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8. 13:29ㆍ山情無限/山
산악인은 자유인이다
글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장
언젠가 독일의 등산책을 읽다가 한 등산가가 쓴 짤막한 글과 부딪쳤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이 없다. 내게 필요한
것은 자유뿐인데, 그 자유가 내게 있다”는 글이었다. 우리 주변에 산책은 많지만, 그리고 산에 가는 사람은 많아도
이렇게 단적으로 ‘자유’를 이야기하는 글을 보거나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등산과 자유의 문제가 나오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오늘날 등산계에 교과서처럼 되어있는 미국의 <마운티니
어링>이 ‘The Freedom of the Hills’, 즉 ‘산의 자유’를 그 책의 부재로 삼은 지도 오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등반대가 산의 지식과 산행의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을 때 비로소 등반대는 산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
뜻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산악인의 자유란 등산의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물론 옳다. 그러나 나는 등산과 자유의 문제를 그렇게 일변도로 다루고 싶지 않으며, 산악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더욱 넓고 깊게 생각하고 싶다.
산악인은 일반 사회인과 다르다. 우선 그 독립된 명칭이 그것을 말해준다. 독일어에 ‘Naturkind(자연아)’라는 독특한
말이 있다.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그 발상과 행위가 사회의 구속을 벗어나 언제나 자유로운 인간을 말하지만, 산악
인이 그런 의미에서 바로 자연아며 자유인이라고 본다.
인간은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숙
명적으로 살고 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예속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예속에는 긍정적인 면
도 없지 않다.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생존조건으로서 우리는 사회의 제반 규제를 만들고 지키고 있는데,
그러면서 인간은 사회에서 안주하게 된다.
이런 자유를 한때 인간이 잘못 받아들여 엄청난 화를 입은 적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주목할 만한 책을 썼다. 그의 논거는 인간이 자유를 희구하면서 한편 복종을 원하는 본능
적 욕구가 어딘가에 숨어있다며 그 예를 독일 나치에 들었다. 당시의 파시즘은 히틀러 한 사람의 권력욕이나 지배력
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독일 민족에게 숨어있는 파시즘의 인간학적 기초에 그런 맹점이 깔려있다는 탁견이었다.
세계는 오늘날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무서운 힘으로 끝을 모르게 발전하며 인간의 생활권이 한없이 넓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점차 자기의 고독감과 무력감을 실감하며 정신적 육체적 안위를 염려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보다 쉬고 싶어 하고 겉으로 화려하지만 안으로 남모르게 허무감에 물들고 있다.
진정한 뜻에서 자유가 무엇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사람들은 보통 ‘~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뿐 ‘~에로의 자유’
를 모른다. 등산은 20세기 후반에 들어가며 지구상에 더 오를 데가 없어지면서 초창기로부터 이어오던 고전적 의미
에서 ‘일상성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현대적 의미가 사람들의 의식과 행위를 규제하게 됐다. 그러나 산악인의 의식
과 행동 밑바닥에는 ‘탈출’보다는 ‘고소지향’의 의미가 더 강하다. 이것이 산악인의 자유다.
메스너의 책에 <가고 싶은 데로 떠나는 자유>라는 것이 있는데, 그 표제가 좀 길어보였던지 영어와 일어판에서는
<자유정신>이니 <자유의 혼을 찾아서>라고 했다. 물론 뜻으로 크게 잘못된 것은 없으나 어딘지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메스너 원제에서는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신선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가고 싶은 데로 떠나는 자유’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산악인은 언제나 그런 자유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인
데, 등산 역사에 나오는 경우가 우리 후진들에게 특히 강하게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게오
르그 빈클러다. 그 옛날 빈클러는 혼자 알프스를 두루 헤맸지만 결코 공명심에서나 어떤 구속으로부터의 도피가 아
니었다. 그는 오로지 알프스의 무인경(無人境)을 혼자 감으로써 절대 자유함을 독차지 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유아
독존(唯我獨尊)이 아니라 무아경(無我境)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그의 단독행 철학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악인은 엑센트릭(eccentric) 하다고 할 수 있다. 남보기에 사서 고생하며 죽음의 지대에 스스로 돌입하는 것을 일
반인의 사고로 추적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산악인의 자유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을 산에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는데 여기에는 큰 의미가 있다. 산에 가는 사람에게는 대자
연을 상대로 자기 생활권을 넓히고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동경하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고 본다. 크리스 보닝턴은
언제나 정상에 서면 다음에 찾아 나설 지평선을 생각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고생 끝에 정상에 서자 대개는
허탈감에 빠진다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고생해서 목표에 도달했지만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허공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러한 자유의 질적 차이를 세계 등산무대에 비친 선구자들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흥미롭고 의미가 크
다.
18세기 후엽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 정상에 오르는 길을 찾으려고 생각했던 대학교수 드 소쉬르를 비롯해서, 일
개 판화가에 지나지 않았던 에드워드 윔퍼가 마터호른에 끌려 운명적인 싸움으로 알피니즘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이런 역사의 분수령 역할을 하지 않았어도 철저한 자유인으로 돋보인 등산가들이 적지 않다. 기도 레이(1861~1935)
가 그런 사람으로, 알프스와의 싸움이 노동처럼 유익하고 예술처럼 고상하며 신앙처럼 우아하다고 믿었다.
그보다 앞서 에밀 자벨(1847~1883)은 36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자유로운 정열과 시정(詩情)으로 산악문학의 정점
같은 <한 등산가의 회상>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의 글에는 산악인만이 아는 독특한 세계가 그려져 있는 것도 우리들
후진이 가지는 자유의 소산인 셈이다. 그것은 이런 글이다.
‘길도 없는 어느 골짜기가, 도끼 소리가 한 번도 들린 적이 없는 숲이,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폭포가 어딘가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런 글은 뛰어난 소설가나 시인이라도 창작하기 어려운 인간의 사고와 체험의 세계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서 등산
의 세계가 그것이며 그곳의 주인이 다름 아닌 산악인이다. 우리들 산악인이 살고 있는 등산세계란 어떤 곳인가?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할 것 같으면서 실은 그렇지 않다.
가까우면서 멀고, 낮으면서 높으며, 좁으면서 넓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웃다가 울고, 용기가 실의로, 환희와 비통이,
좌절과 재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산악인의 연륜이 늘어가며 비로소 자기가 살아온 세계를 진정 의식하고 눈으로 본
다. 이밖에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순수무구한 자유가 있다.
기도 레이의 말대로 ‘산을 기어오른다는 것은 아무도 몽상조차 한 적이 없었는데, 사냥꾼과 학자가 접근할 수 없던
산마루에 오른다는, 극히 간단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행위를 완성하려고 서로 힘을 합쳤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으나
그들은 등산을 발명하고 인간에게 또 하나의 정열을 안겨주었다.’
산악인은 가스통 레뷔파가 즐겨 말하는 ‘산사나이들의 우정’으로 뭉쳐서 알피니즘과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과, 산의
사계(四季)가 연출하는 자연의 향연과, 산행을 통해 체험하는 정서를 중심으로 자유인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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