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연표(신라~고려)

2008. 12. 3. 00:39역사/독도

 

 

 

지금의 울릉도를 본도(本島)로 하고 독도로 인정되는 우산도(于山島)를 작은 섬으로 하는

우산국(于山國)이 라는 하나의  독립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君主)로 이찬 벼슬에 있던 이사부를 시켜서 우산국을 정복하게 하였으며,

이사부등 나무로 만든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무기를 써서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고,  신라가 망한 다음에는  

고려에도 토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독도연표(신라-고려)

독도연표(신라~고려)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6월. 이찬 이사부, 우산국을 정벌함. 이후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침.

 

930년 고려 태조 13년
*8월 15일. '우릉도(芋陵島)'에서 사절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고려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침. 고려 조정은 백길에게 정위(正位), 토두에게는 정조(正朝)의 벼슬을 내림. 이 해는 태조 왕건이 길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을 무찌른 해임.

 

1004년 고려 목종 7년
일본측 자료인 {권기(權記)}, "(1004년에) 고려의 번도인 울릉도 사람들이 표류해 왔다.(高麗藩徒 芋陵島人 漂至)"고 하였고, 이 표류해 온 울릉도인 11명을 돌려보내면서 "고려의 번도 가운데는 신라국 울릉도 사람들이 있다.(高麗藩徒之中 有新羅國迂陵島人)"
이 기록은 일본측의 울릉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 여기서 울릉도는 독도를 부속도서로 한 영토를 지칭. 따라서 울릉도가 신라에 속하였다가 이후 고려에 속하였음을 인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기록.

 

1018년 고려 현종 9년
*동북 여진의 침략으로 우산국의 농업이 피해를 당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와 물품을 나누어 줌

 

1019년 고려 현종 10년
*7월 24일. 동북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내륙으로 피난하여 온 우산국인들을 모두 돌려보냄.

 

1022년 고려 현종 13년
*7월 9일. 여진지역에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온 우산국인들을 예주관(禮州官, 盈德官)이 곡식을 주고 편호(編戶)시키는 조치를 취함.

1246년 고려 고종 33년
권형충, 사정순을 울릉도 안무사로 임명함.

 

1032년 고려 덕종 원년 11월 8일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어 토물을 바침. 이후 울릉도에서 사절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음. 우산국은 11세기 초엽 동북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뒤 급격히 쇠망하여 갔으며, 마침내 울릉도는 촌락 기지만 있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도서가 되어버렸던 것으로 추정됨.

 

1141년 고려 인종 19년
*7월 3일. 명주도감창사 이양실이 파견한 사람이 울릉도에서 돌아와 그 섬에서 나는 과일·나뭇잎 등을 왕에게 바침. 이무렵(12세기 중엽)부터 울릉도는 울릉도(蔚陵島)·우릉도(羽陵島)·우릉도(芋陵島)·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려졌는데, 이 가운데서도 자주 쓰여진 것이 울릉도(蔚陵島)임.

 

1157년 고려 의종 11년
*5월12일. 왕이 동해 중에 우릉도가 있는데 이곳의 땅이 기름지며 주현을 설치한 때도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내륙인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명주도감창전중내급사(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 김유립을 보내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김유립이 이 날 돌아와 (1)섬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그 산정에서 동쪽 해안까지는 1만여 보(步), 서쪽 해안까지가 1만 3천 보, 남쪽 해안까지가 1만 5천여 보, 북쪽 해안까지가 3천여 보에 달한다는 것, (2)7군데의 촌락 기지와 석불·철종·석탑 등이 있다는 것, (3)시호(柴胡)·고목(藁本)·석남초(石南草) 등이 자란다는 것, (4)암석이 많아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등을 보고함. 왕이 이를 듣고는 사민계획을 중지함. 이 무렵부터 울릉도는 동계(東界) 울진현(蔚珍縣) 관할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됨.

 

1197년 고려 명종 27년
*최충헌이 울릉도의 토양이 비옥하며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민호를 다시 돌아오게 함.

 

1243년 고려 고종 30년
*집권자 최우(崔瑀, 혹은 崔怡)가 동군민(東郡民; 東部 지방의 君民)을 울릉도에 이주시켰으나 익사자가 많이 생김에 따라 곧 철수시킴.

 

1246년 고려 고종 33년
*권형충, 사정순을 울릉도안무사로 임명함.     
*이추가 울릉도에 많은 진기한 재목이 있다고 원나라 조정에 무고하여 원나라에서 고려에 그곳에 가서 벌목하여 바칠 것을 요구함. 고려정부는 표문을 올려 이 요구의 철회를 간청함. 

 

1273년 고려 원종 14년
*울릉도에 진기한 나무가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몽고지배기로 들어서면서 원의 목재 요청이 있자, 울릉도 목재의 벌채가 계획됨.

 

1346년 고려 충목왕 2년
*3월 30일. 동계 우릉도인이 내조함.

 

1371년 고려 공민왕 20년
*영흥군 환, 무릉도로 유배됨.

 

1379년 고려 우왕 5년
*7월. 왜(倭)가 무릉도에 침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