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메리즘 창시자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

2011. 5. 19. 22:35山情無限/등산학교

'머메리즘'의 창시자 앨버트 머메리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8> "등반의 가치는 아무도 가지않은 험한 길에 있다"
'어디'보단 '어떻게' 발상의 전환… 지도와 가이드 따른 등반 거부
'루트 개척'으로 새 알피니즘 창조… 알프스 황금시대 후 '초등'의 의미 새로 써


머메리는 마터호른의 ‘보다 어려운 루트’인 즈무트 능선과 푸르겐 능선의 초등자로서 명성을 떨친 당대의 산악인이다.

 

앨버트 머메리는 전형적인 영국 부르주아 출신으로서 ‘산업 생리학’(1891)이라는 경제학 저서까지 출간한 인텔리 산악인이다.

 

크랙 등반의 시범을 보이고 있는 머메리. 그가 등반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북한산의 최고봉은 백운대(836m)다. 백운대 정상에 서서 사위를 돌아볼라치면 바로 지척에 솟아있는 인수봉(810m)이 한뼘쯤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수봉에 올라서 있는 사람이 보다 대단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수봉 정상에서 백운대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비록 보다 낮은 곳에 서 있지만 상대적으로 우쭐하고 뿌듯한 느낌을 만끽하기 마련인 것이다. 문제는 고도가 아니라 난이도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백운대 하나만으로 문제를 좁혀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백운대에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가장 손쉬운 일반적 루트는 위문에서부터 정상까지 연결되어 있는 쇠밧줄을 붙잡고 올라가는 것이다. 보다 어려운 루트로는 인수봉과 마주보는 바위 능선의 호랑이굴 크랙을 통과하는 길을 꼽을 수 있다.

절경으로 유명한 원효리지를 타고 오르면 짜릿한 암릉등반의 묘미를 마음껏 즐긴 다음 정상에 가 닿을 수도 있다. 백운대 남면에 나 있는 ‘신동엽길’이나 ‘녹두장군길’은 암벽등반 루트 중에서도 난이도와 공포감이 높은 길로 정평이 나 있다.

다만 백운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라면 쇠밧줄을 붙잡고 올라가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굳이 호랑이굴 크랙이나 원효리지나 녹두장군길을 이용하여 오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뭔가. 그들은 미련한 바보들일 따름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정상이라는 ‘결과’보다는 그곳에 이르는 ‘과정’을 더욱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보다 어려운 방식’으로 오르는 것이야말로 등반의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머메리즘’이라고 한다. 머메리즘이란 간단히 말해서 ‘머메리가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창시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앨버트 프레드릭 머메리(1855~1895)다.

머메리즘의 출현은 알프스 황금시대의 종언과 깊은 관련이 있다. 등반 사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알프스에서의 황금시대란 대체로 19세기 중엽을 지칭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1854년 앨프리드 윌스가 베터호른을 초등한 시기부터 1865년 에드워드 윔퍼가 마터호른을 초등한 시기까지를 뜻한다.

이 10여년의 세월 동안 4,000m가 넘는 고봉 60개를 포함하여 모두 149개의 알프스 봉우리들이 초등되었다. 그야말로 눈에 띄는 봉우리란 봉우리에는 모두 다 사람들이 올라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초등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며 ‘등반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한 사람이 바로 머메리다.

그가 주장한 것은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남들과는 다른 길로 올라라. 보다 어려운 루트로 오르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등반이다.

지도를 보거나 가이드를 따라 오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 누구도 도전해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굳이 가장 어려운 루트를 선택하여 오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알피니즘의 핵심이다.

머메리의 주장은 전복적이고, 위험하며, 매혹적이다. 하지만 머메리즘 덕분에 후대의 산악인들은 무한한 개척등반 및 초등의 가능성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호랑이굴 크랙과 원효리지와 신동엽길이 탄생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머메리는 목소리만 높일 줄 아는 책상물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직접 행동에 옮겨 숱한 루트를 손수 개척 등반했다. 마터호른의 초등자는 물론 에드워드 윔퍼다. 하지만 즈무트능선을 통한 마터호른의 초등자도, 푸르겐능선을 통한 마터호른의 초등자도 모두 머메리였다. 이 놀라운 발상의 전환은 이후 알피니즘의 역사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어디에 올랐느냐보다는 어떻게 올랐느냐를 더욱 중시하는 현대등반의 역사는 곧 머메리즘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산악계의 큰 어른인 김영도의 다음과 같은 명제도 그 뿌리는 머메리즘에 가 닿아 있다. “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다!”

청년 머메리는 당대의 반항아였다. 하지만 이후 세대에게 그는 엄격한 잣대이자 든든한 맏형이 되었다. 머메리즘이 반드시 등반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따금씩 너무 타성에 젖어 남들이 닦아 놓은 길, 빤해 보이는 쉬운 길만을 따라가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머메리는 예의 그 매서운 눈길을 부라리며 단호하게 쐐기를 박는다. 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다.

▲ 8,000m급 낭가파르바트 최초 등반 중 사라져

 

머메리는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급 산에 도전장을 내민 산악인이었다. 낭가파르바트를 선택한 것은 아무래도 유럽에서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이유에서일 것이다.

앨버트 머메리는 히말라야 8,000m급 산에 도전장을 내민 최초의 산악인으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40세가 되던 1895년 6월, 그의 유일한 산악문학 저서가 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다음, 인도의 봄베이로 떠났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낭가파르바트(8,126m)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전인미답의 경지였으니 제대로 된 정보나 지도가 있었을 리 없다. 그는 두 차례나 등정시도를 했으나 모두 좌절한 다음 새로운 루트를 찾아보기 위하여 또 다른 능선을 넘어갔다. 당시 그가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인상적이다. “설령 낭가파르바트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없소.”

그 이후 머메리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최초의 도전자이자 최초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19세기의 산악문학을 대표하는 그의 명저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마지막 구절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듯 하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한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입력시간 : 2006/04/19 16:35

 

 

 

 

 

 

 

 

 

머메리, 앨버트 프레드릭 Mummery, Albert Frederick 1855~1895

 


현대등반의 기초를 다졌으며 영국산악인 최초로 8000m거봉에 도전했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신화적인 인물이다, 콘웨이(W. Conway)는 그를 평하여 “모든 세대를 통한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라고 말했고, 영(G.W. Young)은 “그가 너무 과대평가 되었으나, 등반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아무도 그를 과소평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 켄트(Kent)주의 도버(Dover)에서 부유한 피혁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병약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사회적 배경은 귀족적인 분위기의 영국산악회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를 ‘근대스포츠 등산의 비조’ 혹은 ‘등반사의 일대 반역아’로 불리었던 까닭은, 그가 안전하고 쉬운 루트를 통하여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던 당시의 일반적인 등산풍조에 대항하여 정상에 오른다는 사실 자체(등정주의)보다 좀더 어려운 루트를 택하는 새로운 모험적인 등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머메리즘(mummerism·등로주의)을 제창했기 때문이다. 

 

그의 등반편력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안내인 부르게너(A.Burgener)와 동행하였고, 후기에 속하는 1890년대부터는 안내인을 동반하지 않는 가이드레스 등반(guideless climbing)으로 전환하였다.

 

1879년 위험한 루트로 알려진 마터호른의 츠무트 능선(zmutt Ridge)을 단 한번의 시도로 성공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1892년 그레퐁(Grepon), 1893년 당뒤르껭(Dentdu Reguin), 1894년 몽블랑(Mont Bland)의 올드브렌바루트(Old Brenva Route)를 초등했다.
그 외에도 에기뒤쁠랑(Aigdu plan) 북벽과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es)의 이롱델르릉(Hirondelles Ridge)에 도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95년 머메리는 콜리(J.N.collie), 해스팅스(G.Hastings), 그리고 구르카(Gurkhas)인 라고비르(Raghobir), 고만싱(Gomansingh)과 함께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Nanga parbat·8125m)을 원정했다. 규모가 크고 접근이 쉬워 이 산을 택했지만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자료도 없는 상태였다. 머메리가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보면 이들이 낭가파르밧 등반을 과소평가 한 것으로 보인다.


정찰을 마친 그들은 서쪽의 디아미르벽(Diamir Face)을 목표로 하였으나 식량부족과 구르카인들의 고산병으로 포기하고, 북면의 라키오트(Rakhiot) 계곡으로 가기로 했다. 콜리와 해스팅스는 포터들과 함께 식량보충을 위해 돌아가고, 머메리는 2명의 구르카인들과 서북능선의 디아마꼴(Diama col·6200m)을 횡단하여 라키오트 계곡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콜리파티가 라키오트에 도착했을 때 머메리 일행은 없었다. 그들은 온 길을 되돌아 출발점에 갔으나 머메리의 빈 텐트만 있을 뿐 그가 돌아온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눈사태를 만나 압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머메리는 히말라야 최초의 희생자가 됐고, 이 사고는 1934년과 1937년에 연이어 일어난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 비극의 전조였다.


저서로는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와 더불어 산악문학의 불멸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My climbs in the Alps and Caucasus' (1895)가 있다.
한국어 번역판으로는 오정환이 옮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가 있다. 이 책은 머메리가 히말라야로 떠나기 직전에 쓴 책으로 사후에 출간되었으며 당시 유럽 산악계의 강한 영향을 끼쳤다. 

 

 

- 이용대著『알피니즘,도전의 역사』에서 -