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선정, 세계 최고의 여행지 베스트 TOP 50 (1/5)
2009. 7. 12. 18:57ㆍ여행/여행자료
BBC 선정, 세계 최고의 여행지 베스트 TOP 50
(1/5)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 할 50곳, 50위부터 1위까지 입니다.
50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보라보라섬
면적 약 30㎢, 인구 약 7,000명 정도이다. 타히티섬에서 북서쪽으로 약 240km 떨어진 곳에 있다. 길이 10㎞, 너비 4㎞의 산호섬이며 32㎞에 이르는 섬 일주도로가 나 있다. 수온이 따뜻하고 수심이 얕아 휴양지로 개발되어 각종 해양스포츠가 활발하며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태평양의 진주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영화 《허리케인》을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쓰던 대포가 남아 있다.
전형적인 환초 섬으로서 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투명한 라군과 모투들이 매우 인상적이고 공항은 본섬의 북쪽에 있는 모투 무테에 있고, 공항에서 주요 마을인 바이타페까지 에어 타히티의 고속 셔틀 보트가 운행되고 있다. 섬의 해안을 끼고 도는 도로의 길이는 약 29㎞이며 자동차로는 약 1시간 30분이면 일주할 수 있다. 도로는 투이바호라 곶을 넘는 부분 (자전거, 스쿠터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을 제외하면 평탄한 편이다. 이 밖에도 보라보라 섬에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남겨 놓고 간 7인치 포의 잔해 8 문이 남아 있다. 섬을 일주하다 보면 쉽게 눈에 띤다.
섬에서 가장 이름난 해안가이며 주요 숙박 시설이 몰려 있는 마티라 곶 부근은 청록색의 투명한 라군과 백사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 라군의 아름다움을 [태평양의 진주]라고 일컬을 정도다. 또한 보라보라 섬은 영화「허리케인」의 무대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보라보라는 뾰족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화산섬을 둘러싼 바다는 연둣빛. 해저 산호가 가락지 모양의 띠를 이루고 있다. 띠 안에 섬이 솟아난 형국이다. 하늘에서 보라보라를 내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보라보라의 바다는 한 눈에 담을 수 없다. 호텔 앞 바다는 연푸른 빛을 띤 산호지대. 조금만 배를 타고 나가면 수많은 푸른 색으로 칠해진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래사장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거나 원시림 같은 녹색 바다가 이어지고, 다시 연두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색의 조화가 놀랍다. 이처럼 바다 빛깔이 다양한 것은 맑은 물 속의 산호 때문이다. 보라보라의 바깥쪽 바다는 해저 산맥처럼 이어진 산호띠인 리프(Reef)로 이뤄져 있다. 리프가 파도를 막아주는 까닭에 큰 파도가 없이 바다는 늘 잔잔하다. 그 안에 야자수만 가득한 새끼섬 모투(Motu)가 흩어져 있다.
산호가루가 부서져 섬이 된 모투의 앞바다는 연하디 연한 푸른 빛. 햇살이 해저 산호가루에 반사돼 물빛도 눈부시다. 산호에 닿은 햇살은 마치 물고기처럼 퍼덕댄다. 모투와 모투는 멀리서 보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다시 반지처럼 이어진 아톨(Atol)을 형성하고 있다. 모투와 아톨로 둘러싸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한 라군(Lagoon·석호)을 이루고 있다. 모두 산호가 수백만년동안 만들어낸 신비다. 형형색색 다른 빛깔로 빛나는 바다 모습을 보려면 화산 봉우리인 오테마누(722m)의 옆쪽이나 전망대에 올라서야 한다.
보라보라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랜 섬이다. 타히티의 섬들은 해저폭발로 이뤄졌다. 3백만년 전 보라보라가 생겼고 그 뒤 다른 섬들이 생겨났다. 보라보라는 원래 바우아바우에서 나온 말. 원주민 말로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는 뜻이다. 또 ‘마이 테 포라’라고도 하는데 신께서 만들었다는 의미다. 보라보라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767년 영국왕립함대 왈리스 함장에 의해서였다. 보라보라에 처음 상륙한 사람은 1768년 쿡 선장이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보라보라는 유명해졌다.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은 남태평양의 보라보라에 급유를 위한 기지와 활주로를 만들었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군이 주둔했지만 전쟁은 없었다. 당시 미국 해군장교로 보라보라에 왔던 제임스 미케너는 '남태평양 이야기'란 책을 통해 상공에서 바라본 보라보라의 모습을 '남태평양의 진주'라고 표현했다. 보라보라의 모습이 마치 조개가 입을 열고 진주를 품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라보라의 흑진주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뮤지컬로 브로드웨이에서 히트했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프렌치 폴리네시아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는 요즘이다. 4월부터 10월은 건기, 12월부터 3월까지가 우기다. 건기에는 적도상의 다른 섬과 달리 후텁지근하지 않다. 태평양을 건너오는 무역풍 때문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19시간 빠르다. 평균기온은 25.9도. 프랑스령인 까닭에 프랑스어가 주로 쓰이지만 호텔에서는 영어가 통용된다.
▶교통편
국내에서 직항편은 없다. 일본의 오사카나 도쿄에서 에어 타히티누이(서울지점 02-775-4697)로 갈아타야 한다. 오사카는 인천공항에서 1시간30분, 도쿄는 2시간 거리. 일본에서 타히티섬 파페테공항까지는 약 12시간 걸린다. 파페테에서 보라보라까지는 항공기로 45분. 파페테 페리터미널에서 모레아섬까지는 배로 30분.
전형적인 환초 섬으로서 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투명한 라군과 모투들이 매우 인상적이고 공항은 본섬의 북쪽에 있는 모투 무테에 있고, 공항에서 주요 마을인 바이타페까지 에어 타히티의 고속 셔틀 보트가 운행되고 있다. 섬의 해안을 끼고 도는 도로의 길이는 약 29㎞이며 자동차로는 약 1시간 30분이면 일주할 수 있다. 도로는 투이바호라 곶을 넘는 부분 (자전거, 스쿠터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을 제외하면 평탄한 편이다. 이 밖에도 보라보라 섬에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남겨 놓고 간 7인치 포의 잔해 8 문이 남아 있다. 섬을 일주하다 보면 쉽게 눈에 띤다.
섬에서 가장 이름난 해안가이며 주요 숙박 시설이 몰려 있는 마티라 곶 부근은 청록색의 투명한 라군과 백사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 라군의 아름다움을 [태평양의 진주]라고 일컬을 정도다. 또한 보라보라 섬은 영화「허리케인」의 무대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보라보라는 뾰족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화산섬을 둘러싼 바다는 연둣빛. 해저 산호가 가락지 모양의 띠를 이루고 있다. 띠 안에 섬이 솟아난 형국이다. 하늘에서 보라보라를 내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보라보라의 바다는 한 눈에 담을 수 없다. 호텔 앞 바다는 연푸른 빛을 띤 산호지대. 조금만 배를 타고 나가면 수많은 푸른 색으로 칠해진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래사장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거나 원시림 같은 녹색 바다가 이어지고, 다시 연두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색의 조화가 놀랍다. 이처럼 바다 빛깔이 다양한 것은 맑은 물 속의 산호 때문이다. 보라보라의 바깥쪽 바다는 해저 산맥처럼 이어진 산호띠인 리프(Reef)로 이뤄져 있다. 리프가 파도를 막아주는 까닭에 큰 파도가 없이 바다는 늘 잔잔하다. 그 안에 야자수만 가득한 새끼섬 모투(Motu)가 흩어져 있다.
산호가루가 부서져 섬이 된 모투의 앞바다는 연하디 연한 푸른 빛. 햇살이 해저 산호가루에 반사돼 물빛도 눈부시다. 산호에 닿은 햇살은 마치 물고기처럼 퍼덕댄다. 모투와 모투는 멀리서 보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다시 반지처럼 이어진 아톨(Atol)을 형성하고 있다. 모투와 아톨로 둘러싸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한 라군(Lagoon·석호)을 이루고 있다. 모두 산호가 수백만년동안 만들어낸 신비다. 형형색색 다른 빛깔로 빛나는 바다 모습을 보려면 화산 봉우리인 오테마누(722m)의 옆쪽이나 전망대에 올라서야 한다.
보라보라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랜 섬이다. 타히티의 섬들은 해저폭발로 이뤄졌다. 3백만년 전 보라보라가 생겼고 그 뒤 다른 섬들이 생겨났다. 보라보라는 원래 바우아바우에서 나온 말. 원주민 말로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는 뜻이다. 또 ‘마이 테 포라’라고도 하는데 신께서 만들었다는 의미다. 보라보라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767년 영국왕립함대 왈리스 함장에 의해서였다. 보라보라에 처음 상륙한 사람은 1768년 쿡 선장이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보라보라는 유명해졌다.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은 남태평양의 보라보라에 급유를 위한 기지와 활주로를 만들었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군이 주둔했지만 전쟁은 없었다. 당시 미국 해군장교로 보라보라에 왔던 제임스 미케너는 '남태평양 이야기'란 책을 통해 상공에서 바라본 보라보라의 모습을 '남태평양의 진주'라고 표현했다. 보라보라의 모습이 마치 조개가 입을 열고 진주를 품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라보라의 흑진주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뮤지컬로 브로드웨이에서 히트했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프렌치 폴리네시아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는 요즘이다. 4월부터 10월은 건기, 12월부터 3월까지가 우기다. 건기에는 적도상의 다른 섬과 달리 후텁지근하지 않다. 태평양을 건너오는 무역풍 때문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19시간 빠르다. 평균기온은 25.9도. 프랑스령인 까닭에 프랑스어가 주로 쓰이지만 호텔에서는 영어가 통용된다.
▶교통편
국내에서 직항편은 없다. 일본의 오사카나 도쿄에서 에어 타히티누이(서울지점 02-775-4697)로 갈아타야 한다. 오사카는 인천공항에서 1시간30분, 도쿄는 2시간 거리. 일본에서 타히티섬 파페테공항까지는 약 12시간 걸린다. 파페테에서 보라보라까지는 항공기로 45분. 파페테 페리터미널에서 모레아섬까지는 배로 30분.
49위 인도네시아 발리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동양 최대의 휴양지로 '지구상의 마지막 낙원', '세계의 아침' 등으로 불리며 이미 유럽과 구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휴양지로 손꼽히고 있는 지상 최후의 낙원 발리. 제주도의 2.7배 크기로 인구 3백만명이 모여 있으며, 남태평양 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로 인도네시아 군도를 구성하는 수천개의 섬 가운데 하나이다. 산스크리트어로 WARI, 즉 제물을 의미하는 발리 섬은 그 자체가 신들의 선물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 섬에 관한 수식어는 끝이 없다. 계단식 벼농사 지대와 구름 위로 높게 솟아오른 불을 품은 3,000m급 화산들, 울창한 열대 숲들, 인도양의 따뜻한 바닷물이 일렁이는 해변들… 발리의 매력은 그것만이 아니다. 성스러운 아군 산 기슭에 펼처진 전원 풍경, 독특한 문화와 훌륭한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신을 사랑하는 발리인들의 따뜻한 마음이다. 쇼핑에서 서핑, 환상적인 경치에서 이국적인 요리에까지 발리는 전세계의 방문객들을 유혹하는 이국적인 관광지로 정평이 나 있다.
인도네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섬나라이다. 그 섬들의 한가운데 위치한 발리는 섬에 사는 사람 수보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 더 많다는 곳.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가 아닌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섬 발리는 약 300만명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매년 50만명 이상의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다. 소위 '열대의낙원'이라할 만한 발리에서는 인도네시아-힌두 문화의 세련된 예술을 만날 수 있다.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우는 발리는 와리(Wari)라는 말이 변형되어 발리가 됐다고 한다.
발리의 크기는 제주도의 약 2.7배 정도이고,연평균 기온은 23℃~30℃로 계절은 우기(10월~3월)와 건기(4월~9월)로 나뉜다. 우기때는 하루에 한두차례 소나기가 내린 후 하늘이 청명하게 개여 더위를 식혀주며, 건기 때는 새벽과 밤이 우리나라의 가을날씨와 비슷하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다도해의 중간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열대섬이다. 적도에서 바로 8도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언덕의 사면을 따라 늘어서 있는 계단식 논들, 화산, 빽빽한 열대정글, 넓은 모래 해변, 따뜻한 해수, 최고의 파도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발리는 1년 내내 평균 온도 26~30도 정도의 열대성 기후가 계속되며 계절은 크게 4월에서 9월까지의 건기와 10월에서 3월까지의 우기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5월에서 8월까지가 더 시원하고 비도 덜 내리기 때문에 발리를 방문하기에 더 좋은 시기이다.
발리인들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한때 힌두교는 인도네시아의 지배적 종교였지만 이슬람 세력의 성장과 함께 많이 사라졌고 발리만이 힌두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15세기 자바의 마자빠핫 왕조가 몰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발리로 피난처를 찾아 탈출하였고 이때 온 힌두교는 발리인들이 원래 갖고 있던 물, 산, 나무에 존재하는 영혼들 같은 자연신들에 대한 고대의 믿음들과 함께 결합하여 오늘과 같은 강하고 활력넘치는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환율 & 환전
인도네시아의 공식화폐는 루피아이다. 루피아로의 환전은 어려워 달러로 환전을 한 후 발리에 도착해서 달러를 다시 루피아로 환전한다. 달러로 환전할때는 1997년 이후에 발행된 달러인지 확인한다. 1996년 이전에 발행된 달러는 환전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고 환전이 된다 해도 낮은 환율로 환전이 된다. 그리고 달러에 낙서나 구김이 있으면 이 역시 낮은 환율을 적용받는다. 달러는 고액 단위일 수록 높은 환율을 적용받는다. 10달러 보다는 100달러를 교환할 때 환율이 더 좋다.
▶주의할 점
- 상대방의 머리를 만지지 않는다.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머리를 매우 신성시하여 자신이 머리를 단장할 때도 꼭 오른 손 만을 사용한다. 지나가는 어린이가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오른손만 사용한다.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지저분한 것을 만질 때에는 왼손을 쓰고 깨끗하고 신성한 것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쓴다. 즉 식사할 때, 머리를 다듬을 때,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건넬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쓰고 용변 후, 세척할 때와 쓰레기 등을 만질 때는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 종교적인 특성으로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많으므로 권하지 않는다.
- 대화 중에 허리에 손을 올리지 않는다. 화가 난 것으로 오해한다.
▶교통
택시를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길이 좁고 일방통행이 많아 초행자의 경우 거리계산을 할 수 없으므로 미터기가 있는지 확인하는게 좋다.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요금에 가까운 화폐를 지불하는게 유리하다.
▶쇼핑
관광객의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쇼핑을 할 수 있을만큼 상점이 즐비하다.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흥정을 통해 가격을 낮출 수 있으며, 노점에서는 가격을 높게 부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적정 가격이 될 때까지 흥정을 해보는게 이득이다. 쇼핑 아이템으로는 색색의 조각품과 목공예품, 핸드메이드 직물, 그림, 살롱, 석상 등으로 다양하며 특히 세공품은 정교함이 세계적인 수준이다.
인도네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섬나라이다. 그 섬들의 한가운데 위치한 발리는 섬에 사는 사람 수보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 더 많다는 곳.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가 아닌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섬 발리는 약 300만명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매년 50만명 이상의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다. 소위 '열대의낙원'이라할 만한 발리에서는 인도네시아-힌두 문화의 세련된 예술을 만날 수 있다.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우는 발리는 와리(Wari)라는 말이 변형되어 발리가 됐다고 한다.
발리의 크기는 제주도의 약 2.7배 정도이고,연평균 기온은 23℃~30℃로 계절은 우기(10월~3월)와 건기(4월~9월)로 나뉜다. 우기때는 하루에 한두차례 소나기가 내린 후 하늘이 청명하게 개여 더위를 식혀주며, 건기 때는 새벽과 밤이 우리나라의 가을날씨와 비슷하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다도해의 중간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열대섬이다. 적도에서 바로 8도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언덕의 사면을 따라 늘어서 있는 계단식 논들, 화산, 빽빽한 열대정글, 넓은 모래 해변, 따뜻한 해수, 최고의 파도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발리는 1년 내내 평균 온도 26~30도 정도의 열대성 기후가 계속되며 계절은 크게 4월에서 9월까지의 건기와 10월에서 3월까지의 우기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5월에서 8월까지가 더 시원하고 비도 덜 내리기 때문에 발리를 방문하기에 더 좋은 시기이다.
발리인들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한때 힌두교는 인도네시아의 지배적 종교였지만 이슬람 세력의 성장과 함께 많이 사라졌고 발리만이 힌두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15세기 자바의 마자빠핫 왕조가 몰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발리로 피난처를 찾아 탈출하였고 이때 온 힌두교는 발리인들이 원래 갖고 있던 물, 산, 나무에 존재하는 영혼들 같은 자연신들에 대한 고대의 믿음들과 함께 결합하여 오늘과 같은 강하고 활력넘치는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환율 & 환전
인도네시아의 공식화폐는 루피아이다. 루피아로의 환전은 어려워 달러로 환전을 한 후 발리에 도착해서 달러를 다시 루피아로 환전한다. 달러로 환전할때는 1997년 이후에 발행된 달러인지 확인한다. 1996년 이전에 발행된 달러는 환전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고 환전이 된다 해도 낮은 환율로 환전이 된다. 그리고 달러에 낙서나 구김이 있으면 이 역시 낮은 환율을 적용받는다. 달러는 고액 단위일 수록 높은 환율을 적용받는다. 10달러 보다는 100달러를 교환할 때 환율이 더 좋다.
▶주의할 점
- 상대방의 머리를 만지지 않는다.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머리를 매우 신성시하여 자신이 머리를 단장할 때도 꼭 오른 손 만을 사용한다. 지나가는 어린이가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오른손만 사용한다.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지저분한 것을 만질 때에는 왼손을 쓰고 깨끗하고 신성한 것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쓴다. 즉 식사할 때, 머리를 다듬을 때,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건넬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쓰고 용변 후, 세척할 때와 쓰레기 등을 만질 때는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 종교적인 특성으로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많으므로 권하지 않는다.
- 대화 중에 허리에 손을 올리지 않는다. 화가 난 것으로 오해한다.
▶교통
택시를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길이 좁고 일방통행이 많아 초행자의 경우 거리계산을 할 수 없으므로 미터기가 있는지 확인하는게 좋다.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요금에 가까운 화폐를 지불하는게 유리하다.
▶쇼핑
관광객의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쇼핑을 할 수 있을만큼 상점이 즐비하다.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흥정을 통해 가격을 낮출 수 있으며, 노점에서는 가격을 높게 부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적정 가격이 될 때까지 흥정을 해보는게 이득이다. 쇼핑 아이템으로는 색색의 조각품과 목공예품, 핸드메이드 직물, 그림, 살롱, 석상 등으로 다양하며 특히 세공품은 정교함이 세계적인 수준이다.
48위 이집트 아부심벨
람세스 2세가 세운 웅대한 신전 '장관'/ 69년 아스완댐 건설로 3,200년전 신전 이전 / 나일강변 돌산 깎아 4년여 대역사 끝 복원.
1965년 5월 전세계 50여개국의 기술자들로 구성된 유네스코 작업반이 일강 서안의 작은 바위 절벽 아부 심벨에 도착했다. 이들은 바위산을 깎아 만든 대신전을 원래 자리에서 90m위쪽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착수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이며 '태양의 아들'로 자처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전이었다.
모든 역사에는 명암이라는 양면성이 깔려있는 모양이다. 파라오 중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영광과 이집트의 번영을 기원하며 세운 이 대신전은 수몰위기를 맞았다. 람세스 2세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빈곤에 시달려온 이집트는 신전을 무시하고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서둘렀다. 1960년 1월에 착공됐다.아스완 하이댐 건설은 관개와 수력발전을 통해 이집트의 경제를 한단계 끌어올리는 대역사였다.
▶유네스코서 이전 작업
그러나 이 댐은 길이 500여㎞에 달하는거대한 인공호수 낫세르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주변에 있던 수십기의 고대 무덤과 신전,기념물들이 수몰의 위기에 내몰렸던 것이다. 유네스코가 무엇보다 긴장했던 것은 가장 위대했던 파라오가 자신의 필생의 업적으로 만든 아부 심벨 신전이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이었다.마침내 이들은 신전을 통째로 바위산 위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바위 절벽을 깍아 만든 신전에 모두 1만7천개의 구멍을 뚫고 그안에 33t에 달하는 송진덩이를 밀어넣어 먼저 신전의 바윗돌들을 단단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거대한 쇠줄톱을 동원해 신전을 모두 1천36개의 돌블럭으로 잘랐다. 돌블록 하나의 무게가 30t에 달했다. 신전을 옮길 절벽 위쪽의 바위에는 그안에 거대한 콘크리트 돔 2개를 만들어 덮어 단단한 인공 산을 만들었다. 그 다음 신전의 재조립 작업이 시작됐다. 1969년 2월, 마침내 3천200년 전에 탄생된 신전이 다시 완벽한 제 모습을 갖고 안전지대로 옮겨졌다. 4천2백만 달러의 공사비가 들었고 4년이 넘게 걸린 작업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를 신전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몬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아부 심벨을 다시 보게 된 것도 바로 유네스코의 이 이전작업이 성공한 덕분이다. 신전을 장식한 신상과 조각들은 완전한 형태로 재생됐고 다만 원래는 없었던 돌 블록들을 이어붙인 이음선들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카이로서 비행기로 2시간
남부 이집트 누비아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아부 심벨까지는 카이로 공항에서 국내선 항공편으로 2시간 남짓 걸린다. 아부 심벨 공항에서 신전까지의 20여 분 거리는 왕복 버스가 운행하는데 이를 타고 2~3시간 신전을 돌아보고 나면 다시 이 버스가 공항으로 데려다준다. 버스에 내려 10분여를 걸어가면 오른편으로 미풍에 수면이 흔들리는 푸른 나일강을 끼고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돌산이 나타난다. 강쪽으로 난 이 돌산 한쪽 면을 깍아 신전 전면을 다시 세웠고 큰 동굴처럼 돌산을 안쪽으로 깍아 신전 내부를 만들었다. 신전 전면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람세스 2세의 좌상 4개가 버티고 있다. 얼굴의 좌우 길이가 1m는 족히 됨직하다. 역학면에서는 거대한 람세스의 상 4개가 높이 30m가 넘는 신전전면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하도록 설계돼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상은 몸통과 머리부분이 모두 사라졌지만 나머지 3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신전 출입문 위에는 매의 머리를 한 여신 라 하크트의 상을 조각했다. 출입문을 들어가면 길이 65m에 달하는 긴 인공 동굴이 나타났다. 좌우로 8개의 오시리스 신상을 모신 복도를 지나면 신전의 가장 내밀한 방인 지성소에 도달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신은 태양신 라와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였다. 파라오는 지상에서 태양신 라를 대신하는 존재였다. 지성소에는 왼편부터 차례로 람세스 2세, 아몬 라, 그리고 하르마키스신, 그리고 어둠의 신인 프타의 신상이 나란히 앉아있다.
▶공사비 4천2백만불 소요
이 지성소에서 태양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다. 매년 2차례씩, 3월 21일과 9월 21일 상오 5시 58분이 되면 정확하게 태양빛이 신전 입구에서 지성소에 이르는 65m의 길을 밝혔다. 그리고 나서 햐지나 아몬 라 신과 람세스 2세의 상에 햇빛이 닿았다. 햇빛은 또 수분뒤 하르마키스신으로 옮겨가기까지 20여분을 지성소안에 머물었다. 그런데 어둠의 신인 프타에는 햇빛이 비치는 법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수몰 위기를 피해 이 인공바위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이 태양의 기적은 여전히 계속됐다. 신전벽은 람세스 2세가 전장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의 장면들을 그린 상형문자와 그림들이 빽빽히 들어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람세스 2세 재위 5년에 그가 북부 시리아족의 일파인 히타이트군과의 힘겨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면이다. '카데슈 전투'인데 그의 활약상이 잘 묘사됐다.이 승전기는 테베의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에도 새겼다. 카데슈는 지금의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북서쪽에 위치한 요새였다. 적의 매복 함정에 빠져 2천500대의 전차대에 포위됐다. 그러나 태양신 아몬 라의 도움을 받아 단신으로 이들을 물리쳐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람세스 2세 신전의 옆에는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운 신전 하나가 더 있다. 평화의 신을 모신 하토르 신전이다. 이 신전은 람세스 2세가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었다. 람세스 2세가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면 네페르타리는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왕비였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통해 람세스 2세의 위대한 힘은 왕비 네페르타리와의 사랑에서 비롯됐다고 상형문자를 통해 예찬했다. 하토르 신전 전면 벽에는 람세스 2세의 상 4개와 왕비 네페르타리의 상 2개가 나란히 새겼다. 이집트 역사상 왕비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고 그 신전 전면을 왕비의 상으로 장식한 파라오는 람세스 2세뿐이다. 태양이 되고자 했던 사나이 람세스 2세와 그가 '가장 아름다운 여인 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노래했던 네페르타리 왕비와의 사랑. 그 힘은 바로 아부 심벨의 신전을 탄생시켰고 또한 이 신전을 3천년 이상 지탱해온 원천이었던 것이다. <아부 심벨(이집트)=이기동 특파원>
1965년 5월 전세계 50여개국의 기술자들로 구성된 유네스코 작업반이 일강 서안의 작은 바위 절벽 아부 심벨에 도착했다. 이들은 바위산을 깎아 만든 대신전을 원래 자리에서 90m위쪽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착수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이며 '태양의 아들'로 자처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전이었다.
모든 역사에는 명암이라는 양면성이 깔려있는 모양이다. 파라오 중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영광과 이집트의 번영을 기원하며 세운 이 대신전은 수몰위기를 맞았다. 람세스 2세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빈곤에 시달려온 이집트는 신전을 무시하고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서둘렀다. 1960년 1월에 착공됐다.아스완 하이댐 건설은 관개와 수력발전을 통해 이집트의 경제를 한단계 끌어올리는 대역사였다.
▶유네스코서 이전 작업
그러나 이 댐은 길이 500여㎞에 달하는거대한 인공호수 낫세르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주변에 있던 수십기의 고대 무덤과 신전,기념물들이 수몰의 위기에 내몰렸던 것이다. 유네스코가 무엇보다 긴장했던 것은 가장 위대했던 파라오가 자신의 필생의 업적으로 만든 아부 심벨 신전이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이었다.마침내 이들은 신전을 통째로 바위산 위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바위 절벽을 깍아 만든 신전에 모두 1만7천개의 구멍을 뚫고 그안에 33t에 달하는 송진덩이를 밀어넣어 먼저 신전의 바윗돌들을 단단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거대한 쇠줄톱을 동원해 신전을 모두 1천36개의 돌블럭으로 잘랐다. 돌블록 하나의 무게가 30t에 달했다. 신전을 옮길 절벽 위쪽의 바위에는 그안에 거대한 콘크리트 돔 2개를 만들어 덮어 단단한 인공 산을 만들었다. 그 다음 신전의 재조립 작업이 시작됐다. 1969년 2월, 마침내 3천200년 전에 탄생된 신전이 다시 완벽한 제 모습을 갖고 안전지대로 옮겨졌다. 4천2백만 달러의 공사비가 들었고 4년이 넘게 걸린 작업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를 신전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몬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아부 심벨을 다시 보게 된 것도 바로 유네스코의 이 이전작업이 성공한 덕분이다. 신전을 장식한 신상과 조각들은 완전한 형태로 재생됐고 다만 원래는 없었던 돌 블록들을 이어붙인 이음선들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카이로서 비행기로 2시간
남부 이집트 누비아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아부 심벨까지는 카이로 공항에서 국내선 항공편으로 2시간 남짓 걸린다. 아부 심벨 공항에서 신전까지의 20여 분 거리는 왕복 버스가 운행하는데 이를 타고 2~3시간 신전을 돌아보고 나면 다시 이 버스가 공항으로 데려다준다. 버스에 내려 10분여를 걸어가면 오른편으로 미풍에 수면이 흔들리는 푸른 나일강을 끼고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돌산이 나타난다. 강쪽으로 난 이 돌산 한쪽 면을 깍아 신전 전면을 다시 세웠고 큰 동굴처럼 돌산을 안쪽으로 깍아 신전 내부를 만들었다. 신전 전면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람세스 2세의 좌상 4개가 버티고 있다. 얼굴의 좌우 길이가 1m는 족히 됨직하다. 역학면에서는 거대한 람세스의 상 4개가 높이 30m가 넘는 신전전면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하도록 설계돼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상은 몸통과 머리부분이 모두 사라졌지만 나머지 3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신전 출입문 위에는 매의 머리를 한 여신 라 하크트의 상을 조각했다. 출입문을 들어가면 길이 65m에 달하는 긴 인공 동굴이 나타났다. 좌우로 8개의 오시리스 신상을 모신 복도를 지나면 신전의 가장 내밀한 방인 지성소에 도달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신은 태양신 라와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였다. 파라오는 지상에서 태양신 라를 대신하는 존재였다. 지성소에는 왼편부터 차례로 람세스 2세, 아몬 라, 그리고 하르마키스신, 그리고 어둠의 신인 프타의 신상이 나란히 앉아있다.
▶공사비 4천2백만불 소요
이 지성소에서 태양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다. 매년 2차례씩, 3월 21일과 9월 21일 상오 5시 58분이 되면 정확하게 태양빛이 신전 입구에서 지성소에 이르는 65m의 길을 밝혔다. 그리고 나서 햐지나 아몬 라 신과 람세스 2세의 상에 햇빛이 닿았다. 햇빛은 또 수분뒤 하르마키스신으로 옮겨가기까지 20여분을 지성소안에 머물었다. 그런데 어둠의 신인 프타에는 햇빛이 비치는 법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수몰 위기를 피해 이 인공바위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이 태양의 기적은 여전히 계속됐다. 신전벽은 람세스 2세가 전장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의 장면들을 그린 상형문자와 그림들이 빽빽히 들어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람세스 2세 재위 5년에 그가 북부 시리아족의 일파인 히타이트군과의 힘겨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면이다. '카데슈 전투'인데 그의 활약상이 잘 묘사됐다.이 승전기는 테베의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에도 새겼다. 카데슈는 지금의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북서쪽에 위치한 요새였다. 적의 매복 함정에 빠져 2천500대의 전차대에 포위됐다. 그러나 태양신 아몬 라의 도움을 받아 단신으로 이들을 물리쳐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람세스 2세 신전의 옆에는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운 신전 하나가 더 있다. 평화의 신을 모신 하토르 신전이다. 이 신전은 람세스 2세가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었다. 람세스 2세가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면 네페르타리는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왕비였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통해 람세스 2세의 위대한 힘은 왕비 네페르타리와의 사랑에서 비롯됐다고 상형문자를 통해 예찬했다. 하토르 신전 전면 벽에는 람세스 2세의 상 4개와 왕비 네페르타리의 상 2개가 나란히 새겼다. 이집트 역사상 왕비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고 그 신전 전면을 왕비의 상으로 장식한 파라오는 람세스 2세뿐이다. 태양이 되고자 했던 사나이 람세스 2세와 그가 '가장 아름다운 여인 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노래했던 네페르타리 왕비와의 사랑. 그 힘은 바로 아부 심벨의 신전을 탄생시켰고 또한 이 신전을 3천년 이상 지탱해온 원천이었던 것이다. <아부 심벨(이집트)=이기동 특파원>
47위 베네주엘라 엔젤폭포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띠띠까까호수'도 남미에 있고, 80m 높이에 서로 다른 275개의 폭포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는 '이과수폭포'도 남미에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폭포, 높이가 약 1km인 엔젤폭포도 남미에 있다.
엔젤폭포. 기아나 고지에서 발원하는 오리노코강(江)의 지류 카로니강이 기아나 고지로부터 1,490m의 높이를 도중에서 막힘없이 낙하하여 형성된 폭포이다. 낙차 979m로 세계 최고이며 부수된 폭포를 포함하면 높이 1,000∼1,600m에 이른다. 하부 일대가 떨어지는 포말에 의하여 안개가 낌으로써 폭포의 흐름이 장엄하다 하여 '천사의 폭포'라고 명명하였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래에서 보면 꼭대기가 보이기는 할까? 건물 한 층의 높이를 대략 3m로 잡는다면 333 층의 고층빌딩 꼭대기에서 물을 뿜어낸다는 이야기다.
엔젤폭포. 기아나 고지에서 발원하는 오리노코강(江)의 지류 카로니강이 기아나 고지로부터 1,490m의 높이를 도중에서 막힘없이 낙하하여 형성된 폭포이다. 낙차 979m로 세계 최고이며 부수된 폭포를 포함하면 높이 1,000∼1,600m에 이른다. 하부 일대가 떨어지는 포말에 의하여 안개가 낌으로써 폭포의 흐름이 장엄하다 하여 '천사의 폭포'라고 명명하였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래에서 보면 꼭대기가 보이기는 할까? 건물 한 층의 높이를 대략 3m로 잡는다면 333 층의 고층빌딩 꼭대기에서 물을 뿜어낸다는 이야기다.
46위 스위스 마터호른봉
높이 4,478m. 프랑스어로는 몽세르뱅(Mont Cervin), 이탈리아어로는 몬테체르비노(Monte Cervino).
몬테로사 산맥의 주봉으로, 스위스 쪽의 등산기지 체르마트의 남서쪽 10km 지점에 위치한다. 피라미드형의 특이한 산용을 가진 빙식첨봉(氷蝕尖峰)으로, 평균경사 45° 안팎의 급한 암벽이 1,5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다. 특히 스위스 쪽의 조망이 수려하다.
천하의 독수리봉인 마터호른 봉은 알프스 관광의 절정이다. 환경에 대한 배려로 휘발유 차량의 출입금지 리조트라서 조용하며 공기가 맑고 상쾌한 청정지역이다. 자동차는 중간역 테쉬의 대형 주차장에 세워두고, 그곳 부터는 등산산악열차로 들어간다. 마을 내의 교통은 전기 자동차 또는 마차가 이용되고 있어 이 또한 흥미로운 스위스 마을이다. 등산철도로 리페르알프와 고르너그라트, 공중 케이블을 타고 클라인 마터호른(3,820M)을 오르면 눈 앞에 펼쳐지는 산들과 빙하를 감상할 수 있다.
몬테로사 산맥의 주봉으로, 스위스 쪽의 등산기지 체르마트의 남서쪽 10km 지점에 위치한다. 피라미드형의 특이한 산용을 가진 빙식첨봉(氷蝕尖峰)으로, 평균경사 45° 안팎의 급한 암벽이 1,5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다. 특히 스위스 쪽의 조망이 수려하다.
천하의 독수리봉인 마터호른 봉은 알프스 관광의 절정이다. 환경에 대한 배려로 휘발유 차량의 출입금지 리조트라서 조용하며 공기가 맑고 상쾌한 청정지역이다. 자동차는 중간역 테쉬의 대형 주차장에 세워두고, 그곳 부터는 등산산악열차로 들어간다. 마을 내의 교통은 전기 자동차 또는 마차가 이용되고 있어 이 또한 흥미로운 스위스 마을이다. 등산철도로 리페르알프와 고르너그라트, 공중 케이블을 타고 클라인 마터호른(3,820M)을 오르면 눈 앞에 펼쳐지는 산들과 빙하를 감상할 수 있다.
45위 중국 진시황 병마용갱
1974년 이래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총면적 25,380㎢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 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은 길이 210m, 너비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로서, 본래 이 갱 위에는 길이 210m, 넓이 9칸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며, 도용의 크기는 1.75~1.8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대이며, 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이 모두 상이하다. 1호 갱의 동북에 위치한 약 6,000㎢의 2호갱 역시 부분적으로 발굴되어 다량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562건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완전 발굴된 520㎢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릉 서북측에서 동마용과 동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가 1대 발견되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서안에서 37km 떨어진 임동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 낮은 야산 처럼 보이는 것이 진시황릉이다. 아직까지 전혀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이 묘는 진시황이 즉위한 바로 그 해로 부터 37년 동안 건설되었으며 병마용 박물관팀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이 곳에 전체 면적이 약 60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다고 한다. 거대한 지하도시는 진시황의 궁전으로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진시황은 기원전 246년 즉위한 진나라의 왕으로 철권통치와 분서갱유 등의 사건으로 악명이 높지만 중국 대륙을 통일한 최초의 왕이며 중앙집권제로 성문법 제정, 도량법 통일, 화폐 통일과 만리장성 축조 등 치적이 눈부신 왕이기도 하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며, 도용의 크기는 1.75~1.8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대이며, 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이 모두 상이하다. 1호 갱의 동북에 위치한 약 6,000㎢의 2호갱 역시 부분적으로 발굴되어 다량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562건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완전 발굴된 520㎢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릉 서북측에서 동마용과 동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가 1대 발견되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서안에서 37km 떨어진 임동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 낮은 야산 처럼 보이는 것이 진시황릉이다. 아직까지 전혀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이 묘는 진시황이 즉위한 바로 그 해로 부터 37년 동안 건설되었으며 병마용 박물관팀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이 곳에 전체 면적이 약 60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다고 한다. 거대한 지하도시는 진시황의 궁전으로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진시황은 기원전 246년 즉위한 진나라의 왕으로 철권통치와 분서갱유 등의 사건으로 악명이 높지만 중국 대륙을 통일한 최초의 왕이며 중앙집권제로 성문법 제정, 도량법 통일, 화폐 통일과 만리장성 축조 등 치적이 눈부신 왕이기도 하다.
44위 아이슬란드
대서양 북부에 있는 섬나라로, 면적은 10만 2928㎢, 인구 29만 명(2003), 레이캬비크, 정식명칭은 아이슬란드 공화국이다.
아이슬란드의 섬은 북위 63°20'부터, 66°33'까지, 서경 13°30'부터 24°32'까지를 차지하며, 남북길이 340km, 동서길이 530km의 계란형을 이루고 있다. 가장 가까운 서쪽의 그린란드까지는 278km, 남동쪽의 스코틀랜드까지는 708km, 동쪽의 노르웨이까지는 970km 떨어져 있다.
동해안과 북해안에는 홍적세(洪積世)에 섬 전체를 뒤덮었던 빙하가 만든 피오르드가 많다. 서쪽 지방과 남쪽 지방, 피오르드 안쪽에는 평지가 있으나 해발고도 200m로 경작한계(耕作限界)에 이르고 있다. 국토의 70%는 400m 이상의 불모지이고, 12%는 빙하이다. 이들 빙하는 6개 그룹으로 나뉘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트나이외쿠틀(바트나 빙하)이며 넓이 8,400㎢나 되는 세계 굴지의 규모이다. 섬의 북부 중앙에서 남서부 일대에 걸쳐 제4기 현무암, 파라고나이트 지대이며, 나머지 반인 동부와 북서부는 제3기 현무암 지대이다. 동부에는 1,100년 동안 헤클라·카틀라·아스캬·쉬르트세이·베스트만 등 30여 개의 활화산이 있으며, 온천과 간헐천(間歇泉)도 260개 지역에 달하여 증기(蒸氣)를 합계한 총열량이 매초 11억 kcal나 된다.
대부분의 아이슬란드인은 영국 셀츠(Celts)지방과 노르웨이 정착민의 후손들이다. 아이슬란드의 주민은 놀랍도록 단일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슬란드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99%의 국민이 도시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의 60%가 레이자비크(Reykjavic)과 그 주변에 살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언어는 고대 노르웨이어에 가까우며 12세기이후 상대적으로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91%의 주민이 국가교회, 복음 루터파 교회, 혹은 다른 종류의 루터파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이슬란드에서는 완벽한 종교적 자유가 있고 프로테스탄트나 로마 가톨릭 집회도 현존한다. 대부분 아이슬란드인 이름의 성(Surname)은 조상의 이름을 따서 만들게 되어 있으며 이것은 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예를들면 성인 Pertursson은 아버지의 이름 Petur에서 딴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슬란드인들은 서로의 성을 부르지 않으며 전화번호부 조차 성이 아닌 이름 순으로 분류되어 있다. 여성은 결혼 후에도 원래 자신의 성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아이슬란드의 섬은 북위 63°20'부터, 66°33'까지, 서경 13°30'부터 24°32'까지를 차지하며, 남북길이 340km, 동서길이 530km의 계란형을 이루고 있다. 가장 가까운 서쪽의 그린란드까지는 278km, 남동쪽의 스코틀랜드까지는 708km, 동쪽의 노르웨이까지는 970km 떨어져 있다.
동해안과 북해안에는 홍적세(洪積世)에 섬 전체를 뒤덮었던 빙하가 만든 피오르드가 많다. 서쪽 지방과 남쪽 지방, 피오르드 안쪽에는 평지가 있으나 해발고도 200m로 경작한계(耕作限界)에 이르고 있다. 국토의 70%는 400m 이상의 불모지이고, 12%는 빙하이다. 이들 빙하는 6개 그룹으로 나뉘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트나이외쿠틀(바트나 빙하)이며 넓이 8,400㎢나 되는 세계 굴지의 규모이다. 섬의 북부 중앙에서 남서부 일대에 걸쳐 제4기 현무암, 파라고나이트 지대이며, 나머지 반인 동부와 북서부는 제3기 현무암 지대이다. 동부에는 1,100년 동안 헤클라·카틀라·아스캬·쉬르트세이·베스트만 등 30여 개의 활화산이 있으며, 온천과 간헐천(間歇泉)도 260개 지역에 달하여 증기(蒸氣)를 합계한 총열량이 매초 11억 kcal나 된다.
대부분의 아이슬란드인은 영국 셀츠(Celts)지방과 노르웨이 정착민의 후손들이다. 아이슬란드의 주민은 놀랍도록 단일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슬란드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99%의 국민이 도시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의 60%가 레이자비크(Reykjavic)과 그 주변에 살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언어는 고대 노르웨이어에 가까우며 12세기이후 상대적으로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91%의 주민이 국가교회, 복음 루터파 교회, 혹은 다른 종류의 루터파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이슬란드에서는 완벽한 종교적 자유가 있고 프로테스탄트나 로마 가톨릭 집회도 현존한다. 대부분 아이슬란드인 이름의 성(Surname)은 조상의 이름을 따서 만들게 되어 있으며 이것은 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예를들면 성인 Pertursson은 아버지의 이름 Petur에서 딴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슬란드인들은 서로의 성을 부르지 않으며 전화번호부 조차 성이 아닌 이름 순으로 분류되어 있다. 여성은 결혼 후에도 원래 자신의 성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43위 서인도제도 바베이도스
면적은 430㎢, 인구는 27만 2000명(2003)이다. 수도는 브리지타운이며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서인도제도의 남쪽, 윈드워드제도(諸島) 동쪽 끝에 있는 영연방(英聯邦)에 속하는 독립국. 국토는 바베이도섬[島]이다. 입헌군주국이므로 총리가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관광산업을 개발하여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다.
주변의 섬들이 대부분 화산섬이나,바베이도스는 석회암섬이다. 약 335m 높이의 힐러바이산(山:374m)이 솟아있고 계곡에는 많은 토종 식물상과 동물군이 서식한다. 섬 주위에는 산호초가 있다. 일년내내 햇볕이 비쳐 따뜻하여 '태양 속의 섬'이라고도 한다. 섬의 대부분은 경작 가능한 평지로 되어 있다. 기후는 열대해양성기후로, 저녁에는 약간 기온이 내려가지만 대체로 23~29℃ 정도 된다. 7~9월의 고온기에는 23~31℃, 2월의 저온기에는 21~28℃를 나타낸다.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지는데 건기는 1월에서 5월, 우기는 6월에서 12월까지이다. 6월에서 10월까지 허리케인이 발생하지만 큰 피해를 준 적은 거의 없다. 1955년에 허리케인 자넷이 내습하였다.
바베이도스 주민의 약 80%가 아프리카인, 4%는 유럽인, 16%는 혼혈이다. 바베이도스인의 약 70%가 영국성공회를 믿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감리교, 침례교 등을 믿는다. 바베이도스인은 영어를 사용한다.
주변의 섬들이 대부분 화산섬이나,바베이도스는 석회암섬이다. 약 335m 높이의 힐러바이산(山:374m)이 솟아있고 계곡에는 많은 토종 식물상과 동물군이 서식한다. 섬 주위에는 산호초가 있다. 일년내내 햇볕이 비쳐 따뜻하여 '태양 속의 섬'이라고도 한다. 섬의 대부분은 경작 가능한 평지로 되어 있다. 기후는 열대해양성기후로, 저녁에는 약간 기온이 내려가지만 대체로 23~29℃ 정도 된다. 7~9월의 고온기에는 23~31℃, 2월의 저온기에는 21~28℃를 나타낸다.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지는데 건기는 1월에서 5월, 우기는 6월에서 12월까지이다. 6월에서 10월까지 허리케인이 발생하지만 큰 피해를 준 적은 거의 없다. 1955년에 허리케인 자넷이 내습하였다.
바베이도스 주민의 약 80%가 아프리카인, 4%는 유럽인, 16%는 혼혈이다. 바베이도스인의 약 70%가 영국성공회를 믿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감리교, 침례교 등을 믿는다. 바베이도스인은 영어를 사용한다.
42위 태국 방콕
태국의 수도이자 관문이 되는 도시이다. 1782년 라마 1세 국왕 때 세워진 이 도시는, 옛 것과 새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태국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
시암 만(Gulf of Siam)에서 조금 떨어진 짜오 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 기슭에 위치한 방콕은 평원을 가로지르며 뻗어 있다. 왕가가 거주하는 곳이며 행정의 중심이자 주요 항구도시로 태국 인구의 약 1/10이 살고 있다. 방콕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강과 철도 사이에 위치한 구 시가지에 대부분의 오래된 사원이 있다. 신시가지는 철도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주요 상가와 관광 지구, 광대한 주거 지역이 펼쳐져 있다. 시내에는 대소 300의 사원이 있을 만큼 일찍이 불교의 꽃을 피워 온 도시이다.
왕궁에 인접해 있는 왓 프라깨오에는 약 60cm 높이의 에메랄드 불상이 있어서 일명 에메랄드 사원이라고 부르는 가장 유명한 사원이다. 그 밖에 대리석으로 만든 대리석사원, 누운 석가상이 있는 왓 포, 방콕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왓 아룬 등이 있다. 한국 보다 2시간 늦다.
인기 여행지
▶태국 왕궁 & 왓 프라 깨우(Grand Palace & Wat Phra Kaew)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 깨우(에메랄드 부처의 사원)는 가장 성스러운 불상을 모신 곳으로 태국 최고의 성지다. 에메랄드 부처는 높이가 66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태국의 가장 중요한 불상으로 종교적인 의미가 크다. 왓 프라 깨우 사원은 1782년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수도를 옮길 때 광활한 땅에 지었던 왕궁과 접해 있다. 라마 1세 이후의 왕들과 가족들이 이 궁에 살았다가 라마 5세가 두씻으로 왕실을 옮겼다. 오늘날 태국 왕궁은 주로 대관식 같은 예식이 있을 때만 사용된다.
94만 5,000평방미터의 땅에 펼쳐진 100여 개의 건물들(대부분이 랏따나꼬씬 건축 양식)을 돌아보는 것은 태국 관광의 백미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므로 복장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본관 사무소에서 적당한 옷을 빌려 입을 수 있다. 왓 프라 깨우의 본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은 슬리퍼 스타일만 아니면 된다. 즉 스포츠 샌들도 가능하다. 신발도 대여 가능하며, 왕궁 밖 노점보다는 왕궁 내 대여소에서 보증금만 내고 빌리는 것이 좋다(보증금 100B은 돌려받을 수 있다). 단, 왕궁 내 대여소에서 신발을 빌리려면 양말을 구입해야 한다. 복장은 반바지는 불가능하나 칠부바지 정도, 즉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옷은 괜찮다.
▶왓 아룬 (Wat Arun) (새벽 사원)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 강을 따라가다 보면 톤부리 제방 위에 펼쳐지는 왓 아룬 사원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에 끊임없이 사로잡힌다. 가장 멋진 모습의 왓 아룬을 보는 것이므로 이 모습을 마음 속에 담아두자. 가까이 가서 실제로 사원을 보면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19세기 초에 지어진 탑을 올라가면 도시의 전경이 보인다. 이 탑은 크메르와 태국 양식을 접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인정 받고 있다.
▶왓 포 (Wat Pho)
왓 포는 방콕의 사원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16세기에 탄생했으니 방콕보다 역사가 더 오래됐으며 가장 큰 규모의 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엄청난 와불상(臥佛像)을 비롯해 태국에서 가장 많은 불상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이곳의 와불상은 태국에서 가장 높은 불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왓 포를 태국 전통 마사지의 중심지로 알고 있다. 다리가 피곤하면 사원의 동쪽 끝으로 가라. 그곳에 바로 그 유명한 태국 전통 마사지 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차이나타운 (China Town)
간단히 말해서 방콕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시끄러운 소리와 냄새에 재미도 있는 곳이다. 골목은 어둡고 큰 도로들은 교통이 막힌다. 활기차고 싼 값에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은 물론 발길을 멈추게 하는 먹거리 노점상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다. 차이나타운은 대략 활람퐁 스카이트레인 역 서쪽 지역과 클롱 옹 앙 동쪽 지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랏따나꼬씬에 새로 수도가 들어설 때 그곳에 살던 중국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19세기 말에는 암흑가로 악명이 높았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으리으리한 태국 아르 데코 빌딩들이 차이나타운의 주요 도로인 야와랏(지금은 금은보석상들로 유명)과 챠루엔 크룽을 따라 줄줄이 들어섰다. 오늘날 차이나타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전히 방콕의 중국 문화 중심지로, 중국어 신문이 4개나 있으며 성대한 중국 신년 축제를 자랑하고 있다.
▶짐 톰슨 하우스 (Jim Thompson's House)
미국 출신인 짐 톰슨은 삶과 죽음에서 모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가 남긴 것은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게 된 태국 비단과 아름다운 동남아 미술품, 평화로운 모습의 태국 전통 주택이다. 여행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 1959년 짐 톰슨이 클롱 샌 샙 옆으로 기둥 위에 지은 목조 주택 6개 가운데 몇 채를 볼 수 있다. 이 집들에는 곳곳에 버마나 캄보디아, 태국 공예품들뿐 아니라 진귀한 중국 도자기를 비롯한 짐 톰슨의 예술품과 개인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짐 톰슨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은 고사 위기에 있던 태국의 가내 공업을 되살리는 데 가장 큰 몫을 했다. 손으로 짠 실크를 유럽의 패션 회사들에 보내 오늘날까지도 전통 기술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시암 만(Gulf of Siam)에서 조금 떨어진 짜오 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 기슭에 위치한 방콕은 평원을 가로지르며 뻗어 있다. 왕가가 거주하는 곳이며 행정의 중심이자 주요 항구도시로 태국 인구의 약 1/10이 살고 있다. 방콕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강과 철도 사이에 위치한 구 시가지에 대부분의 오래된 사원이 있다. 신시가지는 철도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주요 상가와 관광 지구, 광대한 주거 지역이 펼쳐져 있다. 시내에는 대소 300의 사원이 있을 만큼 일찍이 불교의 꽃을 피워 온 도시이다.
왕궁에 인접해 있는 왓 프라깨오에는 약 60cm 높이의 에메랄드 불상이 있어서 일명 에메랄드 사원이라고 부르는 가장 유명한 사원이다. 그 밖에 대리석으로 만든 대리석사원, 누운 석가상이 있는 왓 포, 방콕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왓 아룬 등이 있다. 한국 보다 2시간 늦다.
인기 여행지
▶태국 왕궁 & 왓 프라 깨우(Grand Palace & Wat Phra Kaew)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 깨우(에메랄드 부처의 사원)는 가장 성스러운 불상을 모신 곳으로 태국 최고의 성지다. 에메랄드 부처는 높이가 66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태국의 가장 중요한 불상으로 종교적인 의미가 크다. 왓 프라 깨우 사원은 1782년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수도를 옮길 때 광활한 땅에 지었던 왕궁과 접해 있다. 라마 1세 이후의 왕들과 가족들이 이 궁에 살았다가 라마 5세가 두씻으로 왕실을 옮겼다. 오늘날 태국 왕궁은 주로 대관식 같은 예식이 있을 때만 사용된다.
94만 5,000평방미터의 땅에 펼쳐진 100여 개의 건물들(대부분이 랏따나꼬씬 건축 양식)을 돌아보는 것은 태국 관광의 백미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므로 복장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본관 사무소에서 적당한 옷을 빌려 입을 수 있다. 왓 프라 깨우의 본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은 슬리퍼 스타일만 아니면 된다. 즉 스포츠 샌들도 가능하다. 신발도 대여 가능하며, 왕궁 밖 노점보다는 왕궁 내 대여소에서 보증금만 내고 빌리는 것이 좋다(보증금 100B은 돌려받을 수 있다). 단, 왕궁 내 대여소에서 신발을 빌리려면 양말을 구입해야 한다. 복장은 반바지는 불가능하나 칠부바지 정도, 즉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옷은 괜찮다.
▶왓 아룬 (Wat Arun) (새벽 사원)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 강을 따라가다 보면 톤부리 제방 위에 펼쳐지는 왓 아룬 사원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에 끊임없이 사로잡힌다. 가장 멋진 모습의 왓 아룬을 보는 것이므로 이 모습을 마음 속에 담아두자. 가까이 가서 실제로 사원을 보면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19세기 초에 지어진 탑을 올라가면 도시의 전경이 보인다. 이 탑은 크메르와 태국 양식을 접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인정 받고 있다.
▶왓 포 (Wat Pho)
왓 포는 방콕의 사원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16세기에 탄생했으니 방콕보다 역사가 더 오래됐으며 가장 큰 규모의 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엄청난 와불상(臥佛像)을 비롯해 태국에서 가장 많은 불상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이곳의 와불상은 태국에서 가장 높은 불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왓 포를 태국 전통 마사지의 중심지로 알고 있다. 다리가 피곤하면 사원의 동쪽 끝으로 가라. 그곳에 바로 그 유명한 태국 전통 마사지 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차이나타운 (China Town)
간단히 말해서 방콕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시끄러운 소리와 냄새에 재미도 있는 곳이다. 골목은 어둡고 큰 도로들은 교통이 막힌다. 활기차고 싼 값에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은 물론 발길을 멈추게 하는 먹거리 노점상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다. 차이나타운은 대략 활람퐁 스카이트레인 역 서쪽 지역과 클롱 옹 앙 동쪽 지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랏따나꼬씬에 새로 수도가 들어설 때 그곳에 살던 중국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19세기 말에는 암흑가로 악명이 높았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으리으리한 태국 아르 데코 빌딩들이 차이나타운의 주요 도로인 야와랏(지금은 금은보석상들로 유명)과 챠루엔 크룽을 따라 줄줄이 들어섰다. 오늘날 차이나타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전히 방콕의 중국 문화 중심지로, 중국어 신문이 4개나 있으며 성대한 중국 신년 축제를 자랑하고 있다.
▶짐 톰슨 하우스 (Jim Thompson's House)
미국 출신인 짐 톰슨은 삶과 죽음에서 모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가 남긴 것은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게 된 태국 비단과 아름다운 동남아 미술품, 평화로운 모습의 태국 전통 주택이다. 여행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 1959년 짐 톰슨이 클롱 샌 샙 옆으로 기둥 위에 지은 목조 주택 6개 가운데 몇 채를 볼 수 있다. 이 집들에는 곳곳에 버마나 캄보디아, 태국 공예품들뿐 아니라 진귀한 중국 도자기를 비롯한 짐 톰슨의 예술품과 개인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짐 톰슨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은 고사 위기에 있던 태국의 가내 공업을 되살리는 데 가장 큰 몫을 했다. 손으로 짠 실크를 유럽의 패션 회사들에 보내 오늘날까지도 전통 기술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41위 스리랑카 시기리야
인도 남부 인도양 해상에 위치하며, 면적은 6만 5,610㎢, 인구는 1906만 5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290.6명/㎢(2003)이다. 정식명칭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48년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독립하였으며, 1972년에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개칭하여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가 1978년에 현재의 국명으로 바꾸었다. 1985년 수도가 이전되어 콜롬보 외에 정치적 역할을 하는 수도로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가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의 요지를 차지하며, 인구는 섬의 남서부에 집중해 있다.
최근까지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콜롬보는 매력적인 도시일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융해되는 도시이다. 콜롬보는 인구 50만 정도에 15개의 지구로 나뉘어져 있다. 볼거리로는 불교사원과 힌두사원, 이슬람사원, 기독교 교회당과 같은 사원부터 국회의사당 건물, 공원, 동물원, 박물관과 미술 갤러리 등이 있다. 보통 한나절 여행을 하면 40 km정도를 커버하고 불교사원과 힌두사원 그리고 동물관과 거주지역을 볼 수 있다.
▶Nuwara Eliya 누와라 엘리야
차 재배지인 이 섬의 고원지대의 중앙에 위치한 산악지로서 콜롬보로부터 169km, 캔디에서 77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누와라 엘리야는 해발 1,900미터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영국 식민지시대의 향수가 가장 잘 서려있는 해발 1989미터의 피서지로 유명하다. 이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524미터인 피두루탈라갈라(Pidurutalagala)산이 있다. 모든 공공건물, 집, 거리, 길, 공원 등은 옛 영국식으로 되어 있어 이곳의 맑고 시원한 산 공기를 마시며 가끔씩 내리는 비를 맞다보면 마치 영국시골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라 한다. 이곳의 차는 고지대의 기후에서 경작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맛을 낸다 하며 이 일대를 둘러보면 차 재배와 가공의 전 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곳의 18홀 골프코스도 유명한데 여행객에게도 오픈되어 있고, 근처의 학갈라(Botanical Garden)는 누왈라 엘리야의 명소이다.
▶Sigiriya 시기리야
폴론나루와로부터 6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시기리야는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370미터의 화강암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사자 바위(Lion's Rock)"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밀림지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시기리야의 바위산에는 5세기에 신할리왕조 제65대 왕 카사파 1세가 건설한 성채도시 유적이 있고 산기슭에는 정원과 담장들로 둘러싸인 시가지 유적이 있다. 높이 약 200m, 넓이 약 2㏊인 평평한 산 정상에는 좁은 계단과 작은 길을 연결하여 궁전·저수지·정원 등을 세웠으나, 지금은 벽돌로 된 기단만 남아 있다. 산 북쪽 중턱에는 성문 유적이 남아 있는데, 문 양쪽 옆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거대한 동물의 앞발 조각상이 있다. 문 중앙에는 왕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1982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48년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독립하였으며, 1972년에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개칭하여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가 1978년에 현재의 국명으로 바꾸었다. 1985년 수도가 이전되어 콜롬보 외에 정치적 역할을 하는 수도로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가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의 요지를 차지하며, 인구는 섬의 남서부에 집중해 있다.
최근까지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콜롬보는 매력적인 도시일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융해되는 도시이다. 콜롬보는 인구 50만 정도에 15개의 지구로 나뉘어져 있다. 볼거리로는 불교사원과 힌두사원, 이슬람사원, 기독교 교회당과 같은 사원부터 국회의사당 건물, 공원, 동물원, 박물관과 미술 갤러리 등이 있다. 보통 한나절 여행을 하면 40 km정도를 커버하고 불교사원과 힌두사원 그리고 동물관과 거주지역을 볼 수 있다.
▶Nuwara Eliya 누와라 엘리야
차 재배지인 이 섬의 고원지대의 중앙에 위치한 산악지로서 콜롬보로부터 169km, 캔디에서 77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누와라 엘리야는 해발 1,900미터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영국 식민지시대의 향수가 가장 잘 서려있는 해발 1989미터의 피서지로 유명하다. 이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524미터인 피두루탈라갈라(Pidurutalagala)산이 있다. 모든 공공건물, 집, 거리, 길, 공원 등은 옛 영국식으로 되어 있어 이곳의 맑고 시원한 산 공기를 마시며 가끔씩 내리는 비를 맞다보면 마치 영국시골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라 한다. 이곳의 차는 고지대의 기후에서 경작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맛을 낸다 하며 이 일대를 둘러보면 차 재배와 가공의 전 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곳의 18홀 골프코스도 유명한데 여행객에게도 오픈되어 있고, 근처의 학갈라(Botanical Garden)는 누왈라 엘리야의 명소이다.
▶Sigiriya 시기리야
폴론나루와로부터 6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시기리야는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370미터의 화강암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사자 바위(Lion's Rock)"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밀림지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시기리야의 바위산에는 5세기에 신할리왕조 제65대 왕 카사파 1세가 건설한 성채도시 유적이 있고 산기슭에는 정원과 담장들로 둘러싸인 시가지 유적이 있다. 높이 약 200m, 넓이 약 2㏊인 평평한 산 정상에는 좁은 계단과 작은 길을 연결하여 궁전·저수지·정원 등을 세웠으나, 지금은 벽돌로 된 기단만 남아 있다. 산 북쪽 중턱에는 성문 유적이 남아 있는데, 문 양쪽 옆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거대한 동물의 앞발 조각상이 있다. 문 중앙에는 왕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1982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40위 세이셸제도 라디게섬
세이셸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약 1600㎞ 인도양에 떠있는 92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다. 적도의 바로 남쪽에 있지만 인도양 위에 있기 때문에 시원하고 진귀한 동식물에 둘러싸인 「인도양 최후의 낙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제일 처음에는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상륙했다고 하지만 19세기 초에 모리어스 제도와 함께 영국령이 되어 1979년 6월 세이셸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동부아프리카, 케냐동방 약 1580km 인도양 상에 위치하며, 면적 455평방 Km, 인구는 79,000名 (2000년), 수도는 빅토리아(Victoria), 공용어로는 영어, 프랑스어, 크레올어이고, 종족구성은 세이셀인, 종교는 천주교 90%, 성공회 8%이다.
세이셜 제도는 마스카렌 해령(海嶺)의 북단에 위치하는 고기(古期) 화강암질의 군도이다. 섬은 곤드와나 대륙이 분리했을 때 아프리카 대륙과 남부아시아 대륙 사이에 고립되어 남은 부분으로 추정된다. 지질적으로는 거 의가 화산섬으로 구성된 마다가스카르 부근의 섬들과는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최대의 섬인 마에섬은 산이 많으며 최고점은 928`m에 달하여 전 제도 중에서 가장 높다.
그 밖에 프레슬린섬 라디게섬 실루엣섬 프로비덴스섬 등 이 있으며 큰 섬 외에는 거의 환초(環礁) 등의 산호초로 구성되어 있다. 적도 바로 아래에 위치하나 인도양에 있으므로 연평균기온은 26∼27`℃로 1년 을 통해서 큰 온도 변화는 없다. 12월부터 3월에 걸쳐 습기를 가진 북서몬순 이 불어오고 6월부터 10월에 걸쳐서는 남동무역 등의 영향을 받아 건계(乾 季)를 이룬다. 또한 진기한 동물과 식물이 풍부하여 ‘인도양 최후의 낙원’이라고도 일컫는다. 세이셀공화국의 알다브라 환초지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라디게 섬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허가해 주지 않는다. 우마차와 자전거만 허용된다.
동부아프리카, 케냐동방 약 1580km 인도양 상에 위치하며, 면적 455평방 Km, 인구는 79,000名 (2000년), 수도는 빅토리아(Victoria), 공용어로는 영어, 프랑스어, 크레올어이고, 종족구성은 세이셀인, 종교는 천주교 90%, 성공회 8%이다.
세이셜 제도는 마스카렌 해령(海嶺)의 북단에 위치하는 고기(古期) 화강암질의 군도이다. 섬은 곤드와나 대륙이 분리했을 때 아프리카 대륙과 남부아시아 대륙 사이에 고립되어 남은 부분으로 추정된다. 지질적으로는 거 의가 화산섬으로 구성된 마다가스카르 부근의 섬들과는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최대의 섬인 마에섬은 산이 많으며 최고점은 928`m에 달하여 전 제도 중에서 가장 높다.
그 밖에 프레슬린섬 라디게섬 실루엣섬 프로비덴스섬 등 이 있으며 큰 섬 외에는 거의 환초(環礁) 등의 산호초로 구성되어 있다. 적도 바로 아래에 위치하나 인도양에 있으므로 연평균기온은 26∼27`℃로 1년 을 통해서 큰 온도 변화는 없다. 12월부터 3월에 걸쳐 습기를 가진 북서몬순 이 불어오고 6월부터 10월에 걸쳐서는 남동무역 등의 영향을 받아 건계(乾 季)를 이룬다. 또한 진기한 동물과 식물이 풍부하여 ‘인도양 최후의 낙원’이라고도 일컫는다. 세이셀공화국의 알다브라 환초지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라디게 섬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허가해 주지 않는다. 우마차와 자전거만 허용된다.
39위 싱가포르
적도 북쪽 137km 지점에 있으며, 면적은 685.4㎢, 인구는 423만 3000명(2003)이다. 60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호르 해협을 가로지르는 둑길 위의 도로와 철도를 통해 서말레이시아와 이어지며, 남서쪽으로 말라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과 마주보고 있다. 수도는 싱가포르이며 언어는 중국어, 영어, 말레이어, 타밀어 등을 사용한다. 정식명칭은 싱가포르공화국(Repubic of Singapore). 중국 표준어로는 신자포(新加坡), 타밀어로는 Singapore Kudiyarasu. 말레이 반도 남단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다. 낮게 굽이치는 경관 가운데 약 2/3가 해발 15m 미만의 평지이고 섬 중앙의 울퉁불퉁한 화강암 고지에 있는 최고봉 티마 산도 높이가 165m에 지나지 않는다. 섬의 동부는 언덕과 침식 계곡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낮은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고지의 남쪽과 서쪽에는 해안을 따라 일련의 낮은 벼랑과 얕은 계곡을 이루는 급경사면이 펼쳐진다. 짧은 하천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 있으며 싱가포르에서 가장 길다는 셀레타르 강도 길이가 16km에 채 못미친다.
연평균 강우량이 2,400㎜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 공급의 2/3 이상을 이웃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월평균기온은 높은 편으로 1월의 25℃에서 6월의 27℃ 사이에 연중 고르게 분포한다. 연강우량도 상당히 고르게 분포하지만 북동 계절풍이 부는 11∼3월 사이에는 월평균 250㎜, 남쪽 계절풍이 부는 5∼9월 사이에는 178㎜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육지면적 가운데 2% 정도가 경작이 가능하며 토양은 대체로 메마른 편이다. 가경지에서는 현대적 집약농경이 이루어지는데 세계에서 과일과 채소의 생산성이 가장 높은 지대로 손꼽힌다. 국토 면적 중 약 4.9%가 삼림지로 자연보존위원회에서 관리한다. 우림(雨林)이 가장 울창한 곳은 중앙 고지의 티마 산 자연보호구에 있다. 많은 하천 가운데 특히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에는 홍수림으로 둘러싸인 넓은 하구가 내륙까지 깊숙이 뻗어 있다. 원래 우림지대였던 대부분의 지역이 관목지대로 바뀌었다. 포유동물로는 꼬리가 긴 마카크(아시아산 원숭이)와 천산갑(穿山甲) 등이 있다. 여러 종류의 조류, 코브라와 도마뱀도 많이 서식한다.
중국인이 전체인구의 3/4을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福建省)과 광둥 성(廣東省) 출신이 많으며, 서로 통하지 않는 방언을 쓴다. 말레이인과 타밀족·말라얄리족·시크교도를 포함한 인도인이 나머지 인구를 구성한다. 공용어는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이다. 중국인은 대부분 유교·불교·도교를 믿는다. 말레이인들과 일부 인도인들은 이슬람교도이고 나머지는 그리스도교도이거나 힌두교도이다.
싱가포르는 주로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가 중심을 이룬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인구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한다. 싱가포르에는 100개 이상의 상업은행이 있는데, 대부분이 외국은행이다. 1968년에 아메리카은행의 도움으로 개설된 아시아 달러 시장이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주로 아시아계 기업에 대한 외국의 투자를 중개한다. 싱가포르는 영연방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ASEAN)의 회원국이다. 주요 교역대상국은 미국·말레이시아·일본이며, 원유·자본재·공업원료가 수입의 주종을 이루는 한편 석유제품, 전기기구와 섬유 완제품을 비롯한 공산품 등을 수출한다. 제조업 부문의 급성장으로 중계무역에 대한 의존도는 줄었지만, 싱가포르는 연간 출입 선박의 총 t수로 따져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 가운데 하나이다.
싱가포르의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다. 낮게 굽이치는 경관 가운데 약 2/3가 해발 15m 미만의 평지이고 섬 중앙의 울퉁불퉁한 화강암 고지에 있는 최고봉 티마 산도 높이가 165m에 지나지 않는다. 섬의 동부는 언덕과 침식 계곡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낮은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고지의 남쪽과 서쪽에는 해안을 따라 일련의 낮은 벼랑과 얕은 계곡을 이루는 급경사면이 펼쳐진다. 짧은 하천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 있으며 싱가포르에서 가장 길다는 셀레타르 강도 길이가 16km에 채 못미친다.
연평균 강우량이 2,400㎜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 공급의 2/3 이상을 이웃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월평균기온은 높은 편으로 1월의 25℃에서 6월의 27℃ 사이에 연중 고르게 분포한다. 연강우량도 상당히 고르게 분포하지만 북동 계절풍이 부는 11∼3월 사이에는 월평균 250㎜, 남쪽 계절풍이 부는 5∼9월 사이에는 178㎜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육지면적 가운데 2% 정도가 경작이 가능하며 토양은 대체로 메마른 편이다. 가경지에서는 현대적 집약농경이 이루어지는데 세계에서 과일과 채소의 생산성이 가장 높은 지대로 손꼽힌다. 국토 면적 중 약 4.9%가 삼림지로 자연보존위원회에서 관리한다. 우림(雨林)이 가장 울창한 곳은 중앙 고지의 티마 산 자연보호구에 있다. 많은 하천 가운데 특히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에는 홍수림으로 둘러싸인 넓은 하구가 내륙까지 깊숙이 뻗어 있다. 원래 우림지대였던 대부분의 지역이 관목지대로 바뀌었다. 포유동물로는 꼬리가 긴 마카크(아시아산 원숭이)와 천산갑(穿山甲) 등이 있다. 여러 종류의 조류, 코브라와 도마뱀도 많이 서식한다.
중국인이 전체인구의 3/4을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福建省)과 광둥 성(廣東省) 출신이 많으며, 서로 통하지 않는 방언을 쓴다. 말레이인과 타밀족·말라얄리족·시크교도를 포함한 인도인이 나머지 인구를 구성한다. 공용어는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이다. 중국인은 대부분 유교·불교·도교를 믿는다. 말레이인들과 일부 인도인들은 이슬람교도이고 나머지는 그리스도교도이거나 힌두교도이다.
싱가포르는 주로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가 중심을 이룬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인구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한다. 싱가포르에는 100개 이상의 상업은행이 있는데, 대부분이 외국은행이다. 1968년에 아메리카은행의 도움으로 개설된 아시아 달러 시장이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주로 아시아계 기업에 대한 외국의 투자를 중개한다. 싱가포르는 영연방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ASEAN)의 회원국이다. 주요 교역대상국은 미국·말레이시아·일본이며, 원유·자본재·공업원료가 수입의 주종을 이루는 한편 석유제품, 전기기구와 섬유 완제품을 비롯한 공산품 등을 수출한다. 제조업 부문의 급성장으로 중계무역에 대한 의존도는 줄었지만, 싱가포르는 연간 출입 선박의 총 t수로 따져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 가운데 하나이다.
38위 두바이
인구는 91만정도.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구성하는 7개국 중의 한 나라로, 전에는 트루셜오만의 구성국 중 하나였다. 두바이는 아랍어(語)로 '메뚜기'를 뜻하며, 토후국 중 유일한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여 중계무역지가 되었다.
1969년부터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1971년에는 650만 t의 원유를 수출하여 새로운 산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엄청난 오일달러를 투입해 중동의 허브로 발돋움하기 위해 매일 변하고 있다. 아랍 에미리트 연합에 약 1세기전 석유가 발견되어 생산되기 이전에 두바이는 작은 촌락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석유가 발견되고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두바이에는 고속도로가 뚫리고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가 들어서 사막위의 신기루처럼 도시가 생성된 것이다.
현재는 두바이 비치에 세워진 7성급 호텔인 버즈 알 아랍 호텔(Burj Al Arab Hotel)이 전 세계적으로 화보집이나 달력, 인터넷 매체를 타고 인기를 얻으면서 자연스럽게 두바이라는 도시도 유명해졌으며 2005년 5월 1일부로 매일 1회씩 아랍 에미리트 항공의 직항이 한국과 개설되면서 한국 관광객들도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바다를 항해하는 거대한 아라비아 돛단배를 형상화해서 만들어진 버즈 알 아랍 호텔(Burj Al Arab Hotel)은 지금은 타계한 통치자 셰이크 라시드(Sheikh Rashid)가 정책적으로 건축하도록 한 두바이의 명물로 당시까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두바이를 세계에 알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다. 발상의 전환이 만든 '세계 최대' '세계 최고'의 허브 "두바이 도시 전체가 세계 8대 불가사의다."
야자수 모양의 매혹적인 인공섬 '팜 주메이라'는 지상과 낙원의 경계에 놓여있는 듯했다. 하얗다 못해 차라리 푸르러 보이는 모래 백사장과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다, 해안가에 입을 맞추는 부드럽게 일렁이는 바닷물 위로 우뚝솟은 거대한 인공섬 팜 주메이라는 그 자체가 `위용`이었다.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팜 주메이라는 아직 미완성이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와 기획력에 인간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길이가 400m가 넘는 팜 주메이라의 각 줄기섬에는 형형색색의 최고급 빌라 수천가구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바다의 한 지점을 돌과 흙으로 막아 달에서도 보이는 인공섬을 만들겠다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분명 눈앞에 펼쳐져 있건만 인간의 힘으로 만든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사막으로 사방이 가로 막혀있지만 `공간의 한계`에 전혀 구속당하지 않는 두바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두바이와 미래의 두바이를 엿보게 하는 상상력의 힘이기도 하다.
▶두바이를 관통하는 발상의 전환= 흔히들 두바이의 천지개벽을 '오일달러의 힘'으로 잘못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두바이 곳곳을 다니다보면 이 천지개벽의 출발점은 '석유'가 아닌 '발상의 전환'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지난 1966년 처음 석유를 발견한 두바이는 2026년까지는 걱정없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두바이 지도자였던 세이크 라시드는 석유의 발견과 함께 석유자원의 고갈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그는 겨우 60년치 밖에 안되는 석유자원의 고갈을 두바이 민족의 멸망이라는 객관적인 위기의식으로 전환시켰다. 두바이 민족의 존립을 위한 비전을 두바이 뿐 아니라 전세계에 공고히 한 것이다.
두바이 천지개벽 참관단의 삼성생명 금융연구소 주창돈 상무는 "이슬람 국가로서 두바이에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개방적인 허브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두바이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중동의 허브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단기, 중기, 장기의 로드맵도 정확하게 그려나갔다"고 평가했다. 라시드의 이같은 발상의 전환은 그의 아들 세이크 모하메드로 이어지면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중동의 허브' 두바이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팜 주메이라는 물론 팜 데이라, 팜 제벨알리, 더 월드에 이르기까지 인공섬들을 가득 메운 것은 돌과 흙이 아닌 무한대로 치닫는 '역발상'이다. 발상의 전환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두바이의 현재와 미래를 만든 핵심코드다. 4개의 인공섬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인공해변 길이는 1100Km로 경부고속도로의 3배에 육박한다.
▶천지개벽의 총 지휘자, 세이크 모하메드= 두바이의 천지개벽은 세이크 라시드가 시작했지만 그 정점에는 현 왕세자 세이크 모하메드가 있다. 모하메드는 두바이의 정치, 경제, 산업, 관광을 아우르는 총 지휘자다. 그는 실질적으로 두바이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영국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모하메드는 인공섬과 인터넷시티 등 두바이 개발사업의 각종 아이디어를 직접 내놓는가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기증해 천지개벽을 일궈냈다.
두바이의 천지개벽은 존경받는 왕권정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바이는 모든 토지가 국왕 소유로 엄청난 개발에도 불구, 민원과 보상으로 골치를 썩는 일이 없다. 모하메드의 의지만 있다면 어떤 지역도, 어떤 규모로든 개발할 수 있다. 모하메드는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극대화시킨 위대한 지도자다. 세이크 모하메드는 각계 전문가 2000여명으로 구성된 씽크탱크를 직속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통해 두바이 개발과 관련된 각종 사안들을 빛의 속도에 비유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결정한다고 한다.
세이크 모하메드와 씽크탱크가 두바이 개발에 얼마나 치밀한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두바이는 대형 개발사업을 추진할 때 민간 디벨로퍼에게 99년 임대조건으로 토지를 판다고 한다. 이때 땅값을 계산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표면적인 땅값은 250만원 안팎으로 불모지를 바꾼 땅값 치고는 그다지 비싸지 않다. 그러나 실제 계약서상의 땅값은 여기에 해당 지역 용적률을 곱해 산출한다. 평당 250만원인 땅값에 용적률 600%만 적용해도 평당 땅값은 1500만원을 훌쩍 넘는다. 사업시행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하게 개발을 추진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바이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인 엠마와 낙힐의 실질적 소유주는 세이크 모하메드다
▶두바이 전체가 세계 8대 불가사의=두바이의 기적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두바이는 이미 20년전인 1985년 중동 최초로 제벨알리 항구의 배후지역에 제벨알리 경제자유구역(프리존)을 설치했다. 두바이 공항자유무역지대를 만든 것도 벌써 10년째다. 일찌감치 앞선 마인드로 허브를 구축하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왔다. 두바이 개발은 최근들어 더욱 무서운 속도를 내고 있다. 특이한 점은 두바이의 각종 개발사업에는 항상 '세계 최대',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 홍콩과 싱가포르를 앞서는 허브를 위해서는 '평범함'으로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800m 높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두바이와 골프장과 주거시설을 포함, 미국 디즈니랜드의 8배가 넘는 두바이랜드, 인공섬 프로젝트로는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팜 아일랜드, 세계 최고급 7성호텔 버즈 알아랍(사진)에 이르기까지 두바이의 최고 정신이 녹아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두바이의 천지개벽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 최근 두바이 정부는 제벨알리 내륙지역에 40억달러 안팎의 대규모 크릭(인공수로) 건설을 계획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안 인근지역의 개발은 거의 마무리 단계로 이제 광활한 내륙 사막지역의 공략에 나선 것이다. 이 크릭이 완공되면 현재 두바이 곳곳에서 진행중인 개발사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대형 프로젝트가 또다시 넘쳐날 전망이다.
끝없는 발상의 전환과 피와 땀,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두바이는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우리가 두바이 전체를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도시가 도무지 한계를 느낄 수 없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원종태 기자)
1969년부터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1971년에는 650만 t의 원유를 수출하여 새로운 산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엄청난 오일달러를 투입해 중동의 허브로 발돋움하기 위해 매일 변하고 있다. 아랍 에미리트 연합에 약 1세기전 석유가 발견되어 생산되기 이전에 두바이는 작은 촌락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석유가 발견되고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두바이에는 고속도로가 뚫리고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가 들어서 사막위의 신기루처럼 도시가 생성된 것이다.
현재는 두바이 비치에 세워진 7성급 호텔인 버즈 알 아랍 호텔(Burj Al Arab Hotel)이 전 세계적으로 화보집이나 달력, 인터넷 매체를 타고 인기를 얻으면서 자연스럽게 두바이라는 도시도 유명해졌으며 2005년 5월 1일부로 매일 1회씩 아랍 에미리트 항공의 직항이 한국과 개설되면서 한국 관광객들도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바다를 항해하는 거대한 아라비아 돛단배를 형상화해서 만들어진 버즈 알 아랍 호텔(Burj Al Arab Hotel)은 지금은 타계한 통치자 셰이크 라시드(Sheikh Rashid)가 정책적으로 건축하도록 한 두바이의 명물로 당시까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두바이를 세계에 알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다. 발상의 전환이 만든 '세계 최대' '세계 최고'의 허브 "두바이 도시 전체가 세계 8대 불가사의다."
야자수 모양의 매혹적인 인공섬 '팜 주메이라'는 지상과 낙원의 경계에 놓여있는 듯했다. 하얗다 못해 차라리 푸르러 보이는 모래 백사장과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다, 해안가에 입을 맞추는 부드럽게 일렁이는 바닷물 위로 우뚝솟은 거대한 인공섬 팜 주메이라는 그 자체가 `위용`이었다.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팜 주메이라는 아직 미완성이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와 기획력에 인간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길이가 400m가 넘는 팜 주메이라의 각 줄기섬에는 형형색색의 최고급 빌라 수천가구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바다의 한 지점을 돌과 흙으로 막아 달에서도 보이는 인공섬을 만들겠다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분명 눈앞에 펼쳐져 있건만 인간의 힘으로 만든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사막으로 사방이 가로 막혀있지만 `공간의 한계`에 전혀 구속당하지 않는 두바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두바이와 미래의 두바이를 엿보게 하는 상상력의 힘이기도 하다.
▶두바이를 관통하는 발상의 전환= 흔히들 두바이의 천지개벽을 '오일달러의 힘'으로 잘못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두바이 곳곳을 다니다보면 이 천지개벽의 출발점은 '석유'가 아닌 '발상의 전환'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지난 1966년 처음 석유를 발견한 두바이는 2026년까지는 걱정없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두바이 지도자였던 세이크 라시드는 석유의 발견과 함께 석유자원의 고갈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그는 겨우 60년치 밖에 안되는 석유자원의 고갈을 두바이 민족의 멸망이라는 객관적인 위기의식으로 전환시켰다. 두바이 민족의 존립을 위한 비전을 두바이 뿐 아니라 전세계에 공고히 한 것이다.
두바이 천지개벽 참관단의 삼성생명 금융연구소 주창돈 상무는 "이슬람 국가로서 두바이에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개방적인 허브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두바이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중동의 허브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단기, 중기, 장기의 로드맵도 정확하게 그려나갔다"고 평가했다. 라시드의 이같은 발상의 전환은 그의 아들 세이크 모하메드로 이어지면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중동의 허브' 두바이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팜 주메이라는 물론 팜 데이라, 팜 제벨알리, 더 월드에 이르기까지 인공섬들을 가득 메운 것은 돌과 흙이 아닌 무한대로 치닫는 '역발상'이다. 발상의 전환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두바이의 현재와 미래를 만든 핵심코드다. 4개의 인공섬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인공해변 길이는 1100Km로 경부고속도로의 3배에 육박한다.
▶천지개벽의 총 지휘자, 세이크 모하메드= 두바이의 천지개벽은 세이크 라시드가 시작했지만 그 정점에는 현 왕세자 세이크 모하메드가 있다. 모하메드는 두바이의 정치, 경제, 산업, 관광을 아우르는 총 지휘자다. 그는 실질적으로 두바이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영국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모하메드는 인공섬과 인터넷시티 등 두바이 개발사업의 각종 아이디어를 직접 내놓는가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기증해 천지개벽을 일궈냈다.
두바이의 천지개벽은 존경받는 왕권정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바이는 모든 토지가 국왕 소유로 엄청난 개발에도 불구, 민원과 보상으로 골치를 썩는 일이 없다. 모하메드의 의지만 있다면 어떤 지역도, 어떤 규모로든 개발할 수 있다. 모하메드는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극대화시킨 위대한 지도자다. 세이크 모하메드는 각계 전문가 2000여명으로 구성된 씽크탱크를 직속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통해 두바이 개발과 관련된 각종 사안들을 빛의 속도에 비유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결정한다고 한다.
세이크 모하메드와 씽크탱크가 두바이 개발에 얼마나 치밀한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두바이는 대형 개발사업을 추진할 때 민간 디벨로퍼에게 99년 임대조건으로 토지를 판다고 한다. 이때 땅값을 계산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표면적인 땅값은 250만원 안팎으로 불모지를 바꾼 땅값 치고는 그다지 비싸지 않다. 그러나 실제 계약서상의 땅값은 여기에 해당 지역 용적률을 곱해 산출한다. 평당 250만원인 땅값에 용적률 600%만 적용해도 평당 땅값은 1500만원을 훌쩍 넘는다. 사업시행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하게 개발을 추진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바이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인 엠마와 낙힐의 실질적 소유주는 세이크 모하메드다
▶두바이 전체가 세계 8대 불가사의=두바이의 기적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두바이는 이미 20년전인 1985년 중동 최초로 제벨알리 항구의 배후지역에 제벨알리 경제자유구역(프리존)을 설치했다. 두바이 공항자유무역지대를 만든 것도 벌써 10년째다. 일찌감치 앞선 마인드로 허브를 구축하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왔다. 두바이 개발은 최근들어 더욱 무서운 속도를 내고 있다. 특이한 점은 두바이의 각종 개발사업에는 항상 '세계 최대',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 홍콩과 싱가포르를 앞서는 허브를 위해서는 '평범함'으로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800m 높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두바이와 골프장과 주거시설을 포함, 미국 디즈니랜드의 8배가 넘는 두바이랜드, 인공섬 프로젝트로는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팜 아일랜드, 세계 최고급 7성호텔 버즈 알아랍(사진)에 이르기까지 두바이의 최고 정신이 녹아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두바이의 천지개벽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 최근 두바이 정부는 제벨알리 내륙지역에 40억달러 안팎의 대규모 크릭(인공수로) 건설을 계획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안 인근지역의 개발은 거의 마무리 단계로 이제 광활한 내륙 사막지역의 공략에 나선 것이다. 이 크릭이 완공되면 현재 두바이 곳곳에서 진행중인 개발사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대형 프로젝트가 또다시 넘쳐날 전망이다.
끝없는 발상의 전환과 피와 땀,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두바이는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우리가 두바이 전체를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도시가 도무지 한계를 느낄 수 없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원종태 기자)
37위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베리아반도 북동쪽과 지중해안의 우수한 위치에 자리잡은 바르셀로나는 크기나 인구면에서 스페인 제 2의 대도시이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자치구의 까딸루냐의 수도이기도 하다.
까딸루냐어와 스페인어 두 가지의 공식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현대 바르셀로나는 19세기 후반에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바르셀로나는 예로부터 예술활동이 번성하였고 그 지역을 대표하는 현대 예술이 생겨 난곳으로 유명하다. 단일도시 이상인 바르셀로나는 다면적이고 다양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구는 31만 1,475명(2000)이다. 카라카스에서 동쪽으로 333km 떨어진 곳에 있다. 카리브 해안에서 약 5km의 내륙, 네베리강(江) 연안에 위치한다. 연평균기온은 26.7℃. 1960년대에 관타·푸에르토라쿠르스 공업지대의 일부로서 발전하였다. 주변지역은 콩·카카오·커피·목화·옥수수 등을 재배하는 농업지대이며, 그 상업중심지를 이룬다. 주요 탄전도 부근에 있으며, 주의 석유산업발전과 함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교통정보
항공편 - 바른셀로나공항이 시 남동쪽 12km지점의 엘 프라트 데 요가레트 구역에 위치.
기차편 - 파리,제네바,쮜리히 ,밀라노행 국제 열차가 항구 인근에 위치한 산츠 역에서 출발
▶숙박정보- 바르셀로나에서 이용할수 있는 호텔객실은 5성급,4성급,3성급호텔을 포함하여 총25,000개에 이른다. 등급별로는 5성급 호텔이 6개,4성급 호텔이 48개,ㄴ3성급 호텔이 60개가 있다.
▶날씨정보- 바르셀로나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다.평균 기온은 겨울이 11도이며 여름은 24도이다. 12월과 1월이 가장 추운 달이며 가을과 봄이 일반적으로 우기에 해당한다.
▶쇼핑- 까딸루냐광장에서 폴탈 데 란젤거리를 따라가면 portaferrissa거리에 다다르는데,이 곳에는 두개의 백화점과 의류 악세사리, 기타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선 쇼핑지역이다. 시의 고지대인 다아아고날지역은 또 다른 흥미있는 쇼핑지역이다. 이곳에는 두개의 백화점과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인 부띠끄가 있다. 그로리에스 카타라네스광장에는 모든종류의 고 물건과 신상품을 파는 Mercat de les Encants벼룩 시장이 선다.
▶주요관광지
1.고딕지구 -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인 고닥 지구는 시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근처에는 바르셀로나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까딸루냐광장이 있다. 람브라스거리는 까딸루냐광장에서 항구의 콜롬부스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항구앞의 Avinguda del paral-lel이라는 도로는 피라 데 바르셀로나 경기장이 위치한 스페인광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빈구다 레이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서 1992년 올림픽경기를 위핸 건설된 여러 스포츠 시설이 잇는 몬쥬익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파라우 나시오날이 보인다.
2.리베라 지구 - 고딕지구에서 비아 라이에타나로 분리되는 첫번재 성벽 바깥지역이 리베라 지구이다. 이 지구는 원래 중세시대의 상인들이 거주했던 산 페레지구와 뱃사람들이 거주했던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지구로 분리되어 있다.특히 15번지에는 정원과 장식 창문, 야외 계단이 특징적인 15세기 건축물인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아길라 저택을 볼 수 있다.
3.레산프레지구와 현대 건축 - 레산프레 즉,"확장" 지구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교차로로 된 격자구조의 도로로 형성된 바르셀로나시의 중심지역이다.이곳은 19세기 후반에 도시 확장계획에 기초하여 도시가 확대된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라시아 대로 왼편으로 가면 Luis Demenechi Montaner의 작품인 레오 모레라 저택으로 꽃을 주제로한 현대적 양식의 현관이 특징적이다. 또한 다채색의 자기로 현관이 장식된 신고딕 양식의 아마트렐 저택과 용을 주제화한 모자이크 현관이 아름다운 가우디작품의 바트요 저택을 볼 수 있다.
4.람브라 지구 - 람브라라고 칭하는 거리는7개 의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구역을 되어 있으며 랍브라지구에서 가장특색있는 곳은 보케리아시장으로 신선한 야채와 육류, 생선으로 끝없이 연결된 가판대와 한잔의 술을 즐길수 있는 바가 늘어서 있다.
5.골동품 벼룩시장 - 대다수의 골동품상점도 역시 레산프레에 있다. 그라시아 대로에 있는 쇼핑센터의 1층에 73개의 골동품 상점이 있는 골동품 거리가 있다. 대 성당 광장에서는 매주 목요일골동품 벼룩시장이 열린다.
6.벨항구 -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오락단지이다. Juan de BorbOn거리와 Rambla de Mar거리는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서 항구의 장엄한 풍경을 감상할수 있다.
까딸루냐어와 스페인어 두 가지의 공식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현대 바르셀로나는 19세기 후반에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바르셀로나는 예로부터 예술활동이 번성하였고 그 지역을 대표하는 현대 예술이 생겨 난곳으로 유명하다. 단일도시 이상인 바르셀로나는 다면적이고 다양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구는 31만 1,475명(2000)이다. 카라카스에서 동쪽으로 333km 떨어진 곳에 있다. 카리브 해안에서 약 5km의 내륙, 네베리강(江) 연안에 위치한다. 연평균기온은 26.7℃. 1960년대에 관타·푸에르토라쿠르스 공업지대의 일부로서 발전하였다. 주변지역은 콩·카카오·커피·목화·옥수수 등을 재배하는 농업지대이며, 그 상업중심지를 이룬다. 주요 탄전도 부근에 있으며, 주의 석유산업발전과 함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교통정보
항공편 - 바른셀로나공항이 시 남동쪽 12km지점의 엘 프라트 데 요가레트 구역에 위치.
기차편 - 파리,제네바,쮜리히 ,밀라노행 국제 열차가 항구 인근에 위치한 산츠 역에서 출발
▶숙박정보- 바르셀로나에서 이용할수 있는 호텔객실은 5성급,4성급,3성급호텔을 포함하여 총25,000개에 이른다. 등급별로는 5성급 호텔이 6개,4성급 호텔이 48개,ㄴ3성급 호텔이 60개가 있다.
▶날씨정보- 바르셀로나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다.평균 기온은 겨울이 11도이며 여름은 24도이다. 12월과 1월이 가장 추운 달이며 가을과 봄이 일반적으로 우기에 해당한다.
▶쇼핑- 까딸루냐광장에서 폴탈 데 란젤거리를 따라가면 portaferrissa거리에 다다르는데,이 곳에는 두개의 백화점과 의류 악세사리, 기타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선 쇼핑지역이다. 시의 고지대인 다아아고날지역은 또 다른 흥미있는 쇼핑지역이다. 이곳에는 두개의 백화점과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인 부띠끄가 있다. 그로리에스 카타라네스광장에는 모든종류의 고 물건과 신상품을 파는 Mercat de les Encants벼룩 시장이 선다.
▶주요관광지
1.고딕지구 -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인 고닥 지구는 시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근처에는 바르셀로나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까딸루냐광장이 있다. 람브라스거리는 까딸루냐광장에서 항구의 콜롬부스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항구앞의 Avinguda del paral-lel이라는 도로는 피라 데 바르셀로나 경기장이 위치한 스페인광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빈구다 레이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서 1992년 올림픽경기를 위핸 건설된 여러 스포츠 시설이 잇는 몬쥬익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파라우 나시오날이 보인다.
2.리베라 지구 - 고딕지구에서 비아 라이에타나로 분리되는 첫번재 성벽 바깥지역이 리베라 지구이다. 이 지구는 원래 중세시대의 상인들이 거주했던 산 페레지구와 뱃사람들이 거주했던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지구로 분리되어 있다.특히 15번지에는 정원과 장식 창문, 야외 계단이 특징적인 15세기 건축물인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아길라 저택을 볼 수 있다.
3.레산프레지구와 현대 건축 - 레산프레 즉,"확장" 지구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교차로로 된 격자구조의 도로로 형성된 바르셀로나시의 중심지역이다.이곳은 19세기 후반에 도시 확장계획에 기초하여 도시가 확대된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라시아 대로 왼편으로 가면 Luis Demenechi Montaner의 작품인 레오 모레라 저택으로 꽃을 주제로한 현대적 양식의 현관이 특징적이다. 또한 다채색의 자기로 현관이 장식된 신고딕 양식의 아마트렐 저택과 용을 주제화한 모자이크 현관이 아름다운 가우디작품의 바트요 저택을 볼 수 있다.
4.람브라 지구 - 람브라라고 칭하는 거리는7개 의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구역을 되어 있으며 랍브라지구에서 가장특색있는 곳은 보케리아시장으로 신선한 야채와 육류, 생선으로 끝없이 연결된 가판대와 한잔의 술을 즐길수 있는 바가 늘어서 있다.
5.골동품 벼룩시장 - 대다수의 골동품상점도 역시 레산프레에 있다. 그라시아 대로에 있는 쇼핑센터의 1층에 73개의 골동품 상점이 있는 골동품 거리가 있다. 대 성당 광장에서는 매주 목요일골동품 벼룩시장이 열린다.
6.벨항구 -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오락단지이다. Juan de BorbOn거리와 Rambla de Mar거리는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서 항구의 장엄한 풍경을 감상할수 있다.
36위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도시. 태평양 연안에서는 로스앤젤레스에 이은 제2의 대도시. 샌프란시스코만(灣)에 면한 천연의 양항(良港)으로, 골든게이트에서 남쪽 서안(西岸)에 위치한다. 시가는 반도의 북쪽 끝을 차지하며, 북쪽은 골든게이트 브리지(金門橋)에 의해서 대안(對岸)의 마린 반도(半島)에 이어지며, 동쪽은 샌프란시스코만을 넘어 오클랜드와 마주 보고 있다. 이 사이에는 길이 13.5km에 이르는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가 걸려 있다. 신흥도시 로스앤젤레스가 최근에 샌프란시스코를 앞지를 때까지는 오랫동안 태평양 연안 제1의 항구이었으며, 지금도 세계 유수의 항만 도시 및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골든게이트 브리지(金門橋)는 San Francisco의 상징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이 지역에 금이 많이 나와 이곳 항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해 드나들었기 때문에 골든-게이트 브리지라고 한다. 미국 서남부의 골든게이트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쪽의 마린반도를 연결하는 강철로 만든 현수교(懸垂橋), 금문교(金門橋)라고도 한다. 길이 2,825m. 1933년에 착공하여 37년에 완공되었다. 탑은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고, 2줄의 케이블을 지탱하고 있는 탑의 높이는 약 227m, 기둥 사이는 약 1280m로 뉴욕 베라자노내로우즈교(Verra-zanoNarrows Bridge)에 이어 세계 제 2 위의 다리이다. 이 6차선의 자동차 전용 다리 밑으로는 대형선박이 통과할 수 있다.
골든게이트 브리지(金門橋)는 San Francisco의 상징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이 지역에 금이 많이 나와 이곳 항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해 드나들었기 때문에 골든-게이트 브리지라고 한다. 미국 서남부의 골든게이트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쪽의 마린반도를 연결하는 강철로 만든 현수교(懸垂橋), 금문교(金門橋)라고도 한다. 길이 2,825m. 1933년에 착공하여 37년에 완공되었다. 탑은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고, 2줄의 케이블을 지탱하고 있는 탑의 높이는 약 227m, 기둥 사이는 약 1280m로 뉴욕 베라자노내로우즈교(Verra-zanoNarrows Bridge)에 이어 세계 제 2 위의 다리이다. 이 6차선의 자동차 전용 다리 밑으로는 대형선박이 통과할 수 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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