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0. 23:57ㆍ시,좋은글/詩
사평역 (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문학과지성사, 1983>
곽재구(郭在九, 1954년 ~ )
시인. 1954년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와 숭실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당선되어 등단.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9회 동서문학상을 수상.
화려한 문구로 꾸미거나 치장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생의 풍경을 시 속에 생생하게 작동시킨다는 평을 받음.
시집
《사평역에서, 1983》, 《전장포 아리랑, 1895》, 《서울 세노야, 1990》,
《참 맑은 물살, 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1999》,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2011》, 《와온 바다, 2012》 등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이 있다.
'시,좋은글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월 / 오세영 (0) | 2013.01.14 |
---|---|
새해의 노래 / 김규동 (0) | 2013.01.02 |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0) | 2012.12.26 |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 박정대 (0) | 2012.11.29 |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원재훈 (0) | 2012.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