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 원정기

2010. 2. 17. 16:29山情無限/山

 

     [해외 등반] 몽블랑 원정기

 

‘등반에서 느낀 고통은 삶을 더 다양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기억이 됨을 나는 알았다’

상큼한 공기 속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니데글(Nid d’Aigle·2,372m)역에서 내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알프스는 걸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산경(山景)과 거기에 변화무쌍한 날씨까지 더하여 자연의 신비를 감칠맛 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벨뷔(Bellevue)역에서 만난 아가씨처럼 달음박질치고 싶은 야생화의 초원, 때론 지치게 만드는 잡석의 너덜길을 걸어올라 뒤돌아본 푸른 산등성이들이 일렁였다.


테테로제(Tete Rousse·3,167m) 산장 앞 눈의 평원에서 점심도시락을 먹으며 쉬었다. 가야 할 루트를 바라며 고개를 한껏 쳐들어 보았다. 구테(Gouter·3,817m) 산장은 검은 암벽에 매달린 독수리 둥지 같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여느 히말라야 원정과는 달리 이번 유럽알프스 몽블랑(4,807m) 등반은 출국부터 귀국까지 6일간이라는 꽉 짜여진 일정이었다.


▲ 끝없이 올라야 하는 설릉과 고소의 성긴 공기에 이내 숨이 헐떡여진다. 몽블랑을 오르며 느낀 고통이 행복한 시절보다 삶을 다양하고 더 행복하게 해주는 기억이 되는 것을 알았다.

몽블랑은 유럽알프스 최고봉이다.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 몽벨이 선발한 제1기 몽벨리스트 원정대는 몽블랑으로 갔다. 아니 가야만 했다. 알피니즘이 태동했고 산악인에게는 생전에 꼭 한 번쯤 가 보아야 할 성지(聖地)이자, 어머니의 산인 몽블랑이 1기의 도전 대상지로 가슴에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뻤다던 대원들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뻤다던, 16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개 선발된 4명의 일반인 대원들은 가정의 평범한 엄마로서, 청소년들에게 도전과 리더십을 강의하는 교수로서, 스물 여섯의 나이에 위암3기 판정으로 위를 80퍼센트 절제해내야 했지만 가장의 자리를 지켜야 했던 은행원, 고교시절 백운대에 올라 야호를 외치다 바라본 인수봉의 손잡을 곳 없어 보이는 매끈한 바위를 기어오르던 사람들을 신기하게만 생각하다 결국 암벽등반을 배운 서른 일곱의 청년, 고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김진우 선생은 학생들의 기말고사와 취학준비 관계로 안타깝게 출국하지 못했다)로 살아온 이들에게 몽블랑은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자신들만의 푯대이자, 최고봉이었다.


▲ 대원들 격려차 독일 베를린에서 샤모니까지 온 구자용 LS네트웍스 대표이사 부회장과 김영한 몽벨 대표이사. 오른쪽부터 김창호 원정대장, 권오준, 황국희, 김영한몽벨 대표이사, 구 부회장, 김인백, 박상천, 김영희, 박정자, 서기석 유라시아트렉 대표.(사진 박영대 기자)

자신의 꿈이 아닌 타인의 꿈을 위해 몽벨이 전 원정비용을 지원하며 전 직원이 밤샘작업을 거쳐 원정대를 꾸렸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원들 격려차 샤모니로 쾌히 날아 온 구자용 LS그룹 부회장과 김영한 몽벨 대표이사는 에귀 디 미디(3,842m)까지 같이 올라 발레 블랑쉬에서의 고소적응 훈련을 지켜보며 힘찬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또 지원팀으로는 원정대의 살림을 도맡은 서기석 대표(유라시아트렉), 프랑스 샤모니 현지 코디네이터 조문행 사장, 우리의 아름다운 동행을 이야기로 엮어낼 박영대 기자(동아일보), 그리고 황상규 영상감독이 함께 줄을 묶었다.


나는 원정대장으로 여기에 와 있다. 어두워지기 전에 구테 산장에 도착해 푹 쉬어야 오늘 밤 12시에 정상을 향할 텐데, 폭풍설이 몰아치지나 않을지. 2005년 코스믹 산장을 출발, 북동능선을 거쳐 정상에 섰다가 구테 능선으로 내려왔던 기억을 더듬어 고정로프가 없는 칼날설릉에서 고산등반 초험자들인 우리 대원들이 안전한 등반을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걱정이 뒤섞였다.


“멋진 등반은 모든 대원이 몽블랑 정상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등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건강하게 다시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달간의 만경대 리지·소백산 등의 훈련등반에서, 에귀 디 미디에서의 팀워크 훈련과 고소적응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71세의 왕언니 황국희 대원 꿋꿋한 걸음

▲ 상큼한 공기 속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니데글 산악열차에 내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사진 박영대 기자)

구테로 오르는 바윗길은 만만치 않았다. 1남1녀의 엄마인 박정자(53) 대원은 오직 가족만을 돌보며 살아왔다. 어느 날 찾아온 심장부정맥과 고지혈증은 이젠 자신의 몸도 돌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시그널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등산이 이제는 대만 옥산,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중국의 노산과 태산을 오르곤 등산 마니아가 되었다. 비록 만경대 리지가 첫 암벽등반이었지만 안전벨트에 헬멧을 쓰고 바위턱을 잡고 차분히 오르는 품새는 제법 알피니스트의 냄새를 풍겼다. 그 도드라진 홀드를 움켜잡은 손, 얼굴 표정 하나까지도 잡아내려 앞뒤로 움직이는 황 감독은 고소의 성긴 공기에 이내 숨을 헐떡였다.


대원들이 어머니 또는 왕언니라 불렀고 71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몸이 거꾸로 나이를 먹은 황국희(71) 대원과 네팔 임자체(6,189m)를 지난 1월 5일 겨울시즌에 등정했던 김영희 대원은 “할 수 있는 일이나 해야지, 하고 싶은 것을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용기 있는 도전을 이었다. 황 대원은 53세 때 자궁암 수술을, 김 대원은 9년 전 유방암 수술을 극복한 인생역전의 주인공들이었다. 이 두 대원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 수술 후 암빙벽 등반을 막 시작할 무렵 스승과 제자로서였다.


경험자들답게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꾸준히 올랐다. 뒤에서 조금 더 스피드를 내라고 주문하자 황어머니의 답이 돌아왔다.


“앞에 먼저 가. 김 대장이 뒤에 있으면 불안하고 내 페이스를 유지할 수가 없어!”


그리곤 깊은 날숨을 내쉰다. 조용히 앞으로 나서는데 가슴이 찌릿해졌다. 칠십의 나이와 인생의 질곡을 거쳐왔음에도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은 어머니, 모든 일에 열정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우리의 왕언니, 내 나이 칠십에는 어떠할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황 감독이 한마디 거든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언제나 웃는 어머니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같아요. 어머니 파이팅!”

 

▲ 위암, 자궁암, 유방암을 극복하며 살아온 대원에게 몽블랑은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자신들만의 푯대이자, 최고봉이었다. 몽벨리스트는 좌절과 고통을 넘어 정상에 섰다.

니데글에서 8시간 동안 서로에게 힘을 북돋으며 올랐고 뒤 처진 다른 대원의 무거운 짐을 자기 배낭에 대신 져주는 모습에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부지런히 중력을 거슬러 올라 오후 5시에 마지막 도착하는 황어머니의 흰 귀밑머리에 눈발이 날렸다. 구테에 도착했다. 이제 남은 정상까지를 위험한 구간이라 칭한다며 오늘의 오름짓은 무거운 짐을 둘러멘 인내의 고빗사위였다.


어제 오후 샤모니 현지에서 구테 산장 예약이 되는 행운으로 이른 저녁을 먹는 대원들의 숟가락질은 입맛이 똑 떨어졌다는 표현이다. 새벽부터의 힘든 운행과 3,800m라는 고소가 다시 이들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힘든 이 순간을 극복했던 한 대원은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의 포기는 몸 속 깊이 하나의 교훈으로 각인이 된다. 고소가 오는 높이에서는 음식 한 입을 10분간 씹어라. 이렇게 3회만 먹어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어라. 그래서 위가 소화하는 데 산소가 너무 많이 소모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화장실도 안 가서 힘도 덜 쓰리라. 그러기 전에 남보다 늦게 산장에 도착해라. 거북이가 되어라.”

 

“화장실 간다고 나갔는데 아직 안 들어왔어!”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먹으며 내일의 계획을 설명했다. 운행속도가 약간 느린 황국희·김영희·박정자 대원을 나와 황 감독이 먼저 이끌어 12시30분경 출발하고 나머지 세 명은 서 대표가 팀장을 맡아 한 시간 후에 출발키로 했다. 고글에서 여벌의 장갑까지 다시 한 번 꼼꼼히 체크했다. 포근한 나무 침상에 누웠다.


옆에서 공동장비를 챙기는 서 대표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어두워지면서 강풍에 많은 눈이 내리는 날씨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예전 히말라야 등반에서는 정상 시도 전날 밤의 7,000m대 마지막 캠프에서도 쿨쿨 잘 잤었다. 걱정과 갈등을 억누르며, 발생 가능한 수많은 변수를 그려본다.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랜턴을 켰다. 저쪽에 황어머니와 박정자 대원이 일어나 앉아 있다. 그들이 던진 첫마디에 머리가 아뜩해졌다.


“영희가 밤 11시에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는데 산장으로 안 들어왔어.”

 

▲ 3,800m 발레 블랑쉬 설원에서의 점심식사. 하나의 포기는 몸속에 깊이 하나의 교훈으로 각인이 된다. 고소가 오는 높이에서는 음식 한 입을 10분간 씹어라. 이렇게 3회만 먹어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어라.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무슨 말인가? 화장실은 산장 밑 바위절벽에 매달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나를 깨워 얘기를 했어야죠”라며 화를 낼 시간도 없었다. 온갖 망상이 머릿속에 뒤범벅이 된다.


바로 서 대표를 깨워 눈보라가 치는 밖으로 뛰쳐나가 화장실 계단을 내려가며 혹시나 난간 밖 암벽의 눈 위를 살피며 들어갔다. 네 칸의 화장실 중에 하필이면 한 칸이 잠겨 있다. 턱을 잡고 뛰어올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에는 변기만 덩그러니 앉았다. 서둘러 옆 산장 건물로 잰걸음을 할 때 김영희대원이 우모복을 입고 잔뜩 웅크린 채 문을 열고 나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소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자 괜히 뒤척이다 옆 사람 잠을 위해 산장식당에서 출발시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괜찮아요?”라고 묻는 말밖에 뭐가 더 필요한가.


장비를 착용하고 출발준비를 한다. 통상 산장에서 잔 현지 등반객들은 새벽 2시에 제공되는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평균 5~6시간 안에 정상에 오른다. 우리 팀은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3,800m 아래로 깔린 짙은 먹구름,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의 눈발은 출발을 지연시켰다. 이때 샤모니 타운에는 천둥번개에 폭우가 계속 내렸다고 했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 에귀 디 미디까지 올라 발레 블랑쉬에서의 고소적응과 팀워크 훈련.

 

김인백(현대인재개발원 전문교수·46) 대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산장에 남겠다고 했다. 그의 일기장은 포기라는 결정의 고뇌를 담아내고 있다.


“정신이 혼미하다. 깊이 생각해 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속이 메스껍다. 지금 내 컨디션으로 정상에 오르는 팀을 따라가서 될 일인가? 답이 온다. 정상에 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죽을 고생을 참아내야 한다. 그럴 생각인가? 너무 힘들어서 죽는 사람들을 보지 않았는가! 산을 오르다 죽어도 좋다. 하지만 가족들과 곧 만나게 될 대한산악연맹 오지탐사대원들의 얼굴이 떠오른

다. 그래 포기는 더 용감한 정신이다. 다음을 약속하면서 포기한다.”

 


5m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폭풍설 몰아쳐

 

▲ 양쪽이 1,000여m 이상 절벽으로 깎아지른 100여m 길이의 설릉을 돌파하고 지구의 마루금에 한 걸음 더 오른다.
새벽 2시30분 안자일렌을 하고 나섰다. 구테봉 설릉을 올라서자 바람은 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밤사이 내린 15cm 눈을 헤쳤다. 앞서 간 세 개의 랜턴 불빛이 아른거렸다. 끝도 없는 설면, 뒤에 따라오는 황어머니에 연결된 줄이 자주 팽팽해지고 가쁜 숨소리가 들려온다. 후발대 팀이 따라 붙었다. 늦게 출발했던 외국팀들이 앞질러 갔다.

두 시간 반을 운행했다. 속도가 떨어지고 있다. 크든 작든 한 조직을 이끄는 리더는 이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면도날처럼 예리해야 하며 엄격해야 한다.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나오는 리비에르는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불완전한 비행기를 띄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장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일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엄격하기 때문이다.”


팀을 재편했다. 권오준(하나은행 경희대출장소장·46)·박상천(등산강사 2급·36) 대원과 황 감독이 나와 함께 선두로 줄을 묶었다. 컨디션이 괜찮은 박정자 대원은 내 느낌에 정상까지 갈 의지와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은 폭설이 되어 5m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결정해야 한다. 리비에르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네 부하들을 사랑하라.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를 말하지 말라!’


물었다.


“지금 긴 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해 주시죠. 올라가시겠습니까?”


박 대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두 눈가에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언니와 같이 있겠어요.”


▲ 박정자 대원은 비록 만경대 리지가 암벽등반의 처음이었지만 안전벨트에 헬멧을 쓰고 바위턱을 잡고 차분히 오르는 품새는 제법 알피니스트의 냄새를 풍겼다.

서 대표에게 뒤를 부탁하고 바로 돌아서 오르기 시작했다. 남은 팀은 하산하기 시작했다. 다른 많은 외국팀들도 악천후에 발길을 되돌려 구테로 내려갔다. 발로(Ballot·4,362m) 무인산장 근처에서 황 감독이 지쳤다. 산장 안에서 쉬라고 주문하곤 영상카메라를 건네받았다.


이제 나를 제외한 두 명이다. 이들도 약해져가지만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연이어질 좁은 칼날설릉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고통과 위험이 순간순간 찾아왔다. 연령과 위암의 아픔을 극복한 권 대원은 가끔 졸기는 했지만 평정을 잃지 않았다. 자주 쉬며 균형을 잃은 발걸음으로 뒤따라오던 박대원이 털썩 주저앉으며 내뱉는다.


“대장님, 정상에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내려올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바로 답했다.


“나를 믿어라.”


그리곤 스틱을 허공에 휙 휘두르고는 앞에서 끌고 나갔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리지가 흩날리는 폭풍설 속에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양쪽이 1,000여 미터 이상 절벽으로 깎아지른 100여 미터 길이의 설릉을 돌파하고 지구의 마루금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상이었다. 몽블랑 정상이었다. 7월 6일 오전 8시45분 나에게는 두 번째 오른 곳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보다 가슴은 더 벅찼다. 나는 무전기에 이렇게 외쳤다.


“동료의 등정을 위해 자기의 등정을 접은 황어머니, 김영희, 박정자, 김인백 대원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등정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해냈습니다.”


▲ 몽블랑 정상이었다. 몽벨은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길 꿈꾼다. 올 가을 몽벨리스트 제2기의 일본 남알프스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잠깐의 기쁨 뒤에 이가 부득부득 갈리도록 힘든 하산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 긴 의미를 남긴 원정을 마무리하던 어떤 대원의 메모다.


“어제의 고통이 지금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을 더욱 더 감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사막에서, 산속에서 느낀 고통이 행복한 시절보다 삶을 다양하고 더 행복하게 해주는 기억이 되는 것을 알았다.”


몽벨은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길 꿈꾼다. 올 가을 몽벨리스트 제2기의 일본 남알프스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 글 김창호 대장
  사진 원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