대가 남겨둔 빈 산소통을 건드려 그 산소통이 뒤따르던 셰르파의 가슴에 정면으로 맞아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셰르파가 고산병을 핑계로 등반을 포기하고 제5캠프로 귀환했다고 말했다.
프로다노프는 오후 내내 마실 물도 식량도 없이 강풍 속에서 단독등반을 강행, 오후 6시15분 에베레스트의 13번째 무산소 등정자가 되었다. 그는 도취된 목소리로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저는 정상에 올랐어요.”
그는 배낭을 짊어질 기운이 없어 등반 기록이 담긴 8mm 비디오카메라를 배낭에 넣어 정상에 남겨두었다. 그는 암흑과 강풍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8,600m 지점의 그레이 타워(Grey Towers, 그레이 스텝) 부근까지 하산하고, 텐트 없이 한데서 비박했다.
구조대가 4월 21일 오전 7시45분 비박 중인 프로다노프와 마지막 무전 교신을 했는데, 그는 장갑을 분실해 손에 심한 동상을 입었으며, 팔다리가 무감각하고 2, 3cm도 몸을 움직일 힘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류드밀 얀코프가 즉시 구조대를 이끌었다. 그는 단독으로 8,400m 지점까지 진출했지만 프로다노프와 무전교신에 실패했다. 프로다노프는 영영 불귀의 객이 되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불가리아대는 서릉 등반을 다시 시작했다. 불가리아 정부는 등반대에 산소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그들은 모든 난코스를 돌파하고 8,600m 지점에 제6캠프를 설치했다. 그러나 텐트를 고정시킬 확보지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울부짖는 강풍 속에서 텐트와 그 안의 대원들이 전부 날아가 버려 두 번째 비극을 겪었다.
5월 8일 오전 4시, 이반 불체프(Ivan Vultchev, 당시 37세) 교수, 메도디 사보프(Metodi Savov)가 제5캠프를 출발했다. 신설이 그들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암흑 속에서 그들은 종종 길을 잃었다. 심설 때문에 걸리속의 진짜 만프레다 침니와 비슷한 다른 두 개의 침니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레이 스텝의 난이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강풍의 속도가 점점 증가되어 허리케인이 되었다. 기온은 영하 35℃였다.
그들은 초주검이 된 상태로 비틀거리며 오후 5시15분 정상에 올랐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시간당 평균 55m를 등정한 셈이었다. 정상에서 그들은 며칠 전 하산 중에 실종된 프로다노프의 배낭과 카메라를 발견하고, 비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산소가 떨어지고 비박장비도 없었다. 유일한 음식은 작은 초콜릿뿐이었다. 그들은 정상에서 남동릉으로 하산해 8,700m 부근의 지점에서 작은 크레바스를 발견하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 혹한에 떨며 밤새 고통을 겪었다.
8월 9일 도스코프(Kiril Doskov)와 페트코프(Nikolay Petkov)는 불체프와 사보프를 구조하기 위해 새벽 3시 반에 출발했다. 그들은 시간당 120m씩 등반해 오전 9시 반에 등정했다. 그들은 정상에서 남동릉으로 하산해 사우스 콜에서 2차 등정자들을 따라잡았다.
캐나다대의 서릉 직등…샤론 우드, 여성 루트 초등
1984년부터 1985년까지 4개 등반대가 서릉 직등에 실패했다. 1984년 피터 힐러리(에드먼드 힐러리의 아들)가 이끄는 6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호주-뉴질랜드 대가 서릉의 제4캠프(8,000m 부근)까지 진출하고 10월 9일 강풍으로 퇴각 하던 중, 노틀과 프롬 두 대원이 추락사했다.
프랑스대가 서릉의 7,500m 지점까지 진출했다. 1985년 미국대가 서릉의 8,595m 지점까지 진출했고, 한국대(대장 김기혁)가 7,100m 지점까지 진출했는데, 한국대는 모두 12동의 텐트가 강풍으로 파손되었다.
1986년 캐나다대가 서릉 직등에 성공했다. 그들은 로라에서 출발하지 않고 롱북빙하 상부에서 출발하여 웨스트 숄더의 노스 스퍼(North Spur)를 올랐다. 노스 스퍼는 높이가 1,524m에 달하고, 최고 경사도가 60도이고 웨스트 숄더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눈사태 위험 코스였다.
5월 20일 당시 29세의 여성 캐나다 등반 가이드 샤론 우드와 남성 클라이머 드웨인 콩돈이 등정했는데, 샤론 우드는 에베레스트의 여섯 번째 여성 등정자가 되었다. 다음 글은 샤론 우드의 등정기의 일부이다.
▲ 쿰부빙폭 밑에서 로라로 오르는 암벽길.
5월 19일 아침 나는 제5캠프(7,620m)인 설동으로 들어갔다. 공기 속에 함유된 산소량이 평지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우리는 모두 난민수용소에 1년간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2개월간 에베레스트 서릉의 악천후와 악전고투한 결과였다. 우리는 각자 9kg짜리 산소통 2개, 제6캠프에서 사용할 장비와 식량 등 총 32kg의 짐을 짊어지고 출발했다. 산소통 휴대는 호흡에 도움을 주긴 하지만, 장비의 무게 때문에 오히려 방해물 취급을 당했다.
우리는 고정 자일의 끝 지점(8,077m)에 도달했다. 경사도 40~60도의 눈과 얼음 걸리가 760여m의 높이로 치솟아 있었는데, 군데군데 바위 스텝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걸리를 고정 로프의 도움 없이 올라야 했다. 나는 걸리 밑에 경사도 45도인 설사면을 깎아내고 앉아서, 위쪽 난코스에서 사용할 소형 자일을 180여m의 길이로 자르고 있었다. 곧 배리 대원이 도착했다.
그는 잠시 후 산소마스크를 착용해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더니, 갑자기 내 발 밑에 몸을 숨겼다. 얼떨결에 위쪽을 쳐다보니 돌사태가 발발(勃發)해 걸리의 양쪽 벽에 낙석들이 계속 부딪쳐 튀어 오르며,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공포에 사로잡혀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기적적으로 낙석들은 간발의 차이로 우리들을 비켜 떨어졌다. 그 수초 동안의 공포의 순간은 여러 시간처럼 느껴졌다. 배리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전년도 등반 중에 작은 낙석에 맞아 어깨뼈에 골절상을 입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산이 나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산에서는 전념을 다해 등반하라. 그렇게 못할 바엔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조급한 행동은 삼가 하라.’
얼마 후에 드웨인과 케빈 대원이 그곳에 도착했다. 드웨인은 조금 전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전혀 모르고 말했다.
“왜 등반을 계속하지 않고 이렇게 꾸물대고 있어?”
나는 수년간 고산에서 고정자일 없는 등반, 즉 자유등반을 체험하고 싶었다. 그런데 원수 같은 매정한 강풍이 위쪽의 암설벽에서 무자비한 힘으로 눈과 바위를 날려 보내, 우리가 등반할 깔때기 틈 속에 쏟아놓고 있었다. 즉 우리 앞에 낙석들이 난타하는 걸리의 빙벽, 즉 죽음의 탄도(彈道)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낙석의 큰 덩어리를 피하기 위해 벽을 포옹하는 자세로 등반했다. 마치 얇은 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등반대장 짐 엘징가가 며칠 전에 나와 드웨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말했다.
“에베레스트는 높이만 다를 뿐 여느 산들과 다를 바가 없어. 여느 산들을 등반할 때와 똑같은 자세로 등반하게. 그러나 어떤 산도 인간의 생명만큼 소중하지는 않으니까, 에베레스트의 등정을 자네들의 목숨과 맞바꿀 생각은 하지 말게.”
▲ 롱북빙하에서 출발하는 서릉의 노스 스퍼.
케빈이 걸리를 등반하며 투덜댔다.
“생지옥이 따로 없군. 한 번은 오를 수 있지만, 두 번 다시 오르고 싶지 않은 산이야.”
지원조 케빈과 배리는 드웨인과 내가 제6캠프에 도착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5월 20일 드웨인과 나는 정상을 향해 제6캠프를 출발했다. 여러 시간이 지났는데 우리들은 아직도 8,230m 지점을 등반 중이었다. 우리는 강풍이 맹위를 떨치는 절벽에서 웅크린 자세로 등반했다. 우리는 각자 독립해 록밴드를 등반하고, 나중에 하산할 때 손잡이로 사용할 목적으로 자일을 늘어뜨려 확보해 두었다.
평평한 사면이 눈앞에 나타나자 공포심이 사라지고 등정 의혹도 말끔히 가셨다. 우리는 정상에서 수직고도 10m 아래 지점인 8,838m 지점을 등반할 때 체력이 소진되어 두 손 두 발로 설벽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두 시간 전에 기운이 없어서 아이스 액스를 사면에 놔두고 올라온 것을 후회했다. 바위에 앉아 무전기를 꺼냈다. 무전기는 맨손가락을 사용해야 한다. 정상에서 수직고도 6m 아래 지점에서는 맨손가락이 순식간에 동상에 걸릴 수 있다. 나는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우리는 정상에서 수직고도 6m 아래 지점에 도착했어요.”
환호성과 축하의 인사가 들려왔다. 우리는 9시 정상에 섰다. 정상에서 48km 떨어진 곳에 세계 제5위의 고봉 마칼루가 바라보였다. 2년 전 우리가 등정에 실패했던 봉우리였다. 나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한없는 왜소함을 느꼈다. 나의 등정이 꿈만 같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월간 산 2013.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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