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30. 07:49ㆍ山情無限/山
조선시대 백두대간 개념의 형성
양보경 /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1. 머리말
산지가 국토의 3/4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산지는 옛부터 사람들의 삶의 바탕이었다. 사람들은 산지를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하여, 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산을 포함한 땅을 삶의 원형적 존재로 파악하였다. 우리의 건국 신화의 장소가 태백산 신단수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좋은 예이다. 산에 대한 숭앙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도화되었다. 그 예로 삼국시대에 신라는 동악(東岳)인 토함산, 남악(南岳)인 지리산, 서악(西岳)인 계룡산, 북악(北岳)인 태백산, 중악(中岳)인 부악(父岳, 지금의 팔공산)을 오악(五嶽)으로 정하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제사인 중사(中祀)를 행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
고려와 조선에서도 사전(祀典)제를 정하여 대, 중, 소의 제사를 규정하였으며, 이 가운데 주요 산천(山川)은 중요한 제사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산지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있으나, 근대 이전의 산지와 관한 연구는 극히 드물다. 과거의 산지에 대한 연구는 최근 제기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산맥 체계에 대한 논의의 정립을 위해서도 요청되고 있다.
본 연구는 근대 이전의 지형 및 산지 체계를 파악하는데 근간이 되는 '백두대간'의 개념 정립을 시도한 것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이후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용어의 연원이나 사용 시기, 사용례 등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아, 용어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지닌 역사성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어에 대한 학문적인 개념의 파악과 정립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우리나라 산과 산맥의 뿌리로 인식되어 온 백두산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 보았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이 있음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백두대간'의 개념의 형성 과정을 문헌을 통하여 검토하였다. 또한 '백두대간'의 개념이 지리지와 지도에 반영되어 지리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는지의 여부를 살펴 보았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자연적 상징이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8도의 모든 산이다 이 산에서 일어났으니 이 산은 곧 우리나라 산악의 조종(祖宗)이다."라고 기록하였다. "홍세태의 백두산 기문에 이르기를 백두산은 북방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다. 청조(淸朝)의 선조가 여기에서 일어났으니 우리의 북쪽 국경에서 300여리쯤 되는 곳이다. 저들은 장백산이라 하고 우리는 백두산이라 하는데, 두 나라가 산 위에서 갈라진 두 강으로 경계를 삼는다"는 백두산에 대한 관념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지녔던 백두산에 대한 숭앙심과 백두산의 영역적 의미에 관한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또한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는 백두산은 전국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자 우리 성조(聖祖)께서 위대한 왕업(王業)을 시작한 곳", "우리 한국의 산천은 모두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하고 있으며 두만강 북쪽, 토문강 남쪽에 북간도(北艮島)가 있으니, 그 북간도의 간동(斡東).해관(奚關). 남경(南京) 세 곳은 실은 우리 성조(聖祖)가 발상(發祥)한 땅이다"라는 표현은 백두산과 주변 지역의 또 다른 의의, 즉 백두산이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서 신성시되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백두대간'의 명칭은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큰 줄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백두대간'이라는 명칭은 백두산의 명칭이 확립된 이후에 사용된 개념이다. 백두산의 명칭에 대하여 다산정약용의 『대동수경』에는 여덟가지 이름을 제시하였으니.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산(白山),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 등이 그것이다. 불함산은 중국의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진서(晉書)』동이전(東夷傳) 등에, 개마산 혹은 개마대산은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구성기(九城記)』·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의 『여지고(輿地考)』·『후한서주(後漢書注)』·『명통지(明統志)』 등에, 도태산은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북사(北史)』물길전(勿吉傳)에, 태백산은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 백산은 『괄지지(括地志)』에, 장백산은 『요지(遼志)』·『금사(金史)』고려전(高麗傳)에, 가이민상견은 『성경통지(盛京通志)』에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진한간(秦漢間)의 고서(古書)에 불함(不含)의 명(名)으로 보이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도태산(徒太山) 혹 태백산(太白山)으로 닐컬리고 금대(金代)로부터 백산(白山) 혹 장백산(長白山)의 칭()稱이 생겨서 시방까지 지나(支那)에서는 장백산(長白山)으로 통칭(通稱)하며 반도(半島)에서는 오로지 백두산(白頭山)의 명(名)을 써서 이것이 고려사(高麗史) 광종 10년(光宗 十, 서기(西紀) 959) 조(條)에 보엿다"
중국에서는 시대에 따라 백두산을 부르는 이름이 달라서 불함산, 도태산, 태백산, 백산, 장백산 등으로 부르다가 장백산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조선에서는 오로지 백두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보았다. 이 밖에도 백두산은 탄탄대령(單單大嶺). 개마대산(蓋馬大山) 등으로도 불렸다.
육당은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백두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고대에는 백두산을 태백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장백산과 혼용하였다. 장백산이라는 호칭은 뒤에 언급하듯이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여러 곳에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함경도 회녕도호부(會寧都護府) [산천(山川)]조에서 백두산(白頭山)이 곧 장백산이라고 설명한 것, 『대동수경』에 장백산(長白山)으로 기록한 것 등은 장백산이라는 지명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가계와 업적을 설명하는 중에, "6년(기원전 32) 10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太白山)[백두산(白頭山)]의 동남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고조선에 실린 단군신화의 내용 가운데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본격적으로 숭배화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 생각된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왕건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옛날에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하면서 백두산으로부터 산천을 두루 구경하다가 부소산 왼쪽 산골에 와서 장가를 들고 살았다 .... 세조는 송악산 옛 집에 여러 해 살다가 또 새 집을 그 남쪽에 건설했는데 그 터는 곧 연경궁 봉원전터이다. 그 때에 동리산(桐裏山) 조사 도선(祖師 道詵)이 당나라에 들어 가서 일행(一行)의 지리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 왔는데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까지 와서 세조의 새 집을 보고,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이 땅의 지맥은 북방[임방(壬方)]인 백두산으로부터 수(水)와 목(木)이 근간이 되어[수모목간(水母木幹)] 내려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며, 당신은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좇아서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간으로 하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합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에게 왕건(王建)이라는 이름을 지을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했다는 것을 강조한 기록이다. 같은 내용을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는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 기록은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신라의 수도는 국토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다시 분열되어 후삼국시대를 맞이하였다가, 고려가 이를 통일하였다. 고려는 통일 후 수도를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한 개성으로 옮기고, 각 지역 인물의 포용과 합리적인 제도의 운영 등을 추진하였다. 위의 기록은 왕건의 태생지인 개성과 왕건의 인물됨을 풍수에 의탁하여 신성화한 내용이다. 개성이라는 지역과 왕건이라는 인물을 신성화하는 근거와 수단으로 백두산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백두산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성한 대상으로 인정되고 있었으며, 국민을 통합할 설득력있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 백두산은 우리의 영토 안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여진족의 거주지역이었다. 백두산은 15세기 초에 적극적인 북진정책과 여진족 정벌을 통해 영토로 확보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경 문제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고, 국경 문제에 관한 한 백두산 보다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더욱 중요한 경계의 지표가 되었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4대조인 이안사(李安社) 때부터 당시 여진족의 땅이었던 두만강 유역에서 거주하였다. 고려 말엽의 국경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 평양 - 영흥을 연결하는 선이었으며,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의 영토 수복 작전 결과 압록강 중류 위원(渭原)을 기점으로 하여 평안도 강계 - 함경도 갑산 - 길주를 연결하는 선을 확보하게 되었으나 함경도 동북 일대는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조상의 옛 터인 동북지방을 중요시하였으며, 건국 후 바로 길주의 국경 한계를 두만강 하류 공주까지 연장시키고, 그곳에 성을 쌓고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거주지를 잃어버린 여진족의 습격으로 여진족과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세종은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선으로 하는 국경을 확정함으로써 영토를 넓히고, 확고한 자연지형을 국경으로 확보함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없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700여년 이상 빼앗겼던 옛 땅을 회복한 세종은 압록강 유역에 4군, 두만강 유역에 6진을 설치하여 행정력이 미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은 그후에도 북쪽 변방을 자주 침입하였다. 세조 때 남이.어유소가 압록강 일대 여진을, 신숙주가 회령 부근의 여진을 정벌한 것도 그 예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대한 원병 등으로 명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여진족은 그 세력을 강화하여 1616년(광해군 8)에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노아합적(奴兒哈赤)가 심양(瀋陽)에 후금(後金)을 세우고 계속하여 세력을 확장, 1627년과 1636년에 조선을 침공하였으며, 1636년에는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개칭하고 중국 대륙을 점령하여 중국의 주인이 되었다.
중국을 점령한 청나라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들 조상의 발상지의 성역화 작업을 시작하였다. 1677년에 청나라 성조(聖祖)는 장백산(長白山)이 청나라 조종발상(祖宗發祥)의 땅이라 하여 가서 살펴오도록 하였으며, 1678년에는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하고 오악(五嶽)과 동일하게 제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1644년에는 조선 인민이 국경을 넘어 인삼을 캐거나 벌목 등을 하지 못하도록 조선 국왕에게 이첩해서 엄히 금지토록 하라고 결정한 바 있다.
여진의 뿌리 지역이며 동시에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기도 한 백두산을 중심한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는 그러므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문제라는 불씨를 간직하고 있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주인이 된 청나라와의 사이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경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백두산은 국경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백두산은 이 과정에서 정치적, 현실적 측면에서 국왕 이하 온 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됨으로써 민족의 상징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으로 국경을 정하고 백두산 남쪽 10리 지점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조선도 1761년(영조 37) 예조판서 한익모(韓翼暮)의 건의에서 비롯되어, 1767년(영조 43)에 함경도 갑산부 80리 지점 운총보(雲寵堡) 북쪽 망덕평(望德坪)에 장소를 골라 각을 세우고 백두산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백두산 치제는 국가의 조종산으로서의 백두산의 의미를 확고하게 하였음은 물론, 왕실과 왕권, 함경도 지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전해 주는 가장 중요한 문헌은 18세기 말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경표(山經表)』이다.① 그러나 '백두대간'의 개념은 용어가 정립되어 사용되기에 훨씬 앞서 형성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산을 단절된 고립된 봉우리로 보기 보다 흐름을 가지고 이어지는 맥세(脈勢)로 이해하는 지형 인식은 풍수 사상의 보급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며, 풍수가 삼국시대 이후 보급되면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국토의 지형을 이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을 우리 국토의 조종(祖宗)으로 보는 관점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 풍수가 광범위하게 수용되면서 백두산 중심의 지맥론(地脈論)은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수에서는 산을 용(龍)으로 이해한다. 용은 생명체이며, 생명체는 단절되지 않으며, 생동하는 움직임을 갖는다. 땅을 유기체로 인식하는 것은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이지만, 풍수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앞서 인용한 『고려사(高麗史)』의 「고려세계(高麗世系)」의 기록은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우리나라 지형을 맥세 즉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인식을 보여 주는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도선(道詵)의 비기(秘記)를 인용하여, "이 땅의 지맥은 임방(壬方, 북방)인 백두산으로부터 수(水)와 목(木)이 근간이 되어[수모목간(水母木幹)] 내려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며, 당신은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좇아서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간으로 하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합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에게 왕건(王建)이라는 이름을 지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지맥의 명당이 배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 『高麗史節要』에 기록된 고려말 공민왕대 우필흥의 건의와 그 수용은 지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이다.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옥룡기(玉龍記, 도선의 비결)』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오행(五行)으로 보아서 수(水)를 뿌리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았다. 만일 풍속이 토질에 순응하면 창성하고 역행하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풍속이란 군신과 백성의 의복.관개(冠蓋).악조(樂調). 예기(禮器). 집용(什用)이 그것입니다. 이후로는 문무의 백관은 흑의에 청립을 하고, 승복은 흑건에 대관을 하며, 여자는 흑라를 입도록 하소서. 또 모든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빽빽하도록 하고, 무릇 쓰는 그릇으로는 유동(鍮銅)이나 질그릇(瓦器)을 써서 토풍(土風)에 순응하게 하소서."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우필흥의 건의에 따라 관리.백성의 의복, 관모, 악기, 예기, 집기 등과 소나무를 식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풍수를 신봉하던 고려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생활세계를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맥의 근간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고 한 것은 '백두대간'의 내용과 일치된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는 현존하는 독립된 지리지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는 고려시대에 편찬되었고 명칭이 '지리지'로 되어 있으나, 이 책은 내용이 간략한, 사서(史書)의 부록으로서 독립된 지리지가 아니다.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의 서문에는 "우리나라의 지세를 보면 장백산(長白山)이 만리를 뻗어 기복을 이루어 마천령, 마운령, 철령,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이 되고, 경상도의 경계에 이르러 멈추어 태백산과 소백산[大小伯]이 되었다. 빙돌아서 속리산, 지리산이 되었으나 바다가 곁에 있어 넘지를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초의 국토의 윤곽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세가 백두산에서 시작한다는 것, 지세가 맥을 이루며 만리를 뻗어 기복을 이루어 주요 산을 만들었다는 것, 지세는 남쪽의 지리산에서 멈추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시대의 인식과 다름이 없다. 또한 이 글에서 장백산(長白山)은 백두산을 지칭한 것이다.
조선 초에는 수 차례에 걸친 지리지 편찬이 있었으나, 현전하는 지리지는 매우 드물다. 1424년(세종 6)에 명령을 내려 1432년(세종 14)에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완성되었으나, 이 책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1454년(단종 2)에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하면서, 세종대에 편찬되었던 지리지를 『세종실록』에 등재하기로 함에 따라 실록에 지리지가 수록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세종실록』「지리지」②로 널리 알려진 지리지는 『신찬팔도지리지』의 내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지였으며, 실록을 편찬하면서 다시 한번 검증과정을 거친 국가의 공식적인 문헌이다. 이 책에는 함길도(咸吉道, 후의 함경도) 의 강역을 "동쪽은 큰 바다[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鐵嶺)에 닿고,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하였다. 준령이 백두산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천여 리에 뻗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 역시 지역의 주요 지형을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로 파악하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 준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함길도 길주목(吉州牧)에도 주목되는 기록이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78리, 서쪽으로 백두산(白頭山)의 내맥(來脈)인 대산(大山)에 이르기 90리인데, 갑산(甲山)과 접경(接境)이 되며, 남쪽으로 단천(端川) 마천령까지 91리, 북쪽으로 경성(鏡城) 운가위(雲加委)의 대천(大川)에 이르기까지 89리이다.
길주의 서쪽 경계인 대산(大山)을 백두산의 내맥으로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에 백두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산맥의 개념이 용어상으로도 나타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1463년(세조 9)에는 兵曹에서 함부로 돌을 캐는 사람을 법을 어긴 죄로 다스리기를 청하여 시행되었다. 병조에서 올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石]이란 것은 산맥(山脈)의 골절(骨節)이므로, 다만 도성(都城)의 산등성이 내면에서만 벌석(伐石)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청컨대 도읍에 있는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은 함길도의 장백산에서 철령에 이르고, 강원도 회양부의 남곡(嵐谷)에서 금성현의 마현(馬峴)과 주파현(注波峴)에 이르고, 낭천의 항현(杭峴)에서 경기의 가평현 화악산(華岳山)에 이르고, 양주의 오봉산(五峯山)에서 삼각산 보현봉과 백악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보등동(寶燈洞)에서 다야원(多也院)의 고암제단(鼓巖祭壇)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향림사(香林寺)에서 녹반현의 세답암(洗踏巖)과 북점(北岾), 연창위농소(延昌尉農所)에 이르니, 모두 벌석하지 말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국가의 공공기관인 병조에서 돌을 함부로 캐는 것을 금하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돌이 산맥(山脈)의 골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성의 산등성이 안쪽에서만 벌석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백두산에서 도성으로 이어지는 모든 산에서 금하도록 하며, 필요한 경우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다.
문종 대에도 전부사정(前副司正) 정안종(鄭安宗)이 상언(上言)하기를 "대저 우리 나라의 산천은 백두산에서 비롯하여 대맥(大脈)이 나뉘어 나가 대세(大勢)가 활달하고, 천개의 가지 만개의 잎이 그로부터 어지러이 내려와서 천태만상으로 활처럼 당기고, 손톱처럼 뻗는 모양이 되어 종횡으로 내달아 그 사이에 음양 두 길의 산이 안팎으로 문호를 겸제(鉗制)하니, 산형의 기색과 산수의 성정(性情)과 더불어 저 운맥의 성쇠와 산천의 지덕(地德)과 시운(時運)의 상당함을 전인(前人) 도선이 철저하게 간파하고, 통달하게 알아서 때를 당하여 길흉이 나타나는 바를 바로 대어 놓고 가리키니, 앞으로 올 화복이 미리 정해져 있음이 거짓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이어서 궁중에 짓는 불당의 위치를 변경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불당이 혈(穴)로 들어오는 정맥(正脈)에 자리잡아 맥을 손상한다는 것이었다. 풍수의 관점에서 정맥(正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인조 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의 황고비 능묘에 관해 꿈을 기록한 박지영의 몽서가 나돌았다. 이것을 보고 경상감사 구봉서(具鳳瑞)가 치계하기를, '풍기(豊基) 사람 박지영(朴之英)이 꿈에 황지(黃池)의 능묘를 찾아냈다 하고 이어 몽서(夢書) 1책을 올렸습니다' 하였다. 이른바 몽서는 글이 무려 1만여 자나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백두산(白頭山) 정맥(正脈)이 태백산(太白山)에 결집하여 동해를 안(案)으로 삼았으니, 황지의 묘는 곧 운이 트여서 왕이 나올 좋은 묏자리이다. 조선의 왕업이 본디 여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지금 간악한 백성이 그곳에 투장하여 선조의 신령이 안식처를 잃었기 때문에 나라에 난리가 많이 일어나서 장차 위망의 지경에 이른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기록은 지방 술사(術士)의 허황된 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국가의 안정과 부흥을 이룩하였던 국왕 정조의 다음 언급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땅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 준다.
광릉(光陵)에 전배(展拜)하였다. 아침에 양주목을 출발해서 축석령(祝石嶺)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쉬었다. 이때 새벽비가 살짝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깨끗하였는데, 사방의 산들이 수려함을 다투는 듯 영롱히 빛났다. 상이 승지 서영보에게 이르기를,“이 축석령은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 산의 기세가 여기에서 한 번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이 되는데, 그 기복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은 사람의 외모와도 같은 것이어서 외모가 좋은 산천은 기색(氣色) 또한 좋다.”하였다.
정조는 축석고개를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라 지칭하였다. 당시 일반인은 물론 관료와 왕실에서도 백두산과 그에서 연결되는 지맥을 중시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역시 정조 대의 함경도 어면진(魚面鎭)의 파수장(把守將) 이건수(李健秀)가 함경도 후주(厚州)의 형편에 대하여 써서 비변사에 올린 내용에도 “백두산의 정맥(正脈)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황초령(黃草嶺)에 이르러서 지령(支嶺) 하나가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가다가, 다시 북쪽으로 가서 설한령(薛罕嶺)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향하여 하나의 국지(局地)를 열었으며, 후주(厚州) 및 폐사군이 그 안에 있습니다"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공식 문헌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위의 기록을 제외하면 '백두대간'이라는 표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백두대간'의 개념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수도인 한양(漢陽)의 좋은 지세를 강조하고, 백두산에서 내려 온 국토의 정기가 모인 장소라는 인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백두대간'의 개념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는 정조(正祖)의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수도(首都)를 중심으로 국토를 파악하는 사고는 전통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국왕이 거주하며, 왕조의 중심인 수도는 기능적으로 국가의 행정적·문화적 중심이었지만, 옛 사람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의 측면에서 상징적인 중심으로서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소우주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지도제작에서 방위 표현을 수도인 한양 중심으로 하는 등 지도는 물론 지리지와 여러 읍지들에서도 보인다.
'백두대간'의 개념은 오래된 것이었으나, 백두산과 그에서 연결되는 산맥 체계가 정립된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로 생각된다. 『산경표』에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1개의 대간(大幹)과 1개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조선의 산줄기가 분류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편찬된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1712∼1781)의 『산수고(山水考)』에는 백두산에서 12개의 산으로 나누어지는 체계로 정리되어 있다.③
18세기 중엽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철령으로부터 그 서쪽의 모든 가지들은 서남쪽으로 달렸다. 철령으로부터 태백산, 소백산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닿도록 우뚝 치솟았으니 이것이 곧 정간(正幹)이다. …… 그 왼쪽 줄기는 동해를 끼고서 뭉쳐 있는데, 하나의 큰 바다와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시종을 같이 하였다. 거북이와 자라, 용과 물고기들이 여기에 살고 재화가 여기에서 번성하니, 무한한 인재가 양성되는 까닭이다. …… 대개 한줄기 곧은 대간(大幹)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서 중봉을 이루고 지리산에서 끝나니, 당초 백두정간이라 이름지은 것이 뜻이 있어서 일 듯하다. 그리고 인재가 나온 곳간이 되었으니, 필경 국가가 기댈 바가 다른 곳에 있지 않음을 알겠다.
'백두대간'이라는 명칭과 일치하지는 않으나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다룬 글이다. 더욱이 본문 중에는 백두대간의 왼쪽 줄기가 동해를 끼고 뭉쳐 있는데, 큰 바다와 처음과 끝을 같이 한다고 서술하여, '백두대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도관애(西道關 )」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대체로 백두대간은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달린다. 그 사이에 철령이 북관(北關)의 관문이되고, 조령이 동남의 관문이 되었다"라고 하여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로 보면 이익은 대간과 정간이라는 명칭을 혼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18세기 중엽 성호 이익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자리잡아 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도 '백두대맥(白頭大脈)'④, '백두남맥(白頭南脈)'⑤, '(백두)대간(大幹)'⑥ 등의 표현이 보인다. 또한 정약용의 『대동수경』에도 '백산대간(白山大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 지리학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지지(地志)에도 산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표현이 나온다. 앞서 언급하였던 조선 초기의 지리지를 이어,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이 편찬한 전국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함경도 갑산도호부의 [산천]조에는 '교라한령(巧羅漢嶺'을 "백두산의 남쪽 가지이다. 국내 산맥(山脈)이 모두 이곳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기록하여 산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⑦
특히 영조 대에 왕명으로 편찬된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모든 군현의 [산천(山川)]조에 산의 흐름을 표시하여 주목된다. 이전의 읍지들과 달리 [산천]조에 내맥(來脈), 대맥(大脈), 주맥(主脈), 낙맥(落脈), 후맥(後脈, 단천)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뒤에 기술할 『여지도』 등 18세기 지도의 표현 방식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함흥(咸興)의 [산천]조에는 부내의 산맥(山脈)이 백두산으로부터 북청의 후치령을 따라 부의 북쪽 경계 원천사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이 되었다고 하였다(그림 1). 갑산(甲山)의 [산천]조에도 백두산을 "우리나라 여러 산의 대간맥(大幹脈)"이라 하였다. 『여지도서』의 이와 같은 산천 기록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산맥 표현을 중시하고 그것이 일반화되었음을 더욱 확실히 보여 주는 점에 의의가 있다.(그림 1 : 『여지도서(輿地圖書)』(1760년경)의 함흥부읍지(咸興府邑誌), [산천(山川)]조. 그림을 누르면 큰 그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8세기 이후 백두산을 포함한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되고, 관심의 대상도 영토.정치적인 측면뿐 아니라 이 지역의 사회.인문.경제적 측면까지 확대되었다. 즉 국토 전역을 균형적으로 보는 넓은 차원으로 관심이 진전되었다. 백두산이라는 산에 대한 점적인 대상에 주목하였던 것에서 나아가 조선 후기에는 백두산을 포함한 북방지역 전체, 그 지역의 주민, 주민들의 삶에까지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 백두산으로부터 가지와 줄기로 연결되는 산맥 체계를 이루었다고 보는 '백두대간'과 산지체계 개념은 위와 같은 국토에 대한 포괄적, 균형적 관심에서 체계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전통적 산맥 체계는 산과 강을 기준으로 한 생활권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전통적 산지체계는 산지와 인간의 삶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 데서 출발한 것이며, 국토 전체에 대한 균형적 관점이 이루어지면서 더욱 체계화되었다고 보인다.
지금까지는 실록 등 관찬사료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제 '백두대간'이 실제로 지도상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검토하기로 한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6년(태조 5)에 이첨(李詹, 1345∼1405)은 『삼국도후서(三國圖後序)』에서 고려의 지도를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삼국(三國)을 통합한 뒤에 비로소 고려도(高麗圖)가 생겼으나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산(山)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鐵嶺)에 이르러 별안간 솟아오르며 풍악(楓岳)이 되었고, 거기서 중중첩첩하여 태백산(太伯山), 소백산(小伯山), 죽령(竹嶺)이 되었다. 중대(中臺)는 운봉(雲峯)으로 뻗쳤는데 지리(地理)와 지축(地軸)이 여기에 와서는 다시 바다를 지나 남쪽으로 가지 않고 청숙(淸淑)한 기운이 서려 뭉쳤기 때문에 산이 지극히 높아서 다른 산은 이만큼 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등의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살수(薩水), 패강(浿江), 벽란(碧瀾), 웅진(熊津)인데 모두 서해(西海)로 들어가고, 그 등마루 동쪽으로 흐르는 물 중에서 가야진(伽倻津, 낙동강)만이 남쪽으로 흘러갈 뿐이다. 원기(元氣)가 화하여 뭉치고 산이 끝나면 물이 앞을 둘렀으니, 그 풍기(風氣)의 구분된 지역과 군현의 경계를 이 그림만 들추면 모두 볼 수 있다.
이 글에 표현된 지도는 전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의 전국지도를 보고 기술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첨이 묘사한 당시 고려의 지도에 백두산으로부터 산맥이 연속되어 내려오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는 아프리카·유럽으로부터 일본까지 당시의 세계를 그린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일본 용곡대학(龍谷大學)에 소장된 이 지도는 1402년(태종 2)에 만들었으나 1460년대에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이다(그림 2). 이 지도에는 16세기 이후의 지도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백두산이 지도에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작은 글씨로만 쓰여 있다. 산지 표현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지도의 특징은 선으로 산지를 그림으로써 산맥을 강조한 점이다. 조선 이외의 지역의 산들은 개별 봉우리로 처리한데 비하여, 조선의 산만 유일하게 산맥으로 표시하였다. 이것은 기본도로 사용하였던 당시의 조선전도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위의 이첨의 글과 연결시켜 볼 때 고려시대 이래의 전통으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이 지도에 표현된 산맥의 내용과 체계는 조선 후기의 산맥체계와 다르다. 단지 백두대간의 윤곽은 조선 후기의 그것과 유사하게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백두산이 그 이남의 산맥들과 단절되어 있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에 비하여 16세기 중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인촌기념관 소장, 그림 3)는 아직도 조선의 윤곽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백두산이 크게 그려져 강조되어 있고, 한양으로 뻗은 산줄기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어 이제 백두산과 한양이 조선의 산천 체계의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음을 보여 준다. (그림 2 .왼쪽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조선 부분(1402년)
(그림 3. 오른쪽 :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의 조선 부분(16세기 중엽)
1557년∼155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는 대마도의 종가(宗家)에 보관되어 오던 지도를 1930년대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집한 것이다. 조선 전기의 전도 중 단독 지도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로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만주 일대를 압축하여 그렸으며, 크고 작은 산맥을 상세하게 선으로 그렸으며, 그 내용은 후대의 『산경표』에 보이는 산맥체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살펴 보면 두 곳에서 단절이 되어 있다. 첫째는 백두산 바로 아랫 부분이며, 둘째는 함경도 정평(定平)과 영흥(永興) 사이이다. 어쨌든 16세기 후반 경에는 산맥 표현의 체계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그림 4 :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16세기 중엽)
이상의 지도들은 세계지도, 또는 조선전도에 표시된 산맥 표현이었다. 18세기 지도에는 군현지도에도 산지를 맥으로 인식하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강역총도(朝鮮疆域摠圖)>에는 지도의 여백에 산지의 맥을 특별히 기록해 놓아 주목된다. <그림 5>는 경상도 북부지역을 그린 지도인데, '태백산대간(太白山大幹)'으로 시작되는 설명이 우측 상단에 있다. 충청 북부 지역을 그린 도폭에도 "태백산 대간룡(太白山 大幹龍)이 서쪽으로 속리산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대간의 남쪽 기슭이 되며, 한 가지가 꺾여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돌려 서쪽으로 한남(漢南), 호서(湖西)의 여러 산이 되었다"고 하였다. 경기도 도폭에도 '남간(南幹)' '간맥(幹脈)' 등의 표현이 지도 하단 주기(註記)에 적혀 있다. (그림 5 : 『조선강역총도(朝鮮疆域摠圖)』.왼쪽 - 경상도 북부, 오른쪽 충청도 북부 부분)
1720년경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함경도지도(咸鏡道地圖)』⑧는 중국지도와 성경지도, 조선총도, 함경도 각 군현의 지도를 수록한 지도집이다. 지도의 상단과 뒷면에 주기가 설명되어 있다. 주기는 설명 보다 뒤에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서울의 삼각산(三角山)이 백두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산맥 체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백두대간의 맥에 대하여 분명하게 적어 놓았다.(그림 6 : 『함경도지도(咸鏡道地圖)』의 주기(註記)
백두산대간(白頭山大幹)이 무산과 갑산 두 고을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허리와 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향해 (평안도) 영원 동쪽에 이른다. 무산 앞에서 동쪽으로 떨어지는 작은 산줄기[東落小幹]가 온성과 행영(行營)을 지나 경원 서쪽에 이른다. 부령(富寧)에서 남쪽으로 남은 작은 줄기[南落小幹]가 길주와 단천 사이에서 그친다. 또 남쪽으로 떨어지는 작은 줄기가 이성과 북청 사이에서 그친다. 또 남쪽으로 떨어지는 작은 줄기가 홍원과 함흥의 경계에서 그친다…….
18세기 초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군현지도집인 『여지도(輿地圖)』, 그리고 이 지도를 19세기 초에 모사한 『광여도(廣輿圖)』에도 '백두산래맥(白頭山來脈), '남거대맥(南去大脈)', '무산령거맥(茂山嶺去脈)', '경성모덕낙맥(鏡城牟德落脈)'(무산부), '동주마천령산맥(東走磨天岺山脈)', 대맥(大脈), '북청읍저낙맥(北靑邑底落脈)'(단천부, 그림 7), '장백산대맥(長白山大脈)', '지서수라거맥(至西水羅去脈)'(부령부), '동지마천령상맥(東至磨天岺上脈)', '북거장백산대맥(北去長白山大脈)'(길주목, 그림 8) 등이 표시되어 있다. 산맥(山脈), 대맥(大脈), 내맥(來脈), 거맥(去脈), 낙맥(落脈), 상맥(上脈) 등의 표현이 반복되고 있다. (그림 7 왼쪽 : 『광여도(廣輿圖)』의 서천부지도(端川府地圖)(그림 8 오른쪽 :『여지도(輿地圖)』의 길주목지도(吉州牧地圖)
풍수와 다른 또 다른 국토에 대한 인식은 우리 국토의 형상을 인체에 비유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 또한 '백두대간'의 개념 형성과 체계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 중에 수록된 <팔도총도(八道摠圖)>의 우측 하단에는 우리 국토을 사람에 비유한 내용이 적혀 있다. 19세기 초의 지도로 추정되는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그림 9)에도 제목 아래에 우리나라 지형이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였다. 사람에 비유할 경우 '백두대간'의 의미는 더욱 귀중한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은 인체의 등뼈가 되어 인체를 지탱해 주는 지주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성호 이익도 우리나라의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가운데가 가늘고 아래쪽이 풍만하다. 백산(白山)이 머리가 되고, 대령(大嶺)이 등뼈가 되니, 마치 사람의 옆머리와 등을 구부린 것과 같으며, 대마도와 탐라는 양발과 같다고 하였다. (그림 9 :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
5. 맺음말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국토의 등뼈를 이루는 큰 줄기[大幹]를 말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의 신성화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개념이었다. 백두산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여겨졌다고 짐작되지만, 일차 사료로 인정되는 관찬 사료에 백두산의 신령함이 서술된 것은 『고려사』의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 설화라 할 수 있다. 태조의 아버지 호경이 백두산을 둘러 보고 개성에 와 정착하였으며, 도선의 조언에 의하여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개성의 지기(地氣)를 받아 왕건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왕건이라는 인물의 위대함과 비범함을 풍수에 가탁한 것이며, 이러한 비유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백두산을 신성한 산으로 널리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백두산이 우리 국토의 생명력의 원천이며, 그 생명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국가의 심장인 수도(首都) 명당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기록이다.
고구려 멸망 후 백두산은 우리 영토 내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다수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백두산을 국토의 뿌리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백두산이 현실적으로 우리 국토의 머리로서 역할하게 된 것은 조선 초이다. 조선 건국 후 세종 대에 이르러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을 확보함에 따라 백두산은 민족의 산으로 명실상부하게 자리잡았다.
여진족의 국가인 청이 중국 대륙을 점령하면서 만주와 백두산 일대는 조선과 청 사이의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이 지역을 변방으로 여겨왔으나, 여진족에게는 백두산은 부족의 시조설화가 배태된 중요한 지역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 남쪽에 정계비(定界碑)를 건립함으로써 양국 사이의 국경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국경 문제 논의 과정에서 국왕 이하 모든 관료, 백성들도 백두산의 현실적.정치적.영토적 의의를 주목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백두산이 지녀 왔던 국토의 뿌리로서의 정신적.상징적 의미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보인다.
이 후 백두산을 포함한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되고, 영토.정치적인 측면뿐 아니라 이 지역의 사회.인문.경제적 측면까지 확대되었다. 즉 국토 전역을 균형적으로 보는 넓은 차원으로 관심이 진전되었다. 백두산이라는 산에 대한 점적인 대상에 주목하였던 것에서 나아가 조선 후기에는 백두산을 포함한 북방지역 전체, 그 지역의 주민, 주민들의 삶에까지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 백두산으로부터 가지와 줄기로 연결되는 산맥 체계를 이루었다고 보는 '백두대간'과 산지체계 개념은 위와 같은 국토에 대한 포괄적, 균형적 관심에서 체계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전통적 산맥 체계는 산과 강을 기준으로 한 생활권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전통적 산지체계는 산지와 인간의 삶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 데서 출발한 것이며, 국토 전체에 대한 균형적 관점이 이루어지면서 체계화되었다고 보인다.
백두산으로부터 뻗는 산맥 즉 '백두대간'의 개념은 고려시대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앞서 기술하였다. 그러나 용어 자체는 조선시대의 기록에 와서야 보인다. 조선 초인 1430년대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도 백두산의 내맥(來脈)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이고 공신력있는 관찬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도 산맥(山脈), 정맥(正脈), 대맥(大脈) 등의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국왕 정조도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 내려 와 양주의 축석령을 이루고, 도봉산.삼각산으로 훌륭한 산의 기세가 이어졌다고 하였다. '백두대간'의 개념은 일반화된 것이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백두대간'이라는 표현 그대로 쓰이지는 않았다.
지리지와 고지도에는 16세기 중엽 이후 '백두대간'과 그에서 파생되는 산지체계가 틀을 갖춘 모습으로 수록되었다. 특히 18세기의 지도와 지지에서 산세를 맥(脈)으로 파악한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172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함경도지도』는 '백두산대간(白頭山大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의 '백두대간' 표현과 함께 가장 근접한 기록을 남겼다.
고지도에서 보이는 풍수와 다른 또 다른 국토에 대한 인식은 우리 국토의 형상을 인체에 비유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 또한 '백두대간'의 개념 형성과 체계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해동지도』, <조선국팔도통합도> 등 여러 지도에서 우리나라 지형이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였다. 사람에 비유할 경우 '백두대간'은 인체의 등뼈처럼 국토를 지탱해 주는 지주의 역할을 하게 되어 그 중요성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주) 이 글에 실려 있는 주는 모두 35개입니다. 그 중에서 일부만 여기 수록합니다. 나머지는 주로 출전과 관계된 것입니다. 참고 하실 분들을 위해 주가 모두 실려 있는 한글 파일을 '백두대간 자료실'메뉴에 같이 올려 놓겠습니다.
①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산의 갈래,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나타낸 지리서로 『산리고(山里攷)』,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 『여지편람(輿地便覽)』 등의 다른 제목으로 된 필사본들도 있다. 지금까지 『산경표』는 대체로 신경준의 저작으로 전해 왔다.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작자에 대해서는 보다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②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는 세종실록이 완성된 1454년(단종 2)에 완성되었다. 내용은 세종대의 지리지에 그 후 영토 확장에 의해 편입된 양계(兩界) 지방의 주진(州鎭) 설치 기록을 속부하여 수록한 것이다.
③ 양보경, 1994, 「조선시대의 자연인식체계」, 『한국사시민강좌』 제 14집, pp. 80 ~ 81
『산수고』는 우리나라의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水經)과 수위(水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던 사실을 신경준의 『산수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날줄(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한 것이다. 신경준의 우리나라 산천에 대한 이와 같은 체계적인 파악은 전통적 지형학 또는 자연지리학의 체계화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자연현상을 주제로 하여 전문적으로 접근하였던 『산수고』에서 우리는 지리학의 다양화와 계통지리학적인 요소, 나아가 근대지리학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④ 『택리지』 「팔도총론」 함경도 : '평안도 동쪽의 백두대맥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하늘을 자른 듯이 끊어져 영(嶺)이 되었다.
⑤ 『택리지』 「팔도총론」 황해도 : '대개 백두남맥이 함흥부 서북쪽에서 불쑥 떨어져 검문령이 되고, 또 남쪽으로 내려 와서 노인치가 되었다.
⑥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 : '백두산에서 함흥까지는 산맥(山脈)이 복판으로 내려 왔다... 대간(大幹)은 끊어지지 않고 옆으로 뻗었으며, 남쪽으로 수천 리를 내려가 경상도 태백산까지 한 줄기의 영으로 통해 있다.
⑦ 산맥(山脈)이라는 표현이 일본의 강제 국권 침탈 이후 사용된 용어라는 주장도 있으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택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대표적인 우리의 옛 문헌과 『광여도(廣輿圖)』 등 지도에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박문, 1996, 「우리나라 산맥의 분류체계 및 명칭의 변천」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32에도 지적되었다.
⑧ 지도의 표제는 천하지도조선총도(天下地圖朝鮮摠圖)이다.
『진단학보(震檀學報)』 제83호(1997.6), 진단학회, pp.85∼106
* 이 글은 1996년도에 산림청에서 지원한 「백두대간의 개념정립과 실태조사연구」의 보고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자료 : 백두대간, 안강>
'山情無限 > 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침판없이 남쪽찿기 (0) | 2009.11.03 |
---|---|
북한산과 삼각산 명칭고 / 이민부 (0) | 2009.09.30 |
로프 사용법 (야영용) (0) | 2009.09.21 |
자굴산 유감(有感) / 시나브로 (0) | 2009.09.10 |
나를 부르는 숲 / 빌 브라이슨 지음 (0) | 2009.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