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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장비 점검이 있겠습니다.” 수년간 나와 함께 히말라야를 누비며 청소를 했던 최정예 대원들은 벽안의 아가씨들에게 무장해제를 당했다. 거의 20년 만에 받아보는 장비 점검. 그 옛날 좋아했던 영화 ‘셸부르의 우산’의 여주인공 주느비에브(까뜨린느 드뇌브)를 닮은 푸른 눈의 프랑스 가이드는 꽤나 친절했지만 엄격했다. 대원 중 두 명이 목이 짧은 등산화밖에 없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샤모니에서 새 등산화를 구입해야만 했다. 모두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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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모니 보자 고개로 향하는 대원들. 몽블랑 노멀루트인 구테 산장으로 가는 길이다.
- “몽블랑 일주를 단순 트레킹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표고차 1,500m를 오르내려야 하고 빙하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목 긴 등산화는 필수예요. 빙하를 가로지를 수도 있고 도중에 눈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우리 15명 대원은 비 내리는 샤모니 계곡을 오르며 몽블랑 라운드 트레킹(Tour de Mont Blanc·TMB·트루 드 몽블랑)을 시작했다.
‘아…이래서 사람들이 알프스 알프스 하는구나.’
작년 히말라야 8,000m봉 클린마운틴 운동을 마칠 무렵 나는 미국 보스턴으로 날아가 미국의 대표적인 환경운동인 LNT(Leave No Trace·흔적 남기지 않기) 과정을 이수했고, LNT의 체계를 빌려 국내에서 클린마운틴 운동을 전개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지난 2월부터 광교산, 모악산, 조령산, 오대산, 대둔산 등지에서 클린마운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몽블랑 일주를 하는 건 어떨까요? 시간도 보름 남짓이면 되고, 저는 유럽 알프스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거든요.”
클린마운틴 운동을 하며 지친 대원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제안을 했다. 그 동안 히말라야를 쏘다니며 불편한 먹거리와 잠자리에 고생이 많았는데, 몽블랑 일주는 멋진 경치와 맛있는 먹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클린마운틴 회원들은 찬성했고, 그것에 의기투합한 회원들과 함께 신발끈여행사(www.shoestring.kr)의 도움을 받아 지난 6월 20일 스위스 제네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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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몽블랑산군) 그랑드조라스 세느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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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점검을 마치니 샤모니 계곡엔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잔잔하게 빗발이 내렸다. 몽블랑이 한눈에 건너보이는 최고의 전망대인 브레방(Brevent)까지 걸어 올랐다. 이곳에서 우리는 몽블랑 산군의 대파노라마를 실컷 감상했다. 트레킹 도중 웬만한 능선에 오르면 대자연의 장관을 맘껏 감상할 수 있지만 처음 맞는 광경에 우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잠시 벨 라샤 대피소(Refuge de Bel Lachat·2,136m)에 들렀다. 목조 건물로 30명 정도 수용하는 작은 산장인데 구간 중 유일하게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이다. 산장에서 내려와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고 그곳에 레 우시 로지로 가는 미니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TMB의 특징 중 하나는 이 미니버스다. 이 버스는 15명 기준으로 1인당 300만 원 정도 하는 TMB 패키지에 포함되는데 우리나라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지원조 시스템과 비슷하다. 대원들을 위한 점심식사, 산행 후의 숙소 이동을 모두 도맡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벼운 당일 산행 장비와 식수만 챙겨 마음 놓고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어찌나 시간을 잘 맞추는지 점심 먹을 장소에 항상 대기하고 있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 보면 언제나 먼저 와 있었다.
둘째 날 아침 우리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그림 같은 알프스의 구릉을 걸었다. 가이드가 피곤하면 케이블카를 이용하자고 했지만 전날 장비 점검 등에 자존심이 상했던 터라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해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았다. 20여 년 전 프랑스 국립스키등산학교를 졸업한 남상익 대원은 케이블카를 이용해야 몽블랑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걷는 게 더 좋았다. 꼴데보라에 도착하니 또 다른 절경이 펼쳐졌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알프스 알프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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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레킹 이틀째 히말라야 다리를 건너 레 콩타멩 봉쥬와로 향하는 트레킹단.
- 나는 지난 20여 년간 히말라야만 바라보며 60회 정도 찾았는데 아무리 히말라야가 좋다고 해도 역시 시야를 좀 넓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밥을 주로 먹지만 때로는 빵도 먹고, 회도 먹고 하는 것처럼 또 다른 인생의 뉘앙스를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트리코트 고개(Col de Tricot·2,120m)로 가야 했지만 절경을 감상하느라 트리코트를 거치지 않는 지름길을 선택했다. 이윽고 도착한 레 콩타멩 몽쥬와(Les Contamines Montjoie·알프스 휴양과 리조트의 중심)에서 숙박했다. 이곳은 마을이라기보다는 꽤 규모가 큰 산악도시인데 시골 장터가 있어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마음 편히 마을길을 걸으며 상점 나들이를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와 다른 치즈 가게, 음료수 가게, 채소 가게 등 색다른 삶의 현장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음날 레 콩타멩 몽쥬와에서 미니버스로 이동한 후 몽쥬아(Montjoie)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멀리 산 아래로 레 콩타멩 몽쥬와 마을을 한참이나 시야에서 버릴 수 없도록 일정한 고도와 평탄한 길을 따라가면서 건너편에 커다랗게 자리한 에귀 뒤 크로쉐(Aiguille de Croche)와 몽 졸리(Mont Joly·모두 콩타민 마을 앞에 있는 거대한 검은 흙산군)를 보는 재미로 걸음을 옮겼다. 이 지역은 특히 수림지대가 많아 순간순간 알프스의 시원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며 트레킹할 수 있었다.
클로디우 베르나르(Claudius Bernard)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길목을 따라 1,970m 높이의 트레 라 떼뜨 대피소(refuge de Tre^l a Te^te) 에 도착하니 점심을 가득 실은 미니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이번 트레킹에서는 모든 대원이 가져온 간식이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유인즉 가이드들이 준비해주는 점심식사가 너무 훌륭했던 것이다. 그들이 준비해주는 빵과 과일, 햄, 치즈 그리고 생선조림 등은 그 맛은 물론이고 양도 충분했다. 준비된 음식 모두가 그 지역 농산물일 뿐만 아니라 100% 유기농으로 재배된 것들이었다.
점심 식사 후 웅장하기로 소문난 트레 라 떼뜨 빙하(Glacier de Tre^ la Te^te)를 보러 갔다. 마침 믹스등반을 하러 온 클라이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빙하에서 등반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니 훈련 환경이 좋은 이 지역 클라이머들이 부러웠다. 우리가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 겨울 한철 설악산이나 한라산에서 훈련하는 것과 너무 비교되었다. 이 날 우리는 낭 보랑 산장(Chalet de Nant Borrand)에서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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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레 계곡 건너로 거대한 몽블랑과 악마의 발톱이라 불리는 랑뒤제앙·그랑드조라스이 한줄기 능선으로 바라보인다. 이탈리아 몽드 라 삭스 능선.
- 3개국 국경과 2차 대전 당시 군초소도 거쳐
다음날 시설 좋은 발므(la Balme·1,706m) 산장을 거쳐 본옴므 고개(Col du Bonhomme·2,329m)까지 올랐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과거 로마가 세계를 제패할 때 이 길을 통해 프랑스를 침략했던 로만로드(Roman Road)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르막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노폭이 넓고 평탄한 길이었다.
식사를 하고 부드러운 암석판 사이를 지나 2,665m 높이의 푸르 고개(Col des Fours)를 지나 2,756m의 떼뜨 노르 드 푸르(Tete Nord des Fours)에서 알프스의 황홀한 풍광은 물론 몽블랑의 장엄한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인식(76·전 서울시산악연맹 회장) 대원은 15년 전 회갑기념으로 이곳을 통해 몽블랑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감회가 새롭다며 눈시울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